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 [워낭: 소의 목에 매달려 있는 방울]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은 숙연했다. 그 누구도 선 듯 일어나지 못했다. 나 또한 얼른 일어설 수가 없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한참을 침묵으로 앉아있다 일어서니 청소도우미들이 청소를 하고 있었다. 남편도 말이 없고, 나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린 주차장으로 향했고, 남편 운전하는 옆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데 다시 눈물이 났다. 그는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나 또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꾸불꾸불 낯선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우린 ‘워낭소리’의 여운에 휩싸여 어디론가 달리다가 돌아왔다. 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도 아직도 미뤄진 숙제 같은, 구순을 바라보면서도 일은 놓지 못하는, 일을 놓게 하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내지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면 평생 소와함께 소처럼 일만하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을 것이다. “죽어야 일을 놓지, 일을 보고 어찌 가만히 보며 놀 수 있겠노.” 내 아버지의 말이기도 하고, 최 노인의 말이기도 하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아버지는 두루마기자락 휘날리며 헛기침 한 번으로 마당을 지나고, 언제나 쇠마구로 먼저 들어가셨다. 소와 더불어 40년 인생을 같은 세월을 살아온 실화영화 이시대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이라 볼 수 있다. 무엇이 그토록 아버지의 몸뚱이를 혹사시키면서 마지막 가는 소의 장례를 치루면서 한평생 미치도록 일만했던 주인 잘 못 만난 죄로 고달프고 서러운 일소의 일대기와 그 소를 끔찍하게도 사랑하면서 아끼는 주인의 만남은 전생의 무슨 업보였을까! 힘든 발걸음 한 발 자욱 떼어 놓을 때마다 버거웠고 주저앉아 버릴 것 같은 소와 소의 주인! 소와 일생을 동고동락하면서 소는 주인을 위해 뼈만 남았고 주인은 소를 위한 무공해 먹이를 하루도 빠짐없이 눈이오나 비가 오나 꼴을 베어다 먹인다. 어릴적 주사를 잘 못 맞아 왼쪽 다리를 못 쓰고 그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낫 한 자루에 인생을 투자한 아버지! 영감 잘못 만나 평생 고생이라는 할머니의 긴 한숨은 시시각각으로 삶의 고달픔을 대변하고 영감이 소를 저버리지 못하는한 할머니의 일생은 역시 소보다 못했다. 소의 목에 매달린 워낭소리에는 자다가도 깜작 놀라 일어나시는 할아버지, 그러나 할머니가 아파도 약 한 봉지 사다주는 적은 없었단다. 할머니는 누구를 위한 업으로 사는가! "저놈의 소가 없어야만 내 팔자가 편해질 터인데..." 할머니의 애달픈 소리는 생활 속의 연속이 되었다. 40년간 길들여진 소는 일생을 주인을 위한 일만 하다가 피골이 삼접 해 있고 그 소의 주인인 할아버지도 뼈만 앙상하게 남아 인생의 회한을 준다. 할머니의 성화에 우시장이 열리는 날 소고삐를 이끌고 나서려는데 자신의 버림을 아는지 늙은 소의 눈꼽 잔득 낀 병색 그득한 큰 눈을 꿈뻑거리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지 않는가, 아침여물을 뜨겁게 삶아 듬뿍 먹이고 떠나보내려는데 눈물 흘리는 소는 여물도 마다하고 "움~메""움~메" 크게 곡통을 하고 있었다. "움~메" 불쌍하고 가련한 소야! 내다 팔아보려니 사려는 사람도 없고 쓸모없는 소의 인생이 60만 원짜리 값어치 밖에 안 된다는데, 할아버지는 소의 인생을 값으로 논하고도 싶지 않아 다시 소와 함께 돌아오면서 할아버지는 소와 운명을 같이한다. 수의사가 소의 남은 생을 일 년을 기약한 뒤 봄에 소와 함께 모를 심고 여름에 할아버지는 소를 위한 무공해 꼴을 베고 가을에 벼를 수확해 9남매 골고루 쌀 포대를 담아 소달구지로 힘겨운 마지막 제 할일을 다하고 소는 그만 기진맥진 힘을 잃었다. 힘겨운 일생을 덕지덕지 소털에 붙어있는 오물딱지로 찌든 인생을 대변 하는 듯 할아버지의 온 몸도 삶에 찌든 형색으로 마주하고 있다. 털썩 주저앉아 못 일어나는 소를 보내야 한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소의 평생 멍애를 비로소 낫으로 베어 풀어버렸다.. 코뚜레를 풀어주고 목을 칭칭 감고 있던 고삐도 풀고 움직일 때마다 소리 내어 울리던 워낭을 풀었다. 더 이상 소의 움직임은 없었고 초점 잃고 총기 없는 큰 눈을 힘없이 꿈뻑 거리다 스르르 그 마지막 일생을 마친다. 소의 장례를 치루고 할아버지는 몸져눕고 소의 마지막 가던 그 모습으로 누워있다. 소가 없음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활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까? 이때를 대비해서 이미 젊은 암소를 길들이고 있었는데 노쇄한 할아버지가 그 소를 길들이기도 전에 병색이 짙어가고 양지바른 햇살 받으며 두 늙은이의 쪼그라지고 찌그러진 몸뚱이를 둥글게 감고 머리를 땅으로 처박고 무슨 시름에 잠겨있는지 후일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니던가! 9남매 자식을 위한 평생의 몸부림이던가? 오랜 머슴살이의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연속인가? 소같이 일만하고 소보다 더 고달팠던 소만도 못한 소의 일생을 동시에 살면서 결국 소처럼 가는 이 시대 우리 아버지의 참 모습을 감히 엿본다. 다큐멘타리 영화 "워낭소리" 를 감상하면서 우리들 모두의 부모를 대변함을 소리 없는 소 웃음으로 미소 짓게 하고 긴 한숨소리를 크게 울부짓는 소의 신음으로 간파하고 소와 더불어 의무인양 낙 없이 세월을 긁어내고 자식은 장성하고 부모는 득 없이 초로의 뒤 안을 서성인다. 2009년 대망의 기축년 새해가 밝아 오던 날 세상은 떠들어댄다. 소처럼 부지런한 해가 되자고 말이다, 굳이 소가 아니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며 공존하는 이는 저마다의 자기 할 일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경제위기의 대란을 격어야 하는 예언들이 무성하다. 어떠한 방법이던 살아남는 자만이 살아가는 길이라고 위협을 가하고, 국민들을 괜스레 불안한 경제 한파에 또박 또박 제 날짜에 월급 받는 안정적인 부류 층까지 주머니를 옭아 매려든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시여! 당신을 위한 영화라고 이 영화를 바친다고 제작자는 디 앤드를 마쳤지만, 우리의 가슴속은 온통 그 여운으로 남아 영화종영이 완전히 끝나고 실내의 불이 환하게 켜지도록 자리를 털 수 없었다. 그 세월만큼 남편의 어깨도 추 욱 늘어져 시간을 엄청 뛰어넘어 있는 모습이다. 내가 부모를 위해 한 일이 너무 없었다는 송구함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그저 타고난 시대에 순응하며 무지하리만큼 우직한 성품대로 살아가는 순수하고 정직함으로 받아지는 영화 속에서 변화되는 문화를 감수한 현실적인 우리들이기에 다시 한 번 건너편에 기웃거리며 가물거리는 부모님을 상기하고 궁극적으로 삶은 누구를 위함인가를 들여다본다. 이제는 무조건 희생이기에 앞서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고 좀 더 안락한 삶이되길 소망한다면 과연 이 영화를 본 자로써의 부덕한 소치인가?
출처: 타이거스81 원문보기 글쓴이: 수선화(경숙)
첫댓글 제친구가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들카페에 올린글이데 멋중님들도 함께하면해서 퍼왔읍니다
그런부모님들이 계셧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나봅니다.. 전 감정이 메말랏는지 실컷 울고싶은데 눈물이 않나오던데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습니다...
이걸보니 다시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절 또 울리시는지..ㅠㅠ
아직 못봤는데 봐야겠어요
저도 워낭소리 꼭 볼꺼라는... 좋은 글이고 마음에 들어오는 글 감사합니다. 40대는 아니지만 워낭소리 제목보고만 왔다는^^
저도 보았어요...
첫댓글 제친구가 영화를 보고나서 친구들카페에 올린글이데 멋중님들도 함께하면해서 퍼왔읍니다
그런부모님들이 계셧기에 오늘날 우리가 있나봅니다.. 전 감정이 메말랏는지 실컷 울고싶은데 눈물이 않나오던데요.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워습니다...
이걸보니 다시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절 또 울리시는지..ㅠㅠ
아직 못봤는데 봐야겠어요
저도 워낭소리 꼭 볼꺼라는... 좋은 글이고 마음에 들어오는 글 감사합니다. 40대는 아니지만 워낭소리 제목보고만 왔다는^^
저도 보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