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얼거리던 태양도 어느덧 자취를 감추었다.
물빛 가득 먹은 구름들만 기울어 가는 칠월의 밤을 부축이고 있었다. 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으니, 기어코 ‘여름향기’의 주인공은 되어보겠노라고 아내는 보름 전부터 조르기 시작하였다.
"자기야! 우리 저기 한번 가자1 응? 보성 녹차밭 텔레비전으로 보니까 너무 좋은 거 같아. 호호"
“아니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니까 그렇지 실제 가면 안 그런 거야. 한두 번 속았간디?”
그래도, 이번엔 기어코 가야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별렀었나보다. 다시 조르는 아내에게 말했다.
“좋아 가자! 장사 하루 안 한다고 굶어죽진 않겠지 뭐 하하하!”'
빗물이 어린애처럼 응석을 부렸다.
그치지도 않을 거면서 무엇이 그리 슬픈지 추적추적 밤을 적시는 비가 미웠다. 밤 깊은 10시, 아내가 가게 안에 불 밝은 쇼윈드 끝에서 손님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윈도우 브러시가 쓰윽 한바퀴 회전을 하였다. 송골송골 맺힌 빗방울은 한꺼번에 냉동댕이 쳐져서 흘러갔다. 핸드폰을 오른손으로 잡고, 무의식적으로 번호를 눌렀다. ‘꾹 꾹’ 청아한 음이 툭툭 튕겨 나와 아내의 휴대폰 속으로 밀려들어갔다.
‘따르릉.......따르릉’
숙이의 맑은 음색이 핸드폰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나의 귓불을 간질였다.
"여보세요!"
“응. 나야! 가게 밖에 도착했어! 문 닫고 나오지?”
"으응. 손님계시걸랑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응, 그래”
간판의 불이 꺼지고, 불 밝은 점포의 조명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어둠이 가라앉은 성남 도시로 안개비가 질척거렸다. 차는 어느새 죽암 휴게소를 넘어가고 있었다.
"출출하지? 뭐 좀 먹고 갈래? 피곤하면 운전 내가 할게 응?"
“그래. 무척 졸린다. 낮에 계양산이랑 옥구도 산행해서 그런가봐! 죽암 휴게소로 가자!”
따뜻한 가락국수 국물이 목젖을 타고 넘어갔다. 아내는 국물을 좋아하였다. 떡라면의 구수함이 또한 싫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마지막 목을 축인 다음 아내는 시동을 걸었다. 나는 시트를 누이고, 이내 코를 골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차창 밖으로 서광주 이정표가 보였다.
“벌써 광주 왔네? 고생했어. 이젠 국도니까 운전 내가 할게! 광주 인터체인지 빠지면 교대하자. 응?”
"그래 자기야! 비가 내려서 오는데 애 먹었어. 호호"
피곤에 얼굴이 해쓱해진 아내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지만 멀리 길 떠난 사람의 여행가처럼 미소는 들떠있었다.
광주 순환고속도로를 건너 보성 쪽으로 차는 신나게 질주하였다. 내리던 비도 거의 그쳐갔다. 새벽 2시를 넘어서는 도로는 그야말로 차 한 대 없었다. 오로지 날 위해 뚫어놓은 도로인양 나는 기분 좋은 모습으로 음악은 조금 센치맨탈한 것으로 틀어놓고, 유유히 달려갔다. 보성에 도착하여 율포쪽으로 달려가는데 어둠 속으로 ‘녹차밭’이란 이정표가 보였다. 언덕꼭대기에 차를 세우고 내려가 보았다.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요를 몰고 와 버린 이 적막한 남쪽나라가 가슴 벅찬 감동으로 안겨왔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었지만, 코끝으로 스며드는 녹차의 향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서둘러 율포로 차를 몰았다.
율포에 가면, 녹차탕 찜질 방에서 날을 세우려고 작정을 한 것이었는데, 아뿔싸! 목욕탕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관이나 호텔이 없었다. 텅 비어버린 시골에 허름한 간판들이 나를 반겼다. 여기저기 녹차로 만든 음식을 판다는 간판이 즐비하였다. 차에서 자 버릴까 했는데, 아내가 잠을 제대로 못 자면 여행에 지장이 있다고 싫단다. 할 수 없이 차를 다시 보성으로 몰았다. 시간은 어느새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멀리 간판이 보였다. 이거저거 따질 시간이 없었기에 무작정 들어갔다.
“똑똑! 저기 방 있습니까?”
한참 코를 골던 시골 노인장 한 분이 일어나서 키를 건넸다. 돈을 건네고 키를 받고 이층으로 향하였다. 방안에 들어선 순간,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골 여인숙보다 더 허름한 남쪽나라의 여관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냉장고도 없다. 물론 커피도 없다. 생수 한 병만 카운터에서 가져가란다. 목적이 관광이었지 여관에 들어가 분위기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이내 잠이 들었다.
여덟시가 넘어서야 일어난 우리는 간단하게 해장국을 먹고 시동을 걸었다. 십여 분을 달렸을까? 눈앞에 ‘녹차밭’이란 푯말이 보였다. 차를 주차시킨 후 우리는 내렸다.
거대한 나무들이 씩씩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있고, 그 가로수 저 만큼 산자락으로 녹차 밭이 보였다. 키 작은 사철나무를 빽빽하게 심어놓은 양 녹차 밭은 무리를 지어 자라있었다. 그 무리는 줄을 만들고, 그 줄은 칸칸이 그리움 담아서 고랑을 만들고, 고랑은 이내 둔덕이 되어 산 전체를 녹색으로 물들였다.
산새는 산새대로 녹차에 취해 울었다. 물은 물대로 녹차에 취해 흘렀다. 물기 먹은 이슬은 알알이 녹차 빛을 띄었다.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살포시, 한 걸음 한 걸음 녹차 밭에 우리들의 싱그러움을 내려놓았다. 고운 손으로 어린아이 만지듯 녹차 잎에 손을 얹어보기도 하고, 캠코더를 멀리 잡아 하나라도 놓치면 그 풍경이 아쉬울까봐 여기저기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일손이 부족한지 녹차의 반만큼 크게 자란 풀들이 고랑을 가득 채웠다. 숙이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폼을 잡아보랜다.
"자기야! 저쪽으로 서봐! 내가 찍어줄게! 우아! 이게 누구야? 어쩜 저리 잘생겼어? 호호호"
“매일 보는 얼굴 뭐 그리 잘생겼다고 그러냐?”
"우와! 울 자기 웃으니깐 더 멋진데"
갑자기 고개를 든 나는 어이없는 듯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아마 나의 동영상을 본 분들은 지금 이 글이 상상이 갈 것이다.
조금 더 차를 몰아 나서니 보성에서 가장 큰 ‘다원’이란 차밭이 보였다. 녹차밭 꼭대기까지 우리는 걸어 다니며 두어 시간을 마음껏 즐겼다. 마치 ‘여름향기’의 주인공이 된 듯 우리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내려오는 길에 찻집에 들러 ‘우전차’를 마셨다.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맛보는 우전차는 세상 어느 차보다 맛이 있었다. 우전차는 가장 물이 올랐을 때 따서 만든 차라 그 가치가 제일이라고 설명을 하셨다. 혀끝을 살살 파고드는 녹차 물이 신선하게 기분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오는 길에 녹차 한 봉지를 사서 우리는 율포로 다시 차를 몰았다.
율포만 보고 올라가기엔 서운해서, 차를 돌려 용추폭포에 들렸다. 그 산을 산행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폭포수에 마음을 샤워한 다음 율포 해수욕장으로 향하였다. 텅 비어버린 해수욕장으로 어린아이 네댓 명이 놀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가서 사진을 찍었다. 남해바다는 깨끗함보다는 고즈넉함이 더 어울렸다.
사람이 없는 고요가 마냥 철썩이기만 할 뿐인 저 파도를 다독거리고 있었다. 고대하던 녹차 탕에 들어갔다. 딴 애는 서울 찜질방만을 기대하고 갔는데, 아뿔싸! 이럴 수가? 이건 삼류 목욕탕보다 시설이 엉망이었다. 이래가지고 전국방방곡곡의 관광객들을 맞이할 수가 있을까? 의아하기까지 하였다. 매너 없는 일부 사람들은 목욕탕 난간에 널브러져있었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눈에 보기에도 민망한 알몸을 뎅그러니 내어놓고 잠을 청하는 사람들, 작은 욕실, 어느 하나 마음에 내키는 곳이 없었다. 녹차 탕 안에 조금 있다가 서둘러 욕실을 나와 버렸다.
혼자 터벅터벅 바닷가를 걸었다.
모터보트를 타기 위해 몰려온 서너 명의 청춘들이 즐겁게 보였다. 횟집에 들러 회를 먹고, 서둘러 다음 일정에 들어갔다. 올라오는 길에 서재필 선생님 기념관에 들러 애국자의 길을 잠깐 엿본 후 그 유명한 송광사로 향하였다. 송광사는 삼대사찰중의 하나로 유명한 곳이다.
나는 거기서 북치는 스님을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기념일에나 한번씩 보여주던 그 큰 북 치는 모습을 직접 본 것이다.
세 명의 스님이 북채를 가지고 섰다. 큰 스님이 큰 북채로 북을 쳐 나갔다.
"둥둥 두구두구두구두구 둥 둥"
익숙한 손놀림에 박자를 맞춘 듯 새들도 숨을 멈추고 지켜보았다. 관광객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신명나는 울림 속으로 넋을 놓았다.
한 이십 여분동안 치던 북을 마치고, 드디어 저녁 타종을 하였다.
번뇌는 번뇌대로 사라지라고, 억겁의 세월을 떠도는 혼들은 이제 황천길 고이 가라고, 합장하는 스님의 손길이나, 절을 하는 보살이나 마음은 이미 저기 천상의 세상을 탐하고 있을 터인데, 어이해서 어둠은 그렇게 소리 없이도 잘만 밀려오는지…….어이하나? 어이해야하나? 나는 있어도 너는 가라고, 갈길 먼 중생들은 어서 가던 길 재촉하라고, 그렇게도 종은 은은하게 가슴밑바닥까지 쟁…….쟁…….울리며 깨닫지 못한 우리들의 세속의 때까지 그렇게 쓸어내리고 있었다. 종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한곳까지 걸어오니 주차장이었다.
나가는 길에 연꽃 연못에 차를 세웠다. 어쩌면 오늘 마지막 여행의 묘미가 여기 연꽃이 아닌가 싶다. 이미 꽃은 시들고, 연밥은 무성하게 자라있었다. 길가에 연밥은 이미 사람의 손을 타 남은 게 없었다.
난, 긴 작대기를 들어 연봇 깊숙한 곳에 아담하게 앉아있는 연밥을 땄다. 껍질을 톡 까서, 아내의 입에 넣어주었다. 나머지 한 개는 두고 온 아들과, 어머니에게 드려야지.
어머니는 연로하셔서 이 먼 거리에 혹 병이라도 얻으실까봐, 아들은, 내일 학교 가는데 지치고 힘이 들어 혹 몸살이라도 날까봐, 어쩌면, 우리 둘만의 오붓한 그 시간이 너무 부족했었기에 오늘 같은 이런 여행길을 만들려 하진 또 않았는지도 모른다.
남아있는 보성이나, 율포나, 여기 송광사나, 그곳은 그곳대로 또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머무르리라! 혹여, 언제 다시 이곳 보성 땅을 밟아볼지 모르지만, 오늘 머무는 이 흔적하나가 추억 저 편의 어디쯤 내가 서 있을 때 몸서리치는 그리움으로 오늘 이 시간들이 기억날지도 모르겠다. 그 때, 이 글 한편이 추억을 보듬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조금은 더 행복한 웃음 지을 수만 있다면......
멀리 살풋 희미한 달빛 그림자가 따라왔다. 달을 두고 오려했는데. 차마 가는 길 두려울까봐, 희부연 달빛 조금은 빌려서 올라오는 서울길 내내 비추어 주기를 빌었다.
첫댓글 보면서 꿈을 꾸어 보았어요. 우리 부부 같이하는 세월 늘어질수록 함께하는 시간 점점 깊어가기를 ^^ 부럽사와 다정함에 미소 한 껏^^
이 글 역시 몇년전 글이고요. 다시 읽어보니 그때 기분이 생생하더라고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