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박죽 한 그릇의 뇌물을 먹다
누가 세상사를 호사다마라 했던가? 나는 이 영세민 업무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병사계 보조업무를 맡았다. 사무장과 동장이 예전처럼 하지 않은 업무행태에 여러 차례 경고를 했지만, 영세민을 들쳐먹는 일에 조금도 동의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직원 회식자리에서 사무장이 술을 먹고 그동안 쌓인 불만을 가지고 폭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것이야.”라고 고함을 지르며 술 컵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어는 땐가 동장은 “출세를 하려면 시류에 따라 살아야 되는 법도 몰라? 너 어디 출신이냐?”
아주 노골적으로 지방색까지 내 뱉으며 결재판을 내던지는 일도 있었으나 나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곤욕스러운 것은 업무가 바뀐 지 몇 개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세민들의 뇌물이 여전히 내 책상서랍에 쌓여지고, 전부가 내 앞에 와서 인사를 나누는가하면, 어떤 할머니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사무장을 찾아가 업무분담에 항의를 하는 것이 아닌가?
공무원으로 발령받아 처음으로 대하는 병사계는 신체검사에서부터 예비군관리, 동원훈련, 징·소집 업무 등 깨나 복잡하고, 때론 전문성이 필요로 하는 업무다. 나는 방위병 3명을 데리고 일을 하였는데 어느 때는 밤을 지새우는 날도 많았다. 이곳 역시 돈에 대한 유혹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다.
“어려운 일이 있거나 청탁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라.”
병무청에서조차 노골적으로 병무 담당자인 내게 말했다.
이런 기막힌 현실에 너무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디 이뿐인가? 돈이나 있는 마을 유지들이 자녀를 어떻게 하던지 군대에 안 보내려고 돈으로 흥정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정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유혹에 말려들지 않고 언제나 공평무사하게 일처리를 해 나갔다.
어느 혹한 찬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겨울날 밤, 남루한 옷을 걸친 거동이 불편한 한 아주머니가 보자기에 무언가 싸들고 당직실로 나를 찾아왔다.
“방위병에게 선생님이 당직을 하시는 날을 물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러세요. 무슨 일이신데요?”
“이번에 징집되는 정 모 군의 어머니인데요, 아들이 병사계 선생님이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셔서 면제를 받게 되었는데, 형편이 너무 어려워 인사를 못한다고 고민을 하고 있어 생각다 못해 제가 아주 보잘것없는 호박죽을 써 왔습니다. 큰 답례를 해 드려야 마땅한 일인데 형편이 그렇지 못해 너무 죄송합니다.”
그 아주머니는 호박죽을 당직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오랜만에 먹는 호박죽인지라 두 그릇이나 냉큼 먹었다. 사실 내가 원칙에 따라 있는 그대로 보고하여 올린 것뿐이었는데 아들과 어머니는 이것이 무척 고마웠는지, 맛있는 호박죽을 뇌물로 가져 온 것이다. 나는 정성을 다해 써 오신 이 호박죽이 공직생활 내내 잊어지지 않고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있었다.
나는 숙직실에서 먹고 자고, 조용한 밤 시간에 공부를 한 덕분에 한국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를 간신히 졸업했다. 신림동 서울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졸업식에 동료 직원들이 많이 참석하여 축하를 해 주었다. 비록 2년제일지라도 사각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고 보니 괜히 어깨가 으쓱해 붕 뜨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