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등 광주 5.18 폭동 주동자들이 폭동 초창기에 세무소와 방송국에 불을 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어디선가 읽은 자료에 의하면 시위대는 유조차를 이용해 불을 질렀으며, 만약 계엄군이 빨리 구조작업을 하지 않았으면 그 안에 있던 광주 시민들이 타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요. 더욱이 아직 군경 사망자들만 있었지 시민군 사망자나 부상자는 없었던 시점에 방송국들에 불을 지른 동기가 궁금해집니다.
아마, 그 이유는 일본의 조총련계 한민전과 관계하여 생각하여야 할 듯 싶습니다. 한민전은 배후에서 광주사태를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광주사태 당시 폭도들이 방송국들을 불태운 후에 북한 방송을 듣는 이들이 있었는데, 광주 상황이 북한에서 실시간 방송되고 있어서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외국인 기자 신분으로 들어와 있던 한민전 소행으로 추정됩니다.
요즘 방송국에서 짜집기 방송하며, 대학가 선동 자료로 이용된 비디오는 한국 방송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김일성 똘마니 단체이며, 김대중이 초대 회장이었던 한민전에서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특수 장비를 가지고 있었으며, 군경과 민간 사이에 유혈 충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촬영 대기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의도가 수상합니다. 요즘 모 방송사가 방영하는 5.18 자료는 그러고 보면 한민전이 북한에 먼저 보내 북한에서 선전 자로로 방영되었던 영상 자료들입니다.
한민전이 광주사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징후는 여러곳에서 발견됩니다. 나중에 거짓으로 판명된 그 모든 잔혹한 유언비어들을 누가 제조하였을까요? 조총련은 1975년에도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폭동선동삐라를 제작하였던 광주의 좌익서점 녹두서점은 조총령으로부터 북한 공산주의 서적을 입수하여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고 있었으며, 폭동 주동자 윤상원이 븍한 서적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5월 15일 십만 명의 시위대가 모인 서울역 집회 때 시위대학생들 몇명이 갑자기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순경 5명을 깔아 몇명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운전 솜씨는 학생은커녕 기사도 흉내내지 못할 솜씨였습니다. 아마 5월 20일과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쿠데타(전국적 민중봉기)를 돕던 한민전 소행이었을 것입니다. 5월 19일 똑같은 수법으로 광주에서 순경 네명을 버스로 그 자리에서 깔아죽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가 생기면 나주 경찰이 광주로 출동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있다가 텅빈 나주경찰서에 습격하여 수천정의 기관총, 수류탄 등의 총기를 시민군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들이 광주시민들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광주 시민이 나주까지 오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내국인은 아무도 모르는 극비 장소에서 8톤의 다이너마이트를 탈취하여 조청 지하에 능숙한 솜씨로 폭파 장치를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광주시민들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더구나 누가 시간별로 일정을 미리 짜놓고, 어디서 장갑차를 탈취할 수 있으며, 광주 외곽 어느 지역에서 경찰서 무기를 탈취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가 시민군들을 선동했습니다. 하루 만에 그토록 중무장하는 것은 국군에게도 불가능합니다. 시민군이 단 하루 사이에 그토록 모든 무기를 다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한민전의 소행이 의심스럽습니다. 그 의혹은 5.18 희생자 중에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이 상당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짙어집니다. 탈북자들은 한결같이 북한군이 당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하고 있었는지를 증언합니다. 탈북자의 증언을 물리적으로 증명하기 어렵지만 요즘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5.18방송물 출처가 한민전이라는 사실은 한민전의 암약을 의심케 합니다.
광주사태의 진실은 폭도들이 먼저 낫과 도끼로 공수부대원들의 팔다리를 무수히 절단하여 동료 공수부대원들을 자극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실 광주사태를 점화한 것은 5월 15일의 서울역 집회였고, 그 시위 준비를 김대중이 선동하기도 했지만 당시 서울대 3학년 운동권이었던 한홍구, 유시민. 심재철 학생 등에게 괴전화가 걸려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유언이어를 흘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괴전화의 발신자가 누구였을까요? 여하간 한민전의 의도는 1975년 3월 호지명이 시민군으로 민중봉기를 일으켜 월남을 공산화한 방법과 똑같은 방법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일시에 무수한 온갖 유언비어들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낫과 도끼로 공수부대원들의 팔다리를 절단한 후에 동료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가 비밀 카메라로 촬영하여 북한에도 보내고 여태껏 대학가 선동 자료로 활용해 왔습니다.
처음에 공수부대원들은 전혀 과잉진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오전 11시부터 온종일 폭도들이 세무소 등 공공건물에 방화하고 파출서를 파괴하고 순경을 보는 대로 잡아다가 묶어놓고 개패듯 팼기에 광주경찰서장과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 2개 대대 공수부대원들이 오후 5시 40분에 광주 사람 정웅 장군의 명을 받아 폭동 진압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그들은 전혀 과잉 진압을 하지 않았습니다. 돌맹이와 화염병을 얼굴과 가슴에 맞으면서도 대오를 흐뜨리지 않고 그들은 걸어 행진하면서 시위대를 맨손으로 해산시켰습니다.
그러나 몇몇 폭도들이 낫과 도끼로 공수부대원들이 팔다리를 절단하였기 때문에 동료 공수부대원들의 전우애를 자극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를 미리 예상하고 기다렸다가 촹영한 한민전이 있었습니다. 한민전의 공작 임무는 선동 영상 자료를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사실 공수부대와 시위대 사이에 육탄전이 있었던 시간을 극히 짧았는데, 미리 카메라를 준비해 두고 있다가 모조리 찍었습니다. 그리고 폭동 주동자들은 방송국들을 불태워습니다. 이것은 광주사태가 오로지 한민전의 선동 자료 혹은 그들의 선동 구호로만 광주시민들에게 알려지게 하려 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분들의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아래는 그런 증언 중 하나입니다.
No. |
19252 |
날 짜 |
2004-02-22 오후 12:49:00 |
이 름 |
靑率
|
조 회 |
14 |
나이,성별,직업 |
(1, 남, 1) |
I P |
218.148.142.83 |
잘 읽었습니다. |
당시 흥분한 폭도들이 돌과 화염병으로 비무장(실탄 비 지급) 군인을 향해 무차별 가격하여 군인들이 쓰러지는 장면들이 TV를 통해 방영 된 적이 있었지요. 밀려드는 폭도들에 중과 부적 소수병력으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던 군인들이 외곽으로 철수를 하게 되지요. 이 시점부터 광주시는 해방구, 무정부 상태로 돌입하게 된 듯 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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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도들이 MBC 방송국에 불을 질렀을 때 다행해 계엄군이 일찍 발견하여 건물의 완전 전소를 막을 수 있었으며, 인명 구조도 할 수 있었다. 광주사태 내내 계엄군은 수십 만명의 광주시민의 생명을 구했는데, 아마 이것이 첫번째 인명 구조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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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박사님은 MBC 방송국 방화는 변압기 폭발시켜서 했다고 지들도 놀랐다고
회고록에 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