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와 무이산>
주자와 관련이 깊은 무이산(武夷山)을 목표로 하여 여행을 떠났다. 무이산은 중국인이 평생 한번은 찾아 가보고 싶다는 명소로 1999년 이후 유네스코의 세계복합유산에 등록된 곳이다. 무이산 풍경구는 복건성(福建省) 북부에 위치한 소도시로 중국의 동남쪽에서 경치가 제일이라는 명산이다. 무이산에는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석, 2개의 병풍절벽, 8개의 고개와 3개의 바위암봉이 있고, 계곡도 많아 4개의 계곡, 9개의 여울, 5개의 웅덩이, 11개의 골짜기, 13개의 샘이 있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동주에서는 공자가 나왔고 남송에는 주자가 있으니, 중국의 옛 문화는 태산과 무이로다"(東周出孔丘 南宋有朱熹 中國古文化 泰山與武夷)라는 말로 무이산을 칭송하였다. 주나라의 공자가 태산에서 유학을 창시하였듯이, 남송 때 주자는 무이산에서 신유학인 주자학을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이산은 신유학 즉 성리학과 관련된다. 무이산은 주자가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한 곳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을 찾고, 주자의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읊으면서 주자를 흠모했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해주 석담에 은거하며 무이산의 은병봉(隱屛峯)에서 이름을 따와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은 후 후학을 가르쳤고, 무이구곡가를 본 따서 고산구곡가(孤山九曲歌)를 지었다. 그 후에도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은 화양계곡에 은거하며 지은 집을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동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의 이름도 무이산과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주자를 마치 교주처럼 떠받들었고 성리학은 유교를 성립시켰다.
무이산은 차의 산지로도 유명하다. 특히 여기에서 재배되는 차는 "무이암차"로 불리며, 최고의 품질로 황제에게 상납되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품질을 짐작할 수 있다. 야생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고, 특히 바위가 부서져 있는 토지에서 생산된 것을 최고급품으로 손꼽는다. 또 하나의 계림이라고 부르는 무이산은 낭떠러지 절벽이 연달아 있는 명산이다. 험준한 봉우리들과 계곡을 구불거리며 흐르는 구곡계는 굽이굽이 돌아드는 경치가 무릉도원이 예인가 싶어진다. 볼거리로는 성촌에서 시작하여 무이궁 입구인 1곡에서 9곡까지의 9.5㎞에 걸친 구곡계가 장관인데 수심이 얕고 물이 깨끗하고 파란 빛깔을 띠고 있다.
주희가 오랜 세월동안 머물며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한 곳답게 무이산 지역 전체에서 주자의 발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뗏목을 타거나 등반을 하려고 중국인들이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한다는 곳이다. 한국과 무이산의 경유지인 하문은 대만과 인접한 중국 최남단의 경제특구 도시로 남국 특유의 정취가 있다.
무이산의 내력은 옛날 월나라 때, 이곳을 다스리던 핑노인이 있었는데 핑노인의 두 아들 ‘핑무’와‘핑이’의 이름의 끝 글자 하나씩을 따서 무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문(厦門)의 밤>
10월 26일 3박 4일의 짧은 일정으로 떠난 곳은, 대만과 아주 가깝게 마주보고 있는 지역 중국 복건성 하문시와 무이산 구곡계이다. 하문시는 복건성 남쪽의 구룡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국의 5대 경제 특구 중 하나다. 하문에는 아모이섬과 구랑섬이 있고, 중국 영토인 대만해협 가까이에 대만이 있다. 원래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었는데 등소평이 옆에 있는 도시를 하문시로 편입 시켜놓고, 관광과 무역의 경제특구로 만들어 지금은 아주 잘 사는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석재가 중국에서 두 번째로 많이 나는데, 수산물과 차(茶)도 많이 생산 된다. 기후는 여름엔 40도를 넘지만 겨울에도 영상을 유지하여 늘 따듯한 곳이다.
인천공항에서 오후 7시 50분 중국 항공편으로 출발 하여 2시간 50분을 날아 늦은 시간 9시 40분에 하문에 도착하여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텔에 그냥 있기에는 아까운 시간, 그냥 쉬고 있겠다는 몇 사람을 남겨두고 조선족 가이드 안내로 봉고차 두 대로 해산물 시장 구경에 나섰다. 하문은 바다를 끼고 있어 해산물이 풍부한 해양도시이다. 해산물 시장에서 술 한 잔 하자고 하여 좌판에 생선이 진열되어 어느 한 상점으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당연히 신선한 회를 먹을 것이라 기대 했는데, 내어 오는 생선 음식은 생선이 아니고 익힌 숙선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엔 우리나라처럼 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활어도 없고 냉장고도 없었다. 생선은 좌판에 진열된 채 생선 중간 중간에 신선해 보이라고 고추와 파를 얹어 놓았다. 익힌 물고기 요리를 골고루 10가지 정도 시키고‘칭따오’맥주 한 잔씩을 하고 밤 12시나 되어서 돌아왔다.
<10월 27일 <고랑서(鼓浪嶼)>
오늘은 5분 정도 배를 타고 고랑서로 가는 일정이다. 고랑서는 복건성의 하문시 서남쪽에 있는 섬으로, 하문이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섬 안의 섬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 한 어부가 잠결에 들려오는 북소리를 따라 가 보았더니, 무인도에 있는 구멍 뚫린 큰 바위에 파도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고랑서에는 서방 열강들이 번갈아 점령하였던 곳으로 다양한 서양식 건축물이 많은데, 디자인과 풍격이 각기 다른 모양이어서 그 또한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고 있다. 고랑서는 하문에서 제일 인기 있는 관광지이며 중국에서도 유명한 관광구로,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이 1.78㎢ 밖에 안 되지만 해안선이 구불구불한 천연 해수욕장이 많고 경치가 수려하여‘해화원’으로도 불린다.
배에서 내려 고랑서 남쪽에 있는 숙장화원으로 가는 길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어서 섬 전체가 아름다운 공원 같았다. 꽤 먼 길을 걸어가며 기념품 상점을 기웃 거리기도 하고 특이하게 생긴 나무 아래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가는 길에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는 남자가 있어서 호기심에 사진을 찍었다.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기의 딱한 사정을 호소하며, 깨알 같은 글씨를 복사한 종이를 나에게 주었는데, 내가 그의 사정을 널리 알려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는 어깨와, 가슴과, 팔꿈치와, 무릎 등에 양은 접시 모양의 것을 대고 있었는데 신체의 구부러지는 모든 곳에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종이에 끼워 있는 그의 신체 부분을 찍은 사진을 보니, 무릎과 여러 곳이 심하게 울퉁불퉁하고 구부러져 있었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의 눈치로 보아 산업재해를 입고, 치료와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것 같았다. 공산국가에서도 시위를 하는 것에 놀라면서 세계 어느 곳에나 비참한 처지의 약자에게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바다 위의 아름다운 숙장화원
배에서 내려 숙장화원까지 가는 길은 환경보호를 위해 차를 운행하고 있지 않아, 걸어서 섬을 둘러봐야 한다. 1913년에 지어진 숙장화원은 고랑서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화원으로, 한때 영국 조계지였던 곳이어서 곳곳에 유럽풍 건축물들이 있고 아기자기한 볼거리가 많다. 숙장화원은 지방의 지주인 임이가(林爾嘉)의 개인 별장으로 그의 호인‘숙장’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대만사람인데 1895년‘마관조약’으로 대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그의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하문에 와서 자리를 잡았고, 이곳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하였다.‘임이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고랑서에 화원을 만들고 숙장화원이라 하였다. 1945년 일본이 물러난 후‘임이가’는 대만으로 돌아갔고 뒤에 남은 그의 친지가 1956년 7월 1일 숙장화원을 국가에 헌납하면서 공원이 되었고, 고랑서에‘임이가’의 동상을 세웠다.
바다위에 다리를 놓아 만든 숙장화원은 무척 아름다웠다. 마흔 네 개의 연결된 다리를 지나가는 곳 옆에 커다란 바위들이 있었는데, 그 바위에 사십사교(四十四橋)라고 붉은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언덕으로 올라가면 피아노 박물관이 있고,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70여 대의 기이한 모양의 피아노가 소장되어 있다. 피아노에 써 있는 것을 보니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지리, 오스트랄리아 등의 피아노이다. 전시실 벽에는 유명한 고전 음악의 대가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고랑서의 면적은 1만 7천 평방미터이고 주민은 2만 명도 안 되는데, 이 섬에는 피아노가 500여대가 있다고 한다. 40명당 피아노 한 대를 소유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중국과 세계 전역에서 활동하는 고랑서 출신의 유명한 음악가가 많다고 하는 것은, 작은 섬에 불과한 곳이지만 전통적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젖어 살아 온 때문이 아닌가 생각 된다. 나는 피아노 박물관 기념품점에서 작은 피아노 모양에 시계를 붙여 만든‘오르골’을 샀다. 그 오르골은 지금도 가끔 태엽을 감았다 풀어 주면서 음악을 듣곤 한다.
<일광암(日光巖)> 고랑서에는 바다에는 숙장화원이 있고 언덕위에는 일광암이 있다. 고랑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용두산 일광암은 하문의 상징으로 일광암에 가보지 않으면 하문에 갔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용두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일광암사(日光巖寺)를 지나서 올라가는 길은 바위굴과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만 한다. 계단 위쪽 제일 높은 곳을 광복대라고 하는데, 대만을 점령한 네델란드를 물리친 정성공(鄭成功)의 승전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라 한다. 고랑서에는 정성공기념관이 있다고 하는데 이번 여행길에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광복대 정상으로 올라 가는 길>
뜨겁게 태양이 내리 퍼붓는 언덕길의 계단을 땀을 흘리며 꼭대기를 향해 올라간다. 계단은 겨우 두 사람이 비켜 갈 수 있을 만큼 좁은데 더위에 거친 숨소리를 내는 중국인들과 외국인들이 줄줄이 지친 몸을 서로 부딪치며 올라가고 내려간다. 일광암 정상에 올라갔을 때는 모두들 얼굴이 더위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나중에 그 때 찍은 사진을 보았는데 얼굴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빨갛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고랑서와 숙장화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시원하게 탁 트이는 기분이다. 사람들은 더위에 지쳤던 것도 잊은 채, 아름다운 섬의 풍광에 빠져 절로 감탄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바빴다.
<백조원(百鳥園) 으로 가는 케이블카>
광복대에서 백조원으로 가기 위해서 힘들게 올라 간 계단과 바위를 다시 내려와 일광암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올라가면 내려가야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이면 어디에나 있게 마련이다.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왜 산을 오르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지만, 내려가기 위해서 올라간다고도 한다. 애써 올라 간 길을 내려가야 하는 것은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닥치는 일이다. 그것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성취감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산 중턱에 위치한 일광암사에서 건너편의 백조원으로 가려면 케이블카를 타고 건너가야 한다.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작은 케이블카는 여러 사람이 타고 높은 산 위로 올라가는 케이블카가 아니다. 허공에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는 줄에 매달린 작은 케이블카는 위로 올라가지 않고 줄지어 건너편으로 간다. 그 모양은 줄줄이 계곡의 거센 물살 따라 흘러 내려가는 래프팅 군단과도 같았다. 모모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지만, 앞 쪽과 뒤 쪽 케이블카에 타고 신나게 소리 지르거나 무서워서 어쩔 줄 모르는 재미있는 그림을 놓칠 수 없어, 나는 그들을 사진에 담기 바빴다. 무섭기는커녕 짜릿한 스릴마저 느껴지는 걸 보니 나는 담이 좀 큰가보다.
<백조원>
케이블카에서 내려 조금 걸어 올라간 곳에 새 박물관인 <백조원>이 있었다. 언덕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백조원의 동산엔 각종 새들이 여기 저기 무리지어 있고 동산 전체에 새 그물이 덮여 있다. 그곳엔 보지 못했던 여러 종류의 새들이 관광객들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 물에서 고기를 잡기도 하고, 화려한 색깔의 날개를 펴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재롱을 피우는 놈들도 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새들을 모아 놓아 한 곳에서 구경할 수 있어서 좋기는 하나, 백조원의 새들에겐 참으로 가혹한 처사이다. 자유로이 날아 다녀야 하는 것이 새들의 특성 아닌가. 언덕과 계곡 그리고 냇물을 건너며 이곳저곳 구경하며 다니다가 백조원 입구에서 정말 불쌍한 새들을 보았다. 지금까지 본 새들은 날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새 그물 안에서는 그래도 자유를 누리는데, 날아가지 못하게 앵무새의 발에 쇠사슬을 묶어 놓았다.
인간이 아무리 자연을 지배하는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신은 인간에게 그런 잔인성까지 허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점점 파괴되어가는 지구 환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멸종되어가는 동물을 보호해야하고 식물까지도 마구 채취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도 살 수 없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인간은 한 치 앞을 모르고 나만은 아닐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어느 누가 자연 앞에서 예외일 수 있겠는가. 백조원 하늘을 뒤 덮은 그물 안에서 날지도 못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살아가는 새들은 얼마나 인간을 원망하고 있을까. 앵무새는 발이 아파 그런지, 아니면 갑갑하여 풀어 버리고 싶어 그러한지, 자꾸만 부리로 쇠사슬을 쪼아대고 있지만 두꺼운 쇠사슬은 완고 하다. 인간의 가혹함이여~
<호리산포대(胡里山砲臺)박물관>
호리산포대박물관은 하문시의 남서에 위치한 호리산 해안에 위치하고 있는데, 버스에서 내려 10분 쯤 걸어 올라간 곳에 있었다. 5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샤먼항의 방어 요새이다. 이곳에는 먼 바다에 떠 있는 섬들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다. 전시관 안에는 그야말로 기기묘묘한 기암괴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맑은 날이면 멀리 타이완 영토인 금문도를 전망할 수 있는 군사용 전망경이 있고, 청나라 말기인 1891년에 외국의 침략에 바다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포대가 남아 있다.
독일에서 구입한 대포는 당시 주문을 의뢰받은 독일에서도 이렇게 큰 대포를 어떻게 쓸지 궁금해 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은 8만 냥을 주고 사왔다는 13.95m짜리 대형대포가 인상적이다. 유효 사거리가 6.5km에 달하는 19세기말 최대의 대포라고 하는데, 막상 전쟁에서는 제 몫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멀리 나가는 대포가 있다는 과시용일 뿐, 실제 전쟁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현재 대포는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촬영용으로 쓰이고, 포대는 전망대로 쓰이고 있다. 고대의 무기와 병기도 전시되어 있었다. 야외 전시장에 있는 귀엽고 아기자기하게 생긴 버섯 모양의 구조물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샤먼 원림 식물원>
1960년에 세워 져 갖가지 식물이 어우러진 샤먼원림식물원(厦??林植物?)은 중국 푸젠(福建)성에 속해 있다. 중국 동남연해 지역에 위치한 이 시는 중요한 대외무역 항구로 대만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다. 중국 최초의 4대 경제특구도시 중 하나로 현대적이고 깨끗한 도시경관을 자랑하며, 아름다운 풍경과 연중 따뜻한 아열대 기후,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시내 동쪽에 넓게 위치한 식물공원. 만석암 댐 주변으로 남국 특유의 잎이 크고 화려한 아열대식물이 심어져 있는 식물원이 있고, 공원 이곳저곳에는 기괴한 모양의 암석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중 태평석소(太平石笑)가 명물이다. 식물원 외에 사원과 정원, 호수 등이 있고 마애석각 등도 볼 수 있다. 식물원 이곳저곳에 공작새가 다니고 있다. 사람들 가까이에서 어슬렁거리며 다니고 있는 아름다운 공작들은 아름다운 날개를 자랑하고 있다. 걸어가는 길 주위에 열대우림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나무에 긴 줄기들이 늘어진 것도 있다.
송삼원, 장미원, 종려원, 인펑, 인중식물구역, 약용식물원, 대형선인장원, 난초 밭 등 20여개의 테마원과 식물원으로 구성 되어 있는 이곳에는 관목이 약 180만 그루, 3000여종의 열대식물과 아열대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저수지 주변에 1만여 개의 바위를 배치한 호수에 아름다운 정자가 있기에 일행은 정자 난간에 앉아 쉬기도 할 겸, 사진을 찍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식물원은 인공적이기도 하지만 원래부터 있었던 거대한 자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나무와 숲이 울창하였다.
<주희사당 가는 길>
오늘부터 정작 이번 여행의 목적지였던 무이산과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돌아보는 일정이다. 무이산 관문 입구에서 옆이 트인 관광 순회차를 타고 무이산 쪽으로 가면서 보니 경치가 심상치 않다. 차에서 내려서 얼마를 걸어가자 먼저 무이정사가 보인다. 천유봉 가는 길에 있는 무이정사는 주희가 54세 되던 해(1183년)에 무이산 은병봉(隱屛峰) 아래 지은 것으로 무이구곡 제 5곡에 있다. 주희의 동상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무이정사 안에는 주희 기념관이 있다.
<무이정사(武夷精舍)> 기념관에는 "이학정종(理學正宗)" 등의 현판이 있고 회랑에는 주자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포즈 취하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선비 인형들이 있어 일행들이 그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기념관에는 주희와 함께 그 당시 중국을 풍미한 학자들의 기록들이 잘 정리돼 있는데, 주희의 영향을 받은 해외 학자 명단에 퇴계 이황의 이름도 있어 역사의 인물을 먼 이국땅에서 이름으로 만나니 퍽 반가웠다. 주자는 이곳에서 은거하며 무이정사 주변의 누정(樓亭)과 지형을 시로 읊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지었고 1184년에는 무이계(武夷溪)의 구곡 경치를 읊은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무이산 천유봉(天遊峰) 올라 가는 길>
무이정사에서 나와 드디어 무이산 천유봉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섰다. 무이산(武夷山)은 복건성(福建省)에 위치하여 중국 동남쪽에서 경치가 으뜸이라 꼽혀온 명산으로, 무이산맥의 지맥에 해당하는‘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는 무이구곡(武夷九谷)과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는 명승구를 말한다. 기이함과 수려함으로 이름난 무이산은 물이 옥같이 맑고 산봉이 비취같이 푸르고 기이한 암석과 동굴들이 많다. 무이산에는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암석, 2개의 병풍절벽, 8개의 고개, 3개의 바위 암봉이 있고, 계곡도 많아 4개의 계곡, 9개의 여울, 5개의 웅덩이, 11개의 골짜기, 13개의 샘이 있는 곳이다.
천유봉(天遊峰)에 올라 가 보지 않으면 무이산에 갔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유봉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이다. 해발 750m의 봉우리에 있는 천유봉은 천 길의 절벽 위에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 것으로, 관폭정과 천유정, 일람대가 있고 838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마치 천궁 속을 유람하는 듯하다 하여 '천유(天遊)'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하나의 거대한 암봉 둘레로 깔아 놓은 돌계단이 구불구불 750m 정상까지 늘어놓은 실처럼 보이는데, 그 길 위에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이 없다. 자 이제부터 우리 일행도 저 83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한다. 그러나 계단의 개수와 산의 높이는 올라가면서 보는 경치에 반하여 힘든 줄 몰랐다. 실같이 이어진 좁은 길과 계단을 올라 정상에 이르면 수많은 봉우리가 내려다보인다. 그 곳 어디쯤에 율곡이 주자를 흠모하여 해주의 석담에 은거하면서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지었던 은병봉이 있을 것이다. 율곡은 주자의 무이구곡가를 본 따서 고산구곡가(孤山九曲歌)를 짓기도 하였는데 율곡이 얼마나 주자를 흠모 하였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저 아래 까마득히 무이산을 휘돌아 흐르는 구곡에서 뗏목을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구곡 중에 절경이 제일이라고 하는 천유봉은 6곡에 위치하여 있는데 천 길 낭떠러지 아래 구곡의 옥빛 물길이 장관이다.
‘천유봉’에 오르니
<茶洞>
무이산은 풍경이 수려하고 역사가 유구하며 중국에서 유명한 차(茶) 산지이고 천유봉(天游峰)은 구곡계(九曲溪)의 오곡(五曲)에 위치한 봉우리로 삼면에 계곡이 흐르며 마치 부처가 천궁(天宮)에 있는 것 같다 하여 천유봉이라 불린다.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무이산 5곡의 봉우리에 위치한 천유봉을 향해 올라가는 길 중간쯤에 붉은 글씨로 다동(茶洞)이라고 쓴 바위가 있다. 그 일대에는 무이산에서 가장 좋은 차가 나온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무이산에는 바위틈에서 자라는 암차(巖茶)가 유명하여, 원나라 때에는 황실에 보내는 차를 생산하는 황실다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무이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차(茶)'다. 무이산 암차는 중국 10대 명차의 하나로 그중에서 대홍포(大紅袍)가 가장 진귀하다. 복건성이 차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무이산에는 전 중국에 세 그루밖에 없다는 '대홍포(大紅袍)'를 생산하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대홍포는 이 지방을 여행하던 청나라 건륭제가 병에 걸려 쓰러졌을 때 대홍포 잎을 끓여 마시고 원기를 회복한 후 자신이 입고 있던 홍포를 나무에 덮어주며 황실에 진상할 것을 명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天遊閣>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진 길고 긴 돌계단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올라간다. 사람들은 가다가다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을 만큼 힘이 들면, 쉴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시 숨을 고른다. 올려다보니 천유봉까지 구불구불한 길에 사람들의 행렬이 인간의 띠로 장관이다. 사방 보이는 곳마다 비경(秘境)이요 비색(秘色)이다. 이구동성 감탄하기에 족하고 힘들다는 푸념은 어느새 잦아들고 만다. 그렇게 한발 한발 오르다보니 어느새 천유봉에 올라섰다. 일행은 천유각(天遊閣) 앞 나무아래 둘러 앉아 땀을 들이며, 생수와 한잔 술로 천유각에 오른 기쁨과 피로를 말끔히 씻어 냈다.
올라가면 다시 내려가야 하는 게 산이다. 다른 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경치가 좀 못했지만 색 다른 매력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가마를 들고 내려간다. 가마에 탄 사람은 나이 든 노인이다. 그렇게라도 천유봉을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가 되지만, 아무리 돈 벌이로 하는 일이라도 가마꾼이 힘들어 보이고 애처롭다. 산에 올라갈 수 없을 만큼 힘없는 나이가 되면 나는 안가리라 다짐한다. 어디 꼭 높은 곳에 올라가야만 여행인가. 이 세상에 갈 곳이 얼마나 많은데~
<茶 파는 가게> 차 파는 가게에 들렀다. 차(茶)가 유명한 고장에 왔으니 가이드의 권한으로라도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젊은 여자가 유창한 한국어로 차의 우수성과 효능을 설명하며 금방 우려 낸 차를 한 잔씩 따라 준다. 차를 설명하는 이가 유능했던가. 차를 한잔 마시고 두잔 마시고 그의 상술에 혹해서 너도나도 녹차를 산다. 물론 귀가 얇은 나도 선물용 차를 사는데 한몫 했다.
신선의 세계 무이구곡
<무이구곡계(武夷九曲溪)>
어제 무이산을 올라 천상의 세계를 다녀왔다면, 오늘은 무이산을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물길 따라 구곡계(九曲溪)에서 뗏목 유람을 하는 여행이다. 구곡계는 성촌진에서 무이산 동쪽으로 통과하는 물이 굽이굽이 아홉 번 굽이친다 하여 구곡계곡이라 불린다. 계곡 여행은 굵은 대나무를 묶어 만든 폭 2m, 길이 9m의 뗏목을 여섯 명이 타고 9곡에서 1곡까지 9.5㎞를 1시간 30분 쯤 수상여행을 하는 것이다. 대나무 뗏목 위에 대나무 의자가 양쪽으로 세 개씩 안전하게 묶여져 있고, 앞뒤로 한 사람씩 두 사람의 뱃사공이 노를 젓는다. 우리는 주황색의 구명조끼를 입고 대나무 뗏목에 앉았다. 구곡계는 36峰과 99岩으로 이루어 졌다고 한다. 물굽이를 돌아 갈 때마다 나타나는 기암절벽이 물과 하늘과 계곡에 어울려 그 웅장함에 절로 탄성을 지르게 된다.
물은 그리 깊지 않아 뱃사공은 대나무 노를 저어 바닥을 밀어 속도를 내거나 방향을 잡으며 물살의 흐름에 의지하여 떠내려가게 한다. 무이구곡을 유람하는 뗏목은 300척이며 사공은 600명이다. 그 중에 여자 사공이 80명이라 된다고 하고 사공들은 모두 운항 면허증을 갖고 있다고 한다. 30여명의 일행이 여섯 명씩 뗏목에 타고 줄을 지어 계곡을 내려가는 장면은 장관이다. 여러 개의 뗏목이 서로 스쳐 지나가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유유히 흘러간다. 우리의 뗏목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옆으로 지나가는 다른 일행의 뱃사공은 여자이다. 그녀는 쾌활한 성격인 듯 함박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뭔가 열심히 설명하며 배를 저어간다.
<奇巖마다 傳說> 강을 따라가다 보면 九曲에서 一曲까지는 쌍유봉, 쇄포암, 옥류봉과 대왕암 등 특이한 기암절벽과 바위들이 한 굽이를 돌 때마다 눈앞을 가로막는다. 그 옛날 주희도 구곡의 아름다움에 빠져 무이구곡가를 짓지 않았던가. 계곡의 풍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문득 단원 김홍도의 동양화 속, 뱃놀이하는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구곡계 주변의 봉우리와 기암절벽의 전설~ 봉긋 솟은 젖가슴을 연상시켜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쌍유봉은 옥황상제 둘째 부인의 젓 가슴이다. 둘째 부인을 질투한 첫째 부인이 독수리를 시켜 둘째 부인을 찢어죽이게 해 그때 떨어진 가슴부위라고 한다. 부근의 독수리 바위는 격노한 옥황상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독수리의 부리와 몸통이라고 한다. 호리동은 천년 묵은 여우가 살던 곳, 수월청은 주희가 부인과 보름달을 감상하던 곳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무이산의 3번째 골짜기에는 3,800년 전 원시 부족이 살았다던 흔적이 있다. 흐르는 대로 이쪽저쪽 쳐다보기 바쁜 중에 바위에 움푹 파인 자국이 자주 보인다. 그 구멍은 그곳에 살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계곡의 물이 침범하지 못하는 높은 곳에 묻었던 곳이라 한다. 1976년에 고고학자들이 이 흔적을 발견해 내었다고 하는데, 약 4.98m의 길이로 이어진 널은 나무로 조각되었고 내부에는 3,400여 년 전에 생존한 인류의 뼈가 남아 있다. 어제 올라갔던 무이산 천유봉도 하나의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오늘 九曲을 뗏목으로 돌아들며 만나는 봉우리마다 기암절벽으로 그 기운에 압도 될 만큼 큰 바위 들 뿐이다. 물위 뗏목에 앉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1시간 반 동안 탄성을 지르다 보니 어느새 一曲의 종착지에 도착했다.
<화교 박물관>
여행 마지막 날인 오늘은 화교의 역사와 생활상을 전시하고 있는 화교박물관을 관람하고, 가까이 있는 남보타사(南普陀寺)를 보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박물관에는 인형으로 생활상을 재현해 놓기도 했고, 여느 박물관이나 비슷한 유물들이 있었다. 박물관을 다 돌아 나와 출구쯤에 오니 한쪽 벽면에 성곽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곽그림은 아주 고풍스러워 사진 찍기에 좋은 배경이어서 일행들을 그 앞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는다. 돌아와 그날 찍은 사진을 보니 배경 그림과 인물들이 잘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만 같다.
<남보타사>
화교박물관에서 자리를 옮겨 찾아 간 남보타사에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다. 경내로 들어서자 먼저 천왕전의 날렵한 처마가 눈에 꽂히듯 들어온다. 천왕전에 들어서면 자애로운 미소의 미륵불이 있다. 두 귀가 어깨까지 늘어지고 큰 배를 드러낸 미륵불은 양쪽에 서서 금빛으로 찬란한 4대 천왕을 거느리고 있다. 중국인들은 저마다 불상에 절을 하고 향불을 피워 향로에 꽂는다. 장경각 지붕위에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자기(자기)로 만든 청룡의 화려함이 퍽 인상적이다. 남보타사는 당나라 때 창건된 샤먼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샤먼 남동쪽 오로봉 기슭에 있는 천년고찰이다. 복건성 불교신앙의 중심지로 하문역에서 약 10KM 정도 거리에 위치하여 차를 타고 약 15분정도 가야한다. 중국의 6대 사찰 중 하나로 푸젠성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절이며 북쪽에 있는 절강성의 보타산 남쪽에 있다하여 남보타사로 불린다고 한다. 특히 금색의 당탑가람(堂塔伽藍)이 유명한데 거대한 바위에 새긴 45m 크기의 "불(佛)"자 글씨가 유명하다. 남보타사는 매우 화려하여 우리나라의 소박한 사찰건물에 비교가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명나라 때 훼손 되었던 것을 청대(1684년)에 복원한 것이다. 경내에는 전전(前殿), 대웅보전(大雄寶殿), 대비전(大悲殿), 장경각(藏經閣) 등이 있다. 들여다보지는 못했으나 장경각에는 1만여 권의 경전이 있다고 하고, 지붕이 화려한 대비전에는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이 안치되어 있다. 경내에는 푸른 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는데, 건물의 남쪽의 연못에는 수련이 가득하고 커다란 비단잉어가 물속에서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다. 구불구불 연못의 둘레를 따라 나무다리가 놓여 있어 다리 위 길 따라 연못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좋은 볼거리이다. 원색의 승복을 입은 승려들이 사람들을 헤치고 줄지어 불공드리러 가고 있다. 절도 화려하고 승복도 화려하고, 하도 원색을 봐서 그런지 눈이 어지럽다. 그리고 남보타사에는 1925년에 창립된 불교대학이 있어 불법을 널리 전하고 불제자를 길러 낸다고 한다. 불교대학은 1937년 항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85년에 다시 개강해 현재 양정원과 예과반, 학부원을 두고 있으며, 1992년에는 2년 학기의 대학원부도 신규 설치했다.
주자를 찾아 나섰던 이번 무이산 여행도 끝나가고 있다. 여행은 보는 것. 여행을 관광이라 하고 볼 觀자에 빛 光자를 쓴다. 빛을 본다는 것은 이 세상 어느 구석이든 인간의 눈으로 밝게 드러내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나는 이 세상 곳곳의 것을 보고 글로 써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래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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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강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예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