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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 3사(三公三師)
태위, 사도, 사공 등 3공과 태사, 태부, 태보 등 3사는 정1품의 벼슬로 행정권과는 별도로 주어진 명예직이다. 이것이 언제부터 주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종 대에 정착되었다. 3공 3사는 각 1인으로 하고 모두 정1품의 품계를 받았다. 이 기구는 왕의 고문 구실을 하였으며 국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일반적으로 적격자가 없으면 비워두는 것이 관례였고, 왕족에게도 수여되었다.
고려는 봉작을 상속시키지 않았는데, 모든 공(公) · 후(侯) · 백(伯)의 아들과 사위에게는 봉작 대신 최고의 관직인 사도나 사공이 명예직으로 내려졌다. 또한 일반 신하에게는 명예직인 검교직으로 내려졌다.
3공 3사는 사공 · 사도 · 태위 · 태보 · 태부 · 태사의 순서로 진급하였으나 품계는 모두 정1품으로 동일하였다. 하지만 이 순서는 3공보다는 3사가 상위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3성(三省)
중앙관제의 최고기관으로 중서성, 문하성, 상서성을 통칭한 것이며, 당나라 제도에서 유래하였다. 고려는 이 제도를 변형하여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이라 하였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고려는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의 양성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초에 태봉의 관제를 답습하여 광평성, 내봉성, 내의성을 근간으로 하는 3성체제가 갖춰져 있긴 했으나, 이것은 당나라에서 도입한 3성 조직과는 차이가 많았다. 따라서 3성체제는 성종이 982년에 내사문하성과 어사도성 및 어사6관(선관, 병관, 민관, 형관, 예관, 공관 등으로 후에 6부로 개편됨)을 설치한 때부터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995년에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편됨으로써 고려의 3성체제는 골격을 완성하게 된다.
내사문하성은 문종 15년인 1061년에 중서문하성으로 개칭된다. 중서문하성에는 수상격인 종1품 중서령 겸 문하시중을 장관으로 하여 20여 명의 품관이 있고, 그 아래 정8품 이하로 된 270명 가량의 이속(吏屬)이 딸려 있었다.
20여 인의 품관을 열거해보면 수상격인 종1품 문하시중, 부수상격인 정2품의 중서시랑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평장사 · 문하평장사, 종2품의 참지정사 · 정당문학 · 지문하성사, 정3품의 좌산기상시 · 우산기상시, 종3품의 직문하, 정4품의 좌간의대부 · 우간의대부, 종4품의 급사중 · 중서사인, 정5품의 좌헌납, 우헌납, 종5품의 기거주 · 기거랑 · 기거사인(또는 좌정언 · 우정언 · 좌사간 · 우사간), 정7품(또는 종7품)의 검의녹사(또는 문하녹사) · 중서주서 등이다.
한편 상서도성은 문종 대에 상서성으로 개칭된다. 상서성제가 처음 성립된 성종 대에는 상서도성과 6부 및 9속사로 이뤄졌으나 중복되는 기관이 많아 문종 대에 상서성과 6부 2속사로 축소 개편되었다.
이 상서도성 내에는 상서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가 딸려 있었고, 이 중 이부에는 고공사가, 형부에는 도관이 속사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6부가 독립된 행정조직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상서도성은 6부의 실질적인 지휘기관은 되지 못했다. 당나라에서는 상서6부를 관할하는 도당이 설치되어 있어 상서성의 기능이 강화되어 있었지만 고려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상서성은 중앙의 6부와 지방의 주현 사이의 공첩(公貼)을 중계하거나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사무기관에 지나지 않았다.
상서성에는 종1품의 상서령과 정2품의 좌 · 우복야, 종3품의 좌 · 우승, 정5품의 좌 · 우사낭중, 정6품의 좌 · 우사원외랑 및 종7품의 이속 40인 정도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상서령은 종친에게 제수하는 명예직이었기 때문에 좌 · 우복야가 실질적인 장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상서성이 주로 사무기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 좌우복야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이러한 3성체제는 무신정권 이후 중방, 정방, 교정도감 등의 기구들이 등장하면서 권한과 기능이 대폭 축소된다. 그리고 충렬왕 대에 가서 원나라의 압력에 의해 첨의부로 통합되고, 공민왕 대에 다시 중서문하성은 도첨의부, 상서성은 3사로 각각 개편되어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6부(六部)
중앙관제인 이부 · 병부 · 호부 · 형부 · 예부 · 공부를 통칭한 것으로 성종대에 설치된 어사도성의 어사 6관에서 비롯됐다. 995년에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편되면서 그 하부조직으로 6부가 유지되었는데, 업무상으로는 상서도성의 지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독립적인 기관으로 이해됐다.
6부는 형식적으로는 3성의 하부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과 연결되는 기관이었다.
이 제도는 당나라에서 도입되었지만 고려에 와서 다소 변형된다. 당나라의 6부가 상서성의 도당에 의해 관리되었는 데 비해 고려의 6부는 상서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직접 정무를 처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나라의 6부는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의 서열로 되어 있었으나 고려는 이 · 병 · 호 · 형 · 예 · 공의 서열이었다. 이는 고려가 병부를 중시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6부의 각 기능을 살펴보면 이부는 주로 인사를 담당하였고, 병부는 군제와 군사를, 호부는 재정과 호적관리를, 형부는 형벌 및 재판과 노비문제를, 예부는 과거 및 일반 상례를, 공부는 도로 · 교량 · 도량형 등을 관리했다.
6부 역시 3성과 마찬가지로 충렬왕 대에 원나라의 강압으로 인해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등으로 축소 개편된다. 그 후 1356년에 공민왕의 개혁에 의해 복구되었다가 1362년 다시 친원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 예의사 · 전공사 등 6사로 개편된다. 그러다가 1369년에 선부 · 총부 · 민부 · 이부 · 예부 · 공부로 개칭되어 공양왕 즉위년인 1389년에 이성계, 정몽주 등의 고려 개혁세력에 의해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6조로 개편되지만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조선 개국 후 비로소 6조로 정착된다.
6부에는 각각 종2품의 판사, 정3품의 상서, 종3품의 지부사, 정4품의 시랑, 정5품의 낭중, 정6품의 원외랑 등의 품관이 있었으며, 종7품 이하의 이속이 15명에서 20명 정도 있었다.
3사(三司)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 및 조세를 관장하며 백관의 녹봉을 지급하던 기구로 중서문하성, 중추원과 함께 중요한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이 제도는 원래 송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 대에 설치되었다.
3사는 형식적으로 국가의 전곡 출납을 총괄하는 기관이었지만 재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재정에 대한 권한은 호부에 더 많이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3사의 기능은 주로 국가의 수입과 세무, 녹봉 관리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에 설치된 3사는 1014년에 상장군 김훈과 최질의 난 이후 혁파되어 도정사로 개편된다. 그러나 1015년에 김훈, 최질 등의 무신정권이 실각하게 되자 1023년에 복구되었다.
3사에는 정1품 판삼사사 1인과 정3품의 3사 2인, 종4품의 지동사 1인과 부사 2인, 판관 2인 등의 품관이 있었으며, 40여 명의 이속이 있었다.
중추원(中樞院)
군사기무와 왕명 출납 및 숙위를 담당하던 중앙관부로 중서문하성과 더불어 양부(兩府)라고 불리었다.
중추원은 성종 10년인 991년에 한언공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의 추밀원을 모방하여 설치되었다. 그 후 현종 대에 중대성으로 개칭되었다가 1011년에 다시 중추원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문종 대에 직제가 정비되어 종2품의 판중추원사 1인, 중추원사 2인, 지중추원사 1인, 동지중추원사 1인과 정3품의 중추원지주사 1인, 좌 · 우승선 각각 1인, 좌 · 우부승선 각각 1인, 정7품의 당후관 2인 등의 품관을 두었으며, 주사 · 시별가 · 영사 · 기관 · 통인 등 이속 36명을 두었다.
이 가운데 판중추원사로부터 직학사까지를 추밀 또는 추신이라고 하고, 지주사 이하 부승선까지를 승선 또는 승제라 하여 구분시켰다. 이는 추신들과 승선들이 추부와 승선방에서 따로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추신과 승선들은 단지 근무처만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위와 직능에서도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추신들은 승선들보다는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밀접하였기 때문에 흔히 재추(宰樞) 또는 재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직능에서는 추신이 군사기무를 맡고 승선은 왕명 출납과 숙위를 맡았다. 그런데 군사기무는 병부와 도병마사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추신의 군사기무권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따라서 추신은 정치적 의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실질적인 업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흔히 임금의 말을 대변한다고 하여 용후(龍喉) 또는 후설직(喉舌職)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095년에 중추원은 추밀원으로 개칭되었으며, 1275년에는 원나라의 압력으로 밀직사로 개편된다. 그리고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의해 추밀원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에 친원정책이 실시되면서 밀직사로 다시 개편된다.
어사대(御史臺) ㅡ 사헌부(司憲府)
법을 통하여 시정을 논하고 풍속 교정, 백관규찰, 탄핵 등의 일을 맡아보던 사정기관으로 신라 진흥왕 대인 54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신라의 제도와 중국 당 · 송의 제도를 융합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재편했다.
태조 때에는 사헌대라고 하던 것이 성종 대에 어사대로 개칭되었고, 현종 대에는 최질 등의 난으로 금오대(金吾臺)로 일시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다시 사헌대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충렬왕 대에는 사헌부, 공민왕 대에는 감찰대와 사헌부 등으로 불리었다.
구성원으로는 정3품의 판사 1인, 대부 1인, 종4품의 지사 1인, 중승 1인, 종5품의 잡단 1인, 시어사 2인, 정6품의 전중시어사 2인, 감찰어사 10인 등이 있었고, 그 외에 이속으로 정7품의 녹사 3인을 비롯하여 영사, 서령사, 계사, 지반, 기관, 산사, 기사, 소유 등 약 50명 정도 있었다.
어사대는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인 낭사와 함께 간쟁 및 시정논집 등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고 이를 위하여 불체포, 불징계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한림원(翰林院)
왕의 칙명과 조서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곳으로 주로 학자들이 재직했다. 이들은 이외에도 고시관, 즉 지공거로서 우수한 관리를 뽑는 일을 하였기 때문에 고려 문신들은 한림원에 재직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알았다.
한림원에는 정3품의 한림학사승지 1인, 정4품의 한림학사 2인, 정5품의 시독학사 4인, 종8품의 직원 4인, 정9품의 의관(醫官) 2인이 속해 있었다. 이외에 녹사 2인을 비롯해 8명의 이속이 포함된다.
한림원은 충렬왕 대에 사림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 되었다. 그 후 충숙왕 대에 예문관으로 독립했다가 공민왕 대에 한림원으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에 다시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사관(史館)
시정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史官)들이 주로 실록 및 역사서를 편찬하던 기관이다.
사관은 감수국사, 수국사, 동수국사, 직사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겸관으로서 감수국사는 시중이 겸하고, 수국사와 동수국사는 2품 이상이 겸하고, 수찬관은 한림원의 3품 이하가 겸하고, 직사관은 4인으로 되어 있다.
이 기관은 충선왕 대에 한림원과 합쳐져 예문춘추관이 되었다가, 충숙왕 때 예문관으로 독립되어 이후 줄곧 춘추관으로 불리게 된다.
그 외 기관들
국자감(國子監)
992년에 설치된 국립대학으로 태조 대의 국학을 계승한 것이다. 충렬왕 대에 국학으로 명명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성균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배원정책을 실시하던 공민왕에 의해 국자감으로 회복되었다가 다시 성균관으로 불리게 된다.
비서성(秘書省)
경전이나 축문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곳이다. 고려 초에는 내서성이라고 불리었다가 성종 대에 비서성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298년 충렬왕 대에 비서감으로 격하되었고, 1308년에 전교서로 개칭되었다가 예문춘추관에 편입되었다.
합문(閤門)
조회와 의례 등의 의전을 주관하던 부서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홍보를 담당하여 왕명을 전달하는 기능을 맡기도 하였다. 1274년에는 원의 간섭으로 격하되어 통례문으로 고쳐졌으며, 1298년에 복구되었다가 1372년에 다시 통례문으로 개칭되었다.
위위시(衛尉侍) : 의장(儀仗), 즉 의식에 쓰이는 그릇이나 기구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전농사(典農司) : 국가의 큰 제사에 사용될 곡식을 맡아보던 기관이다. 원래 사농경이었다가 전농시로 개칭된다. 그 후 1369년에 사농시로 고쳐지면서 폐지되었다가 1371년에 다시 설치된다.
사천대(司天臺)
천체의 운행과 기후를 관측하고 절기와 날씨를 측정하며 시간을 관장하던 곳이다. 원래 명칭은 사천감, 관후서 등이었으나 문종 대에 사천대로 정착되었다. 그 후 1308년에 서운관(書雲觀)으로 개칭되었다. 관원은 정3품의 판관 아래에 품계별로 20여 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