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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기계유씨(杞溪兪氏) 원문보기 글쓴이: 유섭(炳,1946,慈,포천)
∎ 유여림(兪汝霖)의 비명(碑銘)
○ 제명 : 유여림의 비명(碑銘)
○ 저자 : 홍윤필(洪尹弼)
○ 이명 자 : 계옥(啓沃)
○ 시호 : 경안(景安)
○ 자료의 출처 : 원전서지 국조인물고 권14 경재(卿宰)
경주부(慶州府) 기계(杞溪)의 판서(判書) 유공(兪公)은 무술년(戊戌年, 1538년 중종 33년) 겨울에 졸(卒)하였고 이듬해 봄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4년에 아들 진사(進士) 유진(兪縝)이 내가 그의 선인(先人)과 뜻을 같이 한 친구라며 매우 간절히 명(銘)을 청하였다. 상사(喪事)에 도움이 많았고 또 세월이 흐른 것도 아니라며 명을 구하는 말이 자못 슬펐다. 공의 먼 조상 유득선(兪得瑄)이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는데 복야의 후손이 대대로 귀하게 되었다. 7대조 유선(兪僐)과 6대조 유승계(兪承桂)는 모두 판도 판서(版圖判書)이고 증조 유집(兪輯)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이며, 조(祖) 유해(兪解)는 증 이조 참판(吏曹參判)이다. 첨지중추(僉知中樞) 유기창(兪起昌)을 낳으니 곧 공의 고(考)요, 중추가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 구안우(具安遇)의 딸과 혼인하여 병신년(丙申年, 1476년 성종 7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 모부인(母夫人)이 세상을 뜨자 중추를 모시는 여자에게서 자랐는데 어린 나이에도 능히 분발하여 힘써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무오년(戊午年, 1498년 연산군 4년)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6년 뒤 갑자과(甲子科)에 발탁되었다. 이재(吏才)가 있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봉교(奉敎)에 이르렀고 스승의 자질이 있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직강(直講)에 보임되었으며 한형윤(韓亨允)과 고형산(高荊山)을 보좌하여 편장(褊將)이 되었는데 모두 나라의 그릇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또 공리(共理, 행정)를 시험하기 위하여 단양(丹陽)과 한산(韓山) 두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백성을 기르는 소임을 다하여 한(漢)의 순리(循吏, 바르고 성실한 관리)라 지목되기도 하였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ㆍ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ㆍ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ㆍ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ㆍ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을 거치면서 법을 집행하고 간하는 말을 올리고 보호하고 강론함에 있어 모두 조정의 중요한 직책이었으나 재능이 주밀하고 바탕이 넓어 쓰임에 옳지 않은 것이 없었다.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로 승진 임명되었다가 우승지(右承旨)로 옮겼고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병술년(丙戌年, 1526년 중종 21년)에 특명으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에 제수되어 여러 해 옮기지 않았으니 임금의 돌봄이 이에 있었고 유신(儒臣)들이 의지해 존중하였다. 기축년(己丑年, 1529년 중종 24년)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특별히 임명되었고 신묘년(辛卯年, 1531년 중종 26년)에 또 예조 판서(禮曹判書) 겸 세자빈객(世子賓客)에 임명되었다. 공은 식견이 은미하고 생각이 멀었다. 본래 세상의 흐름을 우려하여 당시 권세들의 꺼리는 바 되었으나 감히 항의하다가 소신을 펼 수 없게 되자 시골로 물러나 살면서 문을 닫고 손을 사절하기 거의 7년이었다.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 겨울에, 임금이 하교하기를, “유(兪) 아무개는 대임(大任)을 맡길 만 하다.”고 하여, 불러 예조 판서를 삼고 지경연 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와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하게 하였다. 공이 처음 떠날 때에는 은미를 깨닫고 사람을 피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돌아오게 되어서는 화가 아무개로부터 말미암았다고 그 사람을 허물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이러므로 더욱 존중하였다. 공은 바탕이 순후(純厚)하고 몸가짐이 장중(莊重)하였다. 집에서는 효제(孝悌)의 도를 다하였고 벼슬에 나아가서는 공각(恭恪)의 뜻에 힘썼다. 생각은 치밀하였고 처단은 정확하였으며 청요(淸要)와 내외 관직을 두루 거쳤다. 성(省)의 차관, 조(曹)의 장관으로서 가는 곳마다 정적(政績)을 올렸다. 성품이 담박한 것을 좋아하고 분화(紛華)를 싫어하였으며 스스로의 보양(保養)은 검소하였고 분수에 맞게 행동하였다. 부호의 화려함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물들 것처럼 여겼고, 외로이 바닷가에 살면서 갈매기와 벗을 하였다. 한가로이 지난 역사를 읽으면서 송기(宋紀)를 더욱 좋아하여 사정(邪正)의 논의를 살펴 치란(治亂)의 낌새를 증험하였으며 깊이 먼 생각에 잠겨 세월의 흐름을 안쓰러워하였다.
역리(驛吏)가 치사(馳使, 갑자기 파견된 사자)가 고을로 들어갔다는 것으로 보고하면서 놀라고 두려워하는 낯빛이었으나 공은 평범하게 여기면서 찾아 주워 모으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궁중에 입대(入對)해서는 강론하고 부연하였으며 물러 나와 옛집에 들어가니 손과 벗이 찾아와 맞이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해서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갑자기 관복(官服)을 벗고 세속을 멀리하여 가슴이 깨끗해서 조금의 미련도 없는 듯 하였으니 그제야 인간 세상에서의 순조롭지 못한 경계(境界)가 공에게는 근심거리나 즐거움이 될 수 없음을 안 지 오래이다. 일찍이 말하기를, “시인(詩人)의 경우 대부분 경박한 사람이 많다.” 하였다. 시를 읊조리는 것을 보진 못하였으나 짓는다면 정교해서 족히 읊조릴 만하였으니 대체로 공의 재예는 대부분이 덕에 가리어 미처 알지 못하는 경우가 이와 같았다. 아! 이제야 공을 알겠으니 나의 말은 구차한 것이 아니다. 공은 벼슬하기 전 이미 시망(時望)이 있었고 경장(卿長)이 되어서는 공이 의정(議政)의 소임에 이를 것이라는 조정의 논의는 모두 그러하였으며 민망(民望)은 더욱 많았으나 하늘이 갑자기 빼앗아 가니 운명이다. 공의 휘(諱)는 여림(汝霖)이고 자(字)는 계옥(啓沃)으로 향년 63세이며 시호는 경안공(景安公)이며 고양(高陽)의 관산(館山) 불암동(佛岩洞) 축좌 미향(丑坐未向)의 원(原)에 장사지냈다. 공은 증 판서(判書) 성담명(成聃命)의 딸과 혼인하여 4남을 낳으니 유관(兪綰)ㆍ유진(兪縝)ㆍ유강(兪絳)ㆍ유륜(兪綸)으로 음기(陰記)에 자세히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세상을 다스리는 수단 실제로 현인(賢人)에게 의뢰하는데, 구비했으면서도 크게 시행하지 못하였음은 시세가 어찌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명군(明君)과 시기를 만났으나 어찌해 나이를 더 주지 않았는가? 공이 화려한 성(省)에 올라 한 번 울리자 하늘 높이 날았네. 주식(酒食)을 장만하여 봉양하면서 차라리 집에서 먹기를 의뢰하였네. 쌓은 덕은 인망(人望)이 매여 있고 큰 도량은 사물을 용납하였다네. 계획은 크고 넓었고 지모는 깊고 넉넉하였네. 복잡한 일의 처리는 사리에 맞아 사람들이 감복하였고 칼을 놀림에 망가짐이 없어 대나무 두어 마디를 지나간 듯 하였네. 곤궁에 처했어도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남쪽의 바닷가였다네. 귀밑머리 세고 눈에 티가 듦은 어찌 내 몸을 위해서였던가? 척서(尺書)로 길을 재촉하여 전각(殿閣)을 우러러보았네. 따스한 햇볕은 추위를 물리쳤고 만물은 봄기운에 젖었네. 다시 예조(禮曹)의 장(長)이 되어 옛 제도 다시 새로워졌네. 경륜의 직책 더해지고 아침저녁으로 모시었네. 국가는 노성(老成)한 이를 의지했고 재상의 집은 깊고 빛이 났다네. 일이 공허한 데로 떨어지니 한 차례의 허황한 꿈처럼 갑자기 쓰러졌네. 쌓은 것 모두 펴지 못하니 많은 사람 깊이 애석히 여기네. 그러나 경사는 다함이 없어 자손들 아름답고 향기롭다네. 명성을 세워 집안으로 전하니 그 뒤를 점칠 수 있다네. 불암(佛岩)의 크고 넓은 곳에 산은 그윽하고 물은 깊은데, 이수(螭首)가 우뚝하니 덕음(德音)을 싣는다네.
2) 서흥도호부사공 유진(瑞興都護府使公 兪縝)
유진[兪縝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은 경안공(景安公) 유여림(兪女霖)의 둘째 아들로 자(字)는 진지(縝之)이다. 부인 우씨(禹氏)는 단양(丹陽)이 본관(本貫)이고 우윤근(禹允勤)의 딸이다 유진의 동생 숙민공(肅敏公) 유강(兪絳) 또한 관직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병난 중(丙亂 中)에 집안의 기록(記錄)이 없어져 생몰년을 비롯하여 그의 이력(履歷)이나 일생을 알 수 없다. 다만 내직(內職)으로 호조낭청(戶曹郎廳)을 지냈고 외직(外職)으로 서흥부사(瑞興府使)를 지냈다는 것만 확실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에 유여림(兪女霖)의 묘와 신도비(神道碑, 고양시 향토유적 제15호)가 있다. 유여림의 둘째아들 유진이 배위인 단양우씨를 합장한 쌍분이 그 좌측 기슭에 있다. 봉분 중앙에는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화사석(火舍石)은 화창(火窓)이 없는 장명등(長明燈)이 배치되어 있다. 특히 육각형(六角形)의 향로석(香爐石)은 조각기법(彫刻技法)이 우수(優秀)한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장명등의 규모는 높이 202cm이다. 봉분 앞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 한쌍(一雙)씩 세워져 있다. 봉분(封墳) 좌측(左側)에 1752년(영조28년)에 세워진 묘비(묘비)는 장방형(長方形) 비대(碑臺)위에 월두형(月頭形) 비신(碑身)을 갖췄다.
묘비(墓碑) 전면(前面)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서흥도호부사(瑞興都護府使) 유공진지묘(兪公縝之墓) 라 기록되어 있고 묘비(墓碑)의 찬자(撰者)는 유진(兪縝)의 6대손인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이고, 서자(書者)는 7대손인 유언휘(兪彦徽)이다 후면(後面)의 음기(陰記)에서 유진(兪縝)의 6대손 유척기(兪拓基)는 비록 기록(記錄)이 모두 소실(燒失)되어 유진(兪縝)의 자세(仔細)한 행적(行績)을 알 수는 없지만 그의 후손(後孫)들이 영달(榮達)한 것으로 보아 유진(兪縝)의 사람됨을 능히 짐작(斟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조상(祖上)의 계보(系譜)를 적지 않은 것은 부친(父親)인 경안공(景安公) 신도비(神道碑)에 이미 기재(記載)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3) 진사(進士) 휘 륜(諱 綸) <1516~1548>
1550년(명종 5년)에 부제학(副題學) 진복창(陳復昌)이 지은 묘표문(墓表文)에 따르면
“진사((進士) 륜(綸)은 여러 형제들과 더불어 나와 함께 공부하였다. 그런데 진사는 얼굴이 미남인데다 기도는 대단히 깊었다. 사람들과 더불어 음주를 즐겼는데 덕망이 있었다. 집에서는 밖에서나 기쁘고 즐거움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심중(心中)이 깊어서 사람들이 속을 들어다 보지 못하였다. 대과에는 급제하지 못했어도 사람들은 그릇으로 보아 대성하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1548년(33세)에 진사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조문하였다. 술 한 잔 올리고 눈물거두고 재배하며 생각하니 생사(生死)의 이치는 한 가지인지라 유명을 상감하게 된다. 내가 진사의 형과 더불어 상대하며 음읍하는 모양을 진사는 알 것이다“라고 하였다.
4) 진사공 파조(波祖) 휘 함(諱 涵) <1526-1581>
공의 자(字)는 덕용(德容)이고 생부(生父)는 숙민공(肅敏公) 호조판서(戶曹判書) 휘 강(諱 絳)이며 생모(生母)는 의령남씨(宜寧南氏) 주부(主簿) 숭원(崇元)의 따님이다. 중부(仲父) 서흥부사(瑞興府使) 휘 진(諱 縝)에게 입후(入后)되었으며 양모(養母)는 단양우씨(丹陽禹氏) 사과(司果) 윤근(允勤)의 따님이다.
관직(官職)은 1543년(중종38년)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올랐으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겸(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공의 유묵(遺墨)과 풍영정(風詠亭) 시(時)가 전해 온다. 배위(配位)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광주안씨(光州安氏) 목사(牧使) 한준(漢逡)의 따님과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평창이씨(平昌李氏)는 군수(郡守) 희현(希賢)의 따님 두 분이다.
자(子)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대숙(大俶), 2자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대수(大脩), 3자 수안군수(遂安郡守)대경(大儆), 4자 효력부위(效力副尉) 대엄(大儼), 5자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대칭(大偁), 6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대우(大佑), 7자 대중(大仲), 8자 대신(大伸), 9자 대검(大儉), 10자 증 공조참판(贈 工曹參判) 대길(大佶), 11자 통덕랑(通德郞) 대현(大俔) 12자 대임(大任)이다.
일창(一滄) 치웅(致雄)공의 편저(編著) 기계문헌(杞溪文獻)93-95쪽에 종형 홍(泓)의 만장(挽章)과 종 5세손(世孫) 영의정 척기(拓基)의 묘표문(墓表文), 6세손(世孫) 언휘(彦徽)의 글씨, 종 5세손(世孫) 최기(㝡基)와 척기(拓基), 8세손(世孫) 성주(星主)글의 각각의 묘지(墓誌)가 수록되어 있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고묘(考墓)하 미향(未向)에 있다. 종 5세손(世孫) 영의정 척기((拓基)의 글과 6세손(世孫) 언휘(彦徽)의 글씨로 묘표(墓表)를 세웠다.
5)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휘 대숙(諱 大俶) <1539~1589>
공의 자(字)는 원백(元伯)이고 부(父)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증 (贈) 의정부좌천성(議政府左贊成) 휘 함(諱 涵)이며 모(母)는 증 정경부인 광주안씨(光州安氏) 목사(牧使) 한준(漢逡)의 따님이다. 관직은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배위(配位)는 연안이씨(延安李氏)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 정화(廷華)의 따님과 진주유씨(晋州柳氏) 생원(生員) 계선(繼先)의 따님 두 분이다. 자(子)는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효증(孝曾), 2자 우증(友曾), 통정(通政) 제증(悌曾), 무과 관수문장(官守門將) 귀증(貴曾)이다. 불행이 묘가 실전(失傳)되어 설단을 마련하였다. 종9대손(從九代孫) 치형(致亨)의 비문이 기계문헌(기계문헌) 96쪽에 수록되어 있고 비음기로 기록되어 있다.
6) 수안군수 휘 대경(諱 大儆), <1551~1605>
공의 자(字)는 성오(省悟)이고 호(號)는 엄옥헌(嚴玉軒)이다. 부(父)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증(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휘 함(諱 涵)이며 모(母)는 증 정경부인 광주안씨(廣州安氏)는 목사(牧使) 한준(漢俊)의 따님이다. 관직은 1576년(선조9) 생원시(生員試)와 159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수안군수(遂安郡守)을 역임하였고 자헌대부 (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수사(水使) 흠례(欽禮)의 따님이다. 자(子)는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양증(養曾)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관산동 증조고 묘 좌 제삼강 정향(丁向)에 합폄(合窆)되어 있다. 기계문헌(杞溪文獻) 104~105쪽에 연안 이정구(延安 李廷龜)의 만장(挽章)과 손(孫) 계(棨)의 글로 행장과 종7세손 성주(星主)의 묘지문(墓誌文)이 수록되어 있고 9세손 치흥(致興)의 글(謹識)을 10세손 진성(鎭成)의 글씨(敬書)로 묘표석이 단기(檀紀)4301년(무신, 서기 1968년)에 세워졌으며 이 때 문중의 간사(幹事) 는 12세손 정식(貞植)이었다.
7) 사헌부 감찰 휘 대우(諱 大佑) <1575~1641>
공의 자(字)는 사길(士吉)이고 부(父)는 성균진사(成均進士) 증 (贈)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휘 함(諱 涵)이며 모(母)는 증 정경부인 평창이씨(平昌李氏)는 군수(郡守)희현(希賢)의 따님이다. 관직은 1606년 생원(生員)에 급제하여 봉열대부(奉列大夫) 창령현감(昌寧縣監) 대구진관(大邱鎭管) 병마동첨절제도위(兵馬同僉節制都尉)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사후에 통훈대부 사복시정(通訓大夫 司僕侍正)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는 평산신씨(平山申氏) 군수(郡守) 무갑(茂甲)의 따님이다.
자(子)는 기증(企曾), 증 좌승지(贈 左承旨) 차증(次曾)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고묘하 병향(丙向)에 있다. 현손 이중(頤重)의 글로 음기하고 6세손 한위(漢緯)가 추기(追記) 묘지했고 다시 족손 영의정 척기(拓基)가 묘지를 찬(撰)하였다. 기계문헌(杞溪文獻) 122쪽에 만장(挽章), 묘표(墓表), 묘지(墓誌)글이 수록되어 있다. 현 묘표석은 현손 이중(頤重)의 글(謹識)을 당시 5대손 통훈대부 전(前) 세자시강원 보덕 언술(彦述 : 장헌공)이 글자를 써서(謹書) 음기(陰記)하여 승정기원 후 재 계유(1693년) 2월에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693년은 장헌공의 생졸(1773~1773)로 비교하니 숭정기원 후 삼계유(1753년)인 2월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3. 관산동 산 70-3 소재 묘역
1) 증(贈) 기계부원군 관(諱 綰) <1499~1534>
공의 자(字)는 관지(綰之)이다. 부는 예조판서(禮曹判書)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
시호(諡號) 경안공(景安公) 휘 여림(女霖)이고 모(母)는 창령성씨(昌寧姓氏)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담명(聃明)의 따님이다. 관직은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느나 일찍 세상을 떠 났고 증(贈) 영의정(領議政)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배위(配位)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은 의령남씨(宜寧南氏)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의 손녀이자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 충세(忠世)의 따님이다. 자(子)는 증(贈) 영의정(領議政) 단성현감(丹城縣監) 호(灝)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 좌의정(左議政) 홍(泓)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신계현령(新溪縣令) 순(洵)이다. 사위는 찰방(察訪) 윤중희(尹重喜)와 판관(判官) 홍탁(洪濯)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0-3 소재, 진좌 술향(辰坐 戌向)에 있다.
묘표(墓表)는 1576년(선조9) 10월에 여성군(礪城君) 송인(宋寅)이 찬(撰)한 글로 묘갈을 세웠으나 391년의 장구한 세월로 비, 바람에 빗돌이 마모(磨耗)되어 단기(檀紀) 4300년[정미년(丁未年), 서기 1967년) 10월에 11대손 전(前) 대종회장 일창(一滄) 휘 치웅[(諱 致雄 - 전(前) 문장(門長)]의 글씨로 문중 일가들이 뜻을 모아 개립(改立)하였으며 이 때 문중의 유사(有司)는 12대손 진용(鎭用)과 14대손 달식(達植)이었다.
成均生員 贈純忠積德兼義補祚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杞溪府院君> 兪公諱綰
성균생원 증 순충적덕 겸 의보조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기계부원군 유공 휘 관
<墓碣陰記>
公姓兪氏。諱綰。字綰之。杞溪人。高麗版圖判書僐之後。曾祖諱解。贈吏曹參判。祖諱起昌。僉知中樞。考諱汝霖。禮曹判書。諡景安。妣昌寧成氏。公生弘治已未。篤學窮經。中嘉靖戊子司馬。竟不第以歿。年三十六。葬高陽郡, 東館山里. 先塋之側, 辰坐戌向之原。
公沈重有識量。而待人接物。寬平和易。景安公遇朝廷大事。必與之議, 雖在布衣。期以公輔。不幸早世。咸嗟惜之。配宜寧南氏。贈司僕正忠世之女。秋江居士孝溫之孫。端莊溫惠。 動有禮則。後公四十二歲而終。享年七十六。萬曆乙亥四月。合葬公墓。
有三男二女。男長灝。唐津縣監。次泓。開城留守。次洵。牙山縣監。女適察訪尹重喜。生員洪濯。唐津四男一女。曰大禧, 大祺, 大祿, 大禎。壻生員閔宗彬。留守四男一女。曰大述, 大建, 大進。餘幼。牙山一男四女。男大頣。壻安昶朴安命。餘幼。察訪二女。壻察訪沈日將, 監察權仁慶。生員一男三女。男舜佐。壻李愼孝, 鄭龜齡。監役金好男。內外曾孫三十餘人。以留守貴。贈公吏曹參判。南氏貞夫人。
萬曆四年 丙子 十月 日, 奉憲大夫 礪城君 宋寅(字 明中, 號 頤庵, 礪山人礪城尉, 諡號文端)敬識幷書
<묘갈음기>
공의 성은 유씨로서 휘는 관이며 자는 관지이다. 기계인 고려 판도판서 휘 선의 후손이다. 증조고는 휘 해로서 증 이조참판이며, 조고 휘 기창은 첨지중추부사(중추부 정3품 당상관)이다. 고의 휘는 여림으로서 예조판서이고 시호는 경안이며 비는 창녕 성씨이다. 공은 홍치 기미년(1499년, 연산군 5년)에 학문에 독실하고 경학을 깊이 연구하여 가정 무자년(1528년, 중종 23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끝내 대과에 급제하지 못한 채 36세에 별세하였다. 고양군 동쪽 관산리 선영의 곁 진좌 술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다. 공은 침착 중후하며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남과 교제(交際)에 있어 너그럽고 평온하며 온화하고 평이하였다. 경안공께서 조정의 대사를 만나면 반드시 논의에 참여하였으니 비록 포의의 선비로 살았어도 정승의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일찍 별세하니 모두가 애달프고 안타깝게 여겼다. 배위 의령남씨는 증 사복정 남충세의 따님으로서 추강 남효온의 손녀이다. 용모가 단정하고 가지런하며 마음씨가 따사롭고 은혜로웠으니, 행동거지에는 예절과 법도가 있었다. 공의 사후 42년이 되어 별세하였으니 향년 76세였다(1월 23일). 만력 을해년(1575년, 선조 8년) 4월에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슬하에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호는 당진현감(단성현감, 증 영의정)이고, 차남 홍은 개성유수(좌의정, 기성부원, 시호 충목)이며, 삼남 순은 아산현감(신계현령, 증 이조참판)이었다. 1녀는 찰방 윤중희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생원 홍탁(판관)에게 출가하였다. 당진현감(단성군)은 4남1녀를 두었는데 대희(첨지중추부사), 대기(동 중추부사, 증 찬성, 함원군, 시호 양간) 대록(봉사, 증 병조참판) 대정(문과, 병조참판)이라고 한다. 사위는 생원 민종빈이다. 개성유수(충목공)는 4남1녀를 두었는데 대술(첨정, 증 호조참판, 기천군) 대건(문과, 대사간), 대진(문과, 공조참의, 증 이조판서)이라하고 나머지는 어리다. 아산현감(신계공)은 1남 4녀를 두었는데 대이(종사랑)라하고, 사위는 안창과 박안명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찰방(윤중희)은 2녀를 두었는데 사위는 찰방 심일장, 감찰 권인경이다. 생원(홍탁)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홍순좌이고, 사위는 이신효, 정귀령, 감역 김호남이니, 내외 증손들이 30여 인이다. 개성유수(충목공)가 존귀하게 되어 공은 이조참판을, 부인 의령남씨는 정부인을 증직 받았다.
만력4년 병자(선조 9年, 1576年) 십월 일, 봉헌대부 여성군 송인(자 명중, 호 이암, 여산인, 여성위, 시호 문단)공경히 표지하고 아울러 쓰다.
<註> 기계부원군 묘갈을 짓고 묘갈에 글씨를 쓰신 분
송인(宋寅)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명중 (明仲), 호는 이암(頤庵). 영의정 질(軼)의 손자이며, 지한(之翰)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의령남씨(宜寧南氏)이다. 어려서 어머니가 죽자 외가에서 자랐다. 10세에 중종의 셋째서녀인 정순옹주(貞順翁主)와 결혼하여 여성위(礪城尉)가 되고, 명종 때 여성군(礪城君)에 봉해졌다. 의빈부·충훈부·사옹원·상의원 등에서 요직을 역임하고, 도총관에 이르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이황(李滉), 조식(曺植), 이민구(李敏求), 정렴(鄭𥖝),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였으며, 만년에는 선조의 자문 역할을 하였다.
글과 글씨에 능하여 산릉 (山陵)의 지(誌)와 궁전의 액(額)으로부터 사대부의 비갈(碑碣)에 이르기까지 많은 글과 글씨를 남겼다. 그는 특히 오흥(吳興)의 필법을 받아 해서를 잘 썼다고 한다. 저서로는 《이암유고》 12권 4책이 있다. 그의 글씨는 양주의 덕흥대원군신도비(德興大院君 神道碑), 송지한 묘갈(宋之翰墓글), 남원의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부안의 김석옥 묘비(金錫沃墓碑), 여주의 김공석 묘갈(金公奭 墓글), 남양의 영상 홍언필비(領相 洪彦弼碑), 광주(廣州)의 좌참찬 심광언비(左參贊沈光彦碑) 등에 전한다.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2) 단성공파 파조(派祖)휘 호(諱 灝) <1522-1579>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백순(伯醇)이다. 부(父)는 기계부원군(杞溪府院君) 증(贈) 영의정(領議政) 휘 관(諱 綰)이고 모(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의 손녀요, 증(증) 사복시정(司僕寺正) 남충세(南忠世)의 따님이다. 공의 관직은 당진현감(唐津縣監)과 통진현감(通津縣監),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지냈고 자손들이 임진왜란 극복에 크게 공을 세우면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현령(縣令) 수온(守溫)의 따님이다.
자(子)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대희(大禧), 동지부총관(同知副摠管) 증(贈) 좌찬성(左贊成) 호성원종공신 함원군(咸原君) 대기(大祺) 봉사(奉事)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대록(大祿)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 위성원종공신(衛聖原從功臣) 대정(大禎)이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3-3 소재 술향(戌向)에 합폄(合窆)되어 있다.
묘전(墓前)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상락부원군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짓고 여성위(礪城慰) 송인(宋寅)이 글씨를 쓴 비석(碑石)이 있었는데 단기(檀紀)4300년[정미년(丁未年) 1967년) 10월에 10대손 전(前) 대종회장 일창(一滄) 휘 치웅[(諱 致雄 - 전(前) 문장(門長)]의 글씨로 문중 일가들이 뜻을 모아 개립(改立)하였으며 이 때 문중의 유사(有司)는 11대손 진용(鎭用)과 13대손 달식(達植)이었다.
通訓大夫 行丹城縣監兼 晉州鎭管兵馬同僉節制都尉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 領經筵 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兪公諱 灝
통훈대부 행단성현감겸 진주진관병마동첨절제도위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겸 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유공 휘 호
<墓表陰記>
君諱灝。字伯醇。杞溪人。高麗版圖判書諱僐之後。曾祖諱起昌。僉知中樞。祖諱汝霖。禮曹判書。考諱綰。贈吏曹參判(屢贈至領議政, 杞溪府院君)。妣貞夫人。宜寧南氏(贈司僕正, 忠世之女)。秋江孝溫之孫。君生於嘉靖壬午(中宗十七年, 七月十九日)。
少力學。年十三。丁外艱。服闋。又遭祖父母喪。哀毁得疾。遂廢擧子業。嘉靖癸亥(明宗十八年)。蔭補繕工監監役。隆慶戊辰(宣祖元年)。陞軍器主簿。拜司憲府監察。調通津縣監。辛未。復除監察。壬申。遷唐津縣監。萬曆乙亥(宣祖八年)。丁內艱。戊寅。復宰丹城。己卯正月丙寅。歿于官。年五十有八。
天資厚重。外柔內剛。慮事周。接物平。事母養其志。處兄弟極其友愛。與人交。重然諾。周其貧乏。至於居官恪謹。所至有惠愛。通畿邑也。權貴之家。不服徭役。齊民偏苦。君下車。慨然以均役爲急。唐。傍海之地。先是守令。差徵無藝。一境幾虛。欠逋至於六百。君盡心奉職。流民還集。官儲已盈。在丹三月。治績可觀。反歿。邑人如喪親戚(丹城縣,至今有善政碑)。
配淑人。淸州韓氏(後贈正敬夫人)。縣令守溫之女。靑陽君致義之曾孫。靖莊儉勤。事姑盡禮。佐君無違。居窮守約。處之晏如。先君二十五年卒(乙卯二月二十九日)。年三十有七。己卯三月戊辰。合葬于高陽郡治之東館山里, 辰坐戌向之原。從先隴也。
有四子一女。長大禧(僉中樞府使)。次大祺(武同中樞府使 贈左贊成, 諡良簡, 咸原君)。次大祿(奉事, 贈吏曹參判)。次大禎(文兵曹參判)。女適生員閔宗彬(參奉)。大禧生三男一女。
達曾(武郡守),迪曾(早夭),遜曾(早夭)。女未行(參判 古城李成吉妻)。大祺生二男二女。尙曾(判官)。若曾(通德郞), 女皆幼。大祿生四男。魯曾(直長 贈執義), 昔曾(文全羅監司), 晉曾(文左承旨), 耆曾(早夭)。大禎生一男一女。未曾(後改守曾, 文掌令 贈吏曹參判)。女幼。
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尙州金貴榮(字 顯卿, 號 東園, 左議政, 上洛府院君)撰, 礪城君, 宋寅書
<묘표음기>
군의 휘는 호이고 자는 백순이며, 기계인 고려판도판서 휘 선의 후손이다. 증조고는 휘 기창으로 관은 첨지중추부사였으며, 조고는 휘 여림으로 예조판서이다. 고는 휘 관으로 증 이조참판(여러 번 증직이 가해져 영의정, 기계부원군에 이르렀다) 비는 정부인 의령남씨(증 사복정 남충세의 따님)로서 추강 남효온(생육신)의 손녀이다. 군은 가정 임오년(중종 27년 7월 19일, 152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학문에 힘썼는데 13세에 부친상(外艱)을 당하여 복상을 마치자마자 조부모상을 만났다. 몹시 슬퍼하여 병을 얻게 되자 마침내 과거의 학업을 그만두었다. 가정 계해년(명종 18년, 1563년)에 음보로 선공감 감역에 나아가, 융경 무진년(선조 원년)에 군기주부에 오르고 사헌부 감찰을 제수되었으며, 통진현감으로 옮겼다. 신미년에는 감찰에 다시 제수되었다가 이듬해 임신년에 당진현감에 천거되었다. 만력 을해년(선조 8년)에 모부인상(內艱)을 당해 복상을 하였고, 무인년 단성현감에 복직되었는데 이듬해 기묘년 정월 병인에 관아에서 별세하였으니 향연 58세이었다.
타고난 자질이 중후하여 겉으로는 부드러우면서도 마음은 꿋꿋하고 강하였다. 일을 고려함이 주밀하고 외물에 접촉함이 반듯하였다. 모부인을 뜻으로써 봉양하였고 형제간에 처함이 우애를 극진히 하였다. 남들과의 교유에는 일단 승낙한 일에 신의를 중히 여겼고, 가난하고 궁핍한 처지에서도 일을 잘 주선하였다. 관직에 나아가 몸을 삼가는 정성으로 임했고, 지향하는 바는 백성을 은혜롭게 사랑하는 것에 있었다. 경기일대 읍락을 통 털어 권문세가들은 요역(徭役)을 복역하지 않아 서민들에게 편중되어 그 부담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군은 거마에서 내자마자, 개연히 부역을 균등히 하는 것을 급선무로 여겼다. 당진은 바닷가에 있는 지방인데, 전임 당진현감이 조세를 차등적으로 징수하는 무능을 드러냈다. 이로 인해 한 지역의 세수가 거의 비어 체납된 액수[欠逋]가 무려 육백 냥에 이르렀다. 군은 이를 바로 잡기위해 마음을 다해 봉직하자 다른 지역으로 떠돌던 백성들이 되돌아 와 모여들었다. 그리고 관청의 비축물자들은 창고에 이미 가득 차게 되었다. 단성현감으로 봉직한 3개월 동안 치적이 볼 만하였는데 갑자기 별세하게 되자 읍인들은 친상을 당한 것처럼 애도하였다(단성현에는 지금도 선정비가 남아있다).
배위 숙인 청주한씨(후에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는 현령 한수온의 따님으로 청양군 한치의(韓致義)의 증손이다. 조용하고 가지런하며 검소하고 부지런하였고, 시어머니 공양은 예를 다하였고 부군에 대한 내조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았다. 궁핍하게 살면서 절약하였고 거처는 편안하고 침착하였다. 부인은 군보다 25년 앞서 별세하였으니 37세였다. 기묘년 3월 무진에 고양군 관내 동쪽 관산리 진좌술향의 언덕에 합장하여 선영에 따랐다. 슬하의 자녀들은 4남 1녀인데, 장남은 대희(첨중추부사), 차남은 대기(무과, 동중추부사 증 좌찬성, 시호 양간, 함원군), 삼남은 대록(봉사, 증 이조참판), 사남은 대정(문과, 병조참판)이며 딸은 생원 민종빈(참봉)에게 출가하였다. 장남 대희는 2남 1녀를 낳았는데 달증(무과, 군수), 적증(어려서 요절), 손증(어려서 요절)이며 딸은 출가하지 않았다(참판 고성 이성길처). 차남 대기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상증(판관), 약증(통덕랑)이며 딸들은 모두 어리다. 삼남 대록은 4남을 낳았는데 노증(직장, 증 집의), 석증(문과 전라감사), 진증(문과 좌승지),기증(어려서 요절)이다. 사남 대정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미증(후에 수증으로 고쳤다. 문과 장령 증 이조참판)이며 딸은 어리다.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상주 김귀영(자 현경, 호 동원, 좌의정, 상락부원군)이 글을 짓고, 여성군 송인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