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지훈국학상 수상자의 말
지난 2006년 여름, 저는 말로만 듣던 경북 영양의 ‘주실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 출신의 지인(知人)께서 저를 초청했던 것입니다. 저는 문향(文鄕)으로 이름난 주실은 과연 어떤 곳일까 큰 기대를 하며 그곳에 당도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초청한 지인은 마을 이곳저곳을 소개하더니, 마침내 ‘지훈문학관’으로 안내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조지훈 선생이 주실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조지훈 선생에 대해 특별히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배웠던 〈승무〉(僧舞)의 한 구절과 대학시절 마음을 다지며 읽었던 《지조론》(志操論)의 제목 정도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훈문학관을 둘러보니, 선생께서는 또한 ‘탁월한 국학자’(國學者)요 ‘일세의 풍류객’(風流客)이셨던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저는 선생의 경지가 강물처럼 연원(淵源)이 있고, 바다처럼 넓으며, 푸른 하늘처럼 고결(高潔)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훈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고서, 저는 기쁘면서도 덤덤했습니다. 마침 궁색했던 차에 용돈이 생길 것이니 기뻤던 것이요, 제가 과연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스러웠기에 덤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상(賞)에는 ‘채찍’이라는 뜻도 있는 것 같습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 했듯이,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사실 근래 저는 많이 게을러졌는데, 이를 알고 때마침 채찍을 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야속하나마, 격려의 의미로 알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채찍질의 대상으로 저를 선정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조지훈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또 오늘의 시상식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신 내외 귀빈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의 학문적 성취에 대해, 종종 상반된 감정을 품게 됩니다. 어떤 때는 대단한 것 같아 자부심(自負心)을 품기도 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초라할 뿐이어서 자괴심(自愧心)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번 수상작 《朱子學의 길》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철학자(哲學者)의 본질적 임무는 현실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처방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자(朱子)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주자(1130∼1200)는 송대(宋代)의 학자로서, 천여 년 동안 묻혀있던 공맹(孔孟)의 학술을 다시 천명(闡明)한 인물입니다. 주자는 맹자 이후 송대에 이르기까지 약 1300년의 세월을 ‘올바른 도(道)가 밝혀지지 않은 어둠의 세월’로 규정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분열과 혼란의 시대도 있었지만,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처럼 부강하고 찬란한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자는 이 시대마저도 어둠의 세월이었다고 규정한 것입니다.
사실 한당의 시대는 정치적으로는 법가(法家)가 득세하고, 사상적으로는 노불(老佛)이 주도하던 시대였습니다. 법가는 패도(覇道)와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숭상했고, 노불은 허무적멸(虛無寂滅)을 추구하면서도 창광자자(猖狂自恣: 미치광이처럼 스스로 방자하게 행동함)의 폐단을 연출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불행하게도 대도(大道)의 요점을 듣지 못하고, 소인(小人)은 불행하게도 지치(至治)의 혜택을 입지 못했다”는 것이 주자의 생각이었습니다. 세상은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면, 이는 분명 큰 문제일 것입니다. 이제부터 주자의 진단과 처방을 소개하겠습니다.
주자는 세상의 혼란과 민생의 도탄은 잘못된 정치로부터 기인하고, 잘못된 정치는 잘못된 학술로부터 기인한다고 보았습니다. 주자는 잘못된 학술의 주범으로, 무엇보다도 법가와 노불을 꼽았습니다. 그러면 법가와 노불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주자에 의하면, 첫째, 법가는 통치자의 인격적 성숙 문제는 외면하고 법규라는 제도적 해결책에 매달리며, 사람다움의 근거인 인륜(人倫)은 외면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에만 집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노장(老莊)은 청정무위(淸淨無爲)라는 명목으로 현실의 세계를 외면하며, 또한 상대주의(相對主義)에 빠져 인륜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불교(佛敎)는 원융무애(圓融無헆)라는 명목으로 선악(善惡)의 분별마저 망집(妄執)으로 규정했으며, 특히 선불교(禪佛敎)는 마음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음으로써 창광자자를 연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자는 이러한 학술들을 ‘사이비’(似而非)로 규정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원리를 사서(四書) 특히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서 발견했습니다. 그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진리(眞理)는 현실 속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혼탁한 현실에 실망한 사람들은 곧잘 현실을 외면하고 초월의 세계로 치닫습니다. 그러나 유교의 경전에서는 인간의 삶의 터전은 현실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또한 진리란 현실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반성적으로 현실에 임하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것을 ‘아래로부터 배워 위로 통달함’(下學而上達)이라 했고, 주자는 이것을 ‘실학’(實學)이라 했습니다.
둘째, 근본(根本)과 말단(末端)을 겸비하고, 체(體)와 용(用)을 일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흔히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라 하거니와, 자신의 인격을 닦는 것은 근본이요, 구체적인 통치술(統治術)은 말단이라는 것입니다. 통치자의 인격이 모자라면 아무리 법규를 잘 갖추어도 세상이 제대로 다스려질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유학의 지론(持論)이었습니다. 한편, ‘체와 용’이란 ‘형이상학과 통치술’을 뜻합니다. 무릇 형이상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추구하거니와, 인간과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인간과 세계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자는 ‘이(理)와 기(氣)’라는 개념으로 세계를 해명하고, ‘심(心)과 성(性)’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을 해명하는 이론을 구축했습니다.
셋째, 우리는 ‘각자의 마음’(自由意志)이 아니라 ‘자연의 理法’(天理)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변덕스럽고, 사실 양심적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판단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자는 마음은 진리의 표준일 수가 없다고 봅니다. 마음은 다만 진리를 실천하는 주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중용》에서는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本性)이라 한다”고 했고, 천명(天命, 天理)에서 유래하는 본성이야말로 진리의 표준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자학에서는 마음과 본성을 엄격히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주자는 이상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는 학문체계를 구상했거니와, 이기심성론은 그 기초적 설계도였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기와 심성의 문제를 정밀하게 논의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기심성론을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고 질타하지만, 이는 본래 매우 실천적인 관심에서 출발했던 것입니다. 주자 이기심성론의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본성(理)은 순선하나 그 자체만으로는 공허하고, 마음(氣)은 능동적이나 그 자체만으로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성의 순선함과 마음의 능동성이 결합되어야만 모든 일이 제대로 구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이상적인 목표도 현실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는 뜻이며, 현실적 조건은 이상적 목표라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朱子學의 길》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논의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현대 미국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자유주의’에 대해 심원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자유’란 외부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인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관념은 바로 ‘자기진실성’이었습니다. 자유나 자기진실성은 인간을 타락(墮落)시킬 수도 있고 고양(高揚)시킬 수도 있거니와, 현대 사회의 지배적 경향은 고양이기보다는 타락이었다는 것이 테일러의 진단입니다. 테일러는 ‘자기진실성’이 타락한 형태를 ‘나르시시즘’(narcissism)으로 규정하고, ‘자기 결정의 자유’가 타락한 형태를 ‘인간독존주의’(人間獨尊主義)로 규정했습니다. 테일러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기진실성’은 도덕의 필요조건일 뿐, 결코 충분조건은 못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자기진실성’과 ‘객관적인 가치의 척도’가 결합될 때 도덕의 필요충분조건이 완비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양심지상주의자’(良心至上主義者)들은 이 점을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한편, ‘법치주의’에 대해서도 점차 강한 회의가 싹트고 있습니다. 정치학자 강정인은 “한국사회는 법치의 과잉과 법치의 결핍이라는 역설적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법치의 과잉’이란 ‘법규(法規)의 과잉’을 뜻하고, ‘법치의 결핍’이란 ‘준법(遵法)의 결핍’을 뜻합니다. 우리 사회에 각종 법규는 넘쳐나는데, 그 가운데 제대로 지켜지는 법규는 별로 없다는 진단입니다. 요컨대, 법치(法治)가 성공하려면 준법정신이 필요한데, 준법정신을 함양하는 것은 덕치(德治)의 영역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유학의 선후본말론(先後本末論)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출발점’은 ‘우리들 각자 먼저 자신의 인격을 닦는 것’입니다. 이를 외면하고서 개혁을 논하는 것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민주화 개혁세력’들은 이 점을 깊이 통찰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철학자 이명현은 오늘날의 고립적 ‘개인주의’가 초래하는 병폐를 세 측면에서 진단한 바 있습니다. 즉 개인주의는 인식론적으로는 유아론(唯我論)에 빠지고, 나와 남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며, 결국엔 그로 인해 자신마저 불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명현에 의하면, 개인은 ‘전체에 종속된 존재’도 아니요, 그렇다고 ‘고립적 존재’도 아닌 것입니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서로 맞물림의 틀’로 규정하고, 구체적으로는 ‘상호의존성, 상호주관성, 공정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관점에서 ‘새로운 文明’을 제창하고, 새로운 文明의 文法으로서 ‘창문이 열려있는 單子’(Monad with Open Window)라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새로운 문법은 주자가 구상했던 문명의 설계도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오늘날의 석학(碩學)들이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제시하는 처방은 주자학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궤(軌)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에 저는 주자의 철학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훌륭한 지침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은 학문에 있어서 가법(家法)과 사승(師承)의 중요성을 역설하신 바 있습니다. 시골 농부로서 주경야독(晝耕夜讀) 유학의 여러 經典들을 가르쳐주셨던 아버님, 전통(傳統)과 현대(現代)를 아우르면서 학업의 방향을 지도해 주셨던 은사 이동준(李東俊) 선생님께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조지훈 선생의 학덕이 길이 계승되기를 기원하면서, 지금도 가슴에 와 닿는 <승무>의 한 구절을 낭송하는 것으로 제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감사합니다.
지훈국학상 심사보고
제9회 지훈상 국학부문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심사위원들은 역사, 종교, 철학 분야에서 한국학의 심화에, 또 영역 개척에 기여한 연구 성과를 탐문한 바, 나희라 교수의 한국역사 속에 드러난 ‘한국인의 생사관’에 관한 연구(《한국인의 생사관》, 지식산업사, 2008), 박재순 박사의 함석헌 및 유영모의 ‘씨 사상’에 관한 연구(《민중신학과 씨 사상》, 천지, 1990; 《다석 유영모》, 현암사, 2008), 그리고 이상익 교수의 한국유학에 관한 연구(《서구의 충격과 근대한국사상》, 한울, 1997; 《畿湖性理學硏究》, 한울, 1999; 《기호성리학논고》, 심산, 2005; 《朱子學의 길》, 심산, 2007)에 주목하였다. 앞의 두 가지 연구는 그 주제의 ‘한국적’ 고유성 때문에, 그리고 마지막 연구는 그 연구 성과의 깊이와 중량 때문에 특히 심사위원들의 주의를 끌었다.
다각도의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나 교수의 연구는 그 주제영역의 참신성은 높이 살 만하나 그 연구의 성과가 아직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데에 동조하였고, 박 박사의 연구는 한국 사상가에 대한 연구가 큰 의미를 지니기는 하나 그 체계적 이론화 작업이 학적 수준에 이르기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이 교수의 연구 중 최근작인 《朱子學의 길》을 수상작으로 결정하였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이 저술을 통해 이 교수가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한국유학의 이론적 기초, 즉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에서 정초되는 주자학의 핵심이론을 재해석함으로써 한국유학의 여러 논쟁적 문제들을 새로운 관점에서(이 교수의 생각대로는 바로 잡힌 관점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핵심 내용에 대해 언급하자면 이렇다:
퇴계, 율곡뿐 아니라 많은 조선 유학자들의 성리학 연구는 그 형이상학적 깊이가 그 연원인 중국의 주자학을 넘어선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 성리학은 전통적으로 주자학을 ‘주리론’(主理論) 체계로 해석하고 그 위에서 여러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착종된 논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주자학은 우주만물을 이(理)가 주재하는 체계로만 보지 않고 기(氣)도 함께 주재하는 세계라고 역설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주재’(主宰)의 뜻은 달라 이(理)의 주재란 이(理)가 기(氣)의 운동의 표준이 됨을 뜻하고, 기(氣)의 주재란 기(氣)가 이(理)를 맡아서 운용하는 주체가 됨을 뜻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주자학은 이를테면 이기상호주재론(理氣相互主宰論)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현재 한국유학에서는 주자학을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을 중심으로 논구하고 있는데, 주자학은 이러한 이론철학적 관점 외에도 실천철학적인 관점, 즉 현실적인 사회철학적 문제연관 속에서 탐구해야 그 형이상학적 이론의 의의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저작에서 이 교수는 주자의 형이상학(理氣心性論)과 실천철학(修養論/工夫論)의 관계를 ‘체(?)와 용(用)’의 연관관계로 보고 이 양자의 긴밀한 관계를 소상히 밝힌다.
이 교수는 또한 이 저작에서, 한국유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는 양명학(陽明學)을 그 근원인 왕양명(王陽明)의 철학 자체에서 다룸으로써 한국유학의 주변부까지도 조망하고자 했으며, 마찬가지로 보론(補論)에서 다산(茶山)의 윤리사상을 주자학 이론에 비추어 문제 삼음으로써 한국인 고유의 유학사상을 구명하고자 힘쓰기도 하였다.
제9회 지훈국학상 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임현진
심사위원 노태돈·손동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