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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윤희 선생은 1919년 3월 1일 개성 시내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여 개성 3.1운동 발발에 도화선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였다. 옥중에서는 유관순과 함께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출옥 후 계성여자교육회에서 활동하며 근우회의 개성지회 설립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어윤희(魚允姬 1881-1961)선생은 1881년 충북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워 학업의 기초를 닦았다. 아버지가 늘 강조했던 “말은 충성되고 미쁘게 행실은 착실하고 남을 공경하라(言忠信 行篤敬)”란 글귀를 가슴에 새겨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선생은 12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1894년에 결혼하였다. 하지만 그 해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남편은 결혼한 지 3일 만에 동학군이 되어 집을 떠났으며 불행하게도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창졸간에 남편을 잃은 선생은 시댁을 떠나 본가로 돌아와 지내던 중 1897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고향을 떠났다. 아마도 생계유지를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녀는 10여 년을 황해도 평산, 해주 등지를 전전하다 1909년 경기도 개성에 정착하였다. 그 후 선생은 우연히 개성 북부교회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정춘수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감명받아 기독교에 입문하여 북부교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시기 기독교와의 만남을 선생은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며 충효사상을 익힌 까닭에 나라를 위해 나서려는 마음에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선생은 1909년 6월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개성북부교회 등에서 전도하던 갬블(Gamble, Rev. 甘保利)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이후 갬블의 주선으로 개성의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재학시절 선생은 이미 교육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개성동부교회 부속학교의 교사로 활약하였고,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호수돈 여학교에 입학하여 35살 되던 1915년 3월 졸업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각과 민족독립을 위해 희생할 준비된 여성으로 재무장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다져나갔다.
개항 이후 추진된 정부주도의 근대적 교육과 기독교 선교사들의 여성교육운동을 통해 깨어난 여성들은 점차 진정한 사회구성원이 되어 갔으며, 여성운동의 진전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조직적인 항일 여성투쟁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러한 여성들의 경험은 1910년대의 준비기간을 거쳐 3.1운동에서 다양한 활약으로 이어졌다.
한편 1919년 전민족적 항일투쟁인 3.1운동의 추진주체였던 민족대표들은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종교 교단조직과 학생조직을 이용하여 3.1운동의 지방 확산 및 대중화를 계획하였다.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화영목사는 개성지역의 연락을 책임지고 2월 중순부터 적임자를 물색하며 아우 오은영과 실행계획을 세웠다. 1919년 2월 28일 개성에 급파된 오은영은 독립선언서 100매를 개성북부교회 목사 강조원에게 전달하였다. 강조원은 독립선언서 배포방법을 모색하다가 3월 1일 아침 이 선언서를 전도사 신공량에게 전달하였다. 신공량은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직접 배포하지 않고 배포할 사람을 찾았지만 선뜻 위험을 감수할 자가 나서지 않았다. 이 거사를 비밀리에 전해들은 선생은 자신이 선언서를 배포하겠다고 의사를 전하여 배포자로 결정되었다. 마침내 독립선언서 약 80매를 전달받은 선생은 전도부인 신관빈과 함께 오후 2시경 그 일대의 거리에서 ‘조선독립선언서’ 라고 알리면서 조선인과 부근의 주민 수십 명에게 배포하였다. 이후 개성지역의 3.1운동이 송도고보와 호수동여학교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선생은 곧바로 일본경찰에 끌려갔지만 독립선언서 배포로 개성지역 3.1운동을 촉발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개성지역 3.1운동의 도화선 역할이 된 그녀의 독립선언서 배포는 3.1운동 당시 이루어낸 여성의 역할 중 빛나는 것이었다. 일본 경찰에 연행된 후 선생은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해 4월 11일 보안법위반으로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정작 독립선언서를 선생에게 전달한 강조원, 신공량은 7개월 집행유예 3년형으로 확정된 것과 비교해 보면 3.1운동 당시 그녀가 감당한 역할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재판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선생 역시 유관순이나 다른 여성독립운동가들처럼 감옥에서 쉬지 않고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당시 함께 수감되었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옥중투쟁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중인 선생을 비롯한 여성투사들은 투쟁의지를 더욱 강고히 하여 1919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에 옥중만세시위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무도한 탄압과 모진 악형에도 전혀 굴하지 않는 여성투사들은 1920년 3월 1일을 맞이하여 3.1운동1주년 기념 만세투쟁을 감행한 것이다. 1920년 2월 말 서대문형무소 안에서 선생은 유관순 등과 함께 이 투쟁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통방이라는 감방 안의 비밀통신방법으로 17개 여자감방의 세를 모아서 3월1일 오후 2시 일시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투쟁을 전개하였다. 간신히 시위를 진압한 일인교도관들은 주도한 사람을 색출하고자 여성 투옥자들을 고문하였으며 유관순은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또한 선생은 일본인 간수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밥을 나르던 우리나라 여인을 붙잡아 반민족적인 행동을 질책하고서 따끔한 훈계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한 뒤 도리어 독립투사들의 비밀연락원 역할을 감당케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렇게 1년 이상 투옥되었던 선생은 1920년 4월 28일의 사면령에 따라 출감하게 되었다.
출옥 후 선생은 개성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신앙 이외에 민족의식고취와 계몽교육활동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선생은 3.1운동에서의 항일투쟁경력을 인정받아 개성지역의 종교 및 민족운동 단체에서 주요 지도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선 선생은 개성지역을 넘어 감리교내의 여성지도자로 성장하여 1920년 12월 경성에서 개최된 제1회 남감리회여선교대회에서 부회장으로 피선될 정도로 중요인사로 부상한 것이다. 이 시기 선생은 독립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방법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우선 해외에서 작전을 위해 잠입한 독립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위험한 임무를 감당하였다. 예컨대 1920년 10월 발생한 대한독립의군부 군자금모집사건이 그 사례다.
또한 선생의 활약상은 1920년대 개성지역의 민족운동에서도 빛을 발했다. 즉 개성여자교육회, 신간회와 근우회의 개성지회 등에서 지도급인사로 이 지역 민족독립투쟁과 여권신장활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폭압적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기만적인 통치정책으로 전환하자, 제한적이나마 한국인의 사회운동도 다소나마 활동 공간을 갖게 되었다. 여성운동의 경우 1920년부터 전국에 여자청년회가 다수 발족되면서 여성교육과 의식계몽운동이 활발해졌고, 신교육여성들 주도의 여성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성운동 내부에서 제기된 여성해방은 사회개조의 기초로써 이는 곧 반봉건 근대화의 기치를 확립하는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남녀평등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여성운동의 선결과제는 바로 여성의 계몽과 교육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주도된 1920~23년의 민족운동은 교육계몽운동적 특징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개성에도 이어져 1920년 7월15일 이 지역 여성지도자들이 개성여자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선생 역시 이에 동참하였다. 개성여자교육회는 3.1운동 직후 여성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조성하려는 분위기 하에서 신교육여성들이 주도해 여성의식을 계몽시켜 여성의 인격과 사상 및 행동을 개조할 목적으로 창립했던 것이다. 즉 조선여자교육회와 같은 국권회복과 여성의 권익신장을 목표로 하며, 강연 등을 통해 여성들의 사회의식을 자각시키고 세계관을 넓혀주고자 하였다. 이것은 후일 (1929년경) 교육회 회장에 취임했던 선생의 여성교육운동의 목적이요 방향이기도 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개성신간지회와 자매단체인 근우회개성지회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어 갔다. 선생은 1927년 7월 신간회 개성지회의 설립준비단계부터 간사로 참여한 이래 1931년 1월 임시대회준비 및 해소까지 줄곧 간사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1927년 2월 15일 민족단일당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였다. 신간회운동의 급속한 확대를 위해 전국적으로 지회설립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개성지회 역시1927년 8월 8일 설립되었고, 선생은 이성득, 하보항과 함께 선전조직부 간사로 활동하였다.
한편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개성지회의 결성은 선생의 활약에 힘입은 바 크다. 1927년 5월에 설립된 근우회는 민족독립운동의 통합조직인 신간회 창립에 자극 받은 한편, 그 동안 분산된 여성운동계도 단결된 단일조직으로 통합함으로써 근대 한국여성운동사상 일획을 긋는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은 여성의 공고한 단결과 지위향상이었고, 운동 목표로 봉건적 굴레와 일제침략으로부터의 해방을 제시하였다. 근우회 조직은 지도부의 민족주의계(종교계),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가는 물론 여학생, 직업여성 등 지식인 여성과 여성농민, 여성노동자, 전업주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여성을 망라하였고1930년까지 118개 지회가 설립되는 세를 과시하였다.
근우회 개성지회가창립된 것은 1929년 6월 15일이었다. 즉 개성지회는 개성여자교육회를 기반으로 창립되었는데 설립대회 임시의장은 근우회 본부에서 온 정칠성이 맡았다. 그런데 개성지회의 설립에는 근우회본부와 신간회 개성지회의 후원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실 근우회개성지회는 신간지회에 비해 설립이 지체된 것으로 보이며 1927년 12월경 근우회지회설립 촉진에 대한 논의가 있었음에도 개성여성운동계의 대응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29년 1월 신간회간사였던 선생이 개성여자교육회의 회장직을 맡으면서 비로소 이 단체를 근간으로 근우회개성지회가 출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양 단체에 관여했던 선생을 매개로 근우회 개성지회가 창립되었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결국 근우회 개성지회의 설립을 출범시켰던 숨은 주역이었고 할 수 있다. 선생은 근우회가 지향하는 여성지위 향상과 민족독립투쟁이란 목표가 바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므로 전도부인이란 종교적인 신념에 구속됨이 없이 민족독립운동전선에 동참해서 여성계몽과 교육을 통한 여성해방과 민족독립을 위해 활동했던 여성이었다.
선생이 설립한 유린양육원 어린이들과 함께
1931년 5월 신간회해소 이후 선생은 민족운동단체에서 물러나 아동복지활동에만 헌신하였다. 1937년 감리교의 지원 하에 개성 유지의 도움으로 개성 고려정에 ‘유린보육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고 고아들을 돌보았으며 해방 후 월남하여 서울 마포에 이를 재건하여 복지활동으로 남은 생을 보냈다. 선생은 1961년 11월 18일 유린보육원에서 별세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