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의없는 것들>의 감독 박철희는 늦깎이 데뷔로 치면 몇 손가락에 꼽을 만큼 40대를 넘긴 불혹의 나이에 첫 영화를 연출했다. 장선우 감독 연출부 출신으로 한때 영화계를 떠났다가 돌아온 그가 수년 동안 품에 안고 있던 시나리오로, 마침내 장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예의없는 것들>은 한없이 경쾌할 코미디영화의 분위기지만 뜻밖에도 그 웃음의 뒤끝에는 서늘한 여운이 있다. 드라마의 리듬은 들쑥날쑥 이지만 이 영화의 종잡을 수 없는 정서적 톤은 웃음과 비애의 양면을 건드리며 기어이 관객들의 항복을 받아낸다. 예의 없는 세상에 대해 할 말을 많이 품은 자의 농담조로 던지는 말들 속에 비수가 있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박철희 감독과의 인터뷰는 꼭 그가 연출한 영화의 분위기처럼 농담과 자화자찬과 자책과 성찰을 정신없이 오가는 활기 속에 진행됐다.
개봉판 편집본은 시나리오에 비해 꽤 잘라낸 건가. 신인감독이 봉착하는 문제에 직면해 어쩔 수 없이 들어낸 장면들이 있다. 마음 같아선 세 시간짜리로 상영하고 싶지만 너무 길어져서 하는 수 없었다.
영화가 비탄과 농담, 슬픔과 우스꽝스러움을 오락가락한다. 거기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린다. 그리고 그런 호흡에 익숙해질 즈음에 클라이맥스로 달려간다. 장단점이 있겠지. 관객이 내 연출 호흡을 따라 와주면 고마운 거고. 다행히 시사회 반응은 좋은 것 같다. 워낙 영화를 잘 만들었으니 말이지.(웃음)
그런데 2시간 언저리로 상영시간을 맞추다보니 흐름이 덜커덕거리는 느낌도 받게 된다. 대중 영화라는 게 쭉 상승하는 리듬으로 전개되는 것인데,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하는 리듬 때문에 제3자 입장으로는 편집에서 더 다듬을 수 있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너무 늦었다. 영화가 잘나고 못난 것은 다 내 탓이다. 신인이라 워낙 형편없이 만들었기 때문이지 뭐.(웃음)
자화자찬과 자책을 오가는 당신의 화술과 당신이 연출한 영화는 묘하게 닮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감정의 버라이어티 쇼다. 슬픈 상황에서 출발해 분노도 전해주고 그런가 하면 시종일관 왠지 우스꽝스럽다. <예의없는 것들>이 편안한 형식의 장르 영화가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영화에 몸을 맡기면 어느새 감동의 물결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웃음)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꽤 오래 묵힌 것이라 들었는데. 튜브픽쳐스와 작업할 인연이라 그랬는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원래 2000년 무렵에 써놓은 것인데 여러 영화사를 거쳤다. 준비가 될 만하면 영화사 재정이 악화되거나 모든 게 스탠바이 됐는데 캐스팅이 안 돼 무산되니까 속이 많이 썩었다. 이 영화 시나리오는 내가 한동안 영화계를 떠나 있다가 돌아오면서 쓴 것이다. 할 얘기가 많이 들어 있는 소재였는데 5,6년 전에는 한국영화계가 받아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영화계는 왜 떠났나. 다 알면서 뭘….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었다. 결국 영화를 해야 할 팔자인가 보다 했다. 그때 장선우 감독 연출부 생활을 함께했던 김수현 감독이 <귀여워>의 초안을 잡으러 어느 절에 같이 들어가자고 했고 둘이 절에서 각자의 프로젝트를 구상하던 중에 <예의없는 것들>의 아이디어를 들은 김수현 감독이 그걸로 다시 영화를 하라고 부추겨서 여기까지 온 거다. 원래 이 영화는 깔끔한 단편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김수현의 꼬드김을 받고 장편까지 늘리게 된 거지.
<페이스>로 원래 데뷔할 뻔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내 마음은 <예의없는 것들>로 데뷔하고 싶었지만 영화사에서 원하니까 좀 더 편한 형식의 영화로 가려 했던 거지. 하지만 그 영화도 이런 저런 사정으로 결국 다른 감독에게 인계하고 나는 <예의없는 것들>에 매진하게 된 거다.
대체로 써둔 시나리오가 <예의없는 것들>과 비슷한 분위기인가. 내가 지금 써둔 시나리오만 10편 된다. 아이템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두 편은 정돈된 형식의 시나리오도 있지만 아무래도 마음 가는 쪽은 이쪽, 뭔가 비틀린 쪽이다. 내 취향이 그런가봐.(웃음)
김수현의 <귀여워>와 <예의없는 것들>은 물론 전혀 다른 영화지만 기저에는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보인다. 주인공만큼이나 주변인물이 빛나고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세부묘사가 많은 영화라는 점에서. 이런 말은 좀 뭣하지만 예전에 장선우 감독 연출부에 들어가는 건 하늘에 별 따기였다. 힘든 관문을 뚫고 들어간 조수들이니 뭔가 통하는 게 있었겠지. 김수현과 나도 그런 점에서 뭔가 통하는 게 있다. 나이는 차이나지만 친구 같은 사이다. 툭하면 술 마시고 떠들고. 내 것을 그 자가 많이 빼갔지. 내 카리스마도 많이 배워갔을 거야 아마. (웃음)
김수현 감독은 오히려 박철희 감독과 취향이 비슷하다는 말에 화를 내던데. 당연히 그렇겠지. 부정하고 싶겠지.(웃음) 근데 희한한 걸 좋아하는 공통점은 확실히 있다.
<예의없는 것들>은 일종의 우화 같은 영화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이게 어떤 현실성을 갖고 관객에게 다가설지 고민이 있었을 듯한데. 그게 제일 큰 숙제였다. 보시다시피 이 영화는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판타지의 경계를 살짝 넘어가거든.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어떻게 관객에게 다가가 경계 안쪽으로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했다. 신하균이 연기하는 주인공 킬라는 혀가 짧다. 그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된다. 관계가 끊어진 한 개체가 세상과 접근하려 하는데 시스템 자체가 그걸 거부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관찰자적 입장으로 다루려는 게 내 의도였다. 그러다보면 관객이 혹시 내가 저 친구가 아닌가라는 심정도 들게 되고,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예의없는 것들>은 한국영화사상 가장 많은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나온다. 이것도 연출할 때 고민이 꽤 됐을 텐데. 세상과 격리돼서 사는 친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할지 보는 방식이 내레이션이다. 그는 스스로 행동양식을 개발하고 연구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보기에 엉뚱하고 웃기지만 그 자신에게는 정상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게 옳은 건가라는 기준이 있나? 일상적 친숙성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맞는 건지, 그 친구가 맞는 건지 쉽게 관찰하면서 풀어가는 방법으로 내레이션을 끌어들였다. 물론 주인공이 혀가 짧기 때문에 말을 못한다는 설정 때문이기도 하고.
내레이션은 이 영화에 아이러니한 웃음을 던져주는 주요 장치다. 외적인 상황은 잔혹할 수 있지만 주인공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주 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나온다. 상황 자체에 내레이션이 아이러니를 주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보편적인 상황을 취한 게 아니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상황을 취했기 때문에 허술하기 짝이 없는 드라마다. 플롯의 출발에서부터 주변 캐릭터들의 향연을 깔고 있고 주인공 캐릭터의 목적을 치고 나가는 그런 영화이기 때문에 드라마는 최소화하고 주인공과 주변인물의 상황에 집중하고 싶었다.
신하균의 킬라 캐릭터가 독특하다.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지만 사회적으로 백치처럼 보이기도 하고 살인범이라는 것만 빼면 순진무구하기 이를 데 없다. 신하균 캐릭터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을 관찰할 때 느껴지는 것을 건지고 싶었다. 오랫동안 격리됐던 상황에서 세상에 조금씩 발을 딛는 사람의 어떤 고민이 담겨 있기를 바랐다.
신하균의 연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그거야 하나마나한 얘기다. 책잡힐 부분이 하나도 없으니까. 오히려 현장에서 모니터로도 잡히지 않는 미세한 시선처리 하나도 감독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알아서 잘했구나, 라는 걸 극장 큰 스크린으로 보며 알게 됐다. 한 치의 빈틈도 없다. 불만이 있다면 너무 반듯하다는 거지.(웃음) 아마 신하균의 비리는 정재영이 다 알고 있을 거다. 우리에게는 조금도 틈을 안 보여. 근데 매니저에게 나중에 들으니까 호텔방에서 혼자 미친 듯이 연습했다는 거다. 그러니 책잡힐 일이 뭐가 있겠는가.
신하균의 상대역인 윤지혜도 깊은 인상을 주는데. 처음 캐스팅 때문에 어느 카페에서 만나는데 매니저와 함께 들어서는 그녀를 보고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건가, 라고 생각했다. 대단한 개성을 지닌 외모이고 잠재력이 무한하다. 현장에선 불만이 좀 있었다. 지금도 잘했지만 더 잘할 수도 있었다고 봤으니까. 무엇보다 자기 상처를 갖고 있지만 누나처럼, 엄마처럼 신하균 캐릭터를 품을 수 있는 그런 걸 원했는데 젊은 여배우의 관성이 좀 남아 있었다. 예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런 것….
하지만 퉁명스럽고 무심해 보이는 외모에 깊은 슬픔을 감추고 있는 여주인공 캐릭터에 잘 어울렸다. 그렇지. 잘했지. 전체적으로는 결과가 괜찮았다. 하지만 좀 움츠러들어 있었다. 세상에 확 자신을 열고 발가벗고 달려드는 그런 면이 부족했다. 그런 것들에 난 예민한 편이다. 아직 젊으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굉장한 배우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특정 소재를 이렇게 오래 잡고 있다가 작품 하는 기분은 어떤 건가? 느낌은 별로 없다. 내 성격이 진득하게 못 있는 편이다. 내 의지대로 오래 한 게 아니니까. 근데 꼭 이렇게 괴로운 인터뷰가 돼야 하나? FILM2.0에는 미모의 여기자가 없나? (웃음)
기자시사 때 왜 그렇게 어둡고 쓸쓸하게 말했나? 그날만 그랬어. 내가 한 번 제대로 얘기하면 객석이 뒤집어지지.(웃음) 근데 사실 이 영화는 쓸쓸한 영화야.
장선우 감독 연출부 출신 감독들이 대거 출동했던데. 우애가 좋은가보다. 특히 구성주 감독(<엄마> <그는 내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의 카메오 연기가 대단하던데. 포장마차 주인 분위기가 제대로 났다. 명연기가 더 있었는데 편집에서 들어냈다. 2백 원 덜 냈다고 신하균 캐릭터를 쫓아오는 장면인데. 평소에도 늘 그런다. 배우 겸업하라고.(웃음)
신하균 캐릭터가 해물 요리를 좋아하는 건 왜 그런가. 감독 개인의 취향인가. 괜히 들어갔겠어. 다 내 취향이지. 개인적으로 젓갈 좋아하거든. 시나리오 쓰면서 개인이 혼자 즐길 수 있는, 행복감에 취하는 건 뭘까 궁리하다가 해물 먹으면서 맛있게 위스키를 마시는 걸 상상했다. 위스키를 마시는 것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느낌인데, 주인공이 투우사가 되려는 것도 비현실적인 것이다. 좀 우습지만 그런 설정을 통해 주인공이 세상에 다가서려고 하는 느낌을 전달하려 했다. 고급 바에 들어가서 폼도 잡아보고 하는 그런 것들, 멀리서 보면 우습지만 나름대로 진지하게 노력하는 거다. 적당히 폼도 잡으면서.
투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주인공이라는 것도 흔치 않은 설정이다. 우리나라에선 투우 비디오도 보기가 힘들거든. 실제로 보게 되면 굉장히 강렬하다. 찰나적으로 삶과 죽음이 갈리는 모습이 압권이다. 그것과 주인공의 킬러 직업이 조화될 수 있다고 본 거지. 투우사가 되려 했던 인간이 맞이하는 삶의 실상은, 특히 결말은 아주 잔혹하다. 이 영화, 피도 눈물도 없다….(웃음)
그렇지만 영화는 감독의 성격대로 나온 것 같다. 잔혹한 듯하지만 착하고 건방진 듯하지만 여리고…. 영화를 찍을 때 주변에서 굉장히 스타일리시한 영상을 기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런 영화야말로 투박하고 거칠게 찍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근데 시나리오 보는 사람마다 스타일리시한 영화를 상상하더라고. 보고 나서도 그걸 기대했다고 말하는데. 개인적으로 불만스러운 부분이 스스로 많다.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뽑아내는 것은 망치지 않았다고 생각해.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계속 나오는데 대체로 두 사람, 세 사람씩 집단으로 찍어내는 장면이 많고 신하균 캐릭터를 잡을 때는 깨끗하게 정면 샷이 많다. 애초에는 전체적인 상황과 캐릭터들을 연결하려고 했다. 관찰하듯이 45도 각도에서 내려다보는 걸 지키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러면서 느닷없이 하균이의 깔끔한 샷이 들어간다. 직접적으로 봐라, 이렇게 된 거지. CC TV를 보는 느낌도 의도했고.
말하기 뭣하지만 조역으로 나온 김민준의 연기는 불만족스럽다. 안타깝다. 김민준은 굉장히 성실하고 하균이보다 더 노력하는 친구다. 배우로서 자세나 외모가 다 갖춰진 장점이 있는 배우다. 대사처리나 연기의 안정감이 붙으면 언젠가는 극복이 되리라고 보는데 이번에 캐스팅이 늦게 되는 바람에 내가 같이 뒹굴지 못해서 그렇다. 내가 붙는다고 나아지는 것도 아니겠지만 여하튼 그에게 미안하다. 근데 본인이 자신의 결점을 잘 안다. 똑똑한 친구다. 그걸 같이 극복해주는 게 중요했을 텐데 미안하다. 같이 리딩하고 그러는 것보다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을 텐데. 그가 연기한 발레리나 출신의 킬러도 사실 연기하기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나중에 발레리나의 말을 들어보니까 터닝을 제대로 하는 시간만 3년이 걸린다고 한다. 나는 대강 대역 쓰면 되겠지 하고 안일한 생각을 했는데 영화에서 나온 것만큼 김민준이 해준 것도 대단한 노력의 결과다. 배우가 그렇게 노력했는데 감독이 뭐라고 말하겠나.
악당 역의 선우는 어땠나. <귀여워>에서만큼은 강렬하지 않던데. 감독이 오케이 했는데 또 찍자 그러고, 하여튼 골칫덩어리다. 전형성에 갇힐 위험이 있긴 한데 가능성이 많은 배우다. 그가 이 영화에서 맡은 역이 쉬운 게 아니야. 악당의 전형성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전형성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박철희 감독의 재능은 인물묘사나 상황묘사에서 대단히 특이한 디테일을 잡는 데 있다. 신하균 캐릭터에게 살인청부를 의뢰하는 조직의 보스를 묘사하는 장면 등이 좋은 예다. 부하에게 블라인드를 내리라고 명령하고 부하가 어기적거리자 거기 신경 쓰느라 자기 할 말을 까먹기도 하는 식의 인물묘사가 좋았다. 상영시간을 잡아먹지만 영화의 맛을 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양념을 친다. 실은 시나리오 쓸 때 그런 작업이 제일 재미있다. 샛길로 곧잘 빠진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끝까지 가본다. 의외로 재미있게 풀릴 때가 많다. 연출로도 그런 부분에서 제일 자신 있다. <예의없는 것들>은 데뷔작이고 아무래도 관객은 드라마 우선이니까 대담하게 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만약 이번 영화에서 사람들에게 통한다는 게 입증되면 한번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아무래도 힘들겠지. 사람들은 편한 이야기를 원하니까. 하지만 영화라는 게 캐릭터의 힘만으로도 쭉 밀고 나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데,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다.
다음 영화 찍을 때는 시나리오의 장면 수를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충분히 캐릭터의 디테일을 살리려면 아무래도 영화가 길어질 텐데. 이번에 공부 많이 했다. 현장에서 촬영하면서 욕심이 팽창하는데 부족함을 느끼는 거지. 그래서 더 길게 이것저것 찍어보는 거지. 불안감이지. 다음엔 더 잘할 수 있겠지.
[[4]]한국영화에선 캐릭터 무비라는 게 별로 없다. 이게 박철희 감독의 나아갈 길이 될 수도 있다. 제작사, 투자사, 배우 다 거치면서 시나리오가 조금씩 고쳐진다. 예상은 하는 거지만. 안타까운 게 전부 드라마 위주로 평가하고 판단하니까. 그런 것들로만 채워도, 캐릭터 하나만 갖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데. 관객이 받아줄까 겁이 나니까 그 입장도 이해는 하는데. 다음 영화 시나리오는 더 심하게 비틀려 있다. 10개 정도 써놓았다. 아이템은 더 많다. 일단 이 영화 결과 보고 얘기합시다.(웃음)
후반부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곡이 굉장히 좋던데. 아주 유명한 곡이지. 내가 좋아하는 곡이고. 흔히 월드뮤직이라고 하지.(웃음) ‘벨라치오’라고 내 사랑 안녕이라는 빨치산 노래인데, 내일 산에 가면서 연인과 헤어질 때 부르는 노래다. 버전이 굉장히 많다. 이 영화의 정서와 맞다. 애잔하고 상황이 맞으니까. 이 음악을 어디서 쓸까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음악은 내 영감의 원천이다. 음악적인 관심이 많아서 음악을 들으면 거기 맞춰서 시나리오를 쓰기도 한다. 세계 각국의 토속음악을 좋아하고 집시음악을 특히 좋아한다. 그간 우리가 속아서 미국음악만 듣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지. 지금 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굉장히 큰 덩어리로 예의 없는 것들이 정치, 종교, 교육인데, 음악을 듣는 우리 감수성이 치우친 것도 그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삶의 가장 원천적인 기능을 해야 할 것들이 썩어 있으니까. 사실 넣고 싶지 않았는데 신하균 캐릭터가 사회 주류인사들을 칼이라는 직접적인 무기로 죽이는 장면의 몽타주는 내 심정이 부분적으로 담겼다. 나중에 망설이다가 넣었다. 인성이 파괴된 자들이 많다. 이 세상의 주류층에. 지식인들의 교만에도 염증이 난다. 그런 시스템 하에서 우리가 숨 막히게 살고 있는데 이게 심화되고 있으니까 답답한 노릇이지. 그런 울분, 분노를 직접적으로 영화로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되고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 공기를 우회해서 농담으로 비틀어서 만들었다. 하균이 앉혀놓고 ‘이건 농담 누아르다’라고 하니까 좋아하더라고. 잠깐, 근데 음악 얘기하다가 어디까지 온 거지? (웃음)
‘농담 누아르’란 말 그럴 듯하다. 쓰디쓴 농담 누아르…. 그렇지만 조금 전에 말한 살해 시퀀스 몽타주는 영화의 전체 톤과 맞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대체로 죽이는 인간이나 죽음을 당하는 인간이나 모두 뭔가 연민이 가는 지점이 있다. 그게 이 영화의 쓸쓸함의 정체라고 생각한다. 아유, 그렇게 고급스럽게 봐주면 송구스럽다.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갖다 버려야 할 영화지.(웃음) 이해까지는 아니더라도 쭉 보고 웃고 유치하면 유치한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장을 나와서 내가 저렇게 살고 있지 않나 돌아보면 감독으로서 기쁠 것이다.
사진 김동욱 |
첫댓글 이 영화 재미있게 봤는데...왜 안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