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대진국본기의 의의 1.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2.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의 옛 고구려 영토 회복과 대진국 건설 주변의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 받은 강대국 3. 한국사의 남북국시대를 연 대진국 - 나․당 연합군의 침략 격퇴 - 4. 신교문명의 대제국, 대진국의 강성한 모습 5. 4대 문황제의 민족사 교육과 신교의 대부흥시대 6. 대제국 발해의 통치영역과 전국민의 신교 생활화 7. 역대 임금의 연호와 주요 통치 지명 8. 의려국 왕자(의라)미8일본에 건너가 오진(應神) 천황이 됨 9. 당시 일본의 국가 구성과 한국과의 관계 마무리
태백일사 - 대진국본기
들어가는 말 오늘은 대진국본기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대진국본기는 우리의 고대 신교 철학 사상 같은 것은 많이 있지 않구요. 그래도 대진국본기 자체는 이것이 기존의 강단사학에 대해서 경종을 던져주는 바가 대단히 많습니다. 먼저 본문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대진국에 대해서 우리가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 몇 가지만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우리 역사에 있어가지고 실학사상이 대두하던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우리 역사에 대해서 사대주의에 벗어나서 조금씩 눈을 뜨는 학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중에서 해풍 유득공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분이 발해고라는 책을씁니다. 그게 참 획기적인 이야기이죠. 고려시대에 발해사가 없었어요. 조선시대에 와서도 <고려사>라던가 <고려사절요>같은 고려에 대한 역사는 지었지만 발해에 대한 역사를 우리나라에서 쓰지 않았습니다. 단재 신채효 선생이 가장 가슴아파했던 것은 우리 역사가 이민족에 의해서 왜곡되고 침탈된 것 보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역사가 왜곡된 것을 너무도 가슴아파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해풍유득공은 자기가 발해사를 쓰고 발해고라는 책을 쓰고 발해고 서문에서 고려시대에 가장 큰 실수가 뭐냐면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남북극 시대가 남북조라고도 표현하는데요. 남북극이 전개 되는데요. 신라가 망한뒤에 고려가 계승하고 대진국이 신라보다 더 일찍 망합니다. 926년에 대진국이 망하거든요. 신라는 936년이니까 대진국이 신라보다 먼저 망하잖아요. 그러면 동시에 망하면서 유민들이 고려로 들어오고 해서 고려가 통일을 하게 되었는데 고려가 만약에 발해사만 썼다면 만주의 영토를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발해사를 썼다면 그 역사서를 가지고 여진족에 가서 “우리는 고구려를 계승한 사람들이고 발해를 계승한 사람이니까 그 땅이 우리땅이다.” 거란족에게도 역사서를 가지고 가서 “여기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니까 당연히 우리의 땅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면 그들이 꼼짝을 못하게 되는데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은 것이 대단한 실수였다는 이런 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역사가 왜곡되고 그러기 때문에 바로잡지 못하고 그런걸 보면서 우리가 상제님 진리를 신앙하면서 느끼는 것은 막 울분이 폭발하고 터지고 하지만 그게 또 진리입니다. 그것이 간도수의 섭리에 의해서 완전히 과거 역사 다 잊어버리고 그리고 만주 다 잊어버리고 이 한반도 땅으로 쫓겨들어오게 되는데 우리 상제님 일꾼들이 이번 개벽사업하기 위해서 그런 과거 위대했던 역사가 전부 무너지고 뭍혀 버리고 하는 것이 바로 상제님 신앙인들 남어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열기 위해서는 그렇게 처절히 무너지고 없어져야 되는 것이 그게 또 선천의 역사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에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 우리가 분통이 터지고 그러지만 그게 대국적인 차원에서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4:50 대진국본기의 의의 대진국본기는 기존의 강단사학에서 언급하지 않는 그러한 것을 대단히 많이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대진국본기라고 참 잘 되있는 거예요. 지금도 해풍유득공선생도 <발해고>란 책을 썼고 고려시대 조신시대 다 발해라고 했어요. 왜냐면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에 발해라는 이름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냐면 713년에 당나라 현종 개원원년에 최흥이라는 사람을 보내서 도저히 동북지방은 자기네들이 손을 댈 수 없으니까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내려서 책봉을 해줍니다. 뭐, 대진국에서 그것을 원한 것도 아니고 중국의 대국 놈들의 근성 속에서 자기들이 최고의 황제고 주위는 전부 오랑캐니까 거기서 독립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지만 자기네들이 건방지게 발해군왕이다 이렇게 왕호를 하사해요. 그놈들이 그러고서 중국 놈들은 발해라고만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부 사대주의자들이잖아요. 고려시대 조선시대 150%가 아주 중국이라면 껌뻑 죽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대진국 사람들은 자기네 국호가 대진이었어요. 근데 후세 학자들은 전부 발해라고 써요. 그래서 잘못된 것이 지금까지도 와서 국사에서 발해라고 하는데 대진국을 통치했던 사람들은 국호가 우리는 대진이다선포를 했으니까 우리는 발해라는 명칭을 절대로 쓰면 안되죠. 그리고 대진이라는 것은 어디에서 나온 말이냐? 대는 큰 대자라는 것을 붙이고 진국이라는 거죠. 진국은 거의 여기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도전에도 나오죠. “일중위시교역퇴제출진”이다. 주역에 있는 말인데요. 문왕팔괘순서를 얘기하면서 주역의 설괘전에 공자가 문왕팔괘순서를 얘기하는데 제출호진하여 제호손하고, 상견호리하고, 치역호곤하고, 열언호태하고, 전호건 하고, 노호건하고, 성언호간이라는 주역의 설괘전에 공자가 문왕팔괘의 순서를 얘기하는데 제일 먼저 정동방에 제출어진하여 제가 동방에 진방에서 출한다. 여기에서 진자를 가져다 썼을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대진국이라고 할 때 진은 동방이기 때문에요. 그리고 대진국본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대진국의 시작은 668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698년부터 시작합니다. 대조영이 황제에 오른 것도 669년이지 698년이 아니예요. 1년차이가 있고 분명히 668년부터 그때면 고구려가 망하던 해인데요. 후고구려라고 했어요. 이걸 보면 분명 후고구려를 세운 대중상이라는 분은 고구려의 왕족임이 틀림 없습니다.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지만 고증이 안됐기 때문에 고증할 길이 없어요. 그런데 고구려가 망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대중사학 후고구려를 건립했다는 것을 보면 한사람의 그냥 장군으로써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보장제의 아들이거나 아주 가까운 혈통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668년부터 926년까지 259년 동안 만주를 호령하고 중국의 동북지방 그리고 신라하고는 강릉하고 해주, 강릉하고 옹진반도를 연결하는 선이북이 대진국의 영토였습니다. 이렇게 지금은 걸궐중상 대중상은 역사에서 아주 제껴놓고 있는데요. 이 대진국본기는 그것을 포함을 하고 있습니다. 9:58 1. 대조영의 부친 대중상의 후고구려 건국 조대기 왈 朝代記에 曰
대진국 제 칠이다. 조대기에 왈. 조대기란 책은 여러번 나왔는데요. 발해가 망하고 저도 자꾸 입에 익이서 발해라고 하는데, 대진국이 망하고 대진국의 유민들이 고려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해 옵니다. 대진국의 태자인 대광현이 태자가 망명을 해올 정도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해오는데 그 사람들이 책을 가져오는데 그중 한권이 조대기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보면 이건 전부 중국 사람이 쓴거나 아니면 후세 우리나라에서 썼다. 그래도 중국사람이 쓴 역사서를 베껴놓을 뿐인데 대진국사람들이 그들의 의식을 가지고 쓴 책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일하다면 조대기가 아니겠느냐 발해의 유민이 망명을 해올 때 가져온 책이기 때문에 그들의 의식을 가지고 그들의 입장에서 유일하게 쓴 책이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에 이런 조대기는 그런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화 27년9월21일에 개화는 보장제의 연호입니다. 보장제가 642년에 연개소문이 영류제를 죽이고서 반란을 일으켜가지고 보장제를 세우지 않습니까? 642년부터인데 즉위년부터를 1년으로 따져요 그러니까 668에서 642를 빼면 26년이 나오는데 그 해까지 치니까 플러스 1을 하면 27년이 되죠. 개화라는것은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제의 현호입니다. 개화 27년 668년 음력 9월 21일 날 평양성에 함락시에 이건 해석할게 없죠? 당나라의 이적과 신라의 연합국에 의해서 평양성이 함락할 때 진국장군 대중상이 여기서 진국이라 되있지만 진국은 이것의 같이 쓰는 글자로 봐야합니다. 진국장군 대중상이 그런면 고구려의 성은 고씨인데 이분은 대씨 아닙니까? 대씨나 고씨나 그당시에 성씨를 중시했는지 바꿔쓸 수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구요. 중자를 보면 둘째라는 개념이 있거든요. 우리가 공자가 중리다. 형님이 있었잖아요? 둘째를 중자라 쓰는데 그래서 이런데서 보장제의 둘째아들이 아니겠느냐 추측을 해보는데 근거가 없습니다. 수서압록하라. 압록강 많이 나오죠. 북한과 중국의 국경 압록강만 생각하는데 요하의 서요하를 우리가 압록강이라 얘기합니다. 요하를 압록강이라 그랬어요. 그중에서도 동요하와 서요하가 만나서 심양을 거쳐서 발해만으로 흘러가거든요. 그 서요하가 서압록강입니다. 여기가 바로 고리땅이기 때문에 고구려 해모수 고향도 거기고 고구려 명칭이 거기서 시작되잖아요. 우리 고구려 본기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바로 고리땅입니다. 고리! 서압록하가 문변하고 평양성이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소솔중주험하여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험난한 곳으로 도망을 가서 노경개원하니 길에서 개원땅을 지나니 그러니까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겁니다. 저 서압록하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오다 보면 심양위에 개원시가 있습니다.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개원시가 있는데 그게 바로 44대 궁을단군께서 아사달이거든요. 중국지도를 보면 머리에 확들어오는데 개원땅을 지나니 문풍원종자 그런 문풍을 듣고서 대중상이라는 분이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고 무리를 거느리고서 지금 동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얘기를 듣고서 고구려 유민들이 소문을 듣고서 쫓기를 원하는 자가 8천인이었다. 우리가 환단고기 보면 동방목의 기운이 나오는데 첫째 환웅천왕께서 제세핵랑군 3천명을 거느리고 백두산에 천강을 하시잖아요. 단군성조께서 처음으로 시작할 때 8백명 그다음에 8천명 전부 동방 목기운을 가지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10:27 내동귀. 그래서 그들과 함께 돌아가서 동족으로 가서 지동모산 동모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의 돈화시에 있습니다. 연변조선족 자치주가 대여섯시로 되어있는데 거기서 백두산에서 정북쪽으로 올라가면 돈화시가 있습니다. 돈화시에 동모산에 이르러가지고 거하고 자리를 잡고 견벽자보하여 성벽을 굳게 쌓고 스스로를 보전해서 칭국후고구려오.. 후고구려라고 칭했습니다. 668년 9월 21일날 평양성은 함락했지만 대중상이 무리를 이끌고 돈화에 가서 후고구려라고 그 해에 일컬었습니다. 현대 국사에서는 전혀 언급도 못하는 내용이죠. 그리고 건원중광이라 연호를 세웠습니다. 연호를 세워 중광이라 그랬습니다. 고구려의 광명을 거듭 발한다. 후고구려죠. 고구려를 계승해서 고구려의 영광을 거듭 빛낸다. 이런뜻이예요. 전격소도에 경문을 전해서 이르는 바에 경문을 보낼거 아닙니까? 고구려의 영토가 넓으니까 각 고을고을마다 당나라 세력이 미치지 못하잖습니까. 경문을 전해서 이르는 바에 원근제성이 가깝고 먼 모든 성들이 귀부자 후 고구려에 귀순해서 붙는자가 중이라 아주 많아지게 되었다. 유이복구토로 위기임이라가. 오직 복구토 이게 순 우리말로 다물이죠. 옛 영토를 회복한다.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것으로써 위기임 자기 책임으로 삼다가 중광삼십이년이면 669년이 됩니다. 668더하기 32를 해서 거기다 플러스 2를 해야되요. 당해년부터 치기 때문에 669년 5월에 붕하니 천자가 돌아가시는것을 붕이라 그러죠. 산이 무너진다는 의미에서 붕하시니 묘호왈세조요 시호왈진국열황제라. 묘호가 있고 시호가 있는데요. 우리가 조선시대에 태조이성계다, 정종이다, 태종이다, 세종이다, 그걸 묘호라고 합니다. 묘호란 것은 종묘에다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잖아요. 묘는 사당묘자 종묘묘자니까 종묘에 제사지낼 때 붙여놓는 묘호예요. 그러니까 태종태세문단세 전무 묘호예요. 그거 말고 무슨대왕, 무슨대왕 이런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걸 잘 안배워서 모르죠. 그걸 시호라고 합니다. 시호는 진국열황제라 그랬구요. 묘호는 세조라고 했습니다. 2.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의 옛 고구려 영토 회복과 대진국 건설
내동귀이동 지동모산이거 乃同歸而東하여 至東麰山而據하고
견벽자보 칭국후고구려 堅壁自保하여 稱國後高句麗오
건원중광 전격소도 원근제성 귀부자중 建元重光이라 傳檄所到에 遠近諸城이 歸附者衆이라
유이복구토 위기임 惟以復舊土로 爲己任이라가
중광 삼십이년 오월 붕 重光 三十二年 五月에 崩하시니
묘호왈세조 시호왈진국열황제 廟號曰世祖오 諡號曰振國烈皇帝라〉
태자 조영 종부사 太子 祚榮이 從訃使하여
자영주계성 솔중지 즉제위 自營州薊城으로 率衆至하여 卽帝位하시고
축홀한성 천도 모군십만 위성대진 築忽汗城하여 遷都하고 募軍十萬하니 威聲大振이라
태자 조영이, 태자 대조영이 종부사하여 부사라는 것은 부고를 전하는 사신이죠. 부고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을 부고를 전하는 사신을 따라서 자영주계성으로 영주는 북경을 중심으로 해서 동서쪽으로 3~4백리 굉장히 넓은 을 영주라고 했어요. 굉장히 넓은 땅이었어요. 계헌이 있습니다. 아마 거기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요. 북경하고 붙었어요. 계성이. 거기까지 고구려의 대진국의 영토가 미쳤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영주의 계성으로부터 솔중 무리를 거느리고 지하여 어디에 이르렀어요. 돈화시에 이르렀습니다.돈화시에 이르러서 즉제위하시고 제위에 나아가시고 나아갈 즉자죠. 임금의 자리에 나아갔다. 그러면 대조영이 임금님이 천자가 된 것은 669년인데 지금 전부 역사에서 668년이라하고 있어요. 이것도 잘못된 겁니다. 20:24 축홀한성하여 천도하고 홀한성을 쌓아가지고 천도했습니다. 바로 홀한성이 상경 용천부입니다. 지금의 목단강시 영하년 발해진에 있는 지금의 중국놈들이 당나라 식으로 발해의 왕궁을 복원한다 해가지고 신문에도 났었죠. 성을 제1궁 제2궁 제3궁 제4궁 제5궁을 중국식으로 복원한다고 하는데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입니다. 거기가 홀한성이죠. 홀한성을 쌓아서 천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돈화시에 도읍을 하고 있었고 걸궐중상은 대중상은 그 아들 대조영은 그 위에 거기서 동북쪽으로 가면 지금의 발해진 영화년 발해진에 상경용천부가 있는데 거기가 홀한성입니다. 거기에 홀한성을 쌓고서 천도를 하고 모군십만하니 군사 십만을 보집하니 위성대진이라 그런 위강과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내정책입제 항당위적 복수자서 乃定策立制하여 抗唐爲敵하고 復讐自誓할새
내정책입제하여. 이에 정책을 수립했어요. 정책을 정하고 그다음에 제도를 설치해서 항당위적하고 당나라에 대항하여 당나라를 적으로 삼고 대적을 삼고 복수자서할세.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하는 것을 복수할 것으로 스스로 맹세할대 여말갈장 말갈의 추장인 걸사비우와 말갈이라는 것은 숙신에 물길 숙신 음루 물길 말갈 여진 이렇게 내려온다 하는데요. 이게 사실은 고조선의 혈통을 가지고 쭉 내려오는 그러한 사람들인데요. 지금 말갈과 고구려가 과연 구별이 되는거냐? 나는 사실 구분이 안된다고 봅니다 고구려가 말갈이고 말갈이 고구려인데 중국 역사가들의 특유의 논법으로 동북지방에 있는 우리 민족을 비하하기 위해서 말갈이라썼던 것이라 보고있지 그게 구별이 안된다고 봅니다. 말갈이라는 것을 물길, 원래 물가라 그래요. 물길 물가. 그러니까 송하강 강변에서 살던 사람을 말갈족이라고 물가에 사는 송하강가에 사는 그런 부족이다. 이런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갈장 걸사비우와 거란장 이진영으로 이게 중국식 사료에서 이런 식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걸 가져다 쓰는 거죠. 거란장 이진영으로 악수연병하여 악수를 하고 군대를 연합가지고 대파당장 이해고어천문령 하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해서 완전히 초토화 시켜버렸습니다. 대파해버렸어요. 이 전쟁에서 걸사비우는 전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는 후고구려에 대해서 지금 이 일은 후고구려의 마지막에 있었던 일로 추측이 되는데 지금 여기서는 대조영시대에 갔다 놨는데 지금 그 시대에 이 전쟁이 일어났는데 사료가 없으니까 이게 대중상에 난 전쟁인지 아니면 대조영때 난 전쟁인지 확실치가 않습니다. 여기는 대조영으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대중상 때 사건이 아니냐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이해고를 보내는데 만세통천중이었는데 이거는 669~697년 2년만 썼거든요. 그때는 669년이 대중상이 돌아가신 해이기 때문에 그 전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진영과 걸사비우와 후고구려가 연합해서 이해고를 천물령 해서 깨뜨린 사건이 언제 있었느냐 하는 것도 조금 더 고증이 필요합니다. 천문령이 어딘지를 몰라요. 지금도 천문령이 고증이 안됩니다. 분제장하여 그래서 여러 장수를 나누어서 치수구련하며 구련에다가가 태수를 두었습니다. 장군들을 각 고을에 가서 고을을 다스리라고 수는 태수란 말이죠. 태수로 삼아가지고 구련에다가 배치를 하며 초무유망하여 흘라다니고 도망다니는 사람을 부를 초 어루만질 무 그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을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정착을 할수있도록 해 주어서 주호정착하니 그들을 두루두루 보호해서 정착하게 하니 대득민망하여 크게 백성들의 바람을 얻어서 명망을 얻어가지고 만강유신이라 일만가지의 기강이 새롭게 바로 잡히게 되었다. 유신이라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환골탈퇴해서 유신이라고 합니다. 시경에 주수구방이나, 기명유신이다. 그 용어를 따다가 일본에서 명치유신을 하고 우리도 흉내를 해서 시월유신이라해서 유신이라는 말을 썼죠. 국호를 정위대진하고 국호를 바꿨네요 그러니까 대중상시대에는 대중상을 걸궐중상이라고도 하는데요. 걸궐중상 때는 후고구려라 했고 대조영이 호란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제는 대진이라고 국호를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그들 스스로는 대진인데 왜 우리는 맨날 발해라고 부르는지 말이 안되는거예요. 연호를 왈천통이다. 중광 천통이요. 이건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뜻이 있을 것 같아요. 통이라는 것은 법통 혈통이라는 뜻이 있을것 같아요. 하늘의 법통을 계승한다. 천통이요. 거유고구려구강하여 고구려의 옛 강토에 운거해서 탁지유천리라 육천리의 땅을 개척하였다. 척지 육천리라. 주변의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 받은 강대국 천통이십일년춘 붕우대안전 天統二十一年春에 崩于大安殿하시니
묘호왈태조 시호왈성무고황제 廟號曰太祖오 諡號曰聲武高皇帝라
태자무예 입 개원왈인안 서여계란 太子武藝가 立하니 改元曰仁安이오 西與契丹으로
정계오주목 동십리 임황수 定界烏珠牧하니 東十里에 臨潢水라
시세 개마 구다 흑수제국 개칭신납공 是歲에 蓋馬 句茶 黑水諸國이 皆稱臣納貢하고
우견대장 장문휴 살자사 위준 又遣大將 張文休하여 殺刺史 韋俊하고
취등래 위성읍 取登萊하여 爲城邑하니
당주 융기 노견병래 토불리 唐主 隆基가 怒遣兵來하여 討不利라.
천통 21년에 21년이면 20년만 더하면 되요. 그해부터 따졌으니까 719년 봄에 붕우대안전하시니 호란성 궁전에 있는 전각의 이름이 대안전이라는 전각이 있으니 대안전에서 붕우하시니 묘호왈태조요. 묘호를 태조라 하였고 시호를 성무고활제라 그랬다. 역사에서는 고황이라고 합니다. 아주 잘못된 거죠. 자주성을 확보했는데 당나라의 무슨 속국처럼 우리 역사책에 그렇게 나오니까 문제예요. 고왕이니 문왕이니 아주 잘못된 겁니다. 태자 무예가 대조영은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대무예가 천자가 되었어요. 입하니 개원왈인안이요. 개호를 인안이라 바꾸고 서여거란이요. 서쪽으로는 거란족과 더불어 정계오주목하니 오주목에서 경계를 정했어요. 국경을 정했어요. 거란족과 오주목에서 경계를 정하니 동십리에 동쪽 십리에 임황수라 황수라 임하고 있다. 이게 서압록하입니다. 원래 진국장군 대중상이 있었던 곳 거기가 그 부분이예요. 황수에 임하고 있다. 30:22 시세에, 이 시세라는 것은 뒤에 문장을 봐야 알 수 있는데요. 732년이라고 봐야 합니다. 개마국과 구다국과 흑수국 이런 여러나라들이 모두 신하를 일컫고 곡물을 바쳤습니다. 그러면 개마국과 구다국과 흑수국은 113쪽을 펴 보세요. 보면 밀기주에운 이게 삼성밀기겠죠. 둘째줄입니다. 삼성밀기주에 이르기를 개마국은 웅신국이라 그래요. 개마 곰이라는 뜻이거든요. 곰하나루 공주 웅진을 얘기하듯이 개마라는 것은 우리말로 개마 고마 곰 그걸 웅신국이라고도 하니 제북개마대령지북한다 북개마대령은 외황한령입니다. 흑룡강성을 관통하는 외흥한령의 북쪽에 있어요. 개마국은 웅신국인데, 구다국 거리가 이백리 되고 구다국은 어디에 있었냐? 옛날에는 동로국이라고 그랬는데 북개마대령의 서에 있어요. 외흑안룡에 북쪽에 있었던 것이 개마국 외흑한령 서쪽에 있었던 나라가 구다국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개마국과 구다국을 알 수가 있구요. 그 밑으로 흑수제국은 흑룡강성에 있었던 나라가 흑수국이 되겠습니다. 흑수제국이 개칭신납공하고 우견대장 장문휴하여 장문휴를 파견해서 732년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살자사위준하고 자사위준을 죽이고서 취등래하여 등주와 래주를 취했다. 요동반도에서 배를타고 산둥반도에 상륙해서 거기에 당나라에서 파견한 차사 위준을 죽이고 산둥반도에 있는 등주와 래주를 함락해서 차지해 버렸습니다. 732년에. 이때 대무예의 동생인 문예라는 사람이 극력반대를 하다가 뜻이 맞이 앉으니까 동생은 당나라로 망명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외교문제가 복잡해지고 그런게 있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당나라에서는 복수를 하려고 하죠. 복수를 하려면 신라를 끌여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라 사람으로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김사라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김사라를 신라에 보내서 ‘니네는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해라.’ 해서 연합작전을 펴는게 나오는데요. 보면요. 그래서 위성읍하니 그래서 대진국의 성읍으로 삼아버렸어요. 산동성에 있는 등주와 래주를 당주융기가 당나라의 이융기가 당현종입니다. 이름이 융기예요. 노견병래하여 노해가지고 군사를 파견해 왔어요. 그래서 산동성에서 싸움이 벌어졌지만 토불이라 우리나라 대진국을 쳤지만 이길수가 없었어요. 3. 한국사의 남북국시대를 연 대진국 - 나․당 연합군의 침략 격퇴 - 명년 수장 연충린 여말갈 明年에 守將 淵忠麟이 與靺鞨로
대파당노어요서대산지양 大破唐奴於遼西帶山之陽하니
당 밀여신라약 급습동남제군 지천정군 唐이 密與新羅約하여 急襲東南諸郡하여 至泉井郡하니
제조견보기이만 격파지 帝詔遣步騎二萬하여 擊破之라
회 대설 나당군 동사자 심다 會에 大雪하여 羅唐軍이 凍死者가 甚多라.
명년에 733년에 수장 연충린이 대진국의 지키는 장수 연충린이 말갈과 더불어 대파당노어 요서대산지양하니 크게 당나라놈들을 노가 그런뜻이니까 당나라 놈들을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대파를 해버렸습니다. 35:00 요서라면은 이게 고구려시대와 대진국시대의 요하라면 만하를 얘기하는거예요. 요나라 때 비로서 지금의 요하가 되구요. 그 이전에는 요하라면 난하를 얘기하는겁니다. 그럼 난하는 지금 하북성에 흘러오잖아요. 그래서 서쪽에 지금 풍유년하북성풍유년 동쪽 팔십리에 요대산이 있는데요. 요대산을 여기서 대산이라 한 겁니다. 그래서 요하의 서쪽 하북성풍류년 동쪽 팔십리에 있는 요대산 남쪽에서 당나라 군사를 연충린장군이 대파를 해버렸습니다. 당이 밀여신라약하여 당나라는 비밀리에 신라와 약속을 하고서 급습동남제군하여 급습했어요. 동남제군 이건 한반도에 있는 동남제군을 신라에서는 밑에서 쳐 올라갔거든요. 대진국을 지천정군하니 천정군에까지 이르렀네요 천정군은 원산입니다 덕원부라고 했는데요. 조선시대는 덕원부라 그랬는데 왜냐하면 이성계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가 전부가 다 원산땅이예요. 그러니까 자기 조선 왕족의 덕의 뿌리다 해서 원산을 덕원부라 했거든요. 거기가 천정군이예요. 그래서 천정군까지 쳐들어 왔어요. 원산까지 함경남도 남쪽가지 말이예요. 그러니까 제, 여기 제는 제 삼대 황제인 대무예죠. 무황제가 이름에도 호반무자가 들어가고 호도 무황제입니다. 묘호도 무황제예요. 제께서 조칙을 내려서 견보기이만 보경기병 이만명을 보내서 격파해 버렸어요. 신라군을 격파해버리니 격파지하니 회는 그때 마침 때마침 회자입니다 그런듯이예요,. 그때 마침 때마침 회자입니다 그때마침 대설이 내려서 나당군 연합군이 동사자 얼어죽는 자가 아주 많았어요. 어시 추지하서니하 위계 於是에 追至河西泥河하여 爲界하니
금강릉 북니천 시야 今江陵 北泥川이 是也라
해주 암연현 동계신라 海州 岩淵縣은 東界新羅하니
암연 금옹진 시야 자차 岩淵은 今瓮津이 是也라 自此로
신라 세시입공 임진강이북제성 진귀아 新羅가 歲時入貢하니 臨津江以北諸城이 盡歸我라
우명년 당 여신라 연병래침 又明年에 唐이 與新羅로 聯兵來侵이라가
경무공이퇴 竟無功而退하다.
어시에 추지하서니하하여 원산에서부터 이만명을 대동해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을 쳐서 내려가니까 하서니하에까지 이르렀어요. 하서니하는 강릉입니다. 강릉에 흐르는 강이예요. 이거는 현대의 강단사학자들도 신라와 대진국의 영토는 강릉북계천인가 거기가 니하가 거기다는 것을 지금 학자들도 인정을 해요. 이거는 정약용도 그렇게 고증을 했고 지금의 발해국사를 연구하는 관동대학의 서병국 교수도 ‘그것은 맞다. 대진국과 경계가 강릉 니하다.’ 그렇게 얘기를 해요. 경계를 삼으니 금강릉 북니천이 시야라 해주암연현에 해주에있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암연현은 동계신라하니 동쪽의 신라와 경계를 삼으니 암연은 지금의 옹진반도다 옹진이시야라. 그러니까 옹진에서 강릉 이어지는 선이 국경선이었습니다. 자차로 이로부터 신라가 세시입공하니 신라가 해마다 때때로 들어와서 공물을 바치니 임진강이북제성이 임진강 이북의 모든 성이 대진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우명년에 이거는 774년이 되겠죠. 명년에 당이 여신라로 연병래침이라가 작년에 얼어 죽었는데도 또 쳐들어오려고 하다가 연병해서 군사를 연병해서 경무공이퇴하다 마침내 공이없이 돌아가다 732년에 산동성 등주와 내주를 점령해 버리니 그 다음해 그 다음해 전쟁을 벌였지만 대진국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40:20 4. 신교문명의 대제국, 대진국의 강성한 모습
인안 십육년 구다 개마 흑수제국 仁安 十六年에 句茶 蓋馬 黑水諸國이
이기국 내항 취위성읍 以其國으로 來降하니 取爲城邑하다
명년 축송막십이성 우축요서육성 明年에 築松漠十二城하고 又築遼西六城하여
수유오경 육십주 일군 삼십팔현 遂有五京 六十州 一郡 三十八縣하니
원폭 구천여리 가운성의 圓幅이 九千餘里니 可云盛矣라.
인안 십육년에 734년에 구다 개마 우리구다는 대흥안녕서쪽에 있었다고 했구요. 개마는 그대흥안녕 북쪽에 있었다고 했어요. 남쪽이라 했냐요? 다음에 흑수 흑룡강성에 있었던 여러 나라들이 이기국으로 내항하니 그 나라에 와서 항복을 하니까 취위성읍하다. 그들을 모두 취해가지고 성읍을 삼았다. 명년에 이게 735년이예요. 축송막십이성하고 송막십이성을 쌓았는데 하북성 승덕 열하위에 위장현이 있는데 위장현과 내몽고로 들어가는 견붕연 그 지역이라고 합니다. 내몽고 자치주하고 하북성 제일 꼭대기 거기에 송막 12성을 쌓았다 하니까 북경위쪽입니다. 북경위쪽까지 대진국의 영토가 미쳤다는거예요. 우축요서육성하니 아까 요하는 난하라고 그랬잖아요. 난하. 서쪽에다가 여섯성을 쌓았어요. 북경 근처입니다. 육성을 쌓으니 수요오경 드디어 오경육십주일군삼십팔현이 있게 되니 오경이라는 것을 주의를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배달국 시대 때 환웅천황께서 오셔가지고 오과에 제도를 두었어요 오라는 숫자가 중요한데요 고조선시대때도 오과의 제도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고조선이 망한 뒤에 6년동안 공화정을 할때도 오과가 공화정을 합니다. 해모수께서 정치를 할 때도 오과에 군사를 나누어가지고 오과분치 그런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 시대 때도 내려오고 신라에도 오서경이 있었죠. 동원경 서원경 북원경 중원경 오서경제도가 김해경 해서 오서경 제도가 있었구요. 대진국의 오경 대진국을 계승한 요나라의 오경 금나라의 오경 오행사상에 뿌리를 두어서 오경제도가 쭉 내려옵니다. 그래서 상경용천부 동경성이죠? 지금 호란성이 있었던 상경용천부 동경용원부 서경압록부 남경남해부 중경현덕부 이런 오경제도가 있었는데 지금 역사학자들이 대진국의 오경 다 엉터리입니다. 남경남해부는 함흥이다. 남경남해부는요. 요령시의 해성입니다 남옥저지역이구요. 서경압록부는 임항이예요. 아까 서요하가 흘러내려오는 거기인데 지금 서경 압록부를 어디로 잡고 있다면 백두산 옆으로 잡고 있습니다 다 엉터리예요 이기백의 다 그렇게 나와있거든요. 대진국의 너무 영토를 축소해서 자기네들 멋대로 근거도 없이 가져다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사부님 말씀대로 개벽이 오기 전까지는 도저히 바로잡힐수 없어요. 지금 역사가 왜곡된게 아니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부터 중화주의에 의해서 왜곡되고 일본놈들한테 왜곡되고 역사학자들이야 얘깃거리도 안되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무슨 역사가 바로잡히겠습니까? 결국 바로잡는데도 증산도 외에서는 바로잡지를 못합니다. 역사도! 오경육십주 일군삼십팔현에 있게되니 원폭이 말이예요. 원은 둘레를 말하겠죠 폭이라는건 면적이 되겠습니다. 구천여리가 되었습니다. 가운성의라 가히 성하다. 44:58 시세 당왜 급신라 병견사입공 是歲에 唐倭 及新羅가 並遣使入貢하니
천하칭위해동성국 지유발해삼인당일호지어 天下稱爲海東盛國이오 至有渤海三人當一虎之語라
시세에 735년이 되겠네요. 시세에 당나라 일본놈들 신라가 병견사입공하니 모두 사신을 파견해서 공물을 바치니 천하칭위 천하에서는 일컬었어요. 해동성국. 해동성국이라 일컬었고 해동은 발해 동쪽에 있는 발해만 동쪽에 있는 아주 성대한 나라다가 되었고 지유 심지어는 이런말이 있었어요. 발해삼인당일호라 이 말이 거란지라던가 발해지 여러책에 나오는 말인데요. 발해사민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해낸다. 이런 아주 미칭이 아름다운 표현이 중국 역사서 여러곳에 내려오고 있습니다. 발해사민당일호라. 시 군민화락 논사락의 오곡풍등 時에 君民和樂하고 論史樂義하며 五穀豐登하고
사해안연 유대진육덕지가 이미지 四海晏然하여 有大震六德之歌하여 以美之라.
익년삼월 안민현 감로 강 翌年三月에 安民縣에 甘露가 降하니
예관 계청하의 종지 禮官이 啓請賀儀한대 從之라
시월십육일 제삼신일체상제우서압록하지상 是月十六日에 祭三神一體上帝于西鴨綠河之上하니
서압록 고리고국지야 西鴨綠은 槀離古國地也라.
시에 당시에 군민이 화락하고 임금과 백성이 아주 평화스럽고 즐겁고 논사락의하며 역사를 논했네요. 우리 환국시대 배달시대 고조선시대 북부여 고구려 이런 역사를 논하고 정의로움을 즐겼으며 오곡이 풍년이 들고 사해안연하여 온천하가 편안해서 유대진대진육덕. 구체적인건 저도 모르겠어요. 노래가 있었으니 이미지라 대진국을 찬미하였다. 736년이죠. 익년삼월에 안민현이 바로 황수가 지금의 임항입니다. 요나라의 상경임항부가 있던 곳이예요 서압록하 중간에 있는 거기인데요. 안민현이. 그런곳을 정확히 다 알수 있습니까? 이 책에 다 나와요. 앞뒤로 보다보면 전부다 규명이 됩니다. 뒤에보면 안민현이 거기라는게 다 나와요. 안민현에 감로가 내렸습니다. 하늘에서 이슬이 내렸는데 이슬이 달았어요. 감로라는 정치를 잘하면 하늘에서 보여주는 징조라고 합니다. 감로가 내리니 예관이 계는 여쭐계자예요. 삼대무왕제 대무에게 “안민현에 감로가 내렸습니다.” 이렇게 아뢰니까 “청하의 어떤 축하의식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의를 청했는데 “한번 해보자.” 해서 축하의식도 했구요. 시월십율일에 삼월달에 감로가 내렸는데 삼월 십육일이 무슨 날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영절아닙니까? 3월 16일 삼신상제님을 크게 맞이해서 우리가 천제를 지내는 날이 삼월 십율일이예요. 대영절이라고 합니다. 참고적으로 오월오일은 광개절 넓을 광자에 열릴 개 5월 5일고주몽 탄생일이면서 김형설성도도 오월오일에 태어났고 5월 5일이 술이 최고의 날이라는 의미가 있을것 같아요. 그날은 광개절이라고 하죠. 삼신상제님을 맞이해서 천제를 지내는 대영절이라고 합니다. 3월 16일에 제삼신일체상제를 서압록하의 위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삼신일체상제! 우리민족이 우주의 최고 통치자에 대한 호칭을 우리는 삼신상제님이라고 해왔습니다. 삼신상제님에 대한 호칭만 깨면 천지인 철학에 대한 바탕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삼신상제님이 뭐예요?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 아닙니까? 조교치 삼신이라는것 천지인으로 나누면 하늘에서는 조화의 역할 창조의 역할을 하고 땅에서는 조화의 역할 마지막으로는 인간을 만들어서 완성시키는 그런 치화의 역할을 하신다. 49:58 공간적으로 얘기하면 인간을 완성시키는 상제님 시간적으로 얘기하면 봄에 난 만물을 조화해서 창조하고 여름에는 화생한 것을 기르고 그리고 가을이 되면 기른 것을 완성시킨다는 치화신 삼신상제님 천지인으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도 있고 봄여름가을로 나누어서 조교치 삼신을 해석할 수도 있고 우리민족이 삼신상제님이라고 호칭한 그 속에는 그것만 제대로 알면 우주의 철학을 꿰뚫어 버릴수가 있는거죠. 그 속에서 그렇지 않습니까? 삼신이라 호칭한것이 그렇게 삼신이 막연한 삼신이 아니라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 삼신으로 나누어진다는 이러한 우리민족의 철학입니다. 이런 한마디 속에서도 유불선을 다 가져다 놔도 우리 철학을 당해내지 못해요. 참 철학이라는게 위대한 거죠. 우리가 보고 느끼고 하지만 논리화 하고 압축해서 설명한다는 것 그런것 문명사에 대단히 중요한 겁니다. 서압록하. 또 나왔네요. 서요하입니다. 서요하와 동요하가 만나서 요하를 이뤄서 발해만으로 흘러 들어가는데요. 서압록하의 위에서 서압록하지상은 강가란 말이죠. 강가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서압록은 나왔네요. 고리고국지야라. 우리 고구려라는 명칭이 고리에서 나왔다 그러잖아요. 원래는 고구리라고 해야 합니다. 원래는 거기가 해모수의 고향이예요. 그래서 고구리라는 궁명을 썼던 것입니다. 원래 고리의 옛 나라입니다. 5. 4대 문황제의 민족사 교육과 신교의 대부흥시대 십구년 제붕 十九年에 帝崩하시니
묘호왈광종 시호왈무황제 廟號曰光宗이오 諡號曰武皇帝라
태자흠무 입 개원왈대흥 太子欽茂가 立하니 改元曰大興이오
자동경용원부 이도우상경용천부 自東京龍原府로 移都于上京龍泉府하고
명년 입태학 교이천경 신고 明年에 立太學하여 敎以天經 神誥하며
강이환단고사 우명문사 講以桓檀古史하고 又命文士하여
수국사일백이십오권 修國史一百二十五券하니
문치 흥예악 무위 복제이 文治는 興禮樂하고 武威는 服諸夷하여
태백현묘지도 흡어백성 太白玄玅之道가 洽於百姓하고
홍익인간지화 뇌급만방 弘益人間之化가 賴及萬方이러라.
십구년에 779년입니다. 제붕하시니 제께서 돌아가시니 묘호왈광종이라. 그러구요 삼대황제를 시호왈무황제라 그랬습니다. 태자훔무가 아주 훌륭한 분인데요. 네 번재 임금이제 태자훔무 세종인데요. 우리나라 조선시대도 세종 대진국에서도 네 번째 임금이 세종 이 세종이 위대한 분이셨어요. 세종이 훔무가 입하니 개원왈대흥이오. 대호라 연호를 바꿨구요. 동경용원부로부터 상경용천부하고 동영용원부에 있다가 상경용천부로 갔다고 그러는데요. 이 중간과정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동경용원부는 훈춘 근처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경용원부에 있다가 상경용천부로 가고 이제부터는 상경용천부에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명년에 738년이네요. 태학을 세워가지고 태학! 옛날에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 이름이 태학이예요. 태학을 세워가지고 증산도 대학교지만 뭐를 가르쳤어요. 교이 천경신고를 가르쳤으며, 삼일신고를 가르쳤습니다. 분명한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국가라는 것이 여기서 증명됩니다. 사상과 철학을 계승하는 그것이 진정한 정통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국통을 얘기할 때 우리의 국통은 통일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대진국으로 국통을 정하거든요. 국통을 정하지도 않지만 배우지도 않죠. 한국의 학자들도 우리나라에서 제외되야 한다. 한국의 반 이상의 역사학자들이 그런 얘기를 해요. 많은 학자들이 강이 환단고사하고 환단고사로서 강의를 합니다. 환단고사로서 환국과 단국 단국이 배달국입니다. 54:40 환이라는것은 자천광명 하늘에서 내리는 광명을 환이라고 그래요. 자지광명 땅에서 무슨 광명이 나겠어요? 그 하늘의 광명이 비친 땅의 광명 땅의 광명이 제일 먼저 오는 데가 백두산 아닙니까? 그래서 배달국을 단국이라고도 합니다. 단국! 환단 그리고 한단 한단한 사부님께서 이걸 얘기해 주셨잖아요. 한!단!한으로 매듭짓는다. 우리 민족은 광명을 밝혀오는 민족이었는데 한은 하늘의 광명 단을 땅의 광명 이번에 개벽하면서 상제님의 진리로서 태사부님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인간이 도통하고 하면서 인간의 내면의 광명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게 한의 시대가 열리게 되는거죠. 이렇게 삼변성도 하는겁니다. 천지의 광명도 삼변성도해서 친지와 더불어 매듭을 짓게 되는 거예요. 환단고사하고 우명문사하여 문인들, 문신들에게 명령하여 수국사일백이십오권 역사책 125권을 편찬하게 했네요. 이런것이 전해 내려 온다면 중국에서 까불고 얘기가 안될텐데. 역사해석하면…이게 없어요. 국사125권이 편수했다는 뜻입니다. 수라는 것은. 편찬했다 문치는 흥예악하고 이렇게 문무를 겸해야 하거든요. 일꾼들도 문무를 겸비해야 하잖아요 이렇게 증산도 대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나가서 포교도 잘하고. 모든 것을 상제님께서 바라는 증산도의 일꾼상이라는 것은 성과 웅을 겸하는 인간상을 우리의 최종 목표 아닙니까? 정치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하나로 치우치면 안 되죠. 문으로서는 문의 치는 예악을 흥하게 하고 그래야 살맛이 나는 거죠 예와 음악으로 보람을 느끼게 하고 무인은 무력과 위엄은 복제이 모든 주변의 국가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태백현묘지도가 그래서 우리나라 태백이라는거 아주 광명하다 우리 철학은 광명철학이죠. 빛을 밝히는 거예요. 태백의 현묘한 장밀 광명을 밝히는 현묘하다밖에 얘기 못하잖아요. 우리 진짜 우리민족 철학은 현묘합니다. 현묘한 도가 백성을 흡족하게 우리는 다 잊어버렸는데 대진국시대에는 삼성조시대 이런 오묘한 도가 백성들에게 흡족하게 젖어 들어가고 홍익인간지화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그런 교화가 뇌금만방이러라 만방에 뇌급하더라 힘입어 미치더라. 대흥 사십오년 치청 절도사 이정기 大興 四十五年에 淄靑 節度使 李正己가
거병 거당군 제견장조전 擧兵하여 拒唐軍하니 帝遣將助戰하다
이정기 고구려인야 생어평로 李正己는 高句麗人也니 生於平盧라
이십이년 사중 축군수이희일 二十二年에 師衆이 逐軍帥李希逸하고
입정기 졸 자 납 통부중 立正己러니 卒에 子 納이 統父衆하고
오십육년 납 졸 五十六年에 納이 卒하니
자사고 대기위 급졸 기가인 불발상 子師古가 代其位하고 及卒에 其家人이 不發喪하고
잠사영사도어밀이봉지 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라.
대흥 사십오년에 대흥 사십 오년이면 781년입니다. 치청절도사 치청이라는것은 산둥성에 치박시가 있어요. 예산 제나라 수도였던 청주! 그 옆에 청주가 있어요. 치주와 청주 당나라 시대에는 주를 가지고 지방 관제를 나눴는데 주가 몇 천개가 되는지 모르겠는데 천개가 넘었을 겁니다. 전부 주로 나누었는데 치주와 청주를 관장하는 절두가 이정기가 거병을 해가지고 거단군하니 단군을 막으니 제견장조전하다 우리 사대임금인 세종께서 장수를 보내서 전쟁을 도와주게 하다. 이정기는 고구려인야다 이정기는 망한 고구려의 후손입니다 이정기에 대해서 이걸 다 설명을 마치고 설명을 드릴께요 생어평로하고 평로에서 태어났어요. 요령성 조항시입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22년에 사중이 축군수이회일하고 22년이면 758년인데요. 이것은 이 책이 잘 못 됐습니다. 758년이 아니고 755년입니다. 군사와 대중이 군사 후이일을 쫓아내고 자기의 총 대장인 절도사인 후이일. 여기는 이시일이라고 되어있는데 원래는 후이일입니다. 후이일을 쫓아니고서 이정기 이정기를 자기네 지도사로 세우니 졸에 781년에 이정기가 죽거든요. 졸에 자납이 아들 납이 통부중 아버지의 무리를 거느렸습니다. 1:00:15 이정기가 50살에 돌아가십니다. 납이 계승인데 납이 22세밖게 되지 않아요. 그리고 납이 오십육년에 오십육년은 4대 세중 오십 육년이니까 792년이예요. 이건 맞아요. 납이 졸하니 납이 서른 두살인가 죽습니다. 서른 두살에 죽었으니까 아들 이사고가 열 살밖에 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절도사의 제위를 계승하고 급졸에 사고가 팔백육년에 죽거든요. 그러니까 792~806년까지 이사고가 절도사를 하다가 급졸에 그 불상상하고 죽을 것을 바라지 않고 잠 몰래 사영사도어밀 사람들로 하여금 몰래 사여금 사자 뒤에는 한문을 해석할 때 대명사가 생략된 것을 꼭 찾아야 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도 이복동생을 맞이해서 어디서? 밀당에서. 하남성 밀연이 있는데 그게 아니도 산둥성에 밀당이 있습니다. 지금의 제성현인데 거기에 제성 밑에 낭야대도 있는데요. 거기 밀당에서 이복동생인 사도를 맞이해다가 그를 절도사로 삼습니다. 그래서 806~819년까지 13년동안 이 사도가 그걸 다스리게됩니다. 이게 우리역사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다가 근자에서 조금 조명되기 시작하는데요. 755년에 안록산이가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때에 조양시에 요령성 조양시에서 후시일이라는 사람을 절도사로 만들어줍니다. 원래 왕현지가 절도사로 있었는데 그 사람이 죽었어요. 조정에선 그 사람어린 아들을 절도사로 임명하려그래요. 그러니까 이정기가 왕현지의 아들 목을 베어버리고 후이일과 이정기는 고종사촌간인데 그러니까 고모의 아들이예요. 후일을 절도사로 그냥 지도자로 추대하니까 정부에서도 절도사로 임명합니다. 그게 바로 아까 나왔던 잘못됐던 758년인데요. 그러니까 안록산이가 당나라와 전쟁을 하면서 내편을 들어서 당나라를 무찌르자 계속 유혹을 하지만 그걸 하지 않고 이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이일이 일급 참모죠 요령성에서 배를 타고 산동성으로 상륙해서 당나라를 도와주기 위해서 옵니다. 그러니까 당나라에서는 백마원군을 얻은 것처럼 기뻐해서 치청 절도사로 임명을 합니다. 치주와 청도의 절도사로 임명을 합니다. 그런데 후이일은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절만 짖고 해서 경제가 파탄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후이일을 내 쫓고서 이정기를 최고 지도자로 내세우게 되죠 765년입니다. 그래서 이정기는 치청, 치조와 청주의 절도사가 되면서 산동성 전체를 통일하게 되요. 통일해 버리고서 당나라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독자적으로 관리를 임명하고 독자적으로 조세를 징수합니다. 그 때 인구가 육백만명정도 되는데 고구려가 망할 때보다 인구가 많고 신라보다 인구가 더 많았어요. 이정기가 통치하던 산동성 전체 인구가. 그래서 771년에 갑자기 이정기가 죽자 그 아들 이납이 계승해서 계속 다스리다가 국호가 제나라라고 선포를 해버려요. 제나라라고 국호를 선포해서 산동성 전체를 다스립니다. 1:05:15 그러니까 당나라에서는 이건 천자가 도망가고 그래서 수도를 진격하려하니까 이렇게 해서또 납도 792년에 죽으니까 그 아들 사고가 계승을 하고 806년에 죽으니까 몰래 밀당에서 이복동생인 이사도를 불러다가 또 책임자로 임명하고 그러는데 819년에 결국 당나라한테 망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동안 4대지만 저기로는 삼대죠 세대로는 삼대지만 네 명의 절도사가 계승하면서 중국 땅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중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독자적인 나라를 건설을 해가지고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몇 년 전부터 고구려의 후예인 이정기 장군이 중국의 일부를 통치했다하는 것이 요새 이제 많이 아는 사람들은 많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이게 대진국본기에. 이정기가 고구려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과 전쟁을 할 때 대진국에서 원병을 보내주고 이런 얘기가 조금 나오고 있죠. 대흥 오십칠년 제붕 大興 五十七年에 帝崩하시니
묘호왈세종 호왈광성문황제 廟號曰世宗이오 諡號曰光聖文皇帝라
국인 입기족제 원의 성포악 불능리국 國人이 立其族弟 元義러니 性暴惡하여 不能理國이라
갑술 국인 폐지 甲戌에 國人이 廢之하고
영입선제지손 화흥 개원왈중흥 迎立先帝之孫 華興하니 改元曰中興이오
명년 붕 묘호왈인종 시호왈성황제 明年에 崩하시니 廟號曰仁宗이오 諡號曰成皇帝라.
대흥 오십 칠년에 대흥 오십 칠년 이면은 793년이 됩니다. 그러니까 737~793년까지 57년이면 근 60년이잖아요. 오래했잖아요. 참 정치를 잘 했겠죠. 제붕하시니 묘호왈세종이요. 치호왈광성문황제 또 성인,성자 나왔네요.. 대조영은 성모고황제 여기는 광성문황제 국인이 입기족제 국인이 그 족제인 어떤 왕족이면서도 세종의 동생인 대원인이라는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했는데 성이 포악했어요. 대원이가 성이 포악해서 불능리국이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지라 갑술에 갑술은 그 다음해죠 794년에 국인이 폐지하고 나라사람들이 임금을 쫓아내고 영입선제지손 화흥하니 선제의 손자인 대화흥이라는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했어요. 그래서 개원왈중흥이요. 개원에서 아까는 대흥이라고 했는데 손자는 세종의 손자는 중흥이라고 연호를 바꾸고 명년에 또 돌아가셨네요. 794년에 올라가지고 795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묘호왈인종이오. 시호왈성황제라 그랬습니다. 황숙 숭린 입 시위목종 강황제 皇叔 崇璘이 立하시니 是爲穆宗 康皇帝라
역의종 정황제 원유 강종 희황제 언의 歷毅宗 定皇帝 元瑜와 康宗 僖皇帝 言義와
철종 간황제 명충 지성종 선황제 인수 哲宗 簡皇帝 明忠하여 至聖宗 宣皇帝 仁秀하니
천자영명 덕기여신 天資英明하시고 德氣如神하시며
재겸문무 내유태조지풍 才兼文武하사 乃有太祖之風이라.
황숙 숭린이 대황인의 삼촌되는 대숭린이 시위목종 강황제라 역 목종강황제가 7대 임금이 되죠? 폐제까지 쳐가지고 폐제 쫓아낸 대원의까지 쳐가지고 7번째 임금이 되구요. 그 다음에 역 누구를 지나느냐면 의종정황제 8대,의종은 묘호고 정황제는 시호구요. 원유 이름이 대원유예요. 9대는 강종 희황제 언의 강종 희왕제 대언의 이름은 9대고, 10대는 철종간황제 명충 대명충 을 지나서 역 지 어디까지 이르렀어요? 11대 임금인 성종선황제. 성종이라는 호는 중국의 수많은 천자들을 봐도 성종이라고 쓴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최초로 임금의 묘호에 성종이라는 묘호를 쓰는게 나옵니다. 최초로 대진국에서 중국 천자에 성종이라는 사람 들어봤어요? 중국에 없어요. 성종선황제 인수 대인수라는 이름이 대인수인데요. 11대 임금이예요. 그런데 이 얼마나 훌륭했으면 성종이라는 묘호를 드렸겠습니까? 1:09:54 천자가 영명하시고 타고난 천품이 영명하시고 타고난 자질이 영명하시고 덕기가 여신하니 아주 덕의 기운이 덕이 줄줄 흘러나오는 기운이 신과 같으니시 재겸문무라 이 재주는 문무를 겸했어요. 하나만 잘하기도 어려운데 문과무를 겸하사 내유태조지풍이라 이에 태조 대조영이죠. 대조영의 기풍이 있었습니다. 6. 대제국 발해의 통치영역과 전국민의 신교 생활화
남정신라 치니물 철원 사불 암연등칠주 南定新羅하여 置泥勿 鐵圓 沙弗 岩淵等七州하고
북략염해 나산 갈사 조나 석혁 급남북우루 北略鹽海 羅珊 曷思 藻那 錫赫과 及南北虞婁하여
치제부 장백지동왈안변 置諸部하니 長白之東曰安邊이오
압강지남왈안원 목단지동왈철리 鴨江之南曰安遠이오 牧丹之東曰鐵利오
흑수지상왈회원 난하지동왈장령 黑水之上曰懷遠이오 灤河之東曰長嶺이오
장령지동왈동평 長嶺之東曰東平이오
우루 재북대개마지남북 虞婁는 在北大蓋馬之南北하니
지광 구천리 경우대개 문치희흡 地廣이 九千里라 境宇大開하여 文治熙洽하니
상자국도 하지주현 개유학 구서오계 上自國都로 下至州縣히 皆有學하여 九書五戒를
조석송습 춘추고적 중의천공 朝夕誦習하며 春秋考績하여 衆議薦貢하니
인기축력 가진대용 人旣畜力하고 家盡待用이라.
남정신라하여 남쪽으로는 신라를 평정하며 치 어떤 줄을 두었나면 니물 니물은 아까 강릉 연국포라는 덴데요. 니물 철원 지금은 원자가 이 원자를 쓰는데 지금의 철원이예요. 사불 사불은 지금의 양주 암연은 아까 웅진이라 그랬죠. 이런 칠주를 다시 두었어요. 남쪽으로 내려와가지고 칠주를 세우고 북략 북쪽이라는 것은 략이라는 것은 노략하다는 뜻이지만 경략하겠습니다. 거길 지나가지고 항복을 받았는데 어디까지 갔나. 한번 볼까요? 염해, 염해는 블라디보스톡이예요. 해삼이. 염해 그다음에 나산 북부시베리아라고 합니다. 갈사 갈사는 오솔강 유역이구요. 조나 연해주라 하구요. 석혁. 동부시베리아라고 합니다. 남북우루 흑룡강성에 있는 흑룡강성 호륜연 근처라고 합니다. 우루. 남우루, 북우루, 이런 것을 경략해서 치제부 모든 부서를 부를 두었다. 그거예요 이 때 광역의 이름이 부였거든요. 부. 모든 부를 두니 장백지동왈안변이오. 장백은 백두산이죠. 백두산 동쪽을 안변부라 그랬어요. 안변부 그리고 압록지남 압록강의 남쪽 이거는 지금의 압록강이예요. 평안도함경도 이쪽은 안원부 목단지동왈 목단강의 동쪽은 철리부, 흑수지상 흑룡강의 위는 회원부, 난하지동 난하의 동쪽은 장령부, 장령의 동쪽은 동평부 왈동평이요. 우루는 재북개마대령지남북하니 우루국은 어디있었나면요. 북개마대령 외흥안령의 남북에 걸쳐있었어요. 남쪽에 있으면 남우루 북쪽에 있으면 북우루. 남북한이 지광구천리라 땅이 넓이가 구천리가 되는 대광대국이란 말이죠. 경우 경은 국경이구요. 우라는 것은 집우자니까 이건 강토입니다. 강토가 크게 열려서 문치가 희흡하니 희흡 삼성기에서 희흡사펼호라. 희흡이라는게 빛나는 것이 흡족하게 되었다. 상자국도로 위로 국도로부터 수도로부터요. 하지주현 아래로 주나현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60주가 있었고 38현이 있었다고 앞에 나왔어요. 60주 38현에 이르기 까지 개유학하고 모두 학교가 있어요. 수도에 있는 것은 태학이었을 거고 지방에는 학이 있었어요. 학이 학교에요. 구서오계를 조석송습하며 구서오계를 조석으로 외었어요. 우리가 오계란 것은 원광법사가 만든 오계가 불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한 오계를 가지고 만든거랬죠. 그래서 오계는 먼저 오계를 먼저 설명드리면 충이예요. 효에서 사친이효를 만들어 냈거든요. 충은 충에서 사군이충을 만들어내고 신에서 붕우유신 친구를 사귀면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것이 있고 용은 임전무퇴 인 인은 살생유택 이게 나왔죠. 효충신용인 이것이 오계구요. 1:15:02 구서라는 것은 구물단군께서 43대 구물단군께서 만드신 것이죠. 그래서 하늘에 아홉 번 절을 하면서 상제님전에 아홉 번절을 하면서 맹세하는 말인데 소도경전본은 젤 끝에 나옵니다. 제일 첫 번째가 효가하라. 집안에서는 효도하라. 두 번째는 우형제하라. 형제간에는 우애있게 지내라. 세 번째는 신우사우하라. 스승과 벗에게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네 번째는 충우국하라. 나라에 충성하라. 다섯 번째는 손우군하라. 무리에게는 겸손하라. 여섯 번째는 명지우정사하라. 정사에 아주 현명하고 지혜로워라. 일곱 번째는 용우전하라. 전쟁에 용감해라 여덟 번째는 영우신하라. 몸에는 청렴하라. 아홉 번째는 의유직업 직업을 의롭게 실천해라. 소도경전본은 젤 마지막에 나와요. 굉장히 깁니다. 소도경전본이 고려국본기 바로 직전이죠. 다섯 번째죠 태백일사의 다섯 번째 제일 끝에 나옵니다. 그래서 구서오계를 조석으로 외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의식에 뿌리박히거든요. 구서오계를 조석으로 송습하며 춘추로 고적해서 춘추로 봄가을로 성적을 고찰합니다. 봄에도 성적 매기구요. 가을에도 성적을 매겨요. 관리들의 그래서 벼슬을 올려주거나 내리고 중의천공하니, 뭇사람들이 의논해서 관리는 천공 천거하고 고해요. 이때는 공할 공자입니다. 관리를 백성들이 의논해서 추대합니다. 임금이 임명하는게 아니라, 천거해서 고하고 인기축력하고 사람들은 모두 다 이미 능력을 기릅니다. 사람들이 축력 힘을 능력을 축적하고 가진대용이라 집집마다 대용 씀씀이에 대비합니다. 집집마다 씀씀이에 대비해가지고 저축하고 그래요. 자시 국세부강 自是로 國勢富强하고
내외안열 자무도절간모지단 內外安悅하여 自無盜竊姦謀之端이오
당왜신라 급거란 막불외복 唐倭新羅와 及契丹이 莫不畏服하여
천하만방 개이성인흥치지해동성국 흠송지 天下萬邦이 皆以聖人興治之海東盛國으로 欽頌之라
갱오대 야율 수빈수가병 종불능복야 更五代하여 耶律이 雖頻數加兵이나 終不能服也라
후 경장종 화황제 이진 순종 안황제 건황 後에 經莊宗 和皇帝 彛震과 順宗 安皇帝 虔晃과
명종 경황제 현석 지애제인선 위거란소멸 明宗 景皇帝 玄錫하여 至哀帝諲譔하여 爲契丹所滅하니
자세조 전십오세 공이백오십구년 自世祖로 傳十五世하여 共二百五十九年이러라.
자시로 국세부강하고 이로부터 국세가 부강하고 강성해 지고 내외안열하여 안팎이 편안하고 기뻐해요. 안은 수도라고 봐야죠. 외는 지방이라 봐야 되죠. 수도와 지방이 편안하고 기뻐해서 자무도절간모지단이오. 저절로 도절은 도둑 절도 간사하게 꾀하는 그런 간사한 꾀로서 도모하는 폐단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풍속이 순화되어가지고 사람이 다 아주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성된 사람이 된겁니다. 당·왜·신라가 당나라 일본 놈들 신라와 및 그 거란이 막불외복하여 두려워하고 복종하지 아니함이 없어가지고 천하만방이 개이성인흥치지해동성국 성인께서 흥하고 다스리는 아주 흥해서 다스리는 해동성국으로서 흠송지 했어요. 흠모하고 칭송을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종이라고 그런 묘호를 후세에서 붙여준 것 같아요. 경오대하야 5대를 지나서 5대는 이제 당나라가 망한뒤에 907년부터 송나라 조광윤이 통일할 때까지 53년동안 양당진한주 후량의 주전충 후당의 이극용 후당의 석경당, 이렇게 그 3년 동안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진 이렇게 짧은 나라가 지나가는데 오대라고 합니다. 오대를 지나서 야율이 요나라 거란족의 통치자의 성이 야율씨에요 야율아보기가 수빈수가병이나 빈삭 자주빈 자주 삭자거든요. 자주자주 군사를 가해왔으나 종불능목야라, 끝내 복종시킬수 없었어요. 1:19:55 후에 경 이 아주 유명 한 11대 성종 대인수 이라는 분 성종의 선황제를 지나가지고 12대 장종 화황제, 12대 이름은 이진이구요. 13대 순종 안황제, 이름은 건황. 대건황 14대는 명종 경황제 이름은 대현석입니다. 그 다음에 지애제 마지막 15대 애재 인선 대인선 인선은 시호나 묘호가 없어요. 망하니까 그걸로 끝이지 다른나라에서 시호나 묘호를 줄 리도 없고 제사를 안 지내기 때문에요. 슬프게 돌아가셨으니까 후세에 애제라 할 뿐이죠. 지애제인선이라니라 선이라고 읽어요. 대인선에 이르러서 위거란소멸하니 거란에게 망한바가 되니 자세조로 전십오세하야 공이백오십구년이라.그래AD668~926년까지 빼면 258이 되는데 플러스 1을 해서 259년 대종상에서부터 11세 대종상부터 15세 애제까지 대인손까지 15 대 임금을 지나면서 259년동안 지속됩니다. 259년이라고 똑 부러지게 이야기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 국사에서 발해역사 668년부터 뭐 어쩌고 여기서 다 부정하고 정확히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발해국의 멸망히 최대의 미스테리입니다. 이처럼 강성한 발해국이 어떻게 망하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사부님께서도 써놓으신 책을 보면 이것이 1998년인가에 KBS에서 방영이 됐는데요. 화산이 폭발해서 완전히 성이 화산재로 덮혀서 그래서 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할 수도 없고 해서 거란족이 부여성을 함락한지 천리길을 7일만에 달려와서 그냥 거저먹었어요. 그러나 강대한 대진국이 그렇게 망할 수가 없거든요. 전쟁다운 전쟁이 없어요. 전쟁 얘기가 별루 없어요. 그냥 호란성 들어가기 직전에 대진국 노상과 잠깐 전투를 벌였다 뭐 그 정도가 있어요. 그러니까 전쟁다운 전쟁도 없이 그냥 저절로 망했는데 이건 하늘에서 망하게 한 거예요. 이건 하늘에서 대진국을 망하게 하고 그래서 그 무리들 남은 사람들이 고려로 들어와서 이 간도수를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가 개벽할 때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통을 가지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까지고 오고 그나마 남북한으로 갈려 가지고 남쪽 여기에서 일이 되는데 어떤 그 간도수의 실현을 위해가지고 처참하게 천지에서 대진국을 멸망시켰다고 밖에는 해석이 안됩니다. 그런 강대한 나라가 소리도 없이 하루 아침에 망할 수가 없어요. 이게. 그래서 간도수를 실현하기 위해서 왔다. 이게 사부님의 해석입니다. 7. 역대 임금의 연호와 주요 통치 지명
목종 개원왈정력 의종 개원왈영덕 穆宗이 改元曰正曆이오 毅宗이 改元曰永德이오.
강종 개원왈주작 철종 개원왈태시 康宗이 改元曰朱雀이오 哲宗이 改元曰太始오.
성종 개원왈건흥 장종 개원왈함화 聖宗이 改元曰建興이오 莊宗이 改元曰咸和오.
순종 개원왈대정 명종 개원왈천복 順宗이 改元曰大定이오 明宗이 改元曰天福이오.
애제 개원왈청태 哀帝가 改元曰淸泰라. 목종이 개원왈 7번째 임금이었죠. 목종이 개원에서 연호를 정력이라고 했네요. 8대 의종은 연호를 개원해서 개원은 연호를 바꾼다. 이런 뜻이예요. 영덕이라 그랬구요. 9대 강종은 연호를 바꿔서 주작이라 그랬구요 10대 철종은 연호를 바꿔서 태시라고 그랬구요. 11대 그 유명한 성종께서는 연호를 바꿔서 건흥이라 그랬구요. 그다음 12대 장종은 개원해서 함화라고 그랬구요. 13대 순종은 연호를 바꿔서 대정이라 그랬구요. 14대 명정은 연호를 바꾸서 천복이라 그랬구요. 15대 애제는 연호를 바꿔서 청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발해 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연호가 나와요. 연호가 이게 맞습니다. 대진국 남경 남해부 본남옥저고국 大震國 南京 南海府는 本南沃沮古國이니
금해성현 시야 今海城縣이 是也오
서경 압록부 본 고리고국 금임황 西京 鴨綠府는 本 槀離古國이니 今臨潢이오
금서요하 즉고지서압록하야 今西遼河가 卽古之西鴨綠河也라
고 구지 안민현 재동 이기서 임황현 故로 舊志에 安民縣은 在東하고 而其西는 臨潢縣이니
임황 후 위요상경 임황부야 臨潢은 後에 爲遼上京 臨潢府也오
급고지서안평 시야 及古之西安平이 是也라.
대진국 남경 남해부는 대진국의 우리가 상경용천부 중경현덕부 서경압록부 남경남해부 동경동원부가 있다는데요. 남경남해부가 나왔네요. 남경 남해부는 남옥저고국이니 남옥저라는 것도 여러분이 기억을 해두시면 되겠구요. 남옥저의 옛 나라인데 지금의 해성현이 시야오, 지금의 그 요령성 심양에서 내려오면 요양시가 있고 요양에서 좀 더내려오면 바닷가 가까이 가서 해성시가 있어요. 해성시 요동반도의 윗부분입니다. 거기가 남경 남해부라는 거예요. 지금 모든 대한민국에 나오는 역사책 남경 남해부 함흥이라 그래요.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은 뭘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게 거기가 남옥저입니다. 우리가 동옥저, 서옥저, 남옥저, 북옥저가 있거든요. 그 남옥저가 바로 요동반도예요. 요동반도 서경압록부 는 본고리고국이니 본래 고리 원래 고구려를 고리라고 하거든요. 구자를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는데, 고구리라고 읽어야하는데 본래 고리의 옛 나라이니 지금의 임황땅입니다. 금서요하가 동요하, 서요하가 있잖습니까? 서요하가즉고지서압록하라 그랬잖아요. 서압록에서 대종상이 있다가 동쪽으로 달려갔잖아요. 바로 거기예요. 고로 구지에 안민현은 재동하고 그래서 안민현이 서압록하 동쪽에 있다는고 보는 거예요. 서압록하 근처에 있는 거예요. 아까 안민현에 <‘감로가 내려서 축하의식을 열어야겠습니다.’ 할 때 허락을 했다.> 그런 말이 있었는데 안민현이 거깁니다. 재동하고 이기서는 임황현이니 요의 상경임황부가 되었어요 요나라의 수도에요. 거기가 상경임황부가 되었어요. 내고지서안평이다, 옛날 고구려 시대 때 서암평이라는 데가 바로 여기다 정주는 의려국소도니 50분까지 그냥 계속하겠습니다. 8. 의려국 왕자(의라)미8일본에 건너가 오진(應神) 천황이 됨
정주 의려국소도 正州는 依慮國所都니
위선비 모용외소패 우박욕자재 爲鮮卑 慕容廆所敗하여 憂迫欲自裁라가
홀염아혼상미민 즉하왕불성호 忽念我魂尙未泯하니 則何往不成乎아
밀촉우자부라 유백랑산 密囑于子扶羅하고 踰白狼山하여
야도해구 종자 수천 夜渡海口하니 從者가 數千이라
수도 정왜인위왕 遂渡하여 定倭人爲王하니
자이위응삼신부명 사군신헌하의 自以爲應三神符命이라하고 使群臣獻賀儀하다.
이 정주는 말이예요. 의려국소도니 대진국오경에 서경 압록부가 있었는데요. 서경압록부에 속한 사주가 있었습니다. 고근처에 사주중의 하나가 정주인데요. 의려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의려국이라는 나라는 여러분들 부여 북부여기를 배울 때 맨 마지막에 AD 22년에 대무신왕이 쳐들어가니까 왕의 종제가 7월 달에 최종적으로 항복을 합니다. 항복을 해서 그 사람을 연나부에다가 봉해줘요. 그래서 AD22년에 그 연나부가 어디있나면, 개원 서북쪽인데요. 아까 개원 나왔었죠? 개원서북쪽에다 보내주는데 그것을 연나부부여라고 하고 서부여라고 한다. 그리고 그 종제의 등에 낙문이 있어서 낙시부여라한다. 그사람들이 그 뒤에 서쪽으로 백랑곡으로 갑니다. 백랑산을 지나서 백랑곡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데요. 거기에서 망명했던 연라부부여 사람들이 세웠던 나라가 의려국입니다. 의려국이 도읍했던 곳인데 선비족 우리 민족의 한 갈래 아닙니까? 모용외소패하여 모용외에게 패한다가 되있어요. 모용외는 전년의 건국자인 모용황의 아버지예요 모용황은 우리나라에도 쳐들어오잖아요. 고구려 285년입니다 285년에 모용외하고 의려국하고 전쟁을 해서 졌어요. 의려국 임금이 패한바가 되어서 우가 지면 핍박받을 것을 근심해서 욕자재, 자재는 자살을 하는 거예요. 1:30:00 자살을 하려다가 홀염 문득 생각하기를 아혼상미민하니 내 영혼이 아직 죽지 않았는데 어디를 가든 성공하지 못하겠느냐 밀촉우자부라하고 비밀스럽게 아들인 부라태자한테 부탁을 하구말이예요. ‘니가 나머지 백성을 잘 다스려라.’ 유백랑산 자기는 백랑산을 넘어서 야도해구 밤에 해구를 지나서 대릉하 하구입니다. 거기서 배를타고 왔는지 배를 타구서 대릉하 하류 바다와 접하는데 하구를 지나니 야도해구 밤에 해구를 지나니 밤에 해구는 대령하하류, 그러니까 아마 백랑산이 대릉하상류거든요. 대릉하상류부터 배를 타고 온 모양이예요. 배를 타고 대릉하를 지나서 발해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종자가 수천명이었어요. 따르는 자가 배탄김에 그길로 드디어 도자가 지날 도자예요 어딜 지났어요? 서해바다를 지나가지고 일본을 들어갔습니다. 수도하며 정왜인위왕하니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어요. 그리고 자이위 이위 여기다, 생각하다 이런뜻이예요. 스스로 여겼어요. 이응삼신부명 삼신상제님의 명에 부합되게 삼신 상제님의 명에 부합된 것에 응했다. 삼신에 응해서 천명에 부합한 것이다. 응삼신 삼신에 응해서 그 명에 부합된 행동을 한거다.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 삼신 상제님의 뜻이다. 이렇게 여기고서 사군신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헌하의라 어떤 축하의 의식을 들이게 하니라 이사람이 일본의 15대 천황인 응신천황입니다. 일본은 만세일계 초대 신무 천황부터 무슨 저기 지금까지 그냥 신무천황부터 전부 혈통으로만 내려왔다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구요. 수없이 고구려계에서 천황을 하다가 백제계에서 하다가 신라계에서 하다가 부여계에서 하다가 수없이 바뀌었지 만세일계가 아닙니다. 벌써 이 사람이 15대 응신천황인데 어떻게 이전에 천황들하고 혈통이 같습니까?
혹운 의려왕 위선비소패 도입해이불환 或云호대 〈依慮王이 爲鮮卑所敗하여 逃入海而不還하니
자제 주보북옥저 명연 자의라 입 子弟가 走保北沃沮라가 明年에 子依羅가 立하다
자후 모용외 우부침략국인 自後로 慕容廆가 又復侵掠國人하니
의라 솔중수천 월해 수정왜인위왕 依羅가 率衆數千하고 越海하여 遂定倭人爲王이라〉하다.
흑운 이런 의설이 있어요. 혹자는 이르기를 의려왕이 의려국의 임금이 위선비소패하여 285년에게 모용외에게 전쟁을 해가지고 패한바가 되어서 도입해이 바다로 들어가서 도망해서 바다에 들어가서 불안하니 돌아오지 아니하니 자제가 의려왕의 아들과 동생이 주보북옥저라가, 북옥저로 도망을 갔다가 여기서 북옥저보다는 서옥저가 맞습니다. 중국사람들은 북옥저라고 쓰는데 이건 서옥전데 서옥저는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부근입니다. 서옥저로 갔다가 명년에 명년이면 286년이 되겠네요. 명년에 자의라가 입하다 아들인 의라가 임금이 되었다. 자후로 그런 뒤에도 여기는 앞에는 부라가 여기는 의라라고 되어있어요. 임금이 그뒤로 모용외가 우부침략국인하니 또다시 나라사람들을 침략하니 의라가 솔중수천하고 무리수천명을 거느리고서 월해하야 바다를 건너서 수정왜인위왕이라 왜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앞에는 의려국의 침입을 받았던 임금이라 그랬고 뒤에서는 그 아들 그 아들이 서쪽으로 도망갔다가 일본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9. 당시 일본의 국가 구성과 한국과의 관계
일본 구유이국 역왈이세 여왜동린 日本에 舊有伊國하니 亦曰伊勢라 與倭同隣이오
이도국 재축자 역즉일향국야 伊都國은 在筑紫하니 亦卽日向國也라
자시이동 속어왜 기남동 속어안라 自是以東은 屬於倭하고 其南東은 屬於安羅하니
안라 본홀본인야 安羅는 本忽本人也라.
북유아소산 안라 후 입임나 北有阿蘇山하고 安羅는 後에 入任那하니
여고구려 조이정친 與高句麗로 早已定親이오
말로국지남 왈대우국 유시라군 末盧國之南 曰大隅國이니 有始羅郡이오
본남옥저인소취 本南沃沮人所聚라.
1:34:43 일본에 구유이국하니 일본에 옛날에 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어요. 일본은 수십개의 나라가 있었거든요. 그 중에서 이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또한 이세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일본 크게 네 가지 섬으로 되어 있잖아요. 제일 서쪽에 있는 구죽 규수섬에 동쪽에 삼중현이 있는데 미해현에 있었던 나라입니다. 이세라고도 했다. 이국을 여왜로 왜와 더불어 동민했다. 왜라는 것은 혼슈에 있는 본주의 서쪽에 있는 거기를 왜라고 그랬어요 왜 왜와 더불어 이웃했다. 이도국은 재축자한다. 축자는 후쿠오카입니다. 이도국은 재축자하니 후쿠오카에 있었으니 후쿠오카 남쪽이 지금도 축자라는 명칭을 씁니다. 역즉일향국야라 거기를 일향국이라고도 했다 이말이예요. 자시이동은 이로부터 동쪽은 속어왜하고 왜에 속하고 그럼 서쪽은 어디에 속해요? 그건 다 우리나라에 속했다 이거예요. 속어동하고 속어왜 하고 기동남은 남쪽과 동쪽은 속어안라하니 안라국에 속했는데요. 안라는 본홀본인야라, 홀본인은 졸본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고구려 사람들이 가서 세운 나라가 안라국입니다. 홀본은 졸본이고 지금의 그 흑룍강성 유부나시라고 말했죠. 고구려가 시작한 곳입니다. 그래서 안라국은 고구려 사람들이 가서 세운 나라다. 마무리 시간이 다 되어가지고 더 들어 갈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그래도 우리민족의 환국 배달국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를 계승해서 만주의 대영토를 차지하고 우리민족의 고유한 종교와 사상과 전통을 순수하게 계승해서 뿌리를 가지고 있었던 대진국의 역사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숨겨졌던 베일이 많이 밝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