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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나루의 역사
강을 건너는 방법 중 가장 편한 것은 다리를 건설하는 것이었지만 옛날의 토목 기술로는 한강의 본류와 같이 큰 강에 다리를 놓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한강을 건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배를 이용하여 물살이 약한 부분을 건너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편리한 지점에 배를 대고 출발 시킬 수 있는 특별한 시설을 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장소가 바로 나루였다.
한강에 나루가 만들어진 것은 한강에 집단 거주지가 생겼을 때부터 였을 것이다. 이를 증빙할 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강가에 삶의 터전을 일구거나 어로활동을 하기 위해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러한 경우마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기가 가장 수월한 곳을 택하여 배를 띄웠을 것이고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루가 생겨나게 된다.
삼국시대가 되면 한강 유역을 누가 차지하느냐가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잡는 문제와 직결되었기 때문에 한강의 중요성은 더욱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대규모의 군사 이동도 가능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나루의 규모도 커지고 기능도 다양화되었을 것이다.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에 이르면서 한강은 세곡을 실어 나르는 내륙수운의 중심지가 되고, 또한 전국에 주요 간선 도로가 형성되면서 도로가 통과하는 한강에는 대규모의 나루가 발달하였다. 옛 문헌에 보이는 이러한 나루는 광나루(廣津), 삼밭나루(三田渡), 서빙고나루(西氷庫津), 동작나루(銅雀津), 노들나루(露粱津), 삼개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양화나루(楊花渡) 등이었다. 이들 나루와 나루를 오가며 사람과 물자를 건네주는 나룻배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공 편의시설이었다.
조선시대 나루의 운영 자금은 정부로부터 땅을 받아 거기에 생산되는 소출을 통해 마련되었다. 대로(大路)인 양화도(楊花渡), 삼전도(三田渡), 임진도(臨津渡) 등은 10결(結)의 진척위전을 지급받았으며, 교통이 빈번한 한강도(漢江渡)에는 20결의 진척위전을 지급받았다. 뱃사공(津夫) 또한 규모에 맞춰 10명~20명 정도의 인원이 배속되었다. 다음으로 중로(中路)인 광진(廣津)의 경우는 3결의 진척위전과 3명 내외의 뱃사공이 배속되었다. 나머지 소로(小路)에 해당하는 진에는 1결의 진척위전과 1명의 뱃사공이 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각 나루는 일정 수의 나룻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나 『속대전(續大典)』 등의 자료를 통해 볼 때, 대략 각 나루의 선박 수효는 광진에 4척, 송파에 9척, 삼전도에 3척, 신천진에 2척, 한강도에 15척, 양화도에 9척, 공암진에 5척, 철관진에 1척을 배정하였는데, 뒷날 서빙고진과 동작진)에도 관진선(官津船)을 배치했다고 한다.
옛 기록들을 볼 때, 당시 도강(渡江)의 과정에서 사고는 다양한 모습으로 빈번하게 일어났던 듯하다. 기록을 통해 보면, 태종 13년 한강도에서 전복 사고가 나서 30여 명의 승객이 익사하였고, 중종 때에도 양화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자연 관리를 맡은 책임자는 물론 도진(渡津)에 관련된 인원들은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였다. 특히 도강 중의 침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승선 규정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배에 너무 많은 짐을 실거나, 승선 인원을 초과하여 배가 침몰한 경우, 뱃사공들은 장 1백에 처해졌으며, 도승 또한 중죄를 받았다. 또한 선박 관리 역시 사고 예방 차원에서 범국가적으로 실시되었다. 대부분 선박은 건조된 지 5년이 지나면 수리를 하였으며, 다시 5년이 지나면 해체를 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나루의 운영은 마을이나 민간의 손으로 이양되었다. 사람이 많이 건너다니는 나루는 입찰을 거쳐 선정될 정도로 이익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뱃사공들은 외지인들에게는 뱃삯으로 돈을 받았지만 주민들에게는 대개 봄에 보리 한 말·가을에 벼 한 말씩, 혹은 가을에 쌀 한 말씩 받는 식으로 ‘나루추렴’을 하였다. 그러다 나루가 폐쇄되기 직전에는 건너는 사람들이 없어 모두 돈을 받는 식으로 바뀌었다.
나룻배는 돛은 달지 않고 물이 적을 때는 삿대로 밀고 물이 많을 때는 노를 저어 강을 건넜다. 대개 나루마다 두 척을 운용하였는데, 한 척은 작은 배로 사람을 태우기 위한 것이고, 한 척은 큰 배로 자동차나 우마차를 실어 나르던 것이다. 다른 배보다 배 밑의 너비가 넓어 승선 면적을 넓혔다. 자동차나 우마를 실어 나르는 나룻배는 덕판이 없고, 비우도 몇 쪽을 떼내어 자동차나 우마가 오르내리기 편하게 하였다.
나룻배는 처음 목선을 사용하다가 경제적 목적 때문에 후에 철선으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철선은 배 바닥을 이중으로 해서 공기 부력통을 만들어 물에 잘 뜨게 했다. 목선이 철선보다 물에 잘 뜰 것 같지만, 실상은 나무가 물에 불어 무게가 더 나가기 때문에 목선이 물에 더 잘 가라앉는다. 철선의 경우는 부력통 때문에 목선보다 오히려 부력을 더 받아 잘 뜨지만 대신 바람을 많이 타서 잘 흔들려 안정성은 없었다고 한다.
육로가 발달된 곳이나 강에 여울이 험한 곳 주변의 나루들에는 남한강을 오르내리던 돛단배와 뗏목이 정박하여 물건을 내리거나 쉬어 갔으므로 이런 나루들에는 객주와 주막이 발달되어 있었고 색시집이 있는 곳도 있었다. 또한 ‘배가 가는 때마다 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돛단배가 정박하면 그때그때 소규모의 물물교환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그러다 충주댐과 팔당댐의 건설로 남한강 수운이 끊기자 돛단배와 뗏목이 사라지게 되었고, 양평대교, 양근대교, 이포대교 등이 건설된 후로는 나루의 도강 기능도 없어져 나루는 거의 폐쇄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