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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평양에까지 마중 나왔던 기옥(基玉, 1933)이 누나와 기림(基림, 1943)이 말고도 막내 기명(基明, 1947), 정림(貞琳, 1941)이, 내 바로 밑에 동생 기란(基蘭, 1938)이 등 나의 동생들 내외와 사촌인 기주(基周, 1936), 기형( 基亨, 1929)이, 기옥(基鈺, 1939) 등이 모두 모여 있고 조카들까지 수십 명의 가족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 서로 얼싸안고 너무 울어 눈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오빠”, “정림아, 기란아” 죽지 않으니 이렇게 만나는 날이 있구나” 부둥켜안고 엉엉 우는 것 이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950년 12월 21일 14살의 소년이었던 나는 눈 오는 날 어머니와 형제들을 떠나온 후 32년만의 귀향이다. 집을 나올 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게 되살아났다. 3살짜리 애기였던 막내는 이제 35살의 3남매의 엄마이고 18살꽃다운 나이의 의대 학생이었던 누님은 이제 60세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1950년 12월 21일 14살의 소년이었던 나는 눈 오는 날 어머니와 형제들을 떠나온 후 32년만의 귀향이다. 기림이 가사는 아파트는 집은 낡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남한의 빈민가 수준이다. 걸어서 올라 다녀야 했고 자전거가 있는 사람은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올라 다녔다. 방안에 들어가니 동생 기림이는 무언가 초조하고 안절부절 하며 안내원의 눈치를 보며 미처 앉기도 전에 “형님, 우리는 이제 수령님께 인사하러 가야 합니다.” “수령님께 인사?” “네, 형님이 이렇게 조국을 방문하게 되었으니 해주 광장에 가서 수령님께 인사를 해야 합니다” “아! 광장에 계신 수령님 동상 말이구나 “ 북한에는 도시마다 광장을 만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만들어 세워 놓았다. “네, 인사 하려면 꽃바구니를 준비해야 하는데 얼마짜리로 할까요?” “얼마를 해야 하는데?” “300달라, 400달라, 500달라 짜리가 있습니다” 옆에 있던 조카 해룡이가 “삼춘 3백 달러라구 하십시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지” 그리고 현찰 3백 불을 꺼내주었다. 나는 마누라 한데도 10불짜리 장미 한번 사주지 못하는 위인인데 3백 달러짜리 꽃바구니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할 수 없지 않은가 ? 꽃바구니는 미리 준비되어 있었고 돈 내는 과정만 남아 있었다. 우리 일행은 황해남도 도당 책임비서(황해남도에서는 최고로 높은 관리이다)와 나를 선두로 가두 퍼레이드 수준으로 해주 시내 한복판을 질러 광장으로 갔다. 거기에 서 있는 김일성 동상 앞으로 가서 도열을 했다. 내가 선창을 하는 만세 삼창을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하니?” 동생에게 물으니 “우리의 수령 김일성…. 만세, 만세, 만세” 하란다. 나에게는 아주 생소한 언어(?)였다. 동생 기림에게 “앞대가리는 네가 선창을 하라. 그러면 만세, 만세, 만세는 내가 할께” 동생 기림이가 선창하고 “우리의 수령이신...” 그 다음에 내가 “만세!, 만세! 만세!” 삼창을 하였다. 해주시 인민위원장의 환영사가 있었다. 화환증정과 김일성 장군 만세 좌로부터;양산인민학교동창생,해주시인민위원장,도당책임비서,막내동생,필자 어머님 산소와 묘비
동생 기림이의 집에는 도당 책임비서, 해주시인민위원회위원장, 기림이가 나가는 회사의 사장, 당지도원동지 등이 와 있었고 또 나의 안악양산 인민학교 동창이라는 이름도 기억 못하는 친구를 불러 놓았다(실제로 나는 양산인민학교 5학년을 1년도 못 다니고 안악 3중으로 진학했다).
이제 나를 환영하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동리 사람들은 감히 들어오지는 못하고 문틈으로 내다보며 호기심 있게 쳐다보고만 있다. 이 자리에서 가구 공장에서 일한다는 동생은 천신만고 끝에 내가 미국서 부터 가져다 준 무거운 전기 공구들, 전기톱, 드릴 등 전기연장을 그 자리에 모두 다 들고 나와서 회사에 기증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형님이 미국에서 여기 까지 가져오신 이 도구들을 전부 우리공장에 기증 합니다” 나는 약간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어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장 책임비서가 간단한 인사말과 공장 당 세포위원장이라는 여자가 일어나 “황기림 동무는 우리 공장에서 우수한 조직원으로 모든 책임을 열심히 완수하는 모범 일꾼 입니다” 그동안은 월남한 반동 가족으로 대우받는 우리 가족은 북한 사회에서는 최하류 계급으로 분류 되어 교육의 기회, 승진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 뒷전에서 겨우 생존만을 유지하는 계급으로서의 생활이었다. 그나마 열심히 착하게 살아 왔음으로 그나마 남들이 부러워하는 트럭 운전수로서 일하고 있었다. 이동의 자유가 없는 북한 사회에서는 트럭을 몰고 이 도시 저 도시로 여행할 수 있는 직업은 아주 좋은 특전이 있는 직업이다. 이렇게 황해남도의 최고 간부인 도당 책임비서와 한자리에 앉아 식사 할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형님은 미국에서 조국을 위해 일하고 계신데 저도 이젠 당원이 되어 조국에 봉사 할 수 있도록 책임비서동지에게 부탁 좀 드려 주십시오.” 기림이 직장의 당 세포 위원장이 “기림동무는 매우 열심이고 모범적인 일꾼으로 당연히 당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림동무를 당원으로 추천 합니다” 기림이와 세포위원장은 미리 서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황해남도 도당 책임 비서께서 “그러면 좋습니다. 세포위원장은 서류를 작성하여 당에 상신 하시요” 이렇게 일사 철리 동생 기림이가 당원이 되는 작전이 성공 하였다. 월남한 가족이었던 기림이는 그 동안은 노동당원이 될 수 없었다. 고급 다원들과의 환영파티는 우리 가족들에게는 아주 좋은 만족스러운 기회 였던 것이었다. 동생에게 “너 쓰라고 어렵게 가져온 도구들을 그냥 다 주어 버리냐?” 했더니 “어렵게 가지고 오신 것이지만 이왕 가져 오신 것 공장에서 모두 같이 쓰는 겁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요.” 이 사회에서는 사유물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런 행사가 끝나고 나서야 어머님 산소에 성묘를 갈 수가 있었다. 어머님 산소는 내가 지나왔던 학현고개 근처에 모셔져 있었고 초라하지만 양지 바른 곳에 모신 작은 봉봉이었다. 새로 비석을 만들어 놓았다. 원래는 비석도 없었는데 형님이 오신다고 당국에서 만들어 주었다고 하였다. 비석에 새로 새긴 글자에는 먹물도 채 마르지 않은 상태였다. “어머님 생전에 그렇게도 기다라고 기다리시던 아들, 32년 만의 귀환 이지만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어머님께 묘소에 나마 돌아왔습니다.” 내가 미국서부터 가지고간 고기 간스메(통조림, can food), 캔에 넣은 과일 등 미제 음식으로 격식에도 없는 제사상을 차려 놓았다. 절을 올리고 나니 눈물이 한없이 나왔다. 나를 형제 중에서도 가장 아끼고 사랑해 주시던 어머님, 생전에 뵐 줄 알고 여기까지 어려운 길을 찾아 왔으나 나를 그렇게 기다리시던 어머니가 3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 성묘를 하고 돌아와 네 개의 이민 보따리에 가득 채워간 물건들을 8개로 비슷 한껏 끼리 갈라 방안에 쌓아 놓고 번호를 매겨 놓았다. 사촌들을 포함하여 나이 순서대로 와서 번호표 제비를 뽑게 했다. “누가 더 많이 가져가거나 누가 더 좋은 것 가졌다고 불평이나 시비하지 말 것” “이들 물건들 때문에 형제간의 다툼이나 시비가 생긴다면 다시는 아무것도 안 가져온다”고 선언 하였다. 기형, 기주 그리고 기옥 사촌들 것도 꼭 같이 만들고 번호가 뽑히는 대로 한 무더기씩 가져가게 하였다. 생전에 구경도 못했던 진귀한 미제 신기한 물건들을 받아가진 형제들은 물론 애들이 더 좋아 하였다. 일본 관동군에 끌려가 만주에서 해방을 마지하고소련 시베리아까지 포로로 끌려가 3년간을 시베리아 동토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돌아왔던 사촌형 기형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아끼고 잘 데리고 다녔고 해주에서 우리와 같이 살면서 시베리아에서 있으며 겪은 일들을 재미있게 이야기 해주었었다. 이제 늙어서 과수노동자로서 일하고 있었다. 형제들에게는 소련제 흑백 19 인치 TV 한대씩 $400 식 주고 사 주었다. 여기서는 $100이면 되는 것이 그곳 외화 상점에서는 아주 비싸다. 외화 상점에서 는 외화 벌이 하느라고 뭐든지 사 주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조카 해룡이가 “삼춘 우리나라에서 딸라($)는 아주 귀한 것이니 이들이 하라는 대로 다 사지 마십시오”라고 귀띔을 해준다. 외화 상점에 가기로 계획 되었던 날 조카와 짜고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 병원에 가야 된다고 하였다. 이 기회에 여기 계획에 없었던 병원 시설이라도 좀보고 싶었다. 이들은 끝까지 병원 시설과 의료진을 보여주는 데는 동의하지 않고 병원에는 데려가지 않았다. 북한에는 두 가지 화폐가 잇다. 하나는 그곳 사람들이 쓰는 보통 돈이다. 이를 인민폐라고 하고 외화를 가지고 가면 은행에서 소위 공정환율 이라는 2:1로 바꿔주는 “바꾼 돈”이 있다. 일반 상점이나 국영 백화점에서 인민폐로 살 수 있는 물건은 거의 없다. 있더라고 구입권과 같이 가져가야 살 수 있는 몇 가지 안 되는 한정된 물품만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외화 상점에 가면 거의 모든 물건이 무한정 있어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었다. 그러니 바꾼 돈의 가치는 같은 백 원이라도 암시장가격으로 $로 환산되어 거래된다. 모든 물자가 귀한 북한 땅에서 소위 지배계급인 고급당원들이 일반 민중인 인민들과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으니 지역 마다 외화 상점이라는 것을 만들어 바꾼 돈이나 외화로만 살 수 있게 하여 자기들은 아무 구애 받지 않고 모든 물건을 마음대로 살 수 있게 한 나라 안에서 이중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외화 식당에서는 술, 고기 각종 요리 등 무슨 음식이나 모두 사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어 항상 고급당원이나 그 젊은 아들딸들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호화로운 생활로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북적된다. 식품점에는 쌀, 고기 밀가루, 각종 기름 생선 할 것 없이 슈퍼마켓같이 모든 음식을 다 살 수 있다. 외화 백화점에는 최신형 캠코더, 카메라 각종 전기 전자 기구들을 살 수 있다. 고급 당원들의 생활은 북한에서도 아무 불편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 또 지방에는 평양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차등을 두어 그래도 지방 고급 당원이 구입할 수 있을 정도의 물건들이 구비된 외화 상점이 있다. 여기서 내가 느낀 당시의 북조선에서의 노동당원과 비당원의 인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쉽게 이야기하여 당원과 비당원은 일종의 계급의 구분이었다. 당원은 조선시대의 양반 계급과 같이 소위 상류 계급이고 비당원은 상놈 계급으로 비교 될 수 있겠다. 당원은 나라의 공무원이나 벼슬을 할 수 있는 계급이고 비당원은 조선시대의 상놈과 같이 벼슬을 할 수가 없고 출세를 할 수 없다. 당원 중에서도 소위 고급당원이라는 사람은 출세한 양반과 같이 보직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고 같은 당원이라도 보직이 없는 하급 당원은 돈 없는 양반과 같이 큰소리는 치나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모두 당원이 되기를 원하나 빽이 없고 성분이 나쁘면 당원이 되기가 힘들다. 기림이는 월남 가족으로 높으신 도당(道黨) 책임비서를 만날 기회도 재주도 없었고, 빽도 없고 성분도 나쁘니 여지까지는 당원이 될 수가 없었다. 형님인 내가 와서 최고의 환대를 받으며 도당 책임비서께서 집에까지 와서 저녁식사도 같이 하게 되니 아주 대단히 출세한 (?)형님이 오셨으니 이런 기회에 당원이 되기 위한 좋은 기회로 알고 공작을 하였다. 북조선에서는 철저한 계급사회이다. 당원(노동당)과 비당원이 있고 이들은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원들도 일반당원과 고급당원이 있다. 비당원 중에서도 최하급의 신분은 지주출신의 월남한 자의 가족들이다. 이는 조선 시대의 백정에 해당된다. 다음이 소극적 비협조자들인 이들이 말하는 소시민들이다. 물론 적극적인 비 협조자는 이미 탄광이나 저 산골 오지 마을이나 중국 국경으로 이미 이주 시켰다. 그리고 재미교포의 가족들은 처음에는 월남 가족으로 분류 되어 있었으나 요사이에는 한 급 승진하여 제일 조선인 교포(조총련계) 가족과 같이 취급 되었다. 내가 남한에 있지 않고 미국에 있으니 한 단계 조금 격상된 신분이 된 셈이다. 첫날 저녁에는 남동생 집에서 약 300m 떨어져 있는 바로 옆동리에 사는 누님 집으로 가서 자게 되어 있었다. 안내원은 모두 돌아가 자기네 숙소에 가고 우리 자매들끼리만 남게 되었다. 유럽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으로 전화 했다던 매형은 가짜매형이었다. 진짜 매형은 농촌 국영 농장에서 일하는 농군이었다. “매형이 오지리(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가셨드랬습니까 ?” “오지리가 어디야 ?” 무역 사절단으로 오지리에 출장 왔다던 매형에게 어머니가 관절염으로 고생 하고 몸이 불편하다고 하여 보내주었던 약과 돈은 누가 받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작년 내가 가짜 매형이라는 사람으로 부터 전화를 받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라는 것이다. “돈을 얼마나 보냈는데? 그럼 도루 찾아야지.” 누님은 그 돈이 아까워서 돈을 찾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 돈은 벌서 어느 누가 받아 없어진 것이다. “그 돈은 돌려받아야지” “누님 잊어버리세요. 그 돈을 찾으려다 오히려 다처요” 하고 포기 시켰다. 아예 돈을 돌려받지 못할 바엔 아무소리 않고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났다고 생각되었다. “아무소리 마세요, 없어진 것은 못 찾아요.” 그러나 700불이라는 돈이 누님으로서는 아까워 죽겠다. 나를 북한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가짜 매형을 만들어 조직(계획을 짜는 것)을 했던 것이다. 매형도 다른 곳으로 자러 갔다. 이제 누님 집에는 우리 친 형제 자매끼리만 남아 이야기 하게 되었다. 그런데도 종이를 꺼내 놓고 필담(筆談)으로 글로 쓰며 대화를 하자고 한다. “여기 우리 밖에 아무도 없지 않아. 왜 그래야 하는데 ?” 하였더니 손을 내저으며 말을 못하게 한다. 누님 집은 지금까지는 형편없는데서 살았던 모양이다. ”누님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지요?” 월남 가족이라고 해서 고생도 몹시 했었던 모양이다. 이제 겨우 조용 해져 잊고 지내는데 몇 달 전에 당 기관에서 누이와 동생들을 불러들였다. “황기선이라는 사람이 누구요?” 하더란다. 아이쿠! 또 뭐가 터지나하고 누님은 벌벌 떨고 있었다고 한다. “나쁜 일이 아니라 좋은 일입니다, 염려 마십시오” “예, 예 제 오빠 입니다.” 옆에 있던 막내 동생이 “언니 왜 오빠야 , 동생이지 언니가 제일 위지 않아” “네네 내 동생입니다” 예기치 않았던 나의 소식에 어떤 불길한 마음까지 가지게 되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성격이 당돌한 막내 기명이만이 할 말을 하고 있었다. “황기선 씨가 미국에 살고 있는데 수령님의 배려로 조국에 돌아오게 되었으니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시를 잘 들어 두시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말조심 하시오. 만일 필요 없는 말하면 전부 녹음할 것이니까 나중에 좋지 않은 일 일어나지 않게 하시오” 그리고는 내가 자랄 때 있었던 일들을 작은 일들까지 세세히 이야기 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집에서 떠날 때 입고 나갔던 외투 이야기며 형제들과 자랄 때 있었던 아주 작은 일들까지 알아내어 가짜 매형까지 만들어 놓았다. 몇 년 후에 다시 갔을 때에는 좀 불평도 좀하고 집안에서는 그래도 말들을 조용조용 속삭이며 대화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전에는 말도 못하더니 이젠 좀 낳아 젓니? 말도 좀 자유롭게 하는 것 보니” “흥, 낫기는 뭐가 나아져요. 제까짓 것들이 녹음기가 있어야 녹음을 하지요” 그때는 녹음기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기록이 되는 줄 알았는데 몇 년 동안 일본이나 미국에서 왕래가 있으니 적어도 녹음기는 있어야 녹음이 되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다. 내가 받은 편지도 전부 공작원이 만든 가짜 편지였고 매형도 기관에서 조직 했던 가짜 매형이었다. 중국에 있는 고위 조선족 관리가 평양에 초청되어 간일이 있는데 그가 한말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더라고” 하였다. 내가 가져간 물건들 중에는 누이들을 위해 여자화장품 들도 있었는데 생전 화장품이란 구경도 못한 여자들이 립스틱, 매니큐어 등을 보니 도대체 어떻게 쓰는 것인지 무엇인지도 몰랐다. “오빠 ! 쪼끄만 병에 있는 장판 니스 냄새 나는 것이 뭐야요?” 생전 매니큐어를 보지도 못 했으니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나를 대접한다고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하는 커피(coffee)를 타왔다. “커피 잡수세요” 이는 허연 우유 같은 물이었다. “이거 커피 아닌데” “이거 커피 야요. 이렇게 커피라고 쓰여 있는데” 가져온 봉지에는 coffee mate라고 쓰여 있다. 생전 커피를 구경하지 못한 이들이 앞의 영어로 Coffee라는 글만 읽어 말로만 듣던 커피를 타 가지고 와서 대접하는 것이다. 이런 폐쇄된 사회가 바로가면 서울서 두 시간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현상이다. 내가 다니던 해주 3중학교에서 이 학교 출신 선배인 나를 위한 환영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내가 다닐 때에는 남자만의 중학교였으나 지금은 남녀 공학으로서 교장선생님도 여자였다. 선배님을 환영하는 다양한 행사 프로그램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었다. 주로 여학생들이 하는 환영 기악 연주는 지금 우리가 가끔 TV에서 보는 북한 소년단들의 아코디언, 타악기 무용 순서 등이 있었다. 이런 성대한 환영은 나에게는 너무 송구스럽고 과분 하였다. 안내원과 해주시 인민위원장(해주시장) 도당 책임비서도 대개 동행하여 이 환영 행사에 참가하였음으로 “이렇게 조국에서 별로 한 것도 없는 사람을 과분한 대접을 해주니 너무 송구스럽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우리 안내원은 “우리는 사화주의 나라이기 때문에 선생님의 가족들이 대접 해주어야 할 일을 나라에서 대신해 주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는데 갑자기 평양에서 연락이 왔다. 급히 오후 6시30분까지 평양으로 올라오라는 조국평화통일민족전선 중앙위원회 본부의 통보가 와 있었다. 형제들에게는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나중에 기옥이 누님과 기림이 만이 평양으로 오게 하고 황급히 해주를 떠나 평양으로 출발해야 하였다. 모교 교장선생님과 학생 수업 관람(교장과 나) 어머님 산소가 있는 학현고개를 넘어 오며 길가에 차를 잠시 멈추고 어머니 묘지를 향해 길거리에서 떠나는 삼배(三拜) 절을 하니 다시 눈물이 다시 쏟아져 나온다. 평양에서는 고급 방문자를 위한 국립예술단이 공연하는 전쟁 메로 드라마가 특별 공연하게 되어 이를 관람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관람석의 중앙 특석 두 줄 은 장성급들 고관들이 있고 다음 외국에서 온 대표들과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놓았고 주위에는 동원된 관람객이 있었다. 선배님을 위한 환영 학예 연주 남한에서도 연극은 자주 볼 기회가 없었지만 여기 연극은 좀 다른 것 같고 전쟁영웅과 마을 처녀의 사랑 이야기(Love Story)였다. 다음 행사가 계속 준비되어 있어 안내원에게 좀 불평조로 “기승호 선생, 내가 지금 만고강산(萬古 江山) 유람 온 처지가 아닌데 구경은 이젠 그만하고 하루라도 더 가족과 같이 지내게 해 주십시오” 했더니 “아, 예 그러지요.” 하면서도 자기들 정해진 스케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판문점 견학도 코스에 넣었으나 이것은 내가 완강히 거절 하였다. 판문점에 가면 남측 초소에서 사진이 찍히면 다시는 남한에 못 간다는 말을 들었었다. 묘향산 김일성 기념관은 평양에서 약 4시간 걸리는 곳이다. 잘 포장되지도 않은 시골 도로를 달려 묘향산에 도착 하였다. 사찰들은 깨끗이 잘 수리 보전 되어 있으나 스님은 없고 김일성 배지를 단 관리인과 경비원이 청소만 하고 있다. 우리는 묘향산 호텔에 여장을 풀고 잠시 휴식 한 다음에 김일성 기념 지하 땅굴 전시장을 구경 하였다.(지금은 김정일 지하전시장을 그 옆에 더 크게 만들었다.) 산을 파서 지하 땅굴에 만든 이 지하 전시장은 길이가 500m도 더 되고 중앙에서 십자 길로 양쪽으로 뻗어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김일성 수령에게 보낸 각종 선물과 보물이 보관되어 있어 세계에서 우리 수령이 이렇게 존경을 받는 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지하 구조물들은 전부 인민들의 맨손 노동력으로 조성 되었으며 이 구조 물 들이 지하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은 분명하지 않다. 묘향산은 참으로 경치가 좋고 산을 좋아 하는 나는 묘향산 등산까지 할 수 있어 아주 기분이 좋았다. 다음은 금강산으로 가기로 되어 있다. “만고강산 유람(萬古江山 遊覽) 보다는 지금 내 기분은 하루라도 더 가족과 함께 만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다시 정중이 요청 했으나, “선생님 좋으실 대로 하지요” 라는 역시 꼭 같은 시원한 대답뿐이고 실제 행동은 금강산까지 4박 5일의 일정은 계속되었다. 다시 평양에서 남부 검문소를 거처 새로 포장된 원산 평양 국도로 들어갔다. 중도에 여러 검문소가 있으나 조사나 검문 없이 무사히 통과 되었다. 우리 일행 중 비록 차는 따로 타게 되어 있으나 같은 방향으로 가는 캐나다에서 온 교포 아주머니와 같이 행동하게 하였다. 가는 곳마다 외화 상점 휴게소가 있어서 그 교포 아주머니의 안내원은 매점마다 들려 한 아름씩 되는 당과류와 음료수를 전표 한 장만 주고 가져다가 자기 차에 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나의 안내원인 김승호씨 조차도 눈 쌀을 찌푸리며 나라에서 주는 혜택을 저렇게 개인이 써서는 안 된다고 불평하였다. 상부에서는 우리 귀국 동포들에게 최선의 특혜를 주며 잘해주라고 하였음으로 우리들의 모든 음료와 당과류의 소비는 국가에서 부담하게 되어있었다. 우리가 소비한 것처럼 가짜 전표를 넣어 이 여자안내원의 부수입으로 집으로 가져가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안내원 김승호 선생은 지극히 양심적이며 이런 작은 부정이라도 저지르지 않는 고등교육을 받은 관리이었다. 평양에서 금강산은 새로 개통되어 잘 포장된 평양~원산간 고속도로인 신계 곡산을 거처 백두대간을 터널로 통과 하였다. 곡산(谷山)은 나의 작은 아버지께서 살던 곳이며 아직 나의 사촌인 기주와 정숙이와 기돈이가 살고 있어 아주 감개무량하였다. 금강산에 가는 도중에 원산에 들려 몇 시간의 휴식을 취하게 되어 있다. 원산항에서는 몇 시간 휴식을 하는 데도 호텔에 투숙을 하였다. 나는 이 여행 중에도 밤에 잠을 충분히 자고 있었음으로 중간에 몇 시간씩 자거나 휴식할 필요도 없었다. 또 모든 것이 궁금하고 새로운 것들이니 호텔에서 잠을 청하기보다는 오히려 밖에 나가 산책하거나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고 보람이 있었다. 원산항에 정박된 배들을 들려보며 호텔 맞은편까지 가니 그 유명한 역사적이고 미국의 수치였던 미국 “프에블러호”가 정박해 있었다. 대동강변에 관광용으로 전시중인 프에블로호(출처:http://ask.nate.com/qna/view.html?n=8066942)
구경을 하려고 하니 예정에도 없고 안내자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밖에서만 구경하고 다른 부두로 가니 일본 니이가다와 원산을 연결하는 정기선박 만경호도 여기에 정박하여 있었다.
3시간을 휴식하는 동안 나는 명사십리를 보고 거기에 있는 소위 고관들의 휴양지를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동해안을 따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도로는 아직 비포장 도로였고 여기저기 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되며 인민들이 동원되어 도로 보수공사를 하는데 순전히 손과 곡괭이 삽으로 사람의 힘으로 만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고갯길의 확장 공사에는 부역으로 동원된 인민들이 줄로 서서 하루에 자기가 들어갈 수 있는 세워 놓은 관(棺)의 크기만큼(60cm x 50 cm x 180 cm정도) 땅을 파서 이것이 연결 되면 고갯길 도로가 ½ m가 넓혀져 나간다.
북한의 모든 공사가 순전히 인민의 맨손 인력으로 이렇게 건설되며 이런 식으로 땅굴도 파내려간다.
금강산이 가까워질수록 휴전선이 가까워 검문소가 더 자주 곳곳에서 있었으나 우리들의 차는 그대로 통과되었다.
가는 길에 인민군 전사들이 자루 배낭을 메고 걸어서 길을 가는 것을 더 자주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예외 없이 우리 차를 향하여 정지 거수경례를 하였다. 금강산 입구에 있는 마지막 검문소에서는 우리 일행도 모두 하차 하여 트렁크 까지 열고 검문을 하였다.
당시 금강산에는 금강산 호텔 하나 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여장을 풀고 융숭한 저녁 식사 대접을 받았다.
내일은 구룡폭포에 등반하는 계획이 있었다. 호텔 지도원이
“내일 식사는 야외로 할까요? 호텔에서 하시겠습니까?”
옆에 있던 봉사원 아가씨는 내 옆에 바싹 다가와서 귓속말로
“선생님, 야외에서 한다고 하시라요”
“뭐가 달라요?”
“야외가 더 좋아요”
“야외로 하지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그렇게 대답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야외에서 식사하게 되면 봉사원들이 같이 나가 하루 동안 호텔 음식으로 맘껏 놀고 쉬게 되니 하루 특별 피크닉 휴가 받는 기분이란다.
호텔 봉사원들은 구룡폭포에 가는 중간쯤 되는 곳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우리 일행과 금강산 안내원 한명만이 구룡폭포까지 등산길에 올랐다.
안내원은 금강산의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은도끼 금도끼 이야기들을 현대 북한식으로 설명해 주었고 가는 곳마다 좀 평평한 바위에는 예외 없이 김일성 수령의 찬사구호가 하얀 페인트로 또는 바위를 까고 새겨 놓아 자연의 수려한 풍치를 망가 뜨려 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옛 풍류객들이 새겨 놓은 九龍瀑蒲(구룡폭포)를 읽지 못하는 젊은이가
“선생님 제기 뭐라고 서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북한 젊은이들은 한자 교육을 전연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같은 바위에 새긴 글자지만 “김일성 장군 만세” 는 눈에 거슬리는데 오히려 옛 사람들이 새겨 놓은 글들은 그리 흉하지 않고 오히려 풍치 있게 보이는 것은 나의 생각의 차이일까 ?
내려오는 하산 길의 점심 식사는 미리 대기한 호텔 종업원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야외 불고기며 온갖 산나물로 된 진수성찬이었다.
금강산에서의 야외 식사 모습
구룡폭포 전경
해금강으로 가는 도중에는 역사적 유적지라는 호수로 데려가는데 김정숙(김정일의 생모)이 저 멀리 섬에 있는 오리를 권총으로 쏘아 마쳤다는 정자가 있는데 오리가 떠 있었다던 섬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무리 보아도 권총의 사격의 사정거리에는 미칠 수가 없는데도 이들의 조작된 이야기들이 얼마나 허황한가를 증명해 주고 있다.
여기서 김정숙이 저 섬에 있는 오리를 권총으로 쏘아 마쳤다는 곳
금강산 온천은 실내이긴 하지만 바닥에는 자연석 자갈이 깔려 있고 맑고 뜨거운 물이 솟아나니 거의 자연 그대로의 노천 온천 같이 보였다. 지금 금강산 을 관광하는 TV를 보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음날은 만물상으로 향했는데 이곳은 휴전선에서 멀지 않은 군용도로로 비포장도로였다.
가끔 군용 트럭에 연탄을 적재하고 가는 모습이 보였을 뿐이고 이 고개를 넘으면 바로 휴전선이기 때문에 일반 차량의 통행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이 연탄들은 아마도 군부대의 난방용으로 공급되는 듯 보였다. 그래도 그 유명한 만물상이니 일본 조총련계 관광객과 우리 일행에게만 특별이 허락이 되어 있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조국 방문이 허락되어 있었고 학생들 이외에는 특히 북송된 가족 방문이 대부분이었다.
나의 둘째 매제도 일본에서 돌아온 북송교포이지만 가족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자기는 돌아갈 수도 없고 애타게 부모 형제의 조국 방문을 기다리고 있지만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만물상은 기암절벽의 모임으로 이름 그대로의 만물상 일만 이천 봉이었다. 오르는 길은 좀 험하지만 설악산 정도여서 잘 오를 수 있었다.
재일 조선인들은 그들이 조선인이라는 긍지가 대단하다.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조국(북한)이지만 그래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하여 무엇인가 기여하기를 염원하고 있다. 김일성의 조총련계 교육의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가져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이들이 올 때에는 만경호에 자기 친척들에게 줄 여러 가지 선물들을 많이 싣고 온다. 특히 이들에게 인기 있는 것은 중고품 여자 자전거들과 좀 여유 있으면 일제 자동차를 가져 오는 것이다. 여자 자전거는 북한에서는 남녀 공용으로 애호 하는 교통수단이다.
몇 년 전 일본의 어떤 체육학 교수가 여자들이 자전거를 타는 것은 여러 가지 위생상 좋지 않다는 보고를 하였다. 일본 여자들은 자전거를 모두 폐기 처분하는데 북쪽에 가족이 있는 재일 교포들이 이들을 수집하여 만경호에 실어 놓으면 바로 원산으로 오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가져다 친척을 주면 이들 당 간부가 아닌 사람이 자기 차를 운영 하기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음으로 이 차를 가지고 지방고급 당 간부의 자가용 운전사가 된다.
이들은 좋은 직장을 가지게 되고 만일 해고되면 자기 차를 가지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잘리지도 않고 잘 보장되는 직장이 된다.
이들 일본 관광객들은 일본 “니이가다”에서 만경호 편으로 원산에서 일박하고 바로 금강산을 구경한다. 다음엔 평양으로 가는 코스이다. 나는 이미 평양을 거쳐 왔다고 하니 궁금하여 평양 사정을 묻는다.
이 당시 1982년에는 평양의 전기 사정이 그리 나쁘지 않아 지금 같은 암흑의 밤거리는 아니었다. 대개는 해방 전 북한 출신이거나 특히 북송 교포의 친척들이다.
그들도 가족을 소위 살기 좋다는 조국에 보내 놓고 소식도 제대로 못 듣고 살다가 이렇게 가족 상봉의 꿈에 부풀어 있다.
3박 4일의 금강산 관광을 끝내고 평양으로 돌아가니 호텔에는 누님과 남동생 기림이가 와 있었다.
이제 32년만의 조국 고향방문과 가족상봉의 흥분의 14일이 끝나는 마지막 밤이 되는 밤이 되었다.
내가 비록 어머니는 생전에 뵙지 못하였으나 그 산소에 미제 파인애플과 미제 깡통 고기로 양주를 따라 성묘라도 할 수 있었던 건 소위 1천만 이산가족 중에 몇 명 안 되는 행운아였다.
돌아오는 비행장에 누님과, 기림 그리고 막내 기명이가 억지떼를 써서 나올 수 있었고 나머지 소지품은 있는 대로 다 털어 주고 나중에는 신던 양말, 내의까지 빨랫감이라 하고 들려주고 돌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