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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四聖諦)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이것은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말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분들한테 학인(學人)들한테 한문자를 습득을 시키기 위해서 짐짓코 한문자를 될수록 많이 넣습니다. 이를 운(云)자, ‘무엇 무엇이라 말한다’ ‘사성제 또는 사진제라고도 말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성자나 성인(聖人)이나 같은 뜻입니다. ‘성자가 보는 바의’ 바 소(所)자, 성자가 보는 바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이것이 사제란 말입니다.
일반 범부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를 어떻게 구분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구분이 많이 있으나 외도는 사진제 풀이를 못하고, 정도만이, 우리 부처님 가르침만이 사성제를 그대로 진리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인생고(人生苦)가 무엇인가? 사회고(社會苦)가 무엇인가? 어느 경제인이 잘못해서 굉장히 사회혼란를 야기 시키고 그러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말할 때, 그 원인을 해부할 때에 함부로 말하나, 자기 개인적인 인생고나 사회고나 또는 세계적인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모순되는 문제 같은 것이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원인은 역시 무어라 해도 불교에서 말하는 이 사성제 가운데 고(苦)의 원인인 집(集)에가 있단 말입니다.
사성제는 여기 있는 봐 같이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란 말입니다. 괴로울 고(苦)자, 진실할 제(諦)자, 고제(苦諦), 모을 집(集)자, 진실할 제(諦)자, 집제(集諦),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滅諦), 그다음에 길 도(道)자, 진실할 제(諦)자, 도제(道諦)말입니다.
1. 고제(苦諦)
여기 있는 봐 같이
1.고제(苦諦)란 삼계(三界) 육취(六趣)의 고보(苦報)니 미(迷)의 과(果)요.
나아길 취(趣)자, 육취나 육도(六道)나 똑 같은 것입니다. 삼계육도, 삼계육취의 고보(苦報), 고의 과보(果報)를 결과로 해서 받는, 하나의 보답으로서 받는 미혹(迷惑)의 과보란 말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미혹의 결과란 말입니다.
중생고(衆生苦)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은 그다음의 집제란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중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중생은 안락스러운 것인가? 우리 중생은 역시 무어라 해도 어떻게 해부해 보나 결국은 다 고공(苦空)이라, 고(苦) 뿐이란 말입니다.
중생의 낙(樂)이라는 것은 사실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어째 그러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로병사(生老病死)란 말입니다. 날 때 고통, 살려는 고통, 또는 늙어서 고통, 병들어 고통, 결국은 수명이 다 해서 죽는 고통, 그 외에도 헤어지는 고통, 미운사람 만나는 고통, 또는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 몸뚱아리 원수가 장기(臟器)가 가득해 있기 때문에 완전히 조화로운 상태는 없는 것입니다.
불교말로하면 사사일협(四蛇一匧)이라, 넉 사(四)자, 뱀 사(蛇)자, 네 마리의 독사(毒蛇)가, 한 일(一)자, 상자 협(匧)자, 네 마리 독사가 한 상자에 모여 있는 것이 우리 몸이나 같다 한단 말입니다. 지(地)와 수(水)와 화(火)와 풍(風)이란 말입니다. 바람기운 물 기운 불기운 또는 땅기운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모아서 잠시간 조화를 이루어 놔서 완전무결한 때는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더 먹으면 더 먹은 대로 덜 먹으면 덜먹은 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몸이라는 것은 우리 업(業) 따라서 업이 긁어모아서 잠시간 그와 같이 각 원소가 합해있는지라 우리 몸이 완전무결할 때는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몸 자체로 보아도 이것이 모두가 괴로움뿐이란 말입니다.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 범부(凡夫)의 생각은 모든 것을 확실히 알 수 없단 말입니다. 바로 보지 못하니까 바로 생각도 못하고 말입니다. 바로 생각도 못하고 바로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음의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 마음에 가서 편안할 수가 있습니까.
몸도 편안하지 못하고 맘도 편안하지 못하고 아까 말마따나 끝내는 사실은 한계상황(限界狀況)에서 오는 여러 가지 핍박(逼迫)만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깊이 못한 사람들이 인생은 안락이다. 이와 같이 하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해서 가는 것이 - 죽고 마는 것이지 - 바로 보면 인생은 고(苦)뿐이다 말입니다.
따라서 불교란 것은 고를 피하기 위해서 고를 이기기 위해서 불교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 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교는 고의 원인을 확실히 모른단 말입니다.
우리는 우선 인생이라는 것이 고다. 일체개고(一切皆苦)다. 인생고해(人生苦海)라, 그러니까 인생은 고생 바다란 말입니다.
성자가 깨달아가지고서 우주(宇宙)를 다 통달해 가지고서 항시 불성(佛性)을 보는 경지 같으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는 한에는 우리 중생의 견해에서는 아무리 따져 봐도 고뿐인 것입니다. 고를 분명히 느껴야만 그것이 참다운 수행자(修行者)란 말입니다. 고를 느끼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가 된 것입니다.
삼계(三界) 이것은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아닙니까. 중생이 생사윤회(生死輪廻)해서 왔다 갔다 개미 쳇바퀴 돌듯이 하는 것이 삼계윤회란 말입니다.
욕계라, 욕심을 미쳐 못 떠난 경계, 음욕(淫慾), 식욕(食慾), 잠욕, 또는 가지가지의 욕심(慾心)을 못 떠난 경계가 욕계고, 우리는 지금 욕계에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人間)은 만물의 영장이라, 이와 같이 함부로 탐심을 내고 그런 아만심(我慢心)을 냅니다만 사실 인간이라는 것은 만물의 영장이 못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욕계의 저 밑바닥 남섬부주(南贍部洲)에가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지 욕계 내에도 사람 보다 더 훌륭한 욕계천(欲界天)이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올라가면 또 색계가 있고 무색계가 있는 것인데 어떻게 우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겠습니까.
따라서 인간은 보다 겸허해야 쓰는 것입니다. 욕계내의, 욕계도 꼭대기가 아니라 욕계내의 저 밑에 가서 인간이 존재한단 말입니다. 물론 보다 저 밑에는 지옥도 있고 하겠지만 인간은 어중쭝한(어정쩡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허나 인간이 윤회하는 곳은 욕계 보다 더 높은 색계도 있고 무색계도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삼계고 육도(六道) 이것은 욕계내의 여섯 갈래가 육도입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말입니다.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라, 나쁜 갈래는 지옥, 아귀, 축생인 것이고, 육도 가운데도 좀 좋은 갈래는 아수라, 인간, 천상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그러나 이것은 욕계에 해당합니다. 이와 같이 삼계육도에서 받는 그런 괴로운 과보가 즉 말하자면 여기 있는 고제란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인고 하면 결국은 내내야 미혹(迷惑)해서 진리를 모르는 결과란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았다면 욕계에 태어날 리가 만무합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얽혀가지고서 인제 아, 그 업에 칭칭 묶여가지고서 이렇게 욕계에 온단 말입니다.
부모님의 인연(因緣)을 우리가 날 때도 역시 업장(業障)이 가볍고 저 천상이나 극락에 가버리면 사람으로 올 수가 없습니다. 어중쭝하게 헤매다가 부모님 연 만나서 이렇게 욕계로 덜컥 온단 말입니다. 이것이 욕계 중생인 것입니다.
2. 집제(集諦)
그 다음은 집제(集諦)라, 모을 집(集)자, 진실할 체(諦)자,
2. 집제(集諦)란 탐(貪)·진(嗔)·치(痴) 등(等)의 번뇌(煩惱)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으로서 차이(此二)가 능(能)히 삼계육취(三界六趣)의 고보(苦報)를 집기(集起)함으로 미(迷)의 인(因)이다.
내내야 번뇌라는 것은 무량무수의 번뇌이지만 간추리면 탐심(貪心), 진심(嗔心), 치심(癡心) 아닙니까. 다 아는 바와 같이 3독심 아닙니까. 이러한 3독심 등의 번뇌와 선악의 제업으로서, 업(業)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악업(惡業)도 있지만 선업(善業)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한테 보시도 하고 하는 것이 선업 아닙니까. 잘되기 바라고 또 중생을 위해서 애도 쓰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에 업의 종류를 잘 구분해서, 업의 종류는 3가지로 구분하는 것입니다.
악업(惡業)이라, 악업 이것은 자기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이 악업 아닙니까.
선업(善業)은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나 남을 이익 되게 하는 것이 이것이 선업인 것이고, 허나 이런 업 역시 아직은 상(相)을 못 떠나고 비록 보시(布施)도 하고 여러 가지 베풀기도 하지만 자기라는 상, 남이라는 상, 그런 상을 못 떠나면 그때는 선업에 머무는 것이고 이것이 참다운 성불(成佛)의 도업(道業)은 못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은 이것은 악업이 있는 것이고, 아까 말과 같이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선업이 있고, 또는 상을 털어버린 나라는 상 너라는 상 그런 상을 떠나서 참다운 해탈에 이르는 업, 이것이 길 도(道)자, 도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들은 도업을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업을 짓는 것은 악업보다는 낫지만 아직은 상에 메여 있으면 그때는 해탈의 원인은 못된단 말입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탐심이나 진심이나 치심이나 이런 번뇌나 이런 번뇌가 있으니까 따라서 그때는 마땅히 입으로 행하면 나쁜 말 나오고, 약간 좋은 말 나오겠지요.
몸으로 행하고 살생하고 여러가지 그런 업을 짓는 것입니다.
이런 번뇌가 있으면 자연적으로 그때는 이것이 우리 신구의(身口意)라, 우리 몸이나 입이나 뜻으로 발동(發動)할 때는 그것이 업이 되어 버린단 말입니다.
이런 모든 업으로서 ‘차이(此二)가’ 이와 같이 앞에 있는 그런 번뇌(煩惱)와 제업(諸業) 이것이 둘 아닙니까, 차이(此二)가 이러한 번뇌와 제업이 능히 삼계육취에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육취는 이것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 이러한 삼계육취의 고보(苦報)-괴로운 과보를 모아 일으키는 집기(集起)라, 모아서 일으키므로 결국은 집기란 미혹의 인(因)이 된단 말입니다.
우리는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인생고의 원인은 역시 집기(集起)입니다.
즉 말하면 탐진치 3독, 삼독심에서 우러나온 여러 가지 선악의 업 이것이 인간의 여러 가지 번뇌나 고생의 원인이단 말입니다. 사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모두가 다 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이와 같이 3독심이나 거기에서 우러난 선악의 행위의 과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분명히 느껴야 씁니다. 역시 인간 번뇌 인생고 사회혼란은 그 원인이 무엇인가? 가장 근원은 내내야 결국은 삼독심입니다.
따라서 사회 정화나 자기 개인의 마음의 안정이나 그런 일을 하려면 먼저 3독심을 맑혀야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떠나서 겉만 들어서 사회운동을 할라고 하면 사회도 정화도 못되고 더럽히고 업을 짓고마는 것입니다. 마땅히 우리 불교인들은 이와 같이 근원적인 문제 일체 인간의 여러 가지 모순, 인간의 고생, 이런 것은 모두가 다 원인이 삼독심에서 온단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내내야 인제 참선염불(參禪念佛) 아닙니까. 어느 산중에서 가만히 있다 하더라도 역시 참선염불을 하고 있으면 그때는 인제 삼독심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그때는 악의 뿌리를 뽑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속해있는 좁은 범위 내에서 악의 뿌리를 뽑는 데만 그치지 않고서, 나중에 다시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우리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주에 상통하는 것입니다. 가사 여기서 얼른 한 생각을 일으키면 생각 그대로 해서 없어진다 하더라도 염파(念波)는 소멸 되지 않고서, 우리 생각의 형상은 없어진다 하더라도 염파는 소멸이 안 되고서 그냥 천지 우주의 불성에 바로 그때는 파동(波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인(道人)들은 여기서 한 생각을 딱 일으키면 저 미국에 가서 그냥 직통으로 느낀단 말입니다. 전파(電波) 이상으로 빠른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일으키고 한번 행동하고 그런 것이 모두가 다 천지 우주에 영향을 준단 말입니다. 그런 것이기 때문에 아까 말한바와 같이 우리가 이제 이렇게 앉아서 사회참여를 않고서 데모도 않고서 이와 같이 있다 하더라도 역시 공부를 바로하고 마음을 맑히면 그와 동시에 내 스스로의 마음을 맑힘과 동시에 그 주변도 맑히고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주의 그런 성력(聖力) 즉 말하자면 우주의 성스러운 힘에다가 보다 더 플러스plus 하는 위대한 힘을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같이 우리 생각, 생각 자체가 그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정화 우리 주변 정화 또한 동시에 우주 정화란 말입니다. 이런 걸 알아야 하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는 함부로 꼭 현상적인 사회참여만을 권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3. 멸제(集諦)
멸제(集諦)라,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열반(涅槃)을 말 합니다. 멸제나 열반이나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열반 이것은 바로 풀이하면 영생(永生)이라, 영생한다. 멸(滅)을 단순히 번뇌를 멸한다. 이정도로만 생각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따라서 사제(四諦)를 풀이할 때에 앞서 얼핏 지적을 했지만 멸제를 그냥 번뇌만 멸한다.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영생, 영생의 지혜(智慧), 영생의 생명, 이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이것이 멸제이고 말입니다.,
아까도 얘기 했습니다만 일반 외도(外道)는 결국 멸을 모릅니다. 멸 이것은 정도(正道)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사 산중(山中)에 가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중쭝한(어정쩡한)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때는 그냥 상(相)에 걸리고 만단 말입니다. 구경(究竟) 목적, 일체 번뇌를 멸하고서 영생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그러한 구경적인 끄트머리 목적인 멸을 구해야만 참다운 공부인 것입니다.
가사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사선정(四禪定) 법(法)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을 안 구하면 그때는 외도에 그친 것이고 말입니다. 멸을 목적으로 해서 멸을 구하면 그것이 정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똑 같은 보시(布施)를 한다 하더라도 멸(滅)을 구하면 아까 말한바와 같이 그것이 도업(道業)인 것이고, 멸을 아니 구하고 서는 나중에 칭찬의 말이나 듣고 보답이나 받고 하는 것은 선업(善業)에만 그쳐서는 멸과는 관계가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면 해탈(解脫)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같은 행(行)도 멸을 구해서 해탈을 구하는 - 해탈을 구하면 정도인 것이고 해탈을 안 구하면 즉 유위적(有爲的)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어떠한 공리(功利)를 구하면 그때는 그것이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순교(殉敎)를 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에서는 순교를 많이 안합니까만 순교를 해도 역시 아까 말마따나 해탈을 구하고 하면 그것이 정도란 말입니다. 해탈을 못 구하고 다만 ‘인류(人類)를 위해서 한다.’ 이것은 하나의 속인들이 하는 범부의 하나의 제한된 것밖에는 못되는 것입니다.
3. 멸제(集諦)란 곧 열반(涅槃)으로서 열반(涅槃)이란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생사(生死)의 고(苦)를 출리(出離)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니 오(悟)의 과(果)다.
이는 - 이것은 - 혹(惑)은 미혹할 혹(惑)자, 혹 이것은 번뇌(煩惱)하고 똑 같은 뜻입니다.
혹업(惑業) 그러면, 미혹할 혹(惑)자, 업 업(業)자,
이는 혹업(惑業)을 멸(滅)하고 - 이것은 혹업(惑業)을 없애고서 - 다시 말하면 아까말한 탐진치(貪嗔痴) 이것이 혹(惑)입니다.
본래 혹이 없는 것을, 번뇌(煩惱)에 따라서 행동(行動)하는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이 업(業)인 것이고, 따라서 탐진치(貪嗔痴)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을 한꺼번에 말할 때 혹업(惑業) 그래요.
번뇌와 여러 가지 업을 멸하고서 생사고(生死苦)를 낳았다 죽었다 하는 삼계윤회(三界輪廻)하는 생사고를 출리(出離)하여 날 출(出)자, 떠날 리(離)자, 여의고서 떠나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우리는 진공(眞空)과 단공(但空)과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굉장히 심오(深奧)하기 때문에 자칫 개념이나 술어를 잘 못하면 오류를 범합니다. 일반 공(空) - 다 비었다 하는 허무(虛無)의 공 - 이것은 단공(但空) 그러는 것이고, 다만 단(但)자, 빌 공(空)자, 단공(但空)인 것이고, 다만 비지 않고서 공 가운데는 그야말로 신비(神秘) 불가사의(不可思議) 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功德)이 충만(充滿)해 있다. 이것이 진공(眞空)이란 말입니다.
소승(小乘)은 단공을 말하고 진공은 모릅니다. 진공은 반드시 묘유(妙有)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단공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허무에 빠져가지고 중생 제도(濟度)는 못하고 자기만 편안하고 만다 말입니다.
진공적멸의, 고요할 적(寂)자, 멸할 멸(滅)자,
적멸(寂滅)도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발동(發動)하지 않고서 영원히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 이것이 적멸인 것입니다. 멸 이것은 아까말한 바와 같이 모두를 멸하는 즉 말하자면 번뇌를 멸해 버려서 영원히 안락스럽고 영원히 안온(安穩)한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바로 영생(永生)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열반(涅槃)이나 적멸(寂滅)이나 그냥 멸(滅)이라고 하나 이것은 똑 같은 뜻인 것입니다. 영생(永生), 열반(涅槃), 적멸(寂滅), 멸(滅), 다 똑 같은 뜻입니다. 다만 표현만 달리 했을 뿐입니다.
멸(滅)이라, 오(悟)의 과(果)이다. 깨달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여기서 보아 온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조금도 합리적인 뜻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먼저 중생경계(衆生境界), 우리가 받는 것은 결국 우선 우리 중생은 고(苦) 아닙니까. 고(苦)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다른 고(苦)는 그만 두고라도 인간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인 생로병사(生老病死)라, 업이 있으면 결국은 태어나야 하는 것이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는 것이고, 아파야 하는 것이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한계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는 고가 있는 것인데, 그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이외도 고가 많이 있지만은 하여튼 고의 일체 원인은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번뇌와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行)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면 집(集)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고가 있고,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이 있고 말입니다. 허나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인생고만 있고 또 고의 원인이 번뇌만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뭐 살 필요가 없지요. 우리 인생이 이런 고와 집밖에 없다면 그때는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나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노이로제라든가 사회적인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이상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제법 그래도 판단은 하기 때문에 인생고는 본단 말입니다. 인생고는 보고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도 대강은 봅니다. 대강은 보지만은
인생고의 원인인 집을 우리가 어떻게 떠날 길이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못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 아니면 결국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되어야 인생고(人生苦)를 떠나서 영생(永生)의 안락세계(安樂世界)로 갈 수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멸(滅)이 있어야 만이 결국은 비로소 우리 숨통이 트인단 말입니다. 멸이 없으면 숨통이 못 트이는 것입니다. 어디가 트일 수가 있습니까?
내나야 고를 짓고, 고의 원인을 짓고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이와 같이 즉 말하자면 윤회(輪廻) 가운데서 고를 짓고 받고 또 고를 짓고, 또 윤회하고 그런 가운데서 뱅뱅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단 말입니다.
다행히 그야말로 참 석가모니 가르침 또는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해서 고를 떠나서 집(集)을 우리가 벗어버리고서 해탈의 멸이 있단 말입니다. 멸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해탈의 길, 해방되어서 갈 길을 안다는 것만 두고 보더라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의 원인을 지어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허나 그 반대의 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멸이 있고, 또 멸에 이르려면 그냥 무조건(無條件)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또 역시 이런 고집(苦集)을 고와 집을 없애는 도(道)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나야 우리가 집(集)을 지어서 고(苦)를 받으니까 우리가 멸(滅)에 갈라면 마땅히 그때는 순리(順理)로 본다고 할 때 고와 집을 멸해야 쓰겠지요.
고와 집을 멸하는 이것이 여기 있는 도(道)란 말입니다. 도제라, 팔정도란 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우리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가지 바른 길이란 말입니다.
4. 도제(道諦)
4. 도제(道諦)란 곧 팔정도(八正道)로서 능(能)히 열반(涅槃)에 통(通)하는 도(道)이니 오(悟)의 인(因)니라.
이는 능히 열반에 통하므로 도라 이름하며 바로 오(悟)의 깨달음의 원인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고의 원인은 약간씩은 좀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팔정도를 제대로 지키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하니까 팔정도에서 오는 멸(滅)의 그런 해탈(解脫)의 행복(幸福)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은 그야말로 참 불교의 대(大)·소(小) 또는 현(顯)·밀(密) - 대승(大乘), 소승(小乘), 현교(顯敎), 밀교(密敎) 말입니다. 모든 불교를 결국은 관통(貫通)해 있는 하나의 대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 이든 간에 불교 가운데 가서 이와 같이 사제법문이 안 들어 있는 데는 없습니다. 조금 더 어디다 역점을 두는가 그런 차이는 좀 있다 하더라도 사성제의 진리로 해서 일괄(一括)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따라서 사성제가 들어 있으면 그 때는 불법(佛法)의 참다운 정도 인 것이고, 안 들어 있으면 참다운 불법이 못 된다 말입니다.
첫댓글 성을 함락 시키려면 성의 구조와 능력(역할)을 잘 알아야 하고(苦), 문을 활짝 제쳐서 점령할 것이 고(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