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 미술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노피니의 결혼식’
(1434년, 목판에 유화, 81.8x59.7cm, 런던 내셔널 갤러리)
권용준(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1441년)는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화가로 ‘유화’라는 기법을 창안한 사람이다. 유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계란 노른자를 채색의 용매로 하는 템페라(tempera)와 마르지 않은 회벽에 채색을 하는 프레스코(fresco)라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이런 기법들은 세밀하고 정교한 표현에는 매우 부적절하였다. 그러나 기름을 용매로 하는 유화는 인간이 보고 생각한 것을 꼼꼼하고 자세하게 묘사하도록 해주었다. 이른바 미술에서 사실주의의 실현이라는 엄청난 혁명이 일어난 것이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대표하는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인간중심적 사고의 문화혁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런 새로운 기법으로 반 에이크가 관찰한 것을 상세하게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이 ‘아르노피니의 결혼식’이다.
이 작품은 두 인물의 초상화이다. 왼쪽의 인물이 조반니 아르노피니이며 그 옆의 여인이 조반나 체나미이다. 아르놀피니는 성공한 상인이며 체나미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당시 벨기에에 살고 있던 이탈리아인들이다.
이 그림은 주인공들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크고 검은 차양이 달린 모자를 쓰고 모피가 달린 짙은 갈색의 빌로드 코트에 검정색 스타킹을 신은 아르놀피니는 긴 코와 뾰족한 턱, 음험한 사시(斜視)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습이 결코 신뢰감이 가지 않고 성격 또한 음험하게 보인다. 반면 흰색 미사보를 쓰고 정교하게 디자인 된 멋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체나미는 순진하고 청순하면서도 고지식하고 냉랭한 여인의 이미지로 정숙한 성품을 보이고 있다. 이 여인의 배는 임신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복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귀족이나 신흥 부르주아들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는 번잡하고 혼란스런 결혼식보다는 최소한 두 명의 증인만 있으면 되는 자기들만의 조용한, 이른바 비밀 결혼식을 선호하였다.
지금 신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조형성 곧, 두 인물을 정면으로 보이도록 묘사하려는 것으로 이해하더라도, 신랑이 왼손으로 신부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영 거북하다. 이른바 ‘왼손의 서약’인 이것은 귀천상혼(貴賤相婚)으로 인한 결혼의 성스런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행위이다. 이 왼손의 결혼서약은 신랑이 신부에게 상속의 의무를 갖지 않는 일종의 거짓 서약이다.
여하튼 이 그림이 결혼의 순간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그 속에는 결혼에 관한 그리스도교와 민속적 상징들이 가득한데, 유화 기법으로 매우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선 천정의 샹들리에를 보면 촛불이 하나만 켜져 있다. 이는 하느님의 눈을 상징한다. 곧 아무리 비밀 결혼식이라 하더라도 혼인은 일종의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성사(聖事)로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서 입회하고 계심을 뜻한다. 물론 신방을 밝히고 있는 촛불은 민속적으로는 신부가 기원하는 다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산의 기원은 신부가 입은 드레스의 녹색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창문 앞의 탁자에는 사과인지 오렌지인지 과일이 놓여있다. 이들이 만약 사과라면 금단의 열매로 인간의 지식에 눈을 뜨는 원죄를 뜻하며, 동시에 이 성사를 통해 이들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렌지라면 원죄 이전의 수수한 무구(無垢)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들 주인공들이 지중해 국가 출신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들이 취한 화면 중앙의 손은 그리스도교가 결혼에 두는 중요한 비중을 보여준다. 바로 그 손의 윗부분에 하느님의 눈이 있다는 성사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 발치의 강아지는 배우자에 대한 강한 애정과 정절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벽의 크리스털 묵주는 순결과 덕성, 그리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부의 의무를 상징하는데, 당시 신랑이 신부에게 흔히 선물하던 물건이다. 이 묵주와 침대는 완전한 부부관계 곧, 결혼으로 두 남녀의 정신적 · 육체적 결합을 의미한다. 특히 침대는 인간이 출생하고 죽는 곳으로 자식을 통한 생명의 전수와 재산의 상속이라는 영(靈)과 물(物)의 지속성을 암시한다. 이들이 신을 벗고 맨발로 있는 것은 ‘성스러운 지상’에 있다는 종교의식의 진행을 의미한다.
침대머리 기둥 윗부분을 보면 용을 밟고 있는 여인이 새겨져 있는데, 이 여인은 임신과 출산의 수호성인인 마르가리타 성녀이거나, 옷솔이 가정사를 의미하는 만큼 그 옆에 걸린 옷솔로 보아 요리나 영양 등 가정사와 주부의 수호성인인 마르타 성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성녀의 상징물은 모두 온순한 용이다.
특히 벽의 거울 내부에는 주인공들의 뒷모습과 아울러 매우 넓은 공간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두 인물이 존재한다. 푸른색 옷의 화가와 붉은색 옷의 조수가 바로 그들인데, 이들이 바로 최소한의 비밀결혼 요건인 두 명의 증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더욱이 화가가 벽면 거울 위에 “얀 반 에이크가 지금 여기에 있었다.”라고 서명함으로써 이 그림이 지닌 결혼 증명서로서의 가치를 한층 강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이 작품 속에 묘사된 오브제들은 자연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이상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각각의 오브제에 그리스도교적 상징체계를 부가함으로써 인간사 모든 일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권용준 안토니오 - 프랑스 파리 10대학교(Nanterre)에서 예술사 석사와 D.E.A. 과정을 마쳤으며, 파리 3대학교(Sorbonne Nouvelle)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샤갈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아폴리네르의 조각비평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한국디지털대학교 문화예술학과 교수이며, 미술비평가로도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