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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제 4 구간(초당골 ~ 구절재)
1. 산행일자 : 2008년 6월 29(일)
2. 산 행 지 : 묵방산, 왕자산
3. 참 가 자 : 강동규, 강영재, 박기양, 박봉하, 설경자, 윤희원, 이용준(7명)
4. 날 씨 : 비---개임---비---개임
5. 총 산행 거리 및 소요 시간 : 15.1km, 7시간 40분 정도(초당골 ~ 구절재)
6. 구간별 산행 거리
초당골(210m,27번국도)--1.0km--만경.동진강수분점(350m)--1.3km--묵방산(538m)--2.1km--가는정이(209m)--3.2km--△성옥산(388.5m)--2.8km--소리기재(233m)--△왕자산(444.4m)--4.7km--구절재 (230m)
7. 산행 일정
① 기상(05:00) ∼ 식사(05:30/06:20) ∼ 초당골/운암삼거리(06:30)
② 초당골/운암삼거리(06:30) → 분기점(06:50) → 묵방산(07:25/07:35) → 여우치(08:00)283.6봉 삼각점(08:10)→가는정이(08:25/08:35) → 성옥산(09:40/09:50) → 방성골 차도(10:05) → 방성골(10:30/10:40) → 분기봉/묘(11:20/점심/12:00) → 왕자산(12:20) → 예덕리고개(12:50/13:00) → 460봉(13:25) → 420봉/돌무더기(13:55) → 구절재(14:10)
③ 구절재(14:30) ∼ 정읍(17:00/점심/17:50) ∼ 태인IC ∼ 호남, 천안논산간, 경부고속 ∼ 수원(21:00)
8. 산 행 기
[1] 산 행 전
어제 산행이 고단했고 한우마을에서 뒤풀이가 진했던 모양이다. 05 : 00에 기상을 해서 산행 준비를 해야 하는데 한 시간이나 더디 일어났다.
젖은 옷은 뭉쳐서 비닐봉지에 넣고 등산화도 물기가 그대로 남아 여벌로 준비해 온 것으로 갈아 신었다. 배낭을 챙겨 밖으로 나오니 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다. 오늘도 雨中山行을 해야 할 모양이다. 기상 예보로는 오전 중 간간히 비가 오다 그친다고 하는데 --- 오늘은 이 상태로 비가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모두 날씨 걱정을 하며 아침 식사장소인『구암산장(전북 임실군 운암면 입석리 392 / ☎ 063-643-0349)』으로 이동을 했다. 구암산장에 도착하니 念願은 사라지고 걱정한데로 굵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우선 산장 아주머니가 마련해 준 아침식사를 하고 풋고추와 아침 먹었을 때 饌으로 도시락을 준비했다.
어제 온종일 우중 산행을 한 탓도 있고 몸이 고단한데다 산행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비를 대하고 보니 산행할 念이 없다. 박교장, 윤사장님 오늘은 포기하지 않을라나? 핑계거리가 있으면 오늘 산행은 그만 두어도 되는데 --- 그런데 오늘은 그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2] 井邑 이야기
어제까지는 임실과 완주군에 위치한 산을 오르내렸고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초당골』부터 『내장산』까지는 주로 井邑市에 위치한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을 지나가는 마루금을 이어가게 된다.
<<<정읍은 어떤 곳?>>>
전라북도 남부에 자리 잡은 정읍시는 동쪽은 임실 완주, 서쪽은 부안 고창, 남쪽은 순창 장성에 접하며 북쪽은 김제시와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묵방산, 성옥산, 왕자산, 고당산, 내장산,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동남쪽의 산지를 이루며 섬진강과 동진강의 분수계가 되는 곳이다.
정읍은 어떤 특징을 지닌 곳인가? 정읍시청 문화공보담당관실에 근무하는 「조애숙」님이 ‘기획연재 문화도시를 찾아서 40 「정읍시」’편에서 유서깊은 문화와 역사의‘샘고을’이라 소개를 하고 있다.
정읍(井邑)은 우물 정(井) 고을 읍(邑), 즉 ‘샘 고을’이다. 곳곳에 물이 많을 뿐더러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정읍’이라는 지명은 백제시대 정촌현(井村縣)에서 유래한다. 정촌현의 고을 터가 현재의 과교동 정해(井海)마을에 있어서 정촌, 정읍으로 부르게 됐다. 정해는 새암 바다, 마을 가운데에 정자형(井)의 큰 새암이 있어 붙여졌다.
지명유래에서 보듯 옛부터 사람들이 물을 찾아 살았던 것을 생각할 때, 정읍은 태초부터 삶의 고장이었다. 풍요로운 들녘을 바탕으로 농경문화가 발달했고 이는 또한 문화와 예술의 기름진 토양이 되었다. 유교와 불교 등 다양한 문화를 꽃피웠을 뿐만 아니라 우도농악이 발원, 성했으며 정극인 등 쟁쟁한 문사들의 문학적 텃밭이 되었다.
정읍은 곧 내장산과 정읍사, 갑오동학혁명의 요람지이자 국보 1점과 보물 8점, 사적 3점, 중요민속자료 1개소, 지방유형문화재 15점, 지방기념물 16점, 문화재 자료 11점 등 62개 유형의 문화재 및 기념물들이 산재해 있는 유서 깊은 문화와 역사의 고장이다.
정읍은 그 유명한 단풍명소 내장산의 고장이다. 정읍지역 최대의 문화관광자원인 내장산은 남쪽으로 이어진 백양사를 포함, 단풍 외에도 봄에는 산꽃, 여름에는 녹음,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다워 사계절 관광지로도 손꼽힌다.
정읍을 찾는 이들은 한결같이 정감이 느껴진다고 한다. 모질지 못해 순박하고 따스함이 넘친다고도 한다. 이는 머언 백제시대, 한 촌부의 남편에 대한 불꽃같은 사랑(井邑詞)이 정읍인들의 가슴에 따뜻하게 살아 있음이다. 1300년 전, 장사 나간 남편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가슴 태우던 아낙은 바위 벼랑에 올라가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주문처럼 외웠던 ‘한숨’은 현재 백제시대 유일의 노래로 악학궤범에 전해져 오며 고대문학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리고 기다림에 지친 퍼런 멍울을 안고 마침내 돌이 되었다는 그녀의 지극한 사랑은, 허다한 세월이 비켜간 지금 아름다운 전설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정읍을 평온하고 정감 있는 고장으로만 단언해서는 안 된다. 수천의 농민들이 묵묵히 땅을 일구며 불의와 폭정에 맞서 혁명의식을 키운 붉은‘황토의 땅’이기도 하다. 1893년 11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만들고 거사를 결의했던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농민군의 최대 승전지인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이곳 황토재에는 1963년 세운 혁명기념탑이 있고 탑 동남쪽 야산 기슭에 황토현적지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격전 현장을 생생하게 담은 기록화와 전봉준 장군 영정, 병기와 사료 등 87종 1백4점의 자료들이 전시돼 있고 전봉준 장군, 김개남, 손화중과 농민군 참전제위 위패를 모시고 있는 구민사가 있다. 기념관을 중심으로 인근에 혁명 전까지 살았던 전봉준장군 생가, 농민봉기의 첫 횃불을 밝힌 이평면 두지리 말목장터,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만석보와 배들평야가 남아 있어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 下略 ---
그리고 「신동일」님은 『井邑의 讚歌』를 불렀다.
태고적부터 山川이 秀麗하고 인걸이 탄생된 고을
국악과 문학 묵화에 대가들이 배출된 藝의 고장
걸출한 선비와 학자들이 2세 교육에 진력하는 禮節의 鄕里
義氣 또한 곧아서 불의에 항거한 동학란의 발상지요
정읍 황토현에는 의로운 선열들의 피 자국이 선하고
고대 詩歌 井邑詞에는 한국적 女心이 잔잔하다.
내장산 봉봉마다 연기인 듯 피어오르는 雲霧가 강물처럼 출렁이고
철따라 옷자락이 색색이니
봄이면 연두 빛의 산 빛이 싱그럽고
여름이면 녹음 드리워 山客들을 붙잡아 길마저 잃고
가을이면 단풍으로 주루룩 소매깃을 적시는데
겨울이면 설경에 넋을 앗아가네.
서래봉의 산 그림자가 그늘진 사이로
스물 스물 내려앉은 뒷자락에는
야생화들의 품평회가 향그럽고
얼기설기 잡목사이로 안개죽음 같은 고요 속에
텅 빈 혼자의 자유가 아늑하고 평화롭다.
골 골 사이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山水의 속삭임
풀벌레들의 합창소리에
아슬한 새벽잠에서 갓 깨어난 단풍잎
단풍잎과 잎새를 밟고 가는 서늘한 실바람
상큼한 아침 안개비에 한없이 설레이다가
고개 숙인 들국화의 香마저 그윽하다.
외로운 모습에서 겹쳐오는 그리운 얼굴들
먼 길 떠나간 그 사람인가
보고 또 보는 그리움들이
가슴 한 구석에 내려앉는다.
이들의 소개 내용만으로도 정읍의 모습이 머릿속에 꽉 그려진다. 그리고 그 현장이 전하는 이야기를 직접 눈, 귀로 보고 듣고 싶어 빨리 산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해진다.
[3] 『초당골(운암삼거리)』에서 출발
아침식사 후 차에 올라 옥정호 순환도로를 따라 오늘 산행의 출발지 『초당골(운암삼거리)』로 이동을 했다. 어부집 앞에 주차를 시키고 雨中 山行 채비를 차려 출발을 한다.
어부집에서 강진방면으로 조금 내려가 둔덕을 오르니 묘가 나오고 어김없이 잡목과 억새가 뒤엉켜 산행 출발부터 힘들게 만든다.
[4] 필설로 외침을 막았다는 묵방산(墨防山538m)
완만한 능선을 20여분 오르니 전북산사랑회에서 세운 능선 분기 이정표가 있다. 「분기점 350m / 묵방산 1.3km, 모악산 15.8km, 초당골 1.0km」
이곳에서 우측으로 15. 8km를 가면『모악산』으로 만경, 동진, 섬진강이 갈라지는 分水点이 되는 곳이다.
잠시 숨을 돌리며 우의도 벗어 배낭에 넣고 좌측 내림 길로 들어섰다. 10분여를 내려오니 성황당 흔적이 있는 안부가 나오고 지금까지 왔던 완만한 오르내림과는 다르게 급경사를 이룬 길로 이어진다.
비는 소강상태에 들어갔지만 濕度와 몸의 熱氣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도 없고 열탕에라도 들어간 듯 후끈거린다. 오늘 총 산행 거리 15.1km 중 이제 겨우 2km 남짓 산행을 했는데 다리에 힘이 들고 몸이 나른한 것을 보면 목적지(구절재)까지 완주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제 산행으로 주독이 빠진 때문인지 오늘은 몸 상태는 훨씬 좋아진 것 같다.
오르다 멈추기를 두어 번, 힘들게 봉 하나를 올랐다. 묵방산 직전 봉이다. 오름의 위세가 늦추어 진다 싶었는데 다시 급경사 오름길로 이어진다. 좀 전의 산봉을 힘들게 올랐는데 또 급경사 오름봉 --- . 어쨌든 이름이 붙은 산(묵방산)인데 정상을 만만히 내줄리 없을 것이다. 오르다 산봉을 올려다봐도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전위봉에서 7, 8분을 빡시게 오른 후에야 보자기만큼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3, 4분 더 다리에 힘을 주고 스틱에 의지해 봉을 오른 곳이 오늘 산행의 첫 고비이자 최고봉이요 필설로 외침을 막았다는 뜻을 지닌 묵방산(墨防山538m) 에 올랐다.
묵방산(530.0m 墨房山)은 완주군 소양면 화심리와 상관면 의암리에 위치해 있는 산이다. 화심리(花心里)는 본래 전주군 (1935. 10월 이후는 완주군) 소양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화심리 구진리 묵방리 유상리 약암리를 병합하여 화심리라 했다.
元花心은 法定 異名과 구분하기 위하여 ‘원(元)’을 덧붙인 것인데 화심의 부분명은 묵방리(墨房里. 먹방이)다. 風水說에 ‘작약화예혈’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묵방리는 ‘먹방’이본 이름인데 이 마을이 묵방산 밑이므로 산 이름에서 마을 이름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하고 또 마을에 먹을 만드는 먹방이 있어 마을 이름이 먼저 생기고 그에 따라 산 이름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도 한다.
별 특징이 없는 산이다. 힘들게 오른 산이라 젖은 땅인데도 낙엽에 텁석 주저앉아 땀을 닦고 물병을 꺼내 정신없이 목을 축이니 그제야 정신이 난다. 바로 뒤를 따라 오르던 설부장도 어제보다 더 힘들고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드는 산이라며 그대로 배낭을 내리고 땅에 주저 않는다. 꾀나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5] 여우치 마을
늘 그렇듯이 휴식이래야 길어야 10분, 간식에 물 한 모금 마시면 끝이다. 묵방산을 뒤로하고 갈림길, 묘 1기를 지나고 다시 Y자 갈림 길에서 좌측 내림 길로 들어섰다. 오름이 가파르니 내림도 급경사다. 젖은 땅이라 아차 하면 미끄럼이다. 다리와 스틱에 잔뜩 힘을 주고 20여분을 내려오니 대나무 숲이 나온다. 『여우치마을』에 도착을 한 모양이다. 대나무 숲을 지나 이끼 낀 廢農家 담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시멘트 도로 가에 있는 농가에 도착을 했다. 먼저 도착한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우치』는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宗山里)에 속해 있는 마을이다. 종산리는 평야에 자리 잡은 전형적인 농촌마을로 「도원천」이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송장골, 여우치, 원전, 팽나무정이」가 있다. 송장골은 마을을 宋氏가 개척하였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여우치』는 마을에 臥牛穴의 墓地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원전은 마을에 火田民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팽나무정이는 마을에 팽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6] 『가는정이 고개(정읍시 산외면)』가는 길
농가 앞 도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 시멘트 도로가 가로지르는 사거리(여우치)를 지나고 정자나무가 있는 곳을 벗어나 좀 더 진행하니 넓게 잔디밭에 조성된 光山金氏 納骨墓가 나온다. 납골묘 둔덕을 따라 숲속으로 접어들어 잠시 완만한 길을 따라 오르니 「갈담 236-1984 재설」이라 표시된 삼각점이 있다. 283.6봉이다.
286.3봉을 뒤로하고 약 3, 4분 정도를 진행하면 안부 삼거리가 나오고 이곳에서 표지기를 따라 잠시 봉우리 하나를 올랐다 5, 6분을 내려가니 널빤지 다리를 건너면 바로 2차선 표장도로(749번 지방도로)와 만나게 된다. 우측으로「정읍시 산외면」도로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도로 건너에는 『가는정』버스 정류소가 있다. 그리고 「정읍시 산외면」도로 표지판 뒤로는 「하운암 산장」표지석과 건물이, 그 맞은편은 「옥정호 산장」이 있다. 『가는정이 고개(정읍시 산외면)』는 임실과 정읍을 나누는 고개가 된다.
[7] 동진강과 섬진강의 水界 성옥산(聖玉山)
박기양교장, 무릎 이상이 온 모양이다. 더 이상 산행은 무리가 될 것 같다며 주차를 해 둔 초당리로 돌아가겠다고 한다.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생각하고 정읍시 산외면」도로 표지판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하고 「옥정호 산장」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성옥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500여m를 쉬엄쉬엄 오르니 삼거리가 나오고 마지막 民家를 대하는데 어제 내린 비를 맞고 굵은 살구가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하나를 집어 깨무니 혀끝으로 톡 쏘는 신맛이 감돌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실한 것 몇 개만 주어 가면 간식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옛날에 비해 먹거리가 풍부해진 탓인지, 갈 길이 바빠서인가? 아니면 落果이기 때문인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다.
민가를 지나니 잘 정돈된 雙墓가 나타난다. 雙墓를 뒤로 돌아 숲으로 들어섰다. 묵방산을 오를 때처럼 높고 가파른 산은 없지만 2, 300m 거리를 두고 峰 오르내림이 거듭된다.
몇 개의 봉을 오르내렸는지 뚜렷한 기억은 없지만 잡목과 갈대, 그리고 소나무 숲을 넘나들며 7, 8개의 산봉을 넘은 것 같다. 간간히 숲 사이로 보이는 안개 낀 옥정호가 가끔은 거듭되는 오르내림의 지루함을 들어주고 산행의 운치를 더해주는 것이 위안이 된다고나 할까?
그렇게 능선 오르내림을 한 시간 여를 진행하여 봉을 오르니 빨간 글씨의 성옥산 표지판이 눈에 띈다. 온통 잡목과 키보다 높게 자란 억새가 엉켜 정글을 연상케 한다.
성옥산(聖玉山, 387.9m : 전북 정읍시 산외면 목욕리(木浴里 : 목욕소는 마을에 물이 맑고 좋아서 선녀들이 목욕을 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에 있는 산으로 이렇다 할 자연 경관이나 특징은 없는 산이다.
이곳은 옥정호를 사이에 두고 정읍시 산외면과 임실군 운암면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고 동시에 동진강과 섬진강의 水界가 되는 곳이라고 한다.
[8]소리개재(= 마루재)
성옥산 정상을 뒤로하고 내림 길로 들어섰다. 약 7분여를 내려오니 「파평윤씨묘」가 나오고 다시 여러 기의 墓地群이 눈에 띈다. 묘지군을 지나면 넓은 밭이 있고 그 아래로 포장도로가 산모퉁이를 돌아 나간다. 선두로 가는 대장은 밭을 통과하여 3, 400m 전방 도로 근방을 가고 있다. 잠시 밭을 가로질러 가다 수레길로 나와 2차선 포장도로 삼거리에 내려섰다.
이곳(소리개재, 광성골 도로)은 산외면 종산리와 산내면 두월리를 잇는 715번 지방도로가 호남정맥의 주 능선을 가로지르는 곳으로 현지 주민들은 이곳을 『마루재』라 부른다.
시계를 보니 11 : 30분을 넘겼다. 시간으로 보아 점심시간이 임박했다. 도로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자 했으나 마땅치 않아 도로 절개지를 올라 묘 1기를 지나 20여m를 더 진행하여 깔끔하게 손질이 된 묘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윤사장은 식욕이 없는지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아침 구암산장 아주머니가 마련해 준 도시락과 찬을 꺼내 놓는다. 공동으로 마련한 찬이라 가지각색일리 없고 입맛에 맞는 찬을 고를 처지도 못된다. 궁한 처지에 찬밥 더운밥을 따지며 맛의 有無를 가릴 형편인가. 미리 준비해 온 된장에 풋고추를 곁들이니 나름대로 盛饌이다.
조촐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하는데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비가 쏟아진다. 배낭을 풀어 우의를 꺼내 입고 오후 산행을 위해 출발을 서둘렀다.
[9] 「방성골」에서
이제 소리기재(마루재)를 지나고 나면 『옥정호』와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묘지를 출발하여 임도를 가다보니 벌목지대가 나오고 잡목과 풀이 우거져 길을 찾아가는 것도 어렵다. 2, 3분 마루금을 벗어나 진행하다 간신히 길을 찾아 얼마간 진행을 하니 아름드리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는 안부 사거리를 지난다. 나무 주변에는 쓰레기가 마구 버려져 있는데 지형으로 보아 성황당 자리가 아닌가 싶다.
성황당 안부를 지나 숲을 빠져 나오면 임도를 만나게 되는데 낡은 마루금 표지기가 좌측으로 매달려 있다. 산악대장의 인도에 따라 숲 속 길로 진행하기를 7, 8분, Y자 갈림길을 만났는데 역시 오래된 표지기가 갈림길 중간 지점에 매달려 있다. 선두로 가고 있는 대장, 길을 잘못 가고 있음을 인지했는지 잠시 대기를 하라고 한다. 비도 그쳤고 우의가 찜통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벗어 배낭에 넣고 물도 마시며 잠시 쉼을 청해본다. 대기 시간이 길어질수록 걱정이 된다. 대장의 전갈이 있기를 기다리기 12, 3분, 숲을 빠져나와 임도를 만났던 곳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던 길을 되돌아 가보니 대장, 마을 길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마루금을 찾고 있다. 밭 가장자리로 난 農路를 따라 가는데 밭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왕자산 갈려면 되돌아 저쪽 산 밑으로 가야된다며 목청을 높인다. 아마도 선행자들도 이곳에서 길을 찾아 헤매던 모습을 자주 목격했던 것 같다. 가던 길을 다시 되돌려 사거리 도착해 보니 약 20m 거리에 당산나무 한 그루가 있고 禁 줄이 매어져 있다.
강부장으로 하여금 밭을 지나 건너 산 쪽에서 마루금 표지기를 찾아보게 하고 잠시 대기. 강부장, 부르는 소리 들린다. 마루금 표지기를 찾은 모양이다.
마루금을 찾느라 『방성골』에서 30여 분을 헤매 다녔다. 선행자가 잘못 달아 놓은 표지기 하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고생한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기를 달아 後行者들의 길 안내를 돕는 것도 좋지만 정확한 길 안내가 되어야 할 것 같다.
[10] 444.4m 『왕자봉』 오름 길
어쨌거나 마루금을 찾아 다행이다.
길은 잡목 수림을 이룬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잠시, 급경사 오름길로 변한다. 경사각이 점점 심해지며 마치 直壁을 오르는 기분이다. 묵방산 오름길을 그대로 옮겨 놓은 모양이다. 오전만 해도 대장 뒤를 바짝 따라가던 강사장도 힘이 消盡했는지 걸음이 더뎌진다.
급경사를 약 20여분을 올라보니 넓은 공터에 묘 1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냥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곳에 묘를 쓴 후손의 정성이 그저 놀랍다.
급히 배낭을 내리고 물부터 찾아 마셨다.
『왕자봉』인가?
『왕자봉』은 다음 봉이고 이곳은 『공주봉(437봉)』이란다.(강부장의 弄 말) 묵묵히 산봉을 오르내리던 설부장도 어지간히 힘이 들었던지 아니면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했던 왕자봉이 뒤에 버티고 있다는데 맥이 빠졌는지 “정맥산행은 자신이 없다.”며 배낭을 급히 내리고 땅에 주저앉는다.
잠시 휴식.
이제 방성골을 지나면서 보았던 뾰족산, 『왕자봉』만 오르면 오늘 산행의 고비를 넘긴다 생각하고 다시 출발을 한다.
내리막 길--->묘--->내리막 길--->묘--->안부사거리를 지나면 빡신 오름길로 이어진다. 드디어 해발 444.4m『왕자산』 정상에 올랐다. 붉은 글씨로 쓴 『왕자봉』 표지판을 나무에 매달아 놓았고 삼각점((갈담 453-1991 복구)과 묘 1기가 자리 잡고 있다.
<왕자봉, 444.4m>은 어떤 산인가?
정읍시 산외면 예덕리 배례동은 풍수지리에 의한 지명으로 마을 背山이 왕좌봉이기 때문에 지명이 배례동으로 불리어 지게 되었습니다. 배례동의 왕좌봉을 중심으로 주변 마을인 홍문, 원덕, 방성동, 목욕 등의 지명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왕좌봉 주변의 산들도 촛대봉, 육조봉, 성주봉, 노적봉, 먹방산, 장군봉, 구장산, 국사봉 등으로 풍수지리상 궁궐 터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의 지형입니다. ---<중략>---
풍수지리에 따르면 왕좌봉은 백두산의 정기가 태백과 소백으로 뻗어 내려 호남정맥으로 이어지고 장군봉 준령이 만드는 대혈의 형국으로 군신봉조 사십구대장산의 천하명당이라 전해오는 곳으로 조선 6대 명당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왕좌봉의 시작은 홍문마을 모정 앞 문바위부터 시작되며 문바위를 궁궐 입구의 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홍문마을 뒷산이 무지등, 하례 마을 앞산을 큰 왕좌봉, 하례마을 뒷산을 작은 왕좌봉, 상례마을 앞산을 촛대봉으로 부르고 있으며 배례동 앞들은 등서(謄書- 군왕 아래서 지시를 받고 글을 쓰는 곳)들 이라 부릅니다.
상례마을 뒷산이 육조봉으로 조선 조정의 육조를 나타내며 왕좌봉을 중심으로 네 개의 마을이 있는데 왕좌봉 앞은 홍문,. 뒤는 신배(산외면 오공리), 동쪽은 사근(사교), 서쪽은 배례동입니다.
왕좌봉 주위에는 팔만 개의 코고 작은 산봉우리가 왕좌봉을 중심으로 나열하여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며 한가운데 왕좌봉이 자리 잡고 있어 군왕이 태어날 자리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좌봉에 묘를 쓴 뒤 왕자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9대덕지(九代德志- 9대를 덕을 쌓고 좋은 일만함)을 하여야만 왕자가 태어난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배례동이 남원의 운봉 다음 간다는 곳으로 일컬어 졌으며 지형이 높아 칠보에서 이십리, 산외에서 이십리 길을 걸어 올라서야만 배례동에 당도할 수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곳으로 배례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산내에 좋은 명당도 있으니 산내에 큰 인물이 나오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명당을 차지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구대덕지’를 해야 한다니 열심히 노력하고 선행을 많이 해야 겠지요.
2007년 05월 05일 「정읍통문(www.tongmun.net/news/read.php?idxno=7417)」에 수록된 글을 그대로 옮겨 보았다.
아마도 기사의 내용대로 왕자봉 정상에 묘를 쓴 주인공도 이런 풍수지리를 믿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명당을 얻고서 「구대덕지」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매사가 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연이어 가파른 산봉을 두 번이나 오르내린 탓으로 진이 빠지고 왕자봉이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라 생각하고 넉넉한 휴식을 가져본다.
[11] 「산내면 예덕리(禮德里) 아래보리밭」
다시 출발. 왕자봉 정상에서 10여분쯤 내려오니 안부에 닫게 되고 잠시 더 진행하니 아름드리 정자나무 있는 곳에 도착을 한다. 지도상에 표시된 「산내면 예덕리(禮德里) 아래보리밭」마을이 위치한 곳이다.
『예덕리(禮德里)』는 전북 정읍시 산내면에 있는 어름봉과 왕자산 사이 골짜기에 자리 잡은 산간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보리밭, 구사교, 원덕리가 있다. 보리밧은 예덕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위, 가운데, 아래의 세 마을로 나뉘어졌다. 아래보리밧은 보리밧 아래쪽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구사교는 옛날에 마을에 사근다리가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원덕리는 마을에 원집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정자나무를 지나 다소 가파른 봉우리를 올랐다. 급하게 내림길로 이어진다. 「경주박공, 광산김씨」묘에 도착해 보니 아래로 마을(무래실골)이 눈에 들어온다. 구절재가 저 어디 쯤 되는가?
묘지지대---> 밭--->소나무 숲을 지나 잠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다 좌측 사면으로 비켜나간다. 사면길을 5분여 진행하다 왕자산을 오르는 것 못지않게 가파른 봉을 오른다. 능선 분기봉으로『460봉』에 오른 것 같다. 왕자산 정상에서 내려가면 오늘 산행이 끝나는 것으로 마음을 놓은 것이 잘못이다. 가파른 산 오름의 반복으로 기운이 빠지고 지루하고 지치게 만든다.
[12] 『소군실 마을』
능선봉에 올랐다. 능선이 분기하는 곳으로 멀리 골짜기에 자리 잡은 마을이 보인다. 준비해 온 자료를 보니『소군실 마을』쯤 되는 것 같다.
『소군실 마을』은 정읍시 산내면 능교리(菱橋里)에 포함된 자연마을이다. 능교리의 자연마을에는 「구복리, 대능, 문수동, 봉무동, 사척굴, 새보안, 소군실, 허궁실, 화개동」이 있는데 「구복리」는 마을 옆에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 같은 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문수동」은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봉무동」은 마을 뒷산 봉우리가 武士形으로 생겼다 하여, 「사척굴」은 마을에서 예전에 사기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새보안」은 龍같이 생긴 바위 앞에 새로 보(洑)를 만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소군실』은 마을이 군사를 불러들인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화개동」은 마을에 산불이 잦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3] 420봉
능선이 분기하는 곳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내려가야 하는데 수종 개량을 하기 위함인지 벌목된 싱싱한 소나무 가지가 여기 저기 너부러져 있어 이리저리 나뭇가지를 헤치며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 번거롭고 짜증스럽게 만든다. 간신히 벌목지를 벗어나 안부(소군실 안부?)에 도착했다.
이제 오름봉이 끝났다 싶어 앞을 보니 또 하나의 가파른 봉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다리 힘이 쭉 ~ ~ ~ 빠진다. 산행 시간을 어림짐작 해 보니 정말 마지막 오름 봉이 되는 것 같다. 약 15분여를 다리에 힘을 불끈 주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마지막 산봉을 오르는데 힘을 모아본다. 돌무더기와 작은 공터를 이룬 420봉 정상 도착. 오르내림이 그 어느 때 보다 잦고 힘들었던 호남정맥 4구간 우중 산행을 끝맺게 된다. ‘힘들다. 힘들다.’하면서도 정맥 한 구간을 완주 한 것이 뿌듯하다.
[14] 구절재
420봉을 내려와 작은 봉 하나를 더 넘으니 2차선 포장도로가 보인다. 『구절재』다. 16 : 50분경 구절재에 발을 내려놓았다. 박교장, 고개 마루까지 마중을 나와 반긴다.
구절재는 정읍시 산내면 산외마을과 칠보면을 이어주는 고개다. 구절재 도로변에는 돌로 만든 天下大將軍과 地下女將軍 그리고 산내면 / 칠보면 도로표지판과 정읍시 산내면 표지석을 세워 놓았다.
박교장, 먼저 도착을 한 산악대장은 구절재 아래에 있는 내(川)에서 몸을 씻고 있다며 개천으로 내려가 비와 땀에 젖은 몸을 씻기를 권한다. 개천이 지척에 있는 줄 알고 도로를 따라 내려와도 개천이 보이지 않는다. 『석탄사』4km 표지석도 지나고 5분여를 더 내려가 마을 입구(아랫허궁실)에 다다라서야 내를 만날 수 있었다. 어제와 오늘 내린 비로 냇물이 많이 불어 있다.
다리에 배낭을 내리고 냇물에 들어가 몸을 닦으려 하는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던 박교장, 차가 수로에 빠져 움직일 수가 없으니 차를 밀어주어야 한단다.
몸 씻기를 포기하고 차가 바진 곳에를 가보니 뒷바퀴는 수로에 빠져 있고 차 바닥이 시멘트 포장도로에 닿아 움직이지를 않는다. 사람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 지나가는 마을 청년에게 부탁하여 경운기를 이용하여 차를 빼 내고 ---
[15] 산행 마무리
산행 뒤풀이 겸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산외면 한우마을로 향했다. 주차 공간이 넓은 식당에 주차를 시키고 수돗물을 이용하여 얼굴을 닦고 옷을 갈아입으니 한결 몸이 가볍다.
어제 먹었던 주독이 오늘 산행의 땀으로 다 빠져 나왔는지 못 마실 것 같던 이스리도 술술 넘어간다. 한 순배, 두 순배 잔을 돌리다보니 취기가 올라 흥이 점점 진해졌지만 또 집으로 갈 길이 멀어 아쉬움을 남기고 일어선다.
2008.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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