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진정 개혁주의 신학에 올곧게 서 있는 교단인가 하는 면에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비단 고신 교단만은 아닙니다. 우리네 교회의 모든 교단의 모습이니깐요. 이는 고신교단의 고신대학교를 비롯하여서 우리 나라 곳곳에 있는 각 교단 신학교[신학대학교]의 실상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혁주의 신학에서 떠나 있는 신앙은 교단에 속해 있는 교회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는 님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서도 보게 됩니다.
님의 교회는 고신 교단의 교회인데 전도 표어가 "와보라 들어보라 믿어보라"라고 적혀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님은 ""믿어보라"라는 개념에서 답답합니다"라고 하며 참으로 답답한 자신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말하였습니다. 그 까닭인즉 "믿음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아닌가요?? 믿어 보는 것은 자신의 의지 또한 들어가는 게 아닌가요??"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님의 질문을 대하고서 나도 님과 같은 동일한 심정이기에 참으로 답답하여서 한동안 손을 놓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나라 이 땅 어디에서나 믿음을 제대로 말하는 교회를 만나고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이 나라 이 땅 어디에서나 왜곡된 믿음만을 말하는 교회를 보게 되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우리네 교회가 어떻다고 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럼에도 눈으로 보게 되거나 귀로 듣게 되면 이러한 현실 앞에서 결코 속 시원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님의 교회가 내건 전도 표어 자체가 주의 깊게 신중히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와보라 들어보라 믿어보라"고 셋으로 되어 있는데, 먼저 "와 보라"를 어떤 생각을 갖고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를 뻔히 알기에 그렇습니다. 전도 표어를 "와 보라"고 내 건 것은 성경을 인용하여서일 것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 1장 39절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사역자로 자기 곁에 두시고 교육하시고 훈련하시기 위하여 열 두 제자를 부르시는 일 중에서 첫 번째로 다섯 명을 부르신 일을 하신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섯 명의 제자 들 중에 먼저 두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이 두 명의 제자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하며 구약에서의 제사가 갖고 있는 구속의 경륜에 대한 이해 속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여 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러한 두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그들은 대답하기를 "선생님(랍비), 지금 머무르고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하며 되물었습니다. 두 사람의 이 되물음은 "선생님께서 계신 그곳에 우리도 함께 가서 우리의 스승께서 선생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에 대하여 들은 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하는 의도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말씀이 "와 보라"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요한의 제자인 두 사람이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자세히 듣고 확인하고자 하기에 그런 그들과 함께 해 주시며 그들을 자신에 대한 믿음에로 이끌어 믿음에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와 보라"고 말씀하신 그 이후에는 실질적인 예수님과의 진리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머무르시는 곳에 함께 가서 그날 예수님과 같이 있었으며, 이런 그들 중에 한 사람인 안드레가 먼저 자기 형 시몬을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고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간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와 보라"는 오늘날 교회가 전도 표어에서 가장 유용하게 써먹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와 보라"고 하는 것은 소위 "내 집을 채우라"고 하는 다분히 의도적인 욕심에 의해서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은 교회(예배당)에 오게 해야 될 것 아니냐? 그래야 복음을 들려주든 어떻게 하든 할 것 아니냐?"고 하는 뜻으로 "와 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교회(예배당)에 온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든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진리에 대한 확인 없이 무조건 결신카드를 작성하게 하고 교회 가족이 된 신자로 소개를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와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스승인 요한을 통해서 구약의 경륜 하에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사상과 그 이해를 가지고 있던 두 제자를 자기와 함께 있게 하면서 그들의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지식의 믿음을 이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시는 예수께로 두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믿음을 이끄시는 것으로서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요한의 두 제자를 자신에 대한 믿음에로 이끄시고 그 믿음에 두신 것은 예수님은 요한이 증거한 그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요 그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장차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일할 사도로 세움을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와 보라"는 이전까지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을 이제부터 예수님의 제자 삼으시는(제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와 보라"는 사도행전 4장 29절에서도 다시 한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와 보라"는 앞에서의 "와 보라"와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가고자 하실 때 사마리아를 거쳐 지나가야만 했습니다. 정오쯤 되어서 예수님은 수가라는 사마리아의 한 동네 이르셨고, 이 동네에 있는 야곱의 우물에서 잠시 쉬시며 피곤하신 몸을 추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야곱의 우물에서 쉬신 것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뒤에 나오는 일에서 알 수 있는데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예배와 자신이 그리스도[사마리아 사람이 기다려 온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야]이심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에 따라서 사마리아 여자는 그리스도를 만난 데 대한 기쁨을 안고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알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만나 볼 수 있게 "와 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가진 대화에서 자신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혼들을 하늘의 곳간에 거두어 들이는 일을 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자의 말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게 되었으며, 그래서 야곱의 우물가로 달려가 예수님께 자기네 동네로 들어가 묵으실 것을 청하였고 이러한 동네 사람들의 청을 받아 예수님은 그 동네에 이틀을 머물러 묵으시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에 관하여 증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사는 사람들의 많은 사람들이 직접 듣고 예수님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사실을 알고 믿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셔서 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셨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계시해 주시고 있습니다.
위 두 기록에서 보듯이 오늘날 교회가 인용하고 있는 "와 보라"는 그리스도를 전연 알지도 못하는, 그래서 불신자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전도의 표어로서 말씀되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에서와 같이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이분이 스승 요한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였을 때 이를 허락하시며 그들을 그 믿음에로 이끄시고 그 믿음에 두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해 나갈 예수님의 제자로 삼으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요 또한 사마리아 여자가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들이 기다려온 그리스도라 하는 그 메시야가 지금 야곱의 우물에 와서 계시다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에서 나온 말이었으며,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자를 통해서 수가성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보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경에 기록되고 있는 "와 보라"를 그럼에도 교회가 전도의 표어로 인용할 수는 있습니다. 자신들이 믿음의 주로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와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해 들어보세요!"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와 보라"는 것은 님의 교회가 "와보라 들어보라...."라는 전도 표어에서 보는 대로 그야 말로 "와서 들어보세요!"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와서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인데 저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으면서 어찌 이분을 주로 부를 수 있겠으며, 또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고서야 어찌 이분을 생명의 주로 믿고 섬길 수 있겠습니까?(롬 10:13-17). 그러니 "와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보세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와 보라"는 곧 "들어 보라"는 그리스도에 대한 대명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전도집회"를 갖고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전도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파하여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째서 우리의 생명의 주가 되시는지를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와 보라, 그리고 들어 보라"고 전도 표어를 걸고 이에 그 교회의 신자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과연 "와서 들어보세요!"라고 할 때는, 자신은 사람들을 전도집회를 갖는 교회당으로 인도하는 역할만 하고 교회에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전하는 일을 하여서 사람들이 듣게 하는 역할 분담 형식이 아닙니다. 사실상 사람들을 교회에로 오게 하는 신자들의 태반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해 전도하지를 않고 교회에로 맡기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와서 들어보세요!"라고 사람들을 교회의 전도집회로 인도하는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일상 생활에서나 또는 어떤 기회를 통해서 그들과 갖는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증거하여서 그에 대한 이해와 지식을 갖게 하여 온 중에 아직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고백할 상태에 이르러있지 않음으로 교회의 전도집회란 기회를 통해서 다시 한번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설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님의 교회의 전도 표어인 "와 보라 들어 보라 믿어 보라"에서 보듯이 전도는 곧 믿음을 갖게 하는 것으로 등식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말이죠.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했으니까 이제는 너희 책임 하에 너희 할 일만 남았다. 당신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믿어서 밑질 게 없으니까 한번 믿어 보라!. 그러면 너희에게 복이 주어지는지 안 주어지는지 잘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수님을 믿을 것을 강요하면서, 그 믿음도 엉뚱한 목적으로 끌고 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였는데 전혀 하나님 나라적인 아닌 온갖 세상적인 복으로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전하게 되면 "믿어 보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서 말하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님이 궁금해 하는 대로, 만일 신자나 신자들이 함께 집회를 갖는 교회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복음으로 올바르게 전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예수님의 제자된 임무를 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전한 것으로 사람들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로 이끌고 그 믿음에 둘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란 우리가 그분을 전도한 행위의 영향과 결과의 산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까 전도가 영향을 끼치고 결과를 이끌어내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전하는 자가 있게 하시고 또한 이를 듣는 자가 있게 하시며, 그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게 하십니다. 이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때 전도는 이중적인 기능으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전도가 생명에 이르는 향기로운 냄새로 작용하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 작용합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을 얻게 하시는 일이요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에 내버려두시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뚜렷이 드러내 보여 나가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다름 아닌 전도(傳道)입니다. 그러니 전도[집회]를 하여서 어찌 사람들에게 믿을 것을 요구하거나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는 다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세상에 그분을 알게 해 줄 따름입니다. 과연 그에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생기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온 세상에 생명의 주가 되게 하신 능력을 전도란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는 행사하셔서 그 사람을 믿음에 있게 하시는 은혜[선물]로운 일을 하시는 것이요 또한 영원한 멸망으로 유기된 사람에게는 전도란 방식을 통해서 그들을 죽음에 내버려두시는 무서운 진노와 저주를 보여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님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전도는 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를 알게 해 주는 것이요 그렇듯이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심판을 알게 해 주는 것이지, 전도 그 자체가 무슨 생명의 영향과 결과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와 보라 들어 보라 믿어 보라"는 전도 표어는 아주 잘못된 표현입니다. 아무리 전도해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마음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사람의 실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전적으로 죄에 오염되고 부패하였다는 것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타락한 사람의 실존에 대한 이해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은 사람은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 죄인된 자신에 대해서나 참 신이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만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고 힘을 쓰거나 하는 일을 전혀 할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로 그 이해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고 해서 그 복음을 들은 사람 스스로 믿어 보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전연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에 호소하면서 "믿어 보라"고 말하여 이것을 권면으로나 또는 명령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은혜로운 역사를 펼쳐 나가시지 않는 한에는 그 누구도 결코 믿어 볼 수가 없습니다. 설사 자신의 생각과 의지로 믿어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를 참된 믿음에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에서 우리말 표현의 묘사가 권면이나 명령형으로 되어진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문자 그대로만 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말 번역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래서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라!"하고 하였을 때 "회개하라"는 말은 흔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로 "우리가 주님께 죄를 고백하면 무슨 죄를 지었든지 다 용서를 받는다(용서를 해 주신다)"가 아닙니다.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데서 하나님께서 먼저 나타내시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죄인을 형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저주를 외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심판을 피할 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사람은 이를 피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그 마음을 돌이켜서 무릎을 끓고 죄인된 용서를 빌면서 하나님이 벌하시는 진노와 저주의 심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의 구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너희에게 내릴 진노와 저주를 대신 다 쏟아 내리고 너희는 내 품안에 안고 화평을 누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권면하고 명령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서 그에 따라서 사람들이 마음만 먹으면 자기 마음과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알기 쉽습니다만, 이는 그런 개념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믿으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순종으로 받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누구나 다 복음을 듣고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주님, 내가 그들에게 전해 준 말을 믿은 자가 과연 있었습니까?"라고 탄식한 것입니다(롬 10:16)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유대인들에게서 보듯이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참 선민에게서 보듯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택함을 받은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고 복음에 순종하게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순종하는 마음은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나고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나 의지와는 전연 상관이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와 보라", 그리고 "들어 보라", 그래서 "믿어 보라!"고 전도 표어를 내 걸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말입니다. 필요할 경우 교회당을 전도집회 장소로 쓸 수 있습니다. 만일 상시적(常時的)으로 전도집회 장소로 쓰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공예배(公禮拜)가 "전도집회"가 아니며, 또한 그러기에 "전도집회 설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공예배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분의 몸된 생명체로 하나님을 예배[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공예배의 설교는 전도 설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는 설교요 이 설교를 통해서 세상에로 파송된 자가 되어서 하나님을 생명의 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온 세상에 선양(宣揚)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신자요 이는 또한 제자된 삶으로 연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도는 교회 그 자체가 상시적인 전도집회 기관으로서 행해져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인양 일년 내내 또는 언제까지든지 계속해서 전도 표어를 걸고 교회에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하여 그리스도와 생명의 몸을 이루었는가에 대한 신앙고백의 검증과 그에 따른 확인도 없이 단지 외형적인 교인으로 삼아 그 수(數)와 세(勢)로 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보여 나가려고 하는 것은 결코 참된 교회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네 교회요 실상은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 우리네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마다 "와 보라 들어보라 믿어 보라"고 전도 표어를 내 걸고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금년 목표는 몇 백명 몇 천명이라고 말하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성도들을 동원하여 기도하게 하며 전도하게 합니다. 매년 그 이상의 새로운 목표 수치가 정해지고, 그래서 지역에서 한국에서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은(그들은 신자라고 말하지만) 제일 큰 교회가 되고자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님이여!, "와 보라 들어 보라 믿어 보라"고 해서 과연 믿어 보는 사람들로 사람이 많고 큰 교회가 된들, 정작 하나님께서 믿음에 이르게 해서 믿는 자로서의 교회를 볼 수 없는 것에서는 그런 교회로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교회의 생명에 의한 수명(壽命)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님이여!, 이것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님과 함께 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