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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필코 다시 답사하리라 기약하고
식당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비 그칠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받았는데도 아랫도리가 흠뻑 젖어갔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날씨였다.
오늘과 내일, 김해와 부산의 이어진 약속이 없었다면 아마 하루
접고 내일 삼랑진 ~ 작원관지 ~ 물금 옛길을 도모했을 것이다.
영남대로 양대 관문중 하나인 작원관은 또 하나의 관문인 문경
조령관(鳥嶺關)에 비해 인지도는 낮지만 관(關)뿐 아니라 원(院),
진(津)의 기능을 다 갖춘 요새였다.
대동지지도 위험을 알린 작천잔도(棧道)는 문경 관갑천(串甲遷),
물금 황산(黃山)등과 함께 영남대로 삼대 잔도중 하나다.
'잔도'란 벼랑 통과의 한 방법으로 험한 벼랑에 나무로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길이다.
우리 선인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방식이다.
삼랑, 조창(창암), 뒷기미(오우진)등 세 나루가 간직한 사연들도
길손의 걸음을 멈추게 할만 하다.
기필코 충실한 답사를 다시 하리라 기약하고 천태산 허리를 돌아
가는 신불암고개를 넘음으로서 일단 양산땅에 접어들었다.
1022번도로가 한참 내려가 원동면 신곡마을을 지나면 잠시 경부
선 철로와 나란히 간다.
여전히 오매불망 영남대로였던가.
가야진사(伽倻津祠),용당마을로 가는 다리(신곡교?)를 건너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옛길 따라 원동면사무소, 원동역까지 갔다.
양산시 원동면(梁山 院洞) 원리 원동마을, 옛 내포역(內浦驛:대동
지지)이 있던 곳이다.
원동역 앞 쉼터에서 비를 피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에 배내골
(梨內谷)로 가는 69번지방도로 안내표지판에 잠간 홀렸다.
낙동정맥이 맺어준 상주산장 여인양님(백두대간50, 51회참조)의
호탕하나 불만 가득한 음성이 귓전을 때리는 듯 했다.
"여길 지나가면서도 들르지 않으십니껴.."
전무 후무한 사건(?)과 勿禁
잠시 걸어본 옛길은 원동역까지 뿐이다.
다시 1022번도로를 따라 나섰다.
철로와 원근을 거듭하며 꼬부랑 고개 2개를 넘고 우중에도 물금
읍소재지가 희미하게 나마 보이는 듯 할 즈음이었다.
애매한 갈림길에서 차를 세우려 하는데 빈 택시가 섰다.
사방에 길 대꾸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 물금길을 묻는 내게 기사는 물금까지 그냥 태워주겠단다.
어차피, 양산으로 귀환중이라는 그는 나의 사양도 아랑곳 없이
거의 강요적이었다.
비를 흠뻑 맞으며 걷고 있는 늙은이가 측은해 보여서 자기 선행
대상으로 삼은 것인가.
새로 확포장한, 철로와 나란히 가는 옛길을 잠시나마 달렸다.
영남대로에서, 아니 온 대로에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아무튼 그 고마운 기사와 헤어진 후로는 택시 덕에 세이브(save)
된 시간만큼 물금(勿禁:察訪本驛인 黃山驛)에서 헤매고 다녔다.
양산 다운타운이 지호지간이라 여유가 생긴 것일까.
막걸리 생각이 간절해서 그랬고, 한자 '勿禁'이 궁금해서 그랬다.
지난날 관아에서 금한 일을 특별히 풀어주는 것을 말하던 용어가
지명이 됐으니 궁금할 수 밖에.
낙동강을 국경으로 한 신라와 가락국(김해)관리들의 검문검색과
금지가 하도 심해서 양국민의 불만이 컸더란다.
양국의 관리들이 이 불만을 풀어주기 위해 이 지역에서만은"금지
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해서 勿禁이라 했다는 것.
이 일대가 낙동강 하류지역이라 늘 물피해가 많으므로 수해 없게
해달라는 기원의 뜻으로 물금(水禁)이라 했는데 水의 뜻인 '물'이
한자화 과정에서 '勿'로 바뀌었다는(水 - 물 - 勿) 설도 있단다.
<김해시 상동면 매리2교 앞 삼거리에서 낙남의 첫발을 막 디디려
할 때 강(낙동) 저편 양산 물금쪽에서는 경부선 상하행 열차가 나
보다 더 바쁜 듯 했다.
강가의 이른 아침인데도 시계가 어찌나 좋았던지 동편의 금정산
괴암(고당봉)이 지근처럼 다가왔다.
강 건너 약간 반시계 방향의 오봉산, 토곡산도 지척이었다.
줄기는 염수봉, 시살등을 타고 영축산에 이르러 정족산에서 올라
온 낙동정맥과 합류한다.
이후, 신불, 간월, 능동산과 가지산으로 달려가는 낙동정맥, 일명
영남 알프스의 장쾌한 용트림은 파노라마였다.>(백두대간108회)
2004년 4월 3일 아침, 강 저쪽 김해땅에서는 물금쪽이 그랬건만
2009년 10월 23일 오후의 물금은 이름대로 일체를 금지했다.
부산의 관문 양산의 감회가 유달랐다
어둑해 가는 즈음에, 강 건너편 신현양님(백두대간 109,110회 글
참조)의 전화가 왔다.
내가 양산에 도착하게 될 시간에 맞춰 출발하려는 것이리라.
다시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아까, 물금에서 시간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물금도 대규모 주택단지를 조성중이다.
실은, 물금읍은 미구에 양산 본역(本域)에 흡수되지 않을까.
높다란 양산타워가 현란하게 불을 밝혔다.
범어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 양산천을 건었다.
부산 금정구 범어사(梵魚寺)의 범어와 다른 범어리(凡魚)로 양산
다운타운과 접경이며 물금읍의 거의 반 되는 넓은 마을이다.
양산시가지와 전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번화한 지역이다.
숱한 행정구역개편과 개명이 있었음에도 천년 넘은 이름이란다.
물금과 범어 양쪽 다 만만치 않은 이름이다.
물금읍이 양산에 흡수된다 해도 동명(洞名) 때문에 애 좀 먹겠다.
우리는 약속대로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어렵잖게 재회했다.
1월의 한라산 귀로 이후니까 9개월 만이다.
낙남정맥에서 시작된 그와의 인연은 5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극한의 역경을 극복한 그의 삶은(1급장애인)무시로 나를
60여년 전으로 돌려놓거나 꺼져가는 내 의지에 재점화해 준다.
그와의 대작으로 영남대로 15일만에 처음 취했다.
신현양님네(그에게는 늘 한 명의 동행자가 필요하다)는 내가 쉴
곳(양산시청 부근 찜질방 송림레저텔)을 정해주고 돌아갔다.
부산의 한 관문인 양산에서 낙동정맥 최후의 밤을 보낸 것 처럼
영남대로의 마지막 밤도 보내게 되어 감회가 유달랐다.
산에서 산으로 이어오다가 도움받은 고마운 식당(통도환타지아
옆 주문진황태집)역(役)을 시가지 한 복판에서 김해의 신현양이
한 것이 다를 뿐.
태백 매봉산에서 시작한 실거리 1천5백여리의 낙동정맥에 비할
수는 없다 해도 7년 세월과 부실한 몸임을 감안하면 영남대로도
만만한 여정은 아니었다.
마지막 밤은 늘 여러 생각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 왔듯이
무리한 일정을 소화해내느라 꽤 지쳤는데도 잠이 들지 않았다.
서창동 소달구지집, 신광천수황토찜질방과 김제석님, 택시기사
김석암님, 천성산 원효암의 동지 팥죽, 유락농원을 지나다 만난
온천장의 약사 안병훈님 등 양산땅의 추억들이 잠을 몰아낸 것.
산은 겸손하면 뭉클하도록 무한히 축복하는 자연인데 반해 길은
특별한 감흥이 없는 인위(人爲)라 할까.
그래서 나는 길을 걸으면서도 山나그네임을 자처하는 것이리라.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고산자
영남대로에서 처음 늑장으로 시작했다.
마지막 날이라 해이해진 탓이 아니라 종점 동래읍성이 지근이며
부산의 약속시간을 감안해서 부러 그리 한 것이다.
시청과 각 기관, 학교들이 밀집된 중앙통 답게 길들이 분주했다.
서둘러 동면(東)으로 내려갔으나 경부고속국도와 1077번지방도
역시 출근시간이라 차량들로 만원 사례였다.
대방동을 지난 후에는 어느새 구1077번도로로 전락한 영남대로
옛길을 따라 내송리 동면사무소, 사송리 동면초교 앞까지 갔다.
이후에는 경부고속국도 밑을 통과해 사배고개에 올랐다.
이 때, 낙동정맥 종주때 저 너머 남락고개 일이 고소 짓게 했다.
건널목은 없고 중앙분리대는 높고 꼬리를 문 차량들이 질주하는
왕복 6차선 도로를 통과하기 위해 위험천만한 짓을 했다.
배낭을 들어 분리대 위로 넘긴 후 배낭도 통과할 수 없는 분리대
밑을 엎드려 개구멍 포복하듯 해서 간신히 빠져 나갔으니까.
경상남도와 부산광역시, 양산시와 금정구, 동면과 노포동 경계가
사배고개(沙背也峴:대동지지)다.
한데,<황산역(물금)에서 호포나루를 거쳐 사배고개로 가는 30리
지름길(由狐浦津直至沙背也峴三十里捷路:대동지지>이 있단다.
양산20리, 사배고개20리 합해서 40리인데 10리 단축이다.
물금에서 경부선 철로따라 동면 가산리의 호포삼거리에 도착해
중리마을 ~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 계명봉을 거쳐 사배고개로
내려설 수 있겠다.(호포나루는 1950년대까지도 구실을 했다고)
사배고개
그러나, 호포에서 호락호락하지 않은 금정산, 계명봉을 탄다면
10리 효과는 커녕 더 많은 시간과 체력의 낭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왕에 들어선 지름길이라면 범어사 경유의 동래 길을
택하지 않고 왜 다시 사배고개인가.
예나 지금이나 비중 큰 범어사라 길도 잘 나있었을 텐데.
고산자(古山子)를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발로 걸어보았다면 이런 안내는 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아리송한 것은 사배고개다.
낙동정맥상의 사배고개는 계명봉에서 금정산을 향해 곤두박질치
듯 내려선 안부 사거리다.
부산 범어사 쪽과 양산 동면 사송리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다.
그리고 영남대로상의 사배고개는 '지경고개'라 부른다.
그렇다면, 고산자의 사배고개를 낙동정맥의 사배고개와 일치시켜
보면 어떨까.
그러면 30리 지름길이 이해된다.
코박고 올라야 하는 계명봉을 넘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럴 경우에는 동면초교 앞에서 소산역까지가 또 문제로 남는다.
고산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원망이나 할까.
달라진 사배고개의 한 여인
6년만에 만난 지경고개(사배고개) 일대는 실로 엄청나게 변했다.
계명봉 들머리인 고갯마루에서 계명봉길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어처구니 없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옛 그대로인 것은 오직 부산CC(컨트리클럽)뿐이라 할까.
고갯마루에는 예전에 없던 간이 라면집도 들어서 있다.
숲에 가려 지나치기 십상이겠는데 서있는 승용차 덕에 알았다.
낙동정맥 종주자들에겐 오아시스라 하겠는데 시간대가 맞을까.
상 1. 2 : 사배고개 라면집과 주인녀
3 : 육교 건너 부산CC / 육교 밑은 경부고속국도
4 : 뒷편 봉우리가 계명봉
라면과 부산산(産) 생막걸리로 마지막 날의 첫 식사를 한 장소는
시도계(市道界)지만 양산쪽에 조금 기울었다 해서 양산땅이란다.
그러니까 양산에서 마지막 아침과 점심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걸은 수심(愁心)도 걸걸스럽게 드러내는가.
양산시가 철거를 독촉하고 있다는데 억센 여걸풍의 주인녀(金瓊
子)는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다.
권리금까지 얹혀주고 인수한 생업수단을 잃게 될 판인데도....
언젠가 다음에도 그녀의 걸걸한 웃음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충남 서산태생을 양산까지 내려오게 한 결혼생활도 접은 듯 한데,
과년찬 두 딸보다 친정부모 생각을 더 극진히 하고 있는 효녀다.
그녀의 효심을 봐서라도 일이 잘 풀리기를 빌어주고 떠나왔다.
골목길에 다름 아니던 사배 ~ 녹동 ~ 노포동 길이 4차선 대로다.
두번째 낙동정맥 종주때 계명봉에서 내려와 노포동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기겁하기 한두번이 아니었던 좁은 길이었건만.
이대로 남하를 계속하면 동래읍성이다.
그러나 마지막 경유지인 소산역(蘇山驛:금정구선동 하정마을)을
놓치게 된다.
아니면 지겨운 경부고속국도 시내구간을 끼고 나란히 가야 한다.
늙은이 위세(?)를 다시 한번 과시했다.
시치미 뚝 떼고 베네스티CC를 가로질러 하정으로 갔다.
낙동정맥 통도사CC때처럼 먹혀들었다.
가본들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시간이 여유로와 그랬을 것이다.
지하로를 통해 경부고속국도를 가로질러 남하를 계속했다.
장기간의 분규로 세간에 회자되던 브니엘학교단지(브니엘중고,
여중고, 예중고 등), 구서IC, 동래여중고, 부산예중고, 부곡초교,
'府使閔永勳公去思碑(부사미영훈거사비)도 지났다.
노포동에서 7번국도로 남하를 계속하면 합류하는 삼거리다.
경도발(京都發) 950리가 지근으로 다가오는 지점이기도 하다.
동래부사 민영훈 거사비
영남대로의 대미(大尾) : 사람 나름이다
더러 다녀본 길이며 읍성이라 그 자체로는 새삼스러울 게 없다.
그러나, 장장 16일을 걸어온 길이다.
더구나, 주사맞고 약 먹고, 아무데서나 텁석 주저앉기를 무수히
반복하며 내려왔는데 특별한 감회가 어찌 없겠는가.
마지막 피치(pitch)를 올렸다.
동래 문화회관을 입구로 하여 북문, 북장대(北將臺)에 올랐다.
복원된 문이며 대다.
동래읍성 북문과(상) 북장대(하)
우리나라는 성(城)의 나라다.
크고 작은 성들이 전국 방방곡곡 산하에 편만하다.
이 많은 성의 역사는 곧 민족 수난사에 다름 아니다.
장장 7년의 임진왜란을 비롯해 외적의 침입과 내부의 반란까지
무수히 많은 전쟁이 있었음을 성들은 증언한다.
그래서, 흔적만 남았을 뿐인 성일망정 밟고 지나갈 때는 무참히
죽어갔을 무명 영령들을 위한 진혼 기도를 드리고 싶어진다.
동래읍성이라 해서 다른가.
최초는1021년(고려 현종12년)이라고.
왜구의 노략질을 막으려고 쌓기 시작한 읍성은 임진왜란 때에는
처절한 싸움터가 되었다.
최초의 격전지인 동시에 패전지가 되었으니까.
일본은 이 전투의 승리로 승승장구 북진했다.
그랬는데도, 그들은 왜 그랬을까.
자기네 장병이 전멸한 명량(鳴梁:울돌목)도 아니고 승전한 성이
건만 왜 그리도 저주(헐어버리는)를 퍼부었을까.
일부 남아있는 원형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중이란다.
복원된 성벽에서 바라보는 서북쪽 금정산 고당봉이 비록 아스라
하나 선명할 만큼 청명했다.
어제까지 연3일도 그랬더라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동래읍성에서 바라본 금정산 고당봉(뒤 중앙 암봉)
동장대길은 차단되어 복천박물관, 읍성역사관, 서장대로 갔다.
부산유형문화재 제 6호인 동래향교를 거쳐 동헌을 찾아나섰다.
동헌을 물었건만 하나같이 몰라라 해서 동래구청으로 갔다.
그러나 구청직원의 불손하고 불성실한 응대에 화가 잔뜩 난 날
진정시켜 준 이는 복산동사무소 직원이다.
관내도를 펼쳐놓고 설명해주는 것으로는 미진하다고 판단됐나
밖으로 나와 방위(方位)까지 소상하고도 친절하게 알려줬다.
상 : 동래읍성역사관
중 : 서장대
하 : 동래향교
이중환은 지역적 특성을 말하지만(擇里志) 나는 단연코 아니다.
선천 후천 불문하고 오직 사람 나름이다.
선입견은 절대 금물이라는 말이다.
대간, 정맥, 산이 해주지 않는 일을 길(대로)이 보완해 줌을 마지
막 순간에야 알았다.
그렇다면, 산과 길은 양(陽)과 음(陰)의 관계일까.
이 젊은이가 나의 영남대로 대미를 장식해 주었으니까.
'東萊府東軒'(동래부동헌)에 들름으로서 마침표를 찍었고, '조선
통신사의 길' 표지석 앞에서 영남대로 임을 다시 확인했다.
<영남대로 끝>
동래부동헌과 충신당(하)
동래구 명륜동 명륜초등학교앞 4거리에 세워진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상.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