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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王朝史
?三皇五帝時代
3황은 일반적으로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또는 泰皇)을 가리키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를 들기도 한다. 또는 수인(燧人) ·축융(祝融) ·여와(女媧) 등을 꼽는 경우도 있다. 사마 천(司馬遷, 기원전 145?~86?)은 3황의 전설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사기(史記)》의 기술을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부터 시작한다.
사마 천이 5제로 든 것은 황제헌원(黃帝軒轅) ·전욱고양(顓頊高陽) ·제곡고신(帝嚳高辛) ·제요방훈(帝堯放勳:陶唐氏) ·제순중화(帝舜重華:有虞氏) 등이며, 별도로 복희 ·신농 또는 소호(少昊) 등을 드는 경우도 있어 일정하지 않다. 원래 이 전설은 다양한 신화 ·전설이 혼입된 것이며, 도덕적 ·정치적으로 억지로 끌어들인 것이어서 그 기원은 애매하다.
*는 우리역사
*?한국시대(桓國時代, 기원전 7197-기원전3898)
하왕조(夏王朝, 기원전 5000-기원전 1600)
*?배달국시대(倍達國時代, 기원전 3898-기원전2333)
*단군조선(기원전 2333-기원전 238)
상왕조(商王朝, 기원전 1600년-기원전 1046, 1400년경 殷으로 천도, 殷王朝)
*기자조선(기원전 1100- )
주(周, 기원전 1120-기원전 770)
춘추시대(春秋, 기원전 770-기원전 403)
전국시대(戰國, 기원전 403-기원전 221)
*북부여(해모수는 기원전 239년 4월 8일 개국)
진(秦, 기원전 221-기원전 207)
초(楚, 기원전 207-기원전 202)
한(漢, 기원전 202- 서기 8)
*위만조선(기원전 195-108)
*신라(기원전 57-서기935)
*고구려(기원전 37-서기 668)
*백제(기원전 18-서기 660)
신(新, 서기 8-25)
후한(後漢, 서기 25-220)
삼국시대(三國時代, 서기 220-280)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중국 재통일, 서기 280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서기 430-589),
북조는 기마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 점령, 통치(서기 430-589).
수(隋, 589-618)
당(唐, 618-907)
*발해(698-926)
요(遼916-1125), 거란(契丹)
*고려(918-1392)
후진(後晋, 936-946), 돌궐(突厥)
북송(北宋, 960-1127)
금(金, 1115-1234), 퉁구스족 계통의 여진족
남송(南宋, 1127-1279)
원(元, 1271-1368), 몽고족
*조선(1392-1910)
명(明, 1368-1644)
청(淸, 1644-1911), 만주족
*대한민국 광복(1945)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 )
고구려 건국사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신라는 기원전 57년,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
북한의 어느 학자는 고구려의 건국이 적어도 100여 년은 앞선다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민족사학자는 고구려 건국을 유방이 한을 건국하기 3년 전인 기원전 209년으로 보았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동쪽에는 삼족오가 그려져 있거나 태양을 이고 나르는 여인이 묘사되어 있다. 삼족오(三足烏)는 태양 가운데 있는 세발 까마귀를 상징한다.이 삼족오 또는 여인은 고구려 시조 주몽(추모)의 어머니이신 태양신이며 부여신이다. 고구려는 옛 독법에 ‘가마구지’, ‘까마귀’라는 주장도 있다.
태양신인 고구려를 언제부터 국명으로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다.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보다시피 고구려라는 국명을 고구려는 쓰지 않았다. 장수왕(서기 413-491)이 고려라는 국명을 쓴 증거로는 ‘고구려 탁경비’라고 알려진 충북 중원군에 있는 고구려비가 있다.
‘사기’ 흉노전에 의하면 모돈은 아버지 두만선우, 계모, 이복 동생들과 자기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고 자립하여 흉노국을 개국하였다. 이 사실을 ‘역림’은 “외로운 세 발 까마귀가 영이로운 신명을 앞세우고 나아가, 잘못을 심판하고 사악함을 처벌하니, 스스로 자기 집안을 도륙냈다.” 기원전 246년의 사건이다.
초씨역림(焦氏易林)(前漢昭帝, 기원전 86 - 74 때의 역학의 대가인 焦延壽의 저서)에는 모돈(冒頓)이 모두(모頭)로 되어 있으며 여인이라 하였다. 즉 흉노 모돈은 전술, 전략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여인이며 당시에 까마귀, 즉 고구려라 불렸다. 즉 흉노국은 ‘고구려’라는 여인이 건국한 나라이다. 고구려의 아들 추무(주몽)가 남하하여 ‘해본’에 건도하여 국가를 이루었다. 현토는 해본의 또 하나의 독법이다. 고구려의 해본은 즉 日本이다.
주몽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확실하지만 언제인지는 확실지 않다. 그러나 주몽이 피신하여 남하하게 되는 것은 반대파에 몰린 ‘고구려’의 죽음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즉 주몽이 건국한 연도에 삼족오가 죽었을 것이다.
우리의 조상은 예맥족이며 漢족이나 만주계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민족이다. 중국 측은 고구려는 기원전 3,000년경에 해당하는 3황5제의 하나인 전욱(고양씨라고도 함)이 요서지방 고양에 수도를 두었다가 이들이 중원으로 이동할 때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구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전국시대에 쓰여진 역사책으로 서주시대를 다룬 『일주서』에 보면 기원전 10세기경 서주의 축성 기념식에 '고이'가 참석하였는데 그 고이가 고구려라는 것이며, 특히 한자 ‘高'자의 유사성과 요서지방의 돌무지무덤(적석묘),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의 일치에 무게를 두고 있다.
고구려사와 韓민족사를 분리시키기 위한 중국 학자들의 연구는 대부분 이처럼 고문서 분석에 의존하고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성과를 놓고 논증하다 보면 중국의 주장이 상당 부분 허구로 드러난다.
기원전 3, 4세기경 고구려 영토에서 나타나는 적석총(돌을 쌓아 만든 무덤)은 중국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곽을 쌓는 기술도 완전히 달랐다. 한족과 한민족의 조상은 돌을 다루는 기술 자체가 달랐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중국이 문제삼고 있는 시기 중 하나인 고구려 건국 초기에는 고고학적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전주 우석대 조법종 교수는 '고고학적으로 중국의 청동기문화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지석묘와 비파형동검문화 등 동북지역의 독자적 문화내용에 중국학계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중국문화와의 차별성과 독자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바 있다.
고구려의 건국 장소와 관련하여 중국은 한4군의 하나인 현도군의 영토 안에서 고구려가 성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현도군은 고구려의 초기국가로 성장 기세에 밀려 기원전 75년에 만주로 쫓겨 갔다. 또한 전한왕조를 무너뜨리고 '신'을 건국한 왕망은 고구려가 신의 명을 듣지 않아 엄우를 보냈다는 기록 등은 오히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설 만큼 강력한 국가였으며 현도군을 통해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주고 있다.
고구려를 세운 이들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일단 현재로서는 압록강유역의 적석총의 기원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압록강 중류 유역 일대에는 초기 형태의 소박한 무기단 적석총에서부터 장군총과 같은 장대한 규모와 정제된 형식을 지닌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여러 양식의 적석총이 존재하고 있다. 근래 이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지역의 牛河梁유적 등에서 찾아, 紅山文化를 이룩한 족속의 일부가 동으로 이동하여 압록강유역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지역의 홍산문화에서 찾기에는 양자 간의 시간적 간격이 워낙 커서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오히려 고구려 적석총의 기원과 연관을 지녔을 개연성이 큰 것은 요동지역의 적석총이다. 토기에서도 압록강유역의 그것과 요동지역의 미송리형 토기나 길림지역의 서단산문화의 토기가 양식상 통하는 면을 보여 주목되는 바이다. 이런 면들은 고구려의 기원 및 고조선 , 부여와의 관계 등에 대한 고찰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라 하겠다.
환인 , 집안 일대에 기원전 3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철제 도끼는 벌목을 용이하게 하여 개간을 촉진하였고, 낫은 수확의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이 무렵에는 중국 군현과의 교역이 진전되었다. 무기단 적석총에서 발견되는 명도전 등의 화폐는 그런 일면을 나타내 준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에 따른 농업생산력의 증대와 외부와의 교역은 압록강 중류지역 주민집단의 성장을 촉진시켰고, 그러한 가운데서 새로운 정치적인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미처 그런 움직임이 성숙하기 전에 漢제국의 침공으로 이 지역에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107년 설치된 현도군은 얼마 안가서 토착민의 저항으로 퇴축되어졌다. 기원전 75년 이후 소노집단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연맹체가 형성되었는데, 그 집권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어 계루집단이 고구려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계루집단의 출자와 등장과정에 대하여,〈광개토왕릉비〉에서는 주몽이 북부여에서 이주하여 건국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부여의 중심지가 있었던 길림시 일대에서 확인되는 무덤양식은 석관묘에서 토광묘로 이어지는 것으로서, 고구려의 적석총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부여방면으로부터 이주한 일단의 집단에 의한 새로운 정치체의 형성을 뒷받침할 만한 큰 규모의 석관묘의 무덤떼가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면과 주몽설화의 기본 줄거리가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주몽설화의 사실성을 부정하는 견해가 학계 일각에서 제기되어 왔다. 사실 압록강 중류지역의 맥족의 묘제는 부여지역의 예족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두 지역의 주민이 分岐된 것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였다는 추정은 일정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지역의 묘제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삼국지》고구려전에서는 고구려가 부여의 한 갈래라는 전승이 있어 왔음을 전한다.
이는 곧 부여방면에서 이주한 집단이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주몽전승의 중심적인 요소가 3세기 이전부터 전해져 왔음을 의미하며, 주몽전승의 일정한 사실성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3세기 이전부터 있어 온 그런 전승을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부여의 동명설화의 내용을 대폭 차용하여,〈광개토왕릉비〉에 전하는 형태의 주몽전승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다시 고구려 후기에 주몽이 북부여가 아니라 동부여에서 출자하였다는 서술이 덧붙여졌다. 압록강 중류지역에 석관묘나 토광묘가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예가 보이지 않는 것은 계루집단의 이주 , 정착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즉 급속한 정복과 건국이 아니라, 선주민과 연합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냄에 따라, 묘제상에서도 급격한 문화적 단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면은 주몽설화 자체에도 반영되어 있다. 毛屯谷의 토착 수장들과 연합하고 그리고 주몽이 졸본의 召西奴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그러한 면을 나타낸다.
고구려 건국설화인 朱蒙說話는 백제나 신라의 건국설화에 비해 내용이 풍부하고 구성이 복잡할 뿐 아니라, 고구려인이 직접 남긴 자료가 전해지고 있어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를 준다. 현전 주몽설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廣開土王陵碑〉의 서두 부분이고,〈牟頭婁墓誌〉와《魏書》고구려전의 주몽설화도 5세기경의 기록이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나《三國遺事》 , 〈東明王篇〉 등 국내문헌은 5세기경의 기록에 후대적 윤색이 가해진 것을 전하고 있다.
주몽설화는 부여의 東明說話에 바탕을 두고, 4세기 후반 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와 함께 건국설화로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한 주몽설화의 경우, 주몽의 出自를 비롯하여 세부 내용에 있어서는 전승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 줄거리는 대체로 비슷하다.
이들은 대체로 “天帝와 水神(河伯)의 혈통을 이어받은 朱蒙이 하늘신과 地母神으로부터 부여받은 神的 權能을 가지고 여러 곤경을 극복하고, 卒本地域에 정착하여 고구려를 건국하였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고구려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고구려왕들의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주몽의 신적 권능 또는 주몽집단의 독자적 힘으로 건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백제 건국설화 서두 부분의 주몽설화는 매우 주목된다.
㉠ 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卒本扶餘에 도착한 鄒牟(朱蒙)는 後嗣가 없던 졸본부여왕의 사위가 되었다가 그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 백제 시조 沸流王의 아버지 優台는 북부여왕 解扶婁의 庶孫이고 어머니 召西奴는 졸본인의 딸이다. 소서노는 우태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고 우태가 죽은 뒤 과부로 지냈다. 扶餘에서 남하한 주몽이 건국한 뒤 소서노를 妃로 맞아들여 도움을 많이 받았다. 주몽은 소서노를 총애하고 비류와 온조를 아들처럼 대하다가, 부여에서 孺留가 내려오자 태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다.
위에 따르면 주몽이 부여방면에서 남하하기 이전부터 졸본지역에는 卒本扶餘나 召西奴集團 등 선주토착집단이 있었고, 주몽은 이들과 결합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고 한다.
압록강 중류일대에는 일찍부터 토착세력의 성장, 이주민집단의 유입, 토착세력과 이주민집단의 결합이라는 정치적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주몽의 신적 권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쳐 건국된 것이다. 고구려 왕실의 입장을 반영하는 주몽설화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시조의 신적 권능으로 신비화하였지만,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주체는 주몽집단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압록강 중류일대 각지에서 성장하고 있었던 선주토착집단이다. 따라서 고구려의 성립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압록강 중류일대 토착집단의 성장과정을 면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 중류지역은 서북으로 요동지역, 동으로 동해안으로 통하는 동서 교통로상의 중간지점이다. 그리고 서남으로 황해, 남쪽으로 대동강 , 재령강 유역의 평야지대, 북쪽으로 松花江유역의 대평원지대나 遼河 상류방면의 초원지대로 통할 수 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는 고구려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이 지역의 기후는 만주일대에서 가장 온난하며 강수량도 풍부하여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조건으로 인해 청동기시대 이래 이 지역 주민들은 강 연안의 충적대지를 배경으로 농업을 주업으로 삼고 가축기르기, 사냥, 물고기잡이 등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신석기시대 유적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청동기시대 주민과 동일 계통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바닥이 편평한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돌도끼나 돌괭이 등의 농공구, 그물추, 돌활촉 등이 출토되고 있어 생활양식은 청동기시대와 비슷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두께가 얇은 돌괭이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어 신석기시대에도 농업의 비중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 청동기문화는 遼東~淸川江의 古朝鮮文化나 송화강유역의 西團山文化와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다. 특히 시대적 지역적 특성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토기의 모양새에 있어 양 지역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꼭지 달린 바리모양 단지는 서단산자형 토기의 그것과 비슷하며, 고조선지역의 美松里型 土器가 중강군 토성리와 通化市 王八悖子에서 발견되었다. 이 지역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고조선 주민이나 부여를 이룬 송화강유역의 주민과 활발히 교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4 , 3세기경 중국 戰國 , 秦 , 漢 교체기에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 전국 燕과 대립하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의 공격을 받고 요동지역에서 평양지역으로 중심지를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전기 고조선의 비파형동검문화는 세형동검문화로 변화하였고, 철기문화가 요동과 한반도 서북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유이민 파동이 요동과 한반도 서북지역까지 밀려왔다.
요동지역과 한반도 서북지역의 이러한 정세변화는 압록강 중류일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丹東地區와 桓仁 , 集安지역에서 출토된 비파형동검 , 세형동검 과도기 형식의 銅劍이나 철제농공구와 무기류를 공반하는 明刀錢유적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역 주민집단은 이러한 정세변화와 유이민 파동의 영향 아래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점차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압록강 중류일대의 독특한 묘제인 積石墓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석묘의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는 압록강 중 , 상류와 대동강 , 청천강 상류지역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 초기의 영역과 대체로 일치한다.
다시 적석총 또는 적석묘의 기원으로 돌아가서 고구려족의 기원을 찾아보자.
일반적으로 적석묘에서는 청동제 장식품과 생활용품을 제외하면 철제 농기구, 무기, 생활용구 등이 출토되었고, 가장 이른 형식인 무기단적석묘에서는 전국, 진, 한 시기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석묘는 대체로 비파형동검문화와 세형동검문화 과도기의 청동단검묘에서 기원하여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본격적으로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전국말~진한초(기원전 3세기 중엽~기원전 2세기초)로 추정된다.
또한 독로강과 압록강 연안에는 적석묘 축조집단과 관련된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다수 발견되고 있다. 독로강변의 노남리유적은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초기철기시대층에서 冶鐵址와 온돌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었고 도끼, 손칼, 활촉, 낚시 등의 철기와 함께 明刀錢 , 五銖錢이 출토되었다. 압록강변의 토성리에서도 신석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친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이처럼 이 지역 주민집단은 철기문화를 받아들여 적석묘를 축조하면서 주변 지역과 구별되는 독자적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문헌상 늦어도 기원전 2세기 후반경에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결언
1. 고구려는 예맥족 중심의 고조선(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예족 부여을 이어받아 고조선 지역에 맥족 주몽을 중심으로 기원전 200년경에 건국되었다.
2. 주몽설화는 그 시대의 역사에 근거하여 통치를 위하여 미화한 것이며 실제로는 주몽 前後 200여년의 역사를 압축시킨 것일 수 있다.
3. 고구려는 북방 여러 민족을 주몽이 화합으로 이끌어 세운 나라다.
4. 드라마 ‘주몽’은 실제 역사에 상당히 근접하였다.
5. 단군조선의 통치자는 맥족이었으며 고조선이 붕괴되었을 때 고조선의 귀족인 예족의 장수 해모수가 부여를 건국하였다.
6. 신라의 박혁거세는 호랑이족, 맥족이며 백제는 곰족, 예족의 나라다.
7. 누가 말했던가?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과거도 불확실하다!
첫댓글 황영규 회장!, 원고를 태강 김성호 사장에게 메일로 보냈으니 페이지를 부쳐 인쇄하여 오면 얼마나 좋고 고마울까?!
김성호 사장에게 연락 해 놨읍니다.
한번 읽어서는 얼른 감이 안오거든. 그래서 몇번 되씹어 볼 요량이야. 그리고 질문할께. 암튼 이렇게 박식하시니 대단하구먼.
좀 혼란스러울 것이야....여기 저기서 발췌, 편집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실제 역사 자체가 혼란스러울 수가 있지....오늘의 우리 현실 또한 혼란수러운 걸 이해하시면...
서인회회원께서는 미리 잘 읽어보고 3월 16일 모임에서 봅시다.
과거도 미래도 불확실하지만, 무엇이던 확실한 것을 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들 건강에도 좋지.
사전 토론이 활발해서 좋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