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다앙~신(神) 성역(聖域),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금단지경
포세이돈이 화났다
크레타의 왕에게는 골칫거리가 하나 있었다. 사랑하는 왕비가 아들을 낳았는데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몸뚱이는 사람인데 머리가 소였던 것이다. 인신우두(人神牛頭)인 이 녀석은 식성이 매우 까다로웠다. 사람의 음식도 소의 먹이도 마다하고 오로지 인육(人肉)만을 고집했다. 크레타 왕국에 왕자가 태어났는데 그 꼬락서니가 ‘소대가리’인데다 그 섭생이 ‘사람고기’였으니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왕은 하는수없이 미로를 만들어 괴물을 가둬버렸다.
크레타의 우환은 사실 미노스 왕에게서 기인한다. 제우스 신과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나 크레타 왕국을 세우고 형제들과의 권력쟁탈전에서 승리한 미노스는 강력한 왕권을 세우기 위해 해신(海神) 포세이돈의 힘과 권위를 얻기로 했다. 포세이돈의 상징인 소를 받아 왕가의 정통성을 확립한 다음 신전을 짓고 그 소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성한 소를 보는 순간 너무도 탐난 나머지 딴 소를 제물로 바치고 해신의 소는 자기가 ‘꿀꺽’ 해버렸다.
신은 모르는 게 별로 없다. 화가 난 해신의 저주가 시작되었다. 미노스의 왕비와 소를 서로 사랑하게 만들어 비극을 안겨주는 게 포세이돈의 벌이었다. 왕비 파시파에는 소를 유혹해 사랑을 나누고 소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으니 그가 ‘미노스의 소’ 미노타우로스였던 것이다. 해신의 혈통을 죽이자니 더 큰 재앙을 부를 것이고 그대로 놔두자니 미노타우로스의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크레타 백성들의 비명을 평생 들어야 할 것이다. 해신을 상대로 사기친 벌은 너무도 컸다.
인신우두의 괴물 미노타우로스
하데스가 뿔났다
지하세계의 왕에게 매우 기분나쁜 일이 생겼다. 날마다 들어와야 할 ‘재물’이 장부에서 하나 빠진 것이다. 명부(冥府)의 왕에게 있어 재물이란 ‘죽은 자들의 영혼’이 아니고 무엇이랴? 운명에 따라 제 명을 다 산 인간들은 저승사자의 손에 이끌려 순순히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거역할 수 없는 법이었다. 죽은 자들의 영혼은 다시는 지상으로 나갈 수 없으니 명부의 세계는 날로 재물이 늘었고 그 재물의 양만큼 저승왕 하데스의 권력도 세졌다. 그런데 어느날 재물 하나가 ‘빵꾸’난 것이다.
범인은 아스클레피오스란 자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상징인 히포크라테스의 조상이자 아폴론 신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 아폴론의 권능을 물려받아 의신(醫神)이 되었는데 그 의술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명의(名醫)를 넘어 신의(神醫)로 추앙받았다. 어느날 숨이 ‘꼴딱’ 넘어가는 사람을 살려냈는데 환자는 이미 저승사자와 함께 ‘카론의 배’를 탄 뒤였다. 망자(亡者)의 영혼을 지하로부터 불러내는 일은 엄연히 ‘불법의료행위’였다.
하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징벌하고 싶었지만 그의 아비가 제우스 다음가는 ‘넘버2’이자 올림포스의 ‘갑(甲)’인 아폴론이었기에 함부로 처리할 수는 없었다. 하는수없이 올림포스 법정으로 가서 율법을 어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징벌을 가할 것을 요청했다. 제우스에겐 아들의 아들이니 손자였지만 세상의 율법을 어겼으니 용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우스는 아스클레피오스를 벼락으로 때려죽인다. 주어진 운명을 깨고 법을 어긴 죗값은 너무도 컸다.
제우스가 성났다
제우스를 격분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프로메테우스가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지엄한 명을 어긴 것이다. 신들에 대한 제사와 수발을 들 인간을 창조했지만 그들의 육신이 보잘것이 없어 이를 불쌍히 여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주자고 간청한 일이 있었다. 제우스는 인간이 신성한 불을 갖게 되면 틀림없이 ‘싸가지’가 없어질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므로 이를 불허한 것이었다. 하지만 현자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명을 어기고 몰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제우스에게 프로메테우스는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강력한 티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나 올림포스의 제왕이 되어 권력을 누리는 것도 프로메테우스의 공이 컸다. 미래를 예측하여 제우스 편에 가담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천기를 누설해서 제우스 편으로 우군을 모은 것도 그의 덕택이었다. 모든 면에서 공신이었기에 우대를 해주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능력을 옆에 두고 써먹어야 할 책사였지만 반기를 든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코카서스의 험준한 산으로 끌려가 절벽에 묶였다. 그의 발목에는 결코 끊어지는 법이 없는 헤파이스토스의 족쇄가 채워졌고 날마다 찾아오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먹히게 되었다. 제우스의 사자 독수리에겐 공휴일이 없었다. 밤새 자라난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다음날 어김없이 독수리의 간식이 되었다. 제우스에게 저항한 벌 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벌이었다.
제우스의 명을 어긴 죄로 헤파이스토스의 쇠사슬에 묶이고 있는 프로메테우스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
신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성한 권위와 강력한 권능이 있어서다. 권위와 권능은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위와 권능의 배타적 독점이 신을 존재하게 하는 힘인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비단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은 아니다. 우월한 신과 열등한 신 사이에서도 이 관계는 동일하게 적용된다. 고위 신과 하위 신, 신과 인간의 위계질서는 깨뜨릴 수 없는 법이요 질서인 것이다.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엄청난 고통과 처벌을 감수해야만 한다.
아폴론도 ‘대들다가 피본’ 남자다. 금쪽같은 아들이 벼락맞아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원통했겠는가? 죽은 사람 하나 살렸다고 질서가 어쩌고 율법이 저쩌고 하며 벼락으로 때려죽이는 처사가 너무나 야속했다. 홧김에 아버지 제우스에게 따졌다가 격노한 제우스로부터 인간세계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나긴 세월 동안 반성문 쓰고 양치기 노릇을 한 뒤에야 귀양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시쉬포스는 ‘버티다가 좆된’ 놈이다. 죽어야 할 때 곱게 죽었으면 문제가 그리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주어진 운명 이상을 살아보겠다고 지엄한 저승왕 하데스를 속였으니 ‘사기죄’요 저승사자의 체포에 불응하고 오히려 그들을 묶어버렸으니 ‘공무집행방해죄’였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찾아간 저승에는 감당하기 힘든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기 반복되는 ‘바위 굴리기’라는 형벌은 만기가 없었다.
성역에 다가서는 자의 말로, 방황
벨레로폰에게는 천마 페가소스가 있었다. 괴물 키마이라를 죽이러 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 그가 앞뒤 분간없이 무모하게 떠나지 않고 예언자를 찾아가던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신중함과 겸손함이 있었다. 한 번의 날갯짓에 구만리장천을 난다는 대붕처럼 한 번의 날갯짓으로 천상에 이른다는 페가소스는 벨레로폰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페가소스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페가소스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가 영웅이 되고 왕이 된 데에는 분명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위대한 업적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지상에서는 더 이상 세울 위업도 지킬 임무도 없게 되자 지루해졌던 것일까? 기왕에 얻은 천마를 타고 천궁 올림포스를 구겅하고 싶었다. 마비된 이성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 벨레로폰은 페가소스를 타고 힘차게 날아오른다. 그러나 성역은 완고했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추락한 벨레로폰은 갈대밭으로 떨어져 눈은 장님이 되고 다리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벨레로폰은 ‘방황하는 들판’이라 불리는 알레이온에서 죽을 때까지 방황하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올림포스는 다가설 수 없는 성역이었다.
금단에 들어서는 자의 말로, 추락
이카로스에게는 날개가 있었다.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들어준 날개는 일품이었다. 첨탑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를 잊게 만드는 훌륭한 날개였다. 조심스럽게 비행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아버지의 말씀도 흘리게 만드는 명품 날개였다. 너무 높이 나는 것도 너무 낮게 나는 것도 모두 극단이었다. 극단은 늘 위험을 자초하게 마련이다. 이카로스는 두 깃 가득 바람을 안고 두 눈 가득 욕망을 담아 힘차게 날아올랐다. 목표는 탈출이 아니고 비상이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건 금기였다. 저급한 인간이 고귀한 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모든 금기는 욕망을 부채질한다. 해금(解禁)된 욕망은 욕망이 아니다. 불허되고 금지된 모든 것들이야말로 본능을 자극하여 욕망의 불꽃으로 타오르게 한다. 이카로스는 신의 노여움을 사 바다로 추락한다. 이카로스를 추락시킨 것은 태양의 불꽃이 아니라 욕망의 불꽃이었으리라. 태양은 다가갈 수 없는 성역이었다.
이카루스의 추락
금기를 거스르는 자의 말로, 죽음
파에톤에게는 아버지의 허락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헬리오스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조르는 자식을 이길 부모는 세상천지에 없는 법이니까. 태양마차를 모는 건 아버지 헬리오스의 숭고한 일이었다. 운전면허도 없는 주제에 천마가 끄는 태양마차를 운전하기란 애초에 가당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스튁스 강에 맹세시키고 나서 소원을 말하는 바에야 어찌 수습할 것인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헬리오스는 파에톤에게 운전대를 넘기고 만다.
스카이콩콩 타던 아이에게 운전데를 잡게 하는 건 무모한 짓이다. 돼지목에 진주목걸이요 개발에 편자다. ‘야후’나 다름없는 걸리버가 휴이넘의 신성한 말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파에톤은 신성한 천마와 같은 반열에 들 수 없었다. 저급한 인간이 고귀한 천마를 조종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 파에톤의 손에 고삐는 쥐어졌지만 그의 손에 천마의 마음을 쥘 수는 없었다. 궤도를 밧아난 태양마차의 불로 온세상을 불바다로 만들고 나서야 파에톤은 벼락맞아 죽었다. ‘무면허 운전’이 부른 예고된 참사였다. 태양의 길은 접근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파에톤이 탄 태양마차가 추락하고 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들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것들은 세상천지에 널리고 널렸다. 바빌론의 인간들이 그들의 대소사에 신이 친히 나서는 수고로움을 덜어드리고자 직접 알현하여 밀린 현안(懸案)을 논의하기 위해 하늘로 올랐던 일은 후대에 길이 귀감이 되고 있다. 바벨탑이 완공되지 못했던 건 성역을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금단의 경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금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가까이 할 수 없는 분들을 가까이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가까이 해서 좋은 게 있고 멀리 해서 좋은 게 있는 것이다.
인간 에리직톤이 제 몸을 다 먹어치우고 이빨만 남아 덜그덕거렸던 까닭은 무엇인가? 존귀한 데메테르 여신이 받아야 할 찬미를 본인이 받겠다고 우겨 그리 된 일이 아닌가? 그게 안되자 감히 신목을 베어 신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 아니던가? 누구든 제몫 이상을 바라는 자는 비극을 맞게 된다. 비극을 피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하는 게 방법이다. 인간은 이걸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가장 잘 안지키는 게 또 인간이다. 인간들, 참 묘한 족속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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