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들어가는 말
세계 선교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거두었다고 평하고 있는 한국교회 그 성장 이면에는 여성들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여성들의 공헌과 평가가 남성들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국교회 초기 외국선교사들만 해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언더우드, 아펜젤러, 마포삼열, 스크랜톤 모두 남성들이다.
즉 남성 위주의 평가 사회에서 여성들의 사역과 노고는 남성들의 사역의 보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온 것도 그 중에 한 몫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은둔의 나라 한국에 입국한 많은 여자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한국교회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편의 그늘에 가리어져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선교사 아내들,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하고 평신도 사역자로 선교사역을 감당하면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 선교사들을 한국교회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박용규 교수의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초기 한국에 입국한 많은 외국 여자 선교사들이 그들의 능력과 열매를 제대로 평가를 못 받은 것처럼, 현재 한국교회 내 여성 도들의 지위나 역할이 매우 미미하고 대접을 못 받고 있다, 또한 한국 교회에서 파송 받은 과반수를 차지하는 많은 여성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의 환경에 있다. 그러나 선교 사역에 있어서 여성 선교사의 역할은 참으로 너무도 중요한 위치에 있다.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 총람에 의하면 03년 2월 현재 한국인 선교사 11,614명 중 남자가 5,259명(47%), 여자가 5,928명(53%)이다. 독신의 비율은 12.7%, 기혼자는 87.3%이다(2001-2003 한국선교핸드북, KRIM). 2004년 현재 예장총회세계선교회(이하 GMS)의 여성선교사는 총 615명으로 GMS 선교인력의 53%를 차지한다. 반면 남성선교사는 546명으로 47%이다. 여성선교사 615명을 신분별로 보면 사모 495명, 전도사 79명, 평신도 41명으로 구분된다. 결혼상태(기혼/미혼)로 보면 부부가 557가정으로 87%, 독신이 84명(이중 3명이 남자독신)으로 13%를 차지한다. GMS의 지난 5년간 통계를 분석해 보면 1990년 74명에서 2004년 81명으로 독신 여 선교사의 증가율이 아주 미미하다.
반면 사모 선교사는 90년 370명에서 2004년 495명으로 증가해 37.5%의 큰 증가 폭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GMS 선교인력이 지난 10여년간 거의 500% (90년 227명에서 2004년 1,161명으로 증가)성장세를 보였고, 특히 GMS가 교단 선교 부이기 때문에 목사 선교사의 증가에 기인한 것이다.
위의 두 가지 통계 KWMA(한국세계선교협의회) 총람과 예장총회세계선교회(이하 GMS)의 통계가 우연의 일치처럼 남성(47%)보다 여성(53%)선교사의 비율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여성 선교사의 비율은 앞으로 점점 더 더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 고 필자는 예상한다.
우리 여성들이 믿음의 빛을 더욱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선교 현장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랄프 윈터’ 박사도 말하기를 선교분야에서 ‘폭발적인 여성 에너지’가 분출되었다고 인정했다. 즉 남자 선교사들보다 더 많은 여성 선교사들이, 또한 양적인 면만이 아닌 질적인 면에서도 조금도 뒤지지 않고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선교단체나 교단 그리고 교인들의 생각 속에 깊게 자리 잡은 남존여비의 한국적 전통 사상과 성경적(고전 14:34) 해석이 어우러져 대한민국에서의 여성 선교사의 사역은 한 없이 제한되어 왔었다. 특히 독신 여 선교사에 비하면 더 더욱 그러하다. 더욱 더 큰 문제는 필자를 포함한 우리 여성 선교사 자신들이 위에서 지적한 남존여비의 한국적 전통 사상과 어우러진 성경적 사상에 가득 짓 눌려, 순응하며 자신들에게 부여하신 은사를 폐기(?)하듯 살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남성과 여성’은 창조질서에서 서로 동등하며, 상호 보충적임을 첫 장에서부터 ‘대 헌장’으로 천명한다. 따라서 인류의 삶에서 성차별은 극복되어야 하며, 추방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여자와 남자로 구성된 인간의 존엄성’에 헌신하여야 한다. 여성은 남성에 비하여 결코 ‘열등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필자를 비롯한 모든 여성 선교사들은 오늘도 살아계신 창조자 하나님 아버지께서 부여하신 자존감으로 확실히 무장하여야 한다. 그렇다고 창세기 2장18에 나와 있는 돕는 배필의 범위를 넘어서서 남편 위에 군림(?)하겠다는 생각은 또한 전혀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후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각자의 은사대로 서로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 완성하는 데 있다고 필자는 본다.
특별히 21세기 선교사역은 교회개척, 신학교(성경학교), 지도자 양성, 기독교 학교, NGO, 성경번역, 선교행정 등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에 여성 선교사를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 창의적 접근 지역인 이슬람권에서의 선교사역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여성 선교사만이 해 낼 수 있고 또 여성 선교 인력들이 더 유리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분야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필자가 약 15년 동안 사역을 하고 있는 이슬람권인 실크로드 지역에서의 부녀자 대상 사역과 어린이 교육과 사회봉사는 우리와 같은 여성의 창의성․민감성․인격 감각과 관계 지향적 성격이 유리하게 활용될 수 있는 분야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여성 특유의 관계지향성과 인격감각, 섬세함의 능력을 통해 세계 선교에 기여할 때, 선교 인력 개발 뿐 아니라 선교의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 것으로 필자는 확신한다.
따라서 남편 선교사와 더불어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서 여성 선교사에게 직분과 리더십은 연령이나 지위, 성(性)에 따라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개인의 능력과 은사에 따라서 주어져야 하며, 여성의 리더십을 이제라도 선교 현장에서 여성 선교사들 대상으로 더 더욱 개발 시킬 수 있도록, 교육의 기회와 훈련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야 된다고 필자는 간절히 소망한다.
그러므로 본 필자는 여성 선교사 리더십 개발을 위한 선교현장에서의 훈련의 필요와 역할 발제를
첫째. 선교사 파송 전의 삶
둘째. 선교사 파송 후 현지에서의 리더십 개발을 위한 과정
셋째. 여성 리더 쉽 개발의 활용
넷째. 본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개발을 위한 제안으로 본 발제를 마치려고 한다.
Ⅱ. 선교사 파송 전의 삶 (1992년 이전)
필자는 선교사로 파송 전에는 전형적인(?) 한 목회자의 충실한 부인으로 살아왔다. 필자는 잘 모르겠는데, 남편 말에 의하면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처럼 순종하고 복종하는삶이었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못한데도 남편에게서 항상 이런 상찬을 들으니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뿐이다. 사실 이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생각을 할 지 모르지만, 필자가 남편인 김 경일 선교사와 결혼을 할 때 사랑을 해서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너무도 존경하기 때문에 결혼을 했다.
처음 필자가 출석하던 2층 상가 교회에 전도사로 남편이 부임을 했을 때, 그가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영혼을 사랑하는 정열적인 열심들을 가진 것을 발견하였고, 약간의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그를 지켜 보아왔다. 감히 결혼까지는 상상을 하지는 못하였지만 그런 정열적인 모습과 헌신들이 지극히 아름답게 보였고, 상처 받았던 많은 영혼들이 그를 통하여 예수 앞으로 변화되는 모습들이 필자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결혼 후에 말이지만, 필자는 그를 ‘불도저’라 ‘탱크’라고 불렀으며 대우 회사에 취직하면 두 손 들고 환영하였을 것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하였다. 그 당시 ‘탱크’라 불리우는 대우전자세탁기가 한참 인기상승 중이었으니 말이다.
우즈베키스탄 선교 현지에서, 어느 날 필자는 남편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 ‘이제는 당신을 진짜, 진짜 사랑 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남편은 너무도 행복해 하며 ‘그 이유가 무었이냐’고 물었다. 그래서 필자는 남편에게 ‘당신의 허물과 부족 함들을 감싸주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라고 답해 주었다. 남편 말에 의하면 '사랑스런 아이들 셋 낳고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필자는 지금도 변함없이 김 경일 선교사가 ‘오직 나만의 당신이며, 영원히 태양이다’라고 고백 할 수 있다.
참 감사하게도 모든 것이 부족한 필자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 전에 어린이 선교신학원(원장 리강묵 박사)에서 선교의 소명과 바울의 집(KIM - 조동진 박사)에서 6개월 동안 최상의 양질의 선교훈련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강권적 은혜와 섭리가 아닐 수 없다.
1. 어린이 선교 신학원에서의 선교 소명
필자는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기독 서점이었던 엠마오 서점에서 근무하다가 김경일 선교사를 만나 결혼하였다.
필자의 가정은 불신자의 가정으로, 필자는 2남 2녀 중 장녀였다. 가부장적 유교학자이신 부친이었기에,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다녔던 교회 생활은 매우 어려웠지만,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집 근처 중고등부 시절 학생회장과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남아선호 사상주의자이신 부친은 아들들만 대학교에 가면 되지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하면서, 대학 진학을 엄하게 반대하였고, 더욱이 부친의 사업 실패로 눈물을 머금고 필자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결혼 이후 이전부터 유아 교육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남편의 도움을 얻어 서울 역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는 어린이선교 신학원에 입학을 하였고, 그곳에서 필자는 리강묵 원장 목사님을 통하여 선교의 비전을 갖게 되었고, 또한 어린이 선교 구령에 불이 붙은 많은 목사 사모들과 전도사, 그리고 자매들을 만났다.
그러나 당시 전도사 사례비로는 생활비로도 조차 부족한 어려운 실정이었기에 더 이상재정이 허락되지 않아 1년 만에 휴학을 한다. 그러나 짧은 기간 공부하였지만, 필자에게는 아이들을 향한 새로운 구령의 열정을 갖게 되었고, 선교의 비전을 가득 품게 되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해 본다. 그때 배우고 얻었던 많은 자료들을 우즈베키스탄 선교 개척사역 초기와 지금도 아주 용이하게 잘 활용하고 있다.
2. 동서 선교 훈련원(바울의 집 KIM-조동진 원장)에서 선교 훈련.
선교사로 파송 받기 전 1991년 8월말에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화성시 월문리 소재, 현 GMS 선교 훈련원이 있는 동서선교연구소(바울의집) 주최 제 19회 하기선교 대학원에 참석하다가 급히 전화를 한다면서, “지금 조동진 박사님을 비롯하여, 시니어 선교사들이 바울의 집(KIM) 멤버로 나를 선택을 했다면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고 물었다. 필자는 답하기를 “하나님께서 그 분들을 통하여 부르신다면 곧 순종하고 가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저는 찬성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남편은 매우 실망하는 목소리로 “그래요. 알았어요”라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남편은 필자에게서 반대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선교사로 헌신하기보다는 국내 목회에 더 깊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평신도 선교단체인 가이오 선교회에서 약 7년 동안 총무로 섬기면서 그동안 선교사 후원금 문제로, 교회들과 개인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기에, 남편은 항상 말하기를 “나는 선교 후원금 걱정 없이 선교하기 위하여, 40세 전까지 국내 개척 교회를 하여, 약 천명의 성도들이 회집을 하면, 그때 공산권 선교사로 헌신하겠다” 입버릇처럼 말을 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제나 항상 그랬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 1991년 남편은 강도사 인허를 가을에 받고, 드디어 1992년 2월 1일에 가족 모두 바울의 집에 입소한다. 당시 바울의 집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 하였고, 현재 한국 선교를 대표하시는 모든 선교사 대부분이 KIM 출신인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 당시만 하여도 100명 이상의 선교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바울의 집에서의 선교사 훈련은 년 1-2가정만을 엄격한 특별 전형, 선발하여 선교학 석사 과정으로 선교 훈련을 마치면 선교학 석사과정을 마치는 것이었다. 물론 남편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후에 인도네시아로 파송되어, 현지에서 신학교 사역과 선교현지 사역을 하다 안식년 기간을 통하여 선교학 박사 과정을 이수 할 수 있는 엘리트 코스였다.
남편과 필자는 생애 최고의 선교 교육을 받았다고 자부한다. 존경하옵는 국내 외 대표하시는 신학자들이 오셔서 마치 과외(?)하듯, 단 두 가정을 두고 선교 교육을... 특히 한국 선교의 대부이신, 걸어 다니시는 선교 백과사전이라고 칭할 정도로, 강의 중 바로 바로 세계선교 역사의 년도와 수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시며, 열강 하시며 교육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83세이신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재도 왕성하게 저술하시며, 선교대회마다 초청받아 후진 양성에, 마치 사도 바울이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었다” 고백할 정도로...
아마도 그때 받았던 선교 교육의 영향으로 김경일 선교사가 제1차, 2차 실크로드미션포럼, 즉 선교사 글쓰기 운동과 선교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의 모태로 추진력을 갖게 되었다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바울의 집 사정으로 제1기 6개월 이론 과정만 마치고, 제2기 교육과정인 선교현장 교육을 앞에 두고, 퇴소하여, 그 동안 필자의 남편이 7년 동안 총무로 섬겼던 가이오 선교회를 통하여 구소련 우즈베키스탄 선교사로 92년 9월 파송을 받아, 모스크바를 거쳐 전 가족(요셉 -88년생, 한별-91년생)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로 떠난다.
Ⅲ. 선교사 파송 후의 삶 (1992 - 2006)
(선교사 파송 후 현지에서의 리더십 개발을 위한 과정과 활동)
결혼한 여성 선교사들은 빈번한 역할 변화뿐 아니라 그들이 맡고 있는 많은 역할들로 인해 남편들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겪는다. 가족간의 책임 할당도 전적으로 남편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근거로 결정될 수 있다. 아내 역할의 애매 모호성은 긴장 유발의 주 원인이 되고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직업상 스트레스 요인, 두 가지는“역할의 모호성과 역할 갈등”이라고 했다.
위 말은 현재 필자는 심각히 고민하며 괴로워하는 문제다. 필자만이 아닌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선교사 사모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현실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현재 필자는 여성 선교사로서의 사역과 한 남편의 아내 역할, 그리고 사랑스런 세 자녀의 엄마의 역할을 힘에 지나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오직 여성 선교사로서의 사역이든지, 아니면 여자로서의 고유한 영역(?) 속에만 갇혀 있고 싶은 충동이...
그러나 지난날을 회상해 볼 때 필자는 너무도 행복한 여인이요, 선교사가 아니었나 자부해 본다. 특히 필자에게 리더십을 개발 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준 필자의 남편 김경일 선교사에게 큰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왜냐하면 김경일 선교사를 영원한 사역의 동반자로의 선택이 필자에게는 너무도 탁월한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국내에서 목회를 하는 사모의 신분이었다면 현재의 필자의 모습은 전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즉 내성적이며, 소극적이고, 여성의 리더십의 개발보다는 소위 한 교회의 부엌대장(?)의 행복한 신분에서 벗어 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필자가 선교사 파송 후에 선교 현지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개발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실질적인 과정과 활동을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선교지에서의 남편 선교사의 보조 역할 (1992-1994)
1) 가이오 선교회 파송(92. 9. 17)으로 우즈베키스탄 주재 선교사 되었다.
갑자기 우즈베키스탄으로 선교지가 결정되어, 바울의 집에서 퇴소한 지 3개월 만에 답사 한번도 없이, 1992년 10월 21일에 김포를 떠나 모스크바를 걸쳐 약 20 시간의 쉼 없는 비행을 통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도착한다. 그 다음주 타슈켄트에서120km 떨어진 위성도시 안그렌으로 사역 지를 확정하고, 김 선교사가 추방당하기 전까지 약 14년 동안 사역을 하였다.
2) 남편의 보조적인 삶 (남편과 함께 심방 등등)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이전에는 아이들의 엄마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현모양처의 삶을 최고의 선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왜냐하면 필자의 어머니께서 한평생을 그렇게 살아 오셨고, 시어머니 역시 그런 삶을 사셨기에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에도, 선교사로 헌신 한 후에, 선교현장에 도착한 후에도, 그러한 필자의 생각은 언제나 고정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자의 전부요 하늘이었던, 남편에게 일시 귀국이나 외국으로의 선교보고, 그리고 추방 등등, 나의 삶에 있어서 큰 위기의 순간이 너무도 자주 닦아오면서, 나는 변해가고 있었다. 두려움을 이기고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한 꺼풀 한 꺼풀, 꺾여지면서 비로소 필자의 숨겨진 자아 속에 가득 담긴 달란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즉 리더십이 개발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3) 자녀양육(요셉-88년생, 한별-91년생) 및 출산(다니엘-1994. 7.14)
선교현장에 도착 당시 장남은 만 3살이었고 장녀는 만1살이었다. 그래서 필자와 남편 은 선교 사역을 위하여 빨리 나의 두 자녀가 자라 주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소원(?) 아닌 소원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93년 5월 중순 경 가정예배 설교를 마치고 가족의 공통기도 제목을 나누고 힘차게 기도를 마친 다음 주기도문을 하려고 하는 데, 갑자기 장남 요셉이가 ‘아빠! 기도 제목이 하나 더 있어요.’ 아빠와 필자는 너무도 기특하여서 그래 한번 해 보아라 했는데 요셉 왈 ‘고추 달린 동생 하나 주세요.’ 청천벽력 같은 기도소리에 놀라 우리부부는 바로 눈을 크게 뜨면서 아들에게 취소하라고 협박(?)을 했지만 영력(?)이 큰 아들 덕분에 한 달 만에 드디어 막내가 잉태되었고, 94년 7월 14일에 4.2Kg의 우람하고 귀한 우즈벡스키(우즈벡사람)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부부 처음 잉태 소식을 산부인과 의사에게 듣고는 하늘이 노랗고, 이제 언제 막내를 키울 것인가 참으로 난감했었다. 그러나 막상 태어난 막내를 보는 순간 얼마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지, 옛말에 '내리 사랑'이란 말이 있듯이 첫째와 둘째를 합친 것보도 더 사랑스럽게 우리부부의 가슴에 가득 와 닿았다.
2. 선교지에서의 리더십 개발과 활동 (1995-2006)
1) 우즈베키스탄 안그렌 사범대학에 입학 (1994. 09.)
필자는 남편의 외조를 확실히 누린 행복한 선교사다. 왜냐하면 1994년 6월 중순에 남편이 나에게 갑자기 제안하기를, 우리 사역지에 있는 안그렌 사범대학에 입학을 하라고 권유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사범대학 입학이라고 하면서 거부를 했는데, 그 이유는 필자의 막내아들을 현지 병원에서 출산(94. 07.14)을 한 달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 선교사는 '당신에게는 특별한 언어의 달란트가 있다. 어떻게 선교지에 온 후 전혀 공부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는데, 러시아 말로 현지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TV에서 나오는 러시아 말을 약 70%를 알아들을 수 있는가?라며 '나는 대학원까지 나왔고, 조금만 더 공부를 하면 박사 학위도 받을 수 있는데... '당신은 나보다 머리도 더 좋고, 언어적 달란트가 있으니 충분히 공부를 잘 할 수 있다. 당신의 능력을 개발 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필자에게 ‘기회가 주어 졌을 때 학업을 할 수 있는 것 좋다’고 간절히 필자를 밤새 설득 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곳 종교 상황이 어떻게 변할 줄 모르니까 서로 다른 비자를 받는 것이 선교사역을 위하여 가장 좋다”고 필자에게 말을 했기에, 나는 당연히 비자를 받기 위하여 그냥 사범대학에 입학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다. 당시 남편의 비자는 우즈베키스탄 고려문화협회 초청비자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내 다니엘을 출산하지 두 달도 안 되었는데, 남편이 말하기를 '사범대학교에 정식으로 입학을 했으니, 이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 만약 공부를 하지 않으면 비자가 취소된다’고 필자에게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안되면 돈을 주고 점수를 사야 한다’고 하여 그것은 필자인 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아 정식으로 공부하기로 굳게 다짐한다.
지금은 덜하지만, 필자가 애 셋 낳기 전까지는 남편 말에 순종을 지나 무조건 복종하는 편이었다. 그때부터 낮과 밤이 바뀐 막내아들의 칭얼거림 속에서 첫째와 둘째 출산 시 겪어보지 않은 극심한 젖몸살 속에서... 거의 날마다 새벽 3시까지 러시아어 사전과 씨름하며 힘들고 고달픈 학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범대학교에 등교했다, 하교하는 시간까지 아들이 깨질 않고, 잠을 잘 자주었기에...
2)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니자미 사범대학(2000년 6월) 졸업
1997년 이후 모든 종교비자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사라진 이후 모든 선교사들은 더 이상 사역지에 거주 할 수가 없었다. 일반 비자를 받을 수 있는 타슈켄트로 집결을 했는데, 필자의 가족 역시 안그렌을 떠나 타슈켄트에 거주하며, 남편이 주중에 오가고 필자는 주일 날 아침에 김 선교사와 함께 안그렌을 방문하여 선교사역에 동참을 했다.
그래서 필자는 타슈켄트 사범대학으로 전입학하여 러시아 문학전공을 계속하였고 드디어 2000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을 하였다. 그리고 6월말에 정식 국가 고사를 거쳐, 러시아어 정교사 자격증 도 취득할 수 있었다. 정말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모든 영광 하나님과 사랑하는 남편에게 돌린다.
3) 우즈베키스탄 니자미 사범대학과 국립 외국어 대학 교수 역임(2000-2005년)
2000년 타쉬켄트 니자미 사법대학교를 졸업하면서 한국어 학장 교무처장의 청빙으로 한국어를 1년간 강의를 하였으며, 2004년-2005년까지 약 2년간 국립 외국어 대학 신문방송학과에서 한국 어와 시사 상식을 강의하였다. 필자의 교수 활동은 필자의 자존심에 큰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4) 우즈베키스탄 국립 외국어대 박사과정
2004년 9월부터 외국어대학 총장의 권유와 필자의 합의 하에 외국어 대학에서 한국어 강의를 해주는 대신, 대학원 측에서 전액 장학금을 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박사 과정을 허락하여서 [한국인과 우즈벡 인의 20-30대들의 결혼관과 결혼 그리고 가정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박과 과정을 밟게 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박사 과정 중에 김 경일 선교사가 추방을 당하게 되어 박사 과정을 중단 할 수밖에 없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카자흐스탄이나 한국에서 다시 한번 박사 과정을 하고자 한다.
5) 김경일 선교사의 선교 보고 차 외국방문과 추방(1, 2, 3차 추방 시) 등등으로
대신 선교 사역을 담당
a. 1997과 2001년도 각각 2달 정도씩 필자의 남편 김 경일 선교사가 갑자기 추방을 당하므로 놀란 사슴 모양을 하며 허둥지둥 현지 교회를 추스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이빨이 없으면 잇몸이란 정신으로 정신없이 선교사역의 전체를 담당 했던 기억이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정신이 가물가물 해지며 아득해진다.
그러나 ‘위기가 기회’라고 항상 김 경일 선교사는 외치며 그렇게 살고 있다. 필자가 그의 곁에서 살다 보니 부부는 닮나 보다. 필자의 얼굴과 남편의 얼굴이 형제자매와 같다는 소리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어쨌든 그 위기 상황에서 잘 견디고 품을 수 있었기에, 필자가 여선교사로서의 리더십을 더욱 개발할 수 있었고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b. 위기 상황 속에서 항상 스페어타이어처럼 대타로 선교 사역을 감당 했는데, 하나님께서 필자에게도 단독으로 개척교회를 인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2001년 10월에 추방당한 김 선교사가 기적적으로 생환하여 돌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함께 안그렌으로 가족들이 사역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법으로 만약 비자와 다르게 활동을 하였다 적발이 되면 그대로 추방을 당하는 상황이었기에 더욱이 김 선교사의 일 때문에라도 조심을 해야 되었다.
그래서 김 선교사는 혼자 사역지로 금요일부터 주일까지 잠행을 하여, 제자양육과 교회 성도들 돌보는 사역을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재 추방당할 각오로 그러나 뱀처럼 지혜롭게 사역에 더욱 매달렸다.
그러나 필자와 아이들은 더 이상 함께 사역지로 갈 수 없어, 2002년 9월1 일부터 타슈켄트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다 타슈켄트에 진출해 있던 성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하여, 드디어 정식으로 2003년 1월 5일부터는 타슈켄트 승리교회가 탄생한다.
필자가 말씀을 러시아어로 증거 하였고, 2004년 7월까지 타슈켄트 필자의 아파트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년 25명에, 주일 학교 15명 등 약 4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모임장소가 아파트 지역이고, 2001년 911사태부터 점점 심각해진 당시 종교법으로, 만약 허가 없이 예배를 드리다 적발이 되면 그대로 추방을 당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김 선교사도 없는 상황에서 매 주일, 주일 가슴조리며... 그러나 성가대까지 있어 정말 기쁨으로 매주일 천국 잔치를 경험하며 행복했던 기억이 지금도 필자의 가슴을 가득 흥분시킨다.
2004년 5월 김 선교사에 대한 공안 당국의 추방 통보로 결국 더 이상 필자의 집에서 모임을 할 수 없어 나의 제자인 릴야 전도사에게 모든 목회 전반을 맡기고, 필자는 승리교회마저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김 선교사 역시 사역지로 갈 수 없어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필자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이 사춘기에 도달한 필자의 세 자녀들에게 기독교 정체성을 확실히 심기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지금은 세 자녀가 한국(김요셉-청구고등학교), 미국(김한별-클리브랜드 공립중학교), 그리고 카자흐스탄(김다니엘-11학교)으로 흩어져 하나님께서 주신 각자의 비전 성취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다.
6) 한민족복지재단 우즈베키스탄 대표부 행정실장 및 대표부 소장 직 (2003-2005년)
2003년도 3월 초, 하나님께서는 남편 김 경일 선교사에게 새로운 비전을 허락하신다. 그해8월 13일 국제 NGO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 우즈베키스탄 대표부 소장이 된 것이다.
NGO 회원들에게 준 외교관 자격을 주는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NGO정책으로 남편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준 대사급으로 격상이 된 것이다. 정식으로 등록된 이후부터 그 동안 갈고 닦은 유창한(?) 러시아어 회화 능력으로 한민족 복지재단 대표부의 공식 대정부 일을 맞아 하는 행정실장으로서 대표부의 모든 사무행정 일을 맡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정말 너무도 바쁘게 활동을 하게 된 이년 오 개월이었다.
즉, 매일 출근하는 한민족 우즈베키스탄 대표부 일 외에, 국립 외국어 대학 교수로 주3일 출강, 선교사학교 주 1회 일일 보조교사, 그리고 세 자녀의 엄마로서의 부엌대장 역할과 한 남편의 아내로서 역할, 매 주일 마다 개척한 타슈켄트 승리교회 설교와 기도회 인도 등등 몸이 열 개가 있어도 힘든 지경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필자와 같이 내성적이고, 연약하고, 남에게 싫은 소리는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필자가., 한마디로 기적(?)이다.
필자의 외모가 이국적이란 말을 많이 듣는데, 필자의 러시아어를 들으면, 듣는 현지인들은 필자를 대부분 ‘카자흐여인이 아닌가’라 하며 착각들을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카자흐스탄에서 사역을 힘 있게 하고 있다.
2004년도부터는 성국화, 성시화란 비전을 가지고, 비자 발급이 필요로 하는 동료 선교사들에게 힘에 지나도록 NGO 비자를 내드리면서 함께 사역을 하게 되었고, 다른 분들은 추방을 당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당해도 불사조처럼 살아 돌아온 유별난 필자의 남편이 다시 우즈베키스탄에서 추방되면서부터 2005년 1월부터 필자는 국제NGO단체의 정식 소장으로 약 7개월간을 사역하였다.
이 기간이 필자의 인생에 있어 너무도 처절한 고통과 절망의 시기였었다. 남편이 더 이상 우즈베키스탄으로의 입국이 막혀있는 상황에서, 오직 한민족 복지 재단이 해산될 것과 그러므로 새로 영입한 10명의 선교사들의 가족 비자 중단을 염려한, 필자의 남편이 강제로 소장을 맡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가 어떤 선교지이든 자신의 나라를 떠나 새로운 언어와 문화권에 적응하며 생활하고 사역하는 첫 2년간에 느끼는 스트레스 지수는 400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배우자 사망시의 스트레스 지수가 100이라는 개념과 비교한다면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상태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지를 자신들의 제 2의 고향으로 생각하며 정착하여 살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착된 삶을 송두리째 뽑혀, 황당하게 그것도 중범죄인 취급을 받으며, 남편이 긴급히 선교 지를 떠나야만 되는 상황은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정신적 공항(?) 상태라 아니 할 수 없고, 특히 부인과 자녀들의 입장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그 동안 필자의 태양이며, 든든한 바람막이 남편이 있기에, 어제든지 SOS를 보내면 슈퍼맨처럼 환한 미소로 나타나 동행해 주었던 지난 시간들이 너무도 크고 컸기에... 더욱이 그토록 열정적,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사모했던 우즈베키스탄이, 나의 사랑하는 남편을 매몰차게 내어버린 우즈베키스탄이 필자는 정말 싫었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이, 절망의 고도에 갇힌 것같이, 무기력하고 유약한 필자의 천성(?)이 활동을 시작하려 했지만... 그러나 사랑하는 님의 간절한 부탁이었고 그의 비전과 땀으로 가득 베여있는 곳이기에... 나는 주저앉을 수 없었다. 더 강하고 힘 있게 나의 남편이 한 것보다 더 왕성하게 빈자리 채워야 한다. 그래서 나의 사랑, 나의 님을 유쾌히 위로하여 주리라...
그러나 대한민국 한민족 복지재단 본부에서는 ‘여성이 무슨 소장 일을 할 수 있는가’ 라며 계속 소장 인준을 늦추었다. 결국 김 경일 선교사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2005년 2월 말이 다되어서 정식 서류가 우즈베키스탄으로 도착하였다.
그 이후부터 하루가 24시간이 아닌 25시간으로 알고 뛰고, 또 뛰었다. 새로 대표부 오피스를 확장 이전하고, 우즈베키스탄 여러 지역으로 한민족 지부를 계속 결성하고, 자신을 내 쫓고 박대한 우즈베키스탄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필자의 남편이 한민족 복지재단을 통하여 약 6억원 상당의 의료장비와 20피트 컨테이너 2대 분량의 생필품을 보내왔다. 그것은 우즈베키스탄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있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가꾼 사랑스런 제자들이 있으며, 남편의 분신인 사랑하는 가족들과 특히 막내 다니엘의 고향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필자는 그런 남편이 너무도 좋다. 순수하게, 정직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남들은 남편을 잘 모르고 머리가 좋으니, 계산이 빠르다고 하는데... 사실 한편으로 보면 맞는 얘기 같다. 내가 보아도 참 명석하고 판단력이 뛰어나다. 그렇지만 그것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라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역을 하든, 글을 쓰든, 무슨 일을 하든 그는 한번 심사숙고하고 시작 했으면 반드시 뿌리를 뽑기 전에는 절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우직한 삶이다.
그리고 절대 간과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는 기도의 사람이다. 하루를 기도 시작하여 기도로 끝낸다. 그것이 김경일 선교사의 자산이요, 강력한 무기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필자가 남편을 만난 후, 약 20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결론이다.
필자가 대표부 소장 직을 맡은 지, 정확하게 남편 없이 지낸 시간이 약 6개월이 흘렀다. 참으로 어렵고 힘들었던 절망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여 선교사로서 확실한 리더십을 확립 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었고 고백 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카자흐스탄으로 사역 지 변경한다”라고 그러면서 남편이 한마디 더 한다. “어제 한민족 복지재단 회장을 만났는데 그 분이 하는 말 “앞으로는 이옥희 소장님 하고만 일을 해야겠어요”라고 했단다. 그래서 남편이 왜! 그러냐 하니 “김 선교사보다 이옥희 선교사가 두 배나 일 더 잘 한다” "남자들도 다루기 어렵다는, 10명이나 되는 대표부소속 목사 멤버들을 이끌고, 확실한 리더십을 세우며 대표부 소장 일을 잘했다”라고 칭송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편은 아주 환하고 유쾌하게 웃는다. 남편의 웃음, 그것이 필자에게는 가장 귀한 훈장이요 상급이었다.
필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대하듯, 지금도 남편을 그렇게 대한다. 부족하고 연약한 필자를 강하게 훈련 시켜주신 전능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사랑하는 남편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Ⅳ. 리더십 개발을 위한 제안과 결론
우리 한국 여성들이 믿음의 빛을 힘 있게 발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선교 현장이 아닌가 필자는 강조하고 싶다. 중국의 지하교회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고, 현재 중국에 있는 5만개의 가정교회 중 4만개의 교회가 여성들에 의해 인도되고 있다, "20세기 초엽에는 40개의 복음적인 선교 단체가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전도뿐만 아니라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일을 위해 많은 여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수 백 개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람들도 여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험하고 외딴 지역에서 사역했다.
미국의 선교학자 H. Kane은 1980년 남 여 선교사의 비율이 6:4이며, 일이 더 힘들고 더 할수록 여성 선교사의 비율이 더 높아진다고 진술하고 있다. 즉, 여성 선교사들은 어려움을 더 잘 극복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받은 소명의식과 더불어 여성 특유의 모성애와 강인성, 그리고 남성과는 달리 여성의 섬세함이 선교지로 출발 전까지 수많은 번민과 고민 속에서 내린 결정이기에 더 어려움을 잘 감당하고, 힘차게 일하는 것이다..
사실 모든 것이 부족한 필자가 여성의 리더십에 대하여 논한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런 얘기가 갑자기 생각난다. 어느 바닷가 한가운데에서 배를 타고 바다 풍경을 구경하던 여인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배 갑판에는 단 한명의 선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빠진 여인을 구조 할 생각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처다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용감한(?) 할아버지가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지르며 환호 했는데, 이 할아버지 역시 수영을 못하는 것이었다. 결국 선원들에 의해 둘 다 구조를 받게 된다. 그러나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할아버지의 선행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어, 신문, 방송에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어떻게 수영도 못하시면서, 무모하게 여인을 구조하러 물속에 뛰어 들어 가셨습니까"라고 물으니, 할아버지 왈, 뒤에 있는 군중들을 돌아보면서 "누가 내 등을 밀었어"라는 것이다.
위의 우화 내용이 필자에게 너무도 정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필자는 리더십 개발 계획도 없었고, 그냥 한 남자의 부엌 대장(?)으로 만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으로 말미암아 등 떠밀려, 뛰어들었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선교현장의 처절한 환경 가운데에서, 견디며 살다 보니 어느새 엄청나게 변화되어있는 필자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란 말씀이 정확한 표현 같다.
이제 필자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필자의 경험에 비추어 몇 가지 리더십 개발을 위한 제안을 드린다면 다음과 같다.
1. 리더십 개발에 있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2. 한 남편의 부인이기보다는, 선교 지에 파송 된 선교사라는 확실한 정체성 확립이 중요하다. 즉 선교사 부인은 남편과 함께 파송을 받으므로 신체적, 지적, 정신적, 영적 기준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선교 현지에서 본인 달란트, 즉 사역과 연결이 될 수 있는 리더십을 개발하고자 교육장을 찾아 적극 참여한다. 즉, 현지 언어(러시아어, 카자흐어,..)와 음악대학, 컴퓨터 교육, 등등, 배우고자 하는 열성이 있어야 한다. 특히 남자 선교사들 보다 우리 여 선교사들이 언어적, 그리고 현지 음식 적응 등등, 다양하고, 섬세한 달란트가 아주 뛰어나기에...
4. 남편 선교사의 적극적 외조와 파송 기관(교단, 선교단체, 교회)에서의 체계적인 지원과 여 선교사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만약 부족한 필자가 부엌대장으로 삶에 안주하고 있었다면, 필자가 자연스럽게, 확실하게 리더십이 개발되지 못했다면, 현재의 남편 선교사의 활동 영역과 선교의 열매가 절대 보장 받지 못했을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선교사역에 있어서 동등성과 동반자적 협력의 가치를 가지며 진취적인 활동을 남편 선교사와 함께하되, 반드시 여기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전지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대로 순응하고, 복종하는 가정지기(?) 현모양처의 삶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며, 나아가 선교 사역 있어 풍성한 열매가 될 것 이라고 필자는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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