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미얀마로 가는길
1. 불교의 나라 미얀마
이와 같은 나의 변화를 지켜봐 주신이가 있었다.
미얀마에서 비구(Bikkhu) 생활을 10년 가까이하시며 수행과 교리를 공부하신 좋은 인연사였다. 조심스럽게 타진해 오신 말씀이 미얀마에 가서 그 나라 문물을 둘러본 후 맘에 들면 그 곳에서 227계(戒)를 수계(受戒)하고 비구(Bikkhu)가 되어 수행하는 길이 있으니 한번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그야말로 흔쾌히 승낙하고 몇 달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미얀마로의 장도에 오르게 되었다.
몇 달을 있다가 와도 되고 몇 년을 있어도 만류하지 않는, 그리고 그곳을 떠나올 때에는 수지(受持)했던 계(戒)를 반납(返納)하고 오게 된다고 한다. 반납하지 않게 되면 큰 허물이 되고 계(戒)를 범(犯)하는 일이란다. 아직까지 한국의 풍토에선 상좌부의 계(戒)를 가지고 생활하기 어려운 점이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비구는 돈을 가질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식사는 오후불식(午後不食)이며 탁발 외엔 자급자족(自給自足)은 안 된다’는 등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율들이다.
계획대로 처음 10여일은 미얀마의 서북쪽의 유명 관광지인 뮈아우, 싯트위, 바간 만달레이(Baġan mandalay), 인레호수를 거쳐 양곤까지 그야말로 일반 관광투어와 같이 보냈다. 새벽의 모닝콜로 6회의 국내선 항공기 이동과 5-6회의 선박 및 보트이용, 그리고 단거리 이동은 버스로 하는 등 정신없고 피로에 지친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즐거웠다. 우리남한의 6.5배 면적에 135개 부족(部族)이 사는 버마연합(Union Burma) 미얀마. 인구(人口) 4,600여만 명 중에 89.5%가 불교도이다.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日本)은 이보다는 낮지만 국민의 80%대를 웃도는 불교도가 일생에 두 번만 절에 가는 경우가 무척 많다고 한다. 결혼식 때와 장례식 때만 절을 찾는 사람까지 합한 숫자이니 궤념 둘 것이 없겠다.
그러나 여기는 다르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종교이면서 생활의 중요한 일부이고 문화 그 자체이다. 우리나라는 교회가 동네마다 몇 개씩이나 있듯이 이 나라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찰과 수행센터가 있다. 마침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금 대여섯 살 짜리 유치원생부터 초, 중, 고생까지 남녀 학생 수백 명씩이 각 사찰과 수행센터에서 머리를 빡빡 밀고 남학생은 가사장삼을 입고, 여학생은 비구니의 다른 이름인 딜라신의 복장을 한 채 여느 수행하시는 스님들과 똑같이 행동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방학 때 학생들이 청소년수련원에서 병영체험이나 단체생활을 익히는 것과 비슷한 이벤트이나 여기서는 필수라는 것과 일상(日常)이 부처님 법(法)의 실천이라는 점이 다르다.
전의 왕조(王朝)시대의 영화나 영국의 100년 넘은 식민지 지배, 일본에 의한 짧았던 식민지 생활도 접어두자. 1962년 네윈(Ne win)장군의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수립된 이래 극단적이리만치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정치적 경제적 파탄을 맞은 나라, 무슨 인프라구축이니 SOC사업이니 실업자문제니 복지문제 등이 문제가 되지 않는 나라, 달러화가 상승하면 시장의 암달러상을 수감하면 진정된다는 나라, 은행과 암달러상의 환전차이가 미국 돈 100달러에 은행에서도 30,000ks을 주는데 암시장에서는 104,000ks(짯)을 주는 나라가 미얀마이다.
300%가 넘는 환전의 차이가 과연 믿어지는가? 6년 전에 일산(日産) Toyota 9인승 중고승합차를 1,000만짯(우리 돈으로 1,300∼1,400만원)을 주고 사서 6년 동안을 실컷 탔는데도 지금의 시세는 2,000만짯을 넘는단다. 우리 돈으로 3,000만 원대다. 차주인의 말대로 “세계에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이다. 수요는 늘어가는 데 공급은 오히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태국을 통해 들어오는 중고차의 밀거래가 요새 들어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자동차의 밀거래가 요새 들어 활성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자동차는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기 수준이다. 가끔 보이면 왜 그렇게도 반가운지 땅길도 막히고 뱃길도 막히고, 하늘길만 몇 군데 트인 곳, 군사독재에 대한 세계 각국의 경제 제재 속에서 이 나라는 갈수록 피폐해가고 있었다. 단 하나 원활한 것은 이 나라 역대 왕조들이 이룩한 찬란한 불교문화의 유적지 때문에 세계의 Yogi(수행자의 또 다른 이름)들이 쉬지 않고 밀려들어오는 것이다.
미얀마 불교문화 유적은 또 얼마나 많은가. 가는 곳마다 탑(stupa, pagoda)이며 사원이다. 특히 바간(Bagan)에서 탑무리에 나는 이름을 하나 붙였다. ‘탑밭’이라고 말이다. 아스라이 광활한 들판에 탑으로 일궈진 탑의 밭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탑들이 파악된 것만도 5,000개가 넘는단다. 그중 조금 큰 것은 보시자의 공덕으로 가차 없이 수리 보수하고 금찰을 해대어 문화재의 근본가치를 손상시키고 있어 유네스코에서도 경악을 할 정도란다.
제제가 있기 전 몇 군데 벽화나 건물을 유네스코가 관리한 흔적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수수방관의 상태다. 손상이 있으면 가차 없이 수리보수에 들어간다.
아무튼 세계적인 대탑이라는 양곤의 쉐다곤 대탑의 위용은 절로 탄성을 자아낸다. 탑신의 높이만 98m이고 꼭대기부분의 일산에는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비취, 황금, 진주 등이 주렁주렁 매달려 반짝인다. 60톤이 넘는 황금을 돌려가며 붙인 탑 몸통을 쳐다보노라면 입이 다물어지질 않는다. 5,000여 평의 대지위에 펼쳐진 이 파노라마를 외국인에게만 받는 입장료 미국 돈 5달러의 값을 훨씬 넘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자세히 다보자면 하루가 다 걸려도 부족하다.
불상의 크기와 아름다움도 가히 매머드 급이다. 기존의 불상은 차치하고 지금 400m크기의 와불(臥佛)을 조성 중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러한 관광일자는 몇 백 페이지의 책으로 엮어도 부족하다. 틈나는 대로 묻는 이에게 답하기로 한다.
이 나라에서는 1868년에 제5차 경전결집이, 1954년도에 세계 불교도회의 및 제6차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또 부처님 재세 시 아난존자와 더불어 미얀마를 다녀가셨다는 설화(說話)가 곳곳에 남아 있어 이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무척이나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찬란한 불교문화와 올곧은 가르침이 남아 전해지게 되어 오늘날엔 세계 각국에서 불교도들이 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든다. 21세기의 사상과 철학 지혜의 대안으로 부처님의 수승한 가르침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한 세계의 종교가나 학자들이 모여 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과 같이 수행과 배움을 위해 모여든 이들에게만은 이곳 철권통치의 군사정권도 관대한 편이다. 입국도 비자 연장도 그리 까탈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일반사업자나 비즈니스맨들의 애로사항은 아주 많은가보다. 듣기로는 여기에서 성업하는 사람보다는 짐을 거두어 짊어지고 귀국하신분이 훨씬 많다고 한다. 외국인이래도 실정법을 어기면 추방이전에 가차 없이 구금하여 중형을 살린 후 보낸다고 한다.
그러한 철권통치의 덕분으로 치안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듬직하다고 보아야한다. 이런 점들이 미얀마의 단편적인 사실들이다. 이를 미루어 불교의 나라 미얀마의 시대적 상항을 유추해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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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하시 선원
(1) 위치: 미얀마 수도 양곤의 남쪽 도심지
(2) 규모: 19.6에이커(약 6만평). 대법당 3층(각층 500규모), 소법당 등 많은 복합건물과 부속건물로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3) 창시자: 마하시사야도(본명: 우.소바나 스님), 우. 트윈경
창시자 마하시 사야도는 1904년 북부 미얀마 쉬에보의 옆 세이쿤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로부터 태어나 6세에 세이쿤파마나 수도원 원장인 우.아디짜의 밑에서 수도하다가 수도자가 될 것이냐 환속할 것이냐의 갈림길인 19세에 망설임 없이 수행자의 길을 결정하셨다. 수계이후 아신 소바나 스님(후에 마하시사야도)은 정부의 각종 공인 자격시험을 통과하시고 특히 대념처경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그는 위빠사나(uipassana)수행의 방법인 염처 사티파타나(Sati patthana)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으며 1938년 4개월의 집중수행을 통하여 얻은 좋은 결과로 그 해에 세이쿤에서 첫 3인의 제자를 키우기 시작했다.
일본이 미얀마를 침공하기 전날 스님은 타웅와잉갈래를 떠나 고향인 세이쿤의 마하시수도원으로 돌아오시어 위빠사나 명상의 테크닉을 개발하는데 전력을 쏟았다. 그때부터 마하시 사야도로 불리게 되었다.
전쟁기간 동안 익히며 펴낸 ‘염처 위빠사나 수행 교본’은 선풍적인 인기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고결하고 능력 있는 법사가 지도하는 명상센터건립을 발원한 우.트윈경의 방문을 받은 마하시 사야도는 그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치게 된다. 경은 스님의 실력과 인품에 믿음을 주고 1947년 11월 13일 부처님가르침과 수행법을 배울 목적의 모임의 초대회장이 되어 양곤의 코카잉 지역에 5에이커의 땅을 협회에 보시하게 된 것이 오늘날 이 센터가 19.6에이커의 땅에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게 된 동기가 되었다.
1948년 1월 4일 미얀마는 독립을 하게 되고 1949년 이미 명성을 얻은 마하시 사야도는 수상의 제의로 쉬에보와 사가잉에서 현재의 마하시 센터로 내려오시어 스승으로써의 정신적 지도력과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다. 그 해에 29명의 수행자를 배출하며 전국각지에 분원이 설립되기 시작했고, 테라와다 불교국가인 태국과 스리랑카, 캄보디아 인도에도 널리 퍼지게 되어 1972년 통계에 의하면 이 센터를 통해 배출된 국내외 수행자가 70만명 넘어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서구 쪽에도 수 없이 많은 명상센터가 생기고 그 수행자 수는 수천만 명에 이르고 있다.
독립을 얻은 직후 미얀마는 상좌부 불교국가인 스리랑카. 타일랜드,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제6차 경전결집을 계획하여 1954년 5월 17일에 개최되었고 이 결집에서 마하시 사야도는 최종 편집자와 질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55년에는 스리랑카정부의 요청에 의해 사념처 위빠사나(Sati patana uipassana) 명상법포교를 위해 포교단이 형성되어 1년에 걸쳐 그곳에 머물며 19곳의 명상센터를 설립하게 된다. 이어 인도와 콜롬보, 인도네시아, 태국 등지를 돌며 위빠사나 명상법진흥을 위한 전법활동을 하는 반면 지금까지 67권의 아비담마와 청정도론 등 미얀마어 불교저술을 남겼다.
한때 마하시사야도의 위빠사나 명상법에서 배의 나옴과 들어감을 관찰하는 것은 비불설 비정통(非佛說 非正統)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미얀마와 실론에서도 제기 되었고 영자(英字)신문과 언론보도들에서도 마하시 사야도의 수행방법이 공개적으로 비난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故) 우. 나누타라 사야도의 설득력 있는 답변으로 인해 정통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호흡에 대하여 코에 정념(正念)을 두는데 비해 마하시 사야도는 배의 일어남과 꺼짐에 두는 것은 풍대(風大)를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에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이 답변의 요지였다.
이와 같이 마하시 사야도는 선각자의 입장을 견지하시며 무수한 수행자들을 깨달음과 해탈의 길 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우시다가 1982년 8월 14일 향년 77세로 입적하셨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