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새로운 우주에 태어나는
신생아의 주름진 울음소리 들리고
어느 영안실에서는
아버지를 땅에 묻으러 가는
아들의 초췌한 몰골
불거져 나온 혈관만 말 없는 통곡을 한다
멀리서 보지 않아도 보이는
그의 무너진 가슴을 가늠한다
내 아버지 땅으로 돌아가던 날
황망하던 그 아침
머리에 빗을 대니
머리카락이 다 부서져 내렸다
컴퓨터 소음만 들리는 이 아침에
어머니가 기분 좋을 때 웃는
웃음소리 들리니
비로소 아침이 싱그럽게 다가와
깔깔깔 웃는다
2006. 8. 8.
소나기
............................................. 윤연모
*덴헬더 항구에서
뱃사람처럼 배에 머물며
치즈만 먹었더니
내 몸에서 치즈 냄새가 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운하
운하는 운하로 이어지고
이곳 사람들의 생명도 운명도
운하가 운명 지었다
호수 같던 하늘이 흐려지더니
순식간에 더위를 녹이는 비
인생도
한순간에 몸도 마음도 적셔주는
소나기를 만날 수 있다면
끝없이 이어지는 운하에
갑자기 물이 불어
두려움마저 인다
천둥이야 칠지라도
소나기를 목마르게 기다린다
2006. 7. 23.
텍셀이란 작은 섬으로 떠난다. 여름하늘이 가을하늘처럼 파랗고 바다에는 푸른 파도가 출렁인다. 부는 바람에 바다 표면이 곱게 일렁이니 마치 산지 지형을 바다에서 보는 듯하다. 어쩌면 깊은 바다 속도 이렇게 생겼을지 모른다. 그 파도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인간의 마음을 어딘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해양활동을 하는 아이들은 1박2일로 서바이벌게임을 떠났다. 검은 색 고무보트를 타고 하루 종일 항해를 하여 농장에 있는 헛간에 텐트를 치고 캠핑을 하고 돌아온단다.
나는 캐나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지도자와 함께 네덜란드 왕실 요트인 ‘피에트 하인(Piet Hein)에 탔다. 그 배의 이름은 인도의 도시를 정복한 과거의 정복자 이름이란다. 원래 이 배는 국민의 돈으로 만들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왕비에게 결혼 선물로 주었는데 1982년에 여왕이 다시 네덜란드 해양소년단에게 돌려주었단다. 배로서 특별한 배였는데, 내가 그 배에 타는 영광을 얻었다. 아주 오래된 배인데도 요즘 지은 배처럼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여왕이 사용했기 때문에 여왕의 요트라고 불리며, 여왕부부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공주 부부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멋쟁이 선장과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하고 이 요트에서 따로 생활하는 예쁜 소년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생활해서 그런지, 마음이 어려서 그런지 그 소년과 금방 친해졌다.
갑판에 올라가서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 하얀 모래사막과 작은 숲이 보인다. 네덜란드 지도자인 데이비드가 다가왔다. 그는 붉은 얼굴에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의 수염과 같은 하얀 명품 수염을 달고 다닌다. 아침 식사 자리에서, 팔자수염의 꼬리를 잘 꼬지 않아서 멋지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수염의 꼬리를 정비하곤 한다. 그가 배를 운전해 보고 싶으냐고 물었다. 겸손하게 거절했지만 마음속에서는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다.
선장실로 들어가니 선장은 점잖게 생긴 사람으로 흰색 긴 팔 와이셔츠에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십여 명이 탄 이 배의 조종간을 잡을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물에 떠 있는 녹색이나 붉은 부표를 보며 조종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었다. 하기야 바다가 워낙 넓으니 어느 쪽으로 가든지 교통 표지판도 없고 일정한 차선을 달리는 자동차처럼 충돌사고를 일으킬 리도 없었다.
부둣가에 배가 정박하도록 위 부분을 하얀 색으로 칠한 막대기 같은 것이 죽 이어져 있었다. 그 흰색 줄에 맞추어 뱃전의 위쪽을 대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부두에 닻을 내렸을 때에 그 배가 여왕의 배라서 그런지 관광객들의 눈들이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부두에서 보는 휴양촌의 모습이 환상적이었다. 산은 없고 납작한 섬에 뿔이 없는 양들이 푸른 풀밭에서 평화롭게 놀고, 몰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가 바람의 리듬에 맞추어 부드럽게 돌고 있었다. 마치 영화촬영을 위하여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곳 같았다.
마을을 산책하고 배에 돌아오니 두어 명의 선원들이 헤어링을 통째로 들고 먹고 있었다. 선원 한 명이 소금에 절인 헤어링 한 마리의 끝을 손에 들고 입에 넣으며 먹는 시늉을 하니 어쩐지 징그러웠다. 나에게도 먹으라고 강요 수준으로 다가와서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배 안이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처음에 그 고기 이름을 모르고 원시인이나 먹는 고기인 줄 알고 도망을 갔다.
그 순간에 기념품 가게에서 보았던, 예쁜 주황색 훈제 연어가 생각이 나서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소년이랑 같이 연어 고기를 사 가지고 배로 돌아왔다. 선원들과 소년, 해양지도자들과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나중에 작은 어촌마을 아크마르에 가니, 연어와 헤어링을 토스트에 넣어 먹도록 팔고 있었다. 그 때에 비로소 헤어링이 징그러운 생선이 아니고, 우리도 흔히 먹는 청어라는 것을 알았다. 한 번 꼭 먹어보고 싶어서 사다가 먹으니 길쭉한 것이 별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무지 맛있었다. 옆에서 캐나다의 뢸프와 영국의 앤디가 농담하는 것을 들으니, 그 생선을 남성을 상징하는 물건에 비유하고 있었다. 도대체 남자들은 음식을 가지고 쓸데없는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육로이든 뱃길이든 언제나 처음 길을 나설 때에 그 길은 신비함에 싸여 있고 사람도 처음 만났을 때에 그 신비의 베일을 벗기기에 바쁘다. 돌아오는 길에는 약간 무료함에 빠져 구름 낀 하늘과 파도를 바라보며 돌아왔다. 텍셀 섬과 피에트 하인 왕실 요트, 그리고 청어 고기의 첫 느낌과 훈제 연어의 그 매력적인 맛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아침에 일찍 깨어 갑판에 나오니 어제 그 분주했던 사람들과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갑판이 흔들흔들하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배가 같이 묶여 있으니 앞배가 조용히 호흡하는 것이 보였다. 어제 네덜란드 해양소년단의 귀빈 파티 때에, 나는 갑판에서 유니폼을 입고 소개받은 사람과 담소를 즐겼다.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이 나라 사람들이 과연 영어를 잘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이곳에서 귀빈이란 은퇴한 해군, 현재 보이스카웃이나 해양소년단의 책임자이거나 자녀들이 캠프에 참여하여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아주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있으며 해양소년단에 후원하는 사람들이란다. 벨기에에서 온 신사 리처드 씨가 나를 보고 너희 나라의 대통령이 김정일 씨냐고 물었다. 나는 남한에서 왔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답해 주었다. 그는 1995년에 일본 나고야에서 김정일 수상을 만났다고 해서 나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은퇴한 해군이며 벨기에에서 약 250킬로미터를 자동차로 두 시간 반 동안 운전하여 왔단다. 그의 나이에 비하여 놀라운 의지에 마음속으로 큰 박수를 쳐주었다.
나는 네덜란드 말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곳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중년 여성들이 영어를 비교적 못하고, 생활수준이 낮은 경우 아이들에게 영어 교육을 못 시킨 듯 하다. 그래도 전체적인 수준으로 볼 때, 한국보다 아니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 영어를 잘 하였다.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네덜란드 언어는 영어와 언어 구조가 같고 발음만 다르다. 그러니 언어를 구사하는데 확실히 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암스테르담이 국제적인 도시가 되는 데에 큰 몫을 한 것 같다.
내가 낮에 아무도 없고 대형 선풍기만 돌아가는 바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대원 딘이 들어오며 인사말을 건네었다. 나는 너희 나라 사람들이 영어를 잘 하여 신기하며, 네덜란드 말이 독어와 비슷하고 목소리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는 점이 불어와도 유사하다고 하였다. 그가 의외로 꽤 지적(知的)인 대답을 하였다. 원래 유럽의 말이 하나였는데 1400년 전에 로마인이 세계 곳곳으로 퍼지면서 영어, 독어 불어 등으로 나뉘게 되었단다. 하기야 불어, 독일어, 영어는 모두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말이므로 어원이 동일하여 비슷한 부분도 있을 수 있겠다.
네덜란드 단어를 보면 영어 단어를 마구 조합한 것 같으며 읽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뚱한 발음을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는 네덜란드의 유명한 화가 ‘반 고흐(Van Gogh)’를 이들은 ‘폰 호흐’라고 발음하니 그 박물관을 찾아갈 때에도 얼마나 어려웠던가. 게다가 성대를 일부러 울려서 소리를 내므로 그것을 따라 하려면 무척 힘이 든다. 하지만 이들은 갓난아기 때부터 훈련이 되어 있으므로 어렵지 않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네덜란드의 목에서 나는 이 희한한 소리를 목병이 난 소리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들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불확실한 멜로디로 들린다. 하지만 네덜란드 말로 주고받는 대화 중에 가끔 영어 단어와 같은 소리가 나서, 그 상황을 대강 짐작할 때도 있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다 무료하여, 프랑스 ‘르몽드’ 신문을 들고 있는 여성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의외로 그녀가 영어를 잘 하였다. 그녀는 캐나다에서 불어를 가르치는 불어 선생이었다. 그녀 또한 암스테르담에서 누구나 영어를 잘하는 것에 대해 기가 차다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녀에게 내가 아는 불어 인사말 몇 마디를 하며 ‘사랑해요’가 ‘쥬템’이냐고 물었다. 누구든지 보기만 하면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의 버릇이 그녀에게서 나왔다. 그녀가 갑자기 종이쪽지를 하나 꺼내 메모를 하며 나에게 자세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들으며 놀라운 것을 발견하였다. 상대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쥬템부크’와 ‘쥬브젬’의 두 가지를 쓴단다. 그리고 불어의 문장 구조가 영어와 완전히 다르고 오히려 한국어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즉, 영어 구조가 ‘나는 사랑해요 당신을’인데, 불어는 우리말처럼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식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불란서 사람들이 프라이드가 강해서 영어를 안 하려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속사정은 언어구조가 달라서 공부하기 어려우니 기피한 것이 아니었을까? 프랑스도 요즈음 세태가 변하고 있어서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워서 잘 구사한다.
이제 유럽과 무역을 할 때 손해 보지 않고 하고 유럽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영어뿐만 아니라 상대국의 언어, 그 대륙의 대표적인 언어인, 불어나 독어도 해야 될 것 같다. 우리가 세상을 알기 위해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들 의사소통의 도구인 언어를 많이 배워야겠다. 이렇게 영어 열풍이 과도한 한국적 분위기에서 우리 다음 세대는 영어만 사용하는 나라를 주로 여행하고, 그 나라만 무역 대상 국가로 삼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된다. 내가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언어를 가르치는 교사로서 이번에 유럽 국가를 배낭여행하며 서양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나 독어 스페인어 등 제2외국어의 필요성을 많이 느꼈다.
이곳은 아주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도시이다. 지금은 프랑스 영토에 속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인 알자스 지방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아픔을 많이 겪은 곳이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감동적인 작품이 이곳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 감동의 흔적이라도 느껴 볼까하여 유럽철도를 타고 이곳을 찾아왔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 노트르담 성당과 유럽의회 건물을 볼 만하다며 추천하여 주었다.
묻고 물어서 찾아가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트르담 성당이 화려한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 아름다움에 한순간 숨이 꺼억 막혔다. 어느 종교를 믿느냐와 상관없이, 종교 성지는 인류의 오래된 문화유산이고 인류 정신의 집합체이다. 성당에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모여 있었다. 성당 중앙의 스테인드글래스가 마치 정교하게 다듬어놓은 아름다운 꽃밭 같고 파이프오르간 같은 기둥이 특이하였다. 성당 중앙에 예수가 승천하기 전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양옆으로는 가톨릭 신자들을 위하여 촛불을 마련해 두었다. 내가 불교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이 편안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성당 우측으로 커다랗고 아름다운 시계가 있었다. 성당에서 이 시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대가로 1유로 달러를 받았다. 입장권이라기보다 헌금하는 마음으로 내면 좋을 듯 하였다. 성당 측에서는 세계 각 나라에서 오는 관광객들을 위하여 불어, 독어, 영어로 똑 같은 설명을 계속하였다. 맨 처음에 설명을 시작할 때에 사람이 많으니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처음에 독어나 불어로 설명을 할 때에 무슨 이야기인줄 몰라서, 멀뚱멀뚱하며 성당의 조각품만 목이 빠져라 쳐다보다가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다. 그들은 프랑스 리용에서 온 부부였는데 우리에게 기꺼이 설명해주었다.
성당은 4세기에 만들어졌으며 프랑스와 독일에도 있다. 1523년에 스위스 화가가 색을 칠하였고 1783년에 이 시계가 깨졌다. 시계는 세 단에 걸쳐서 인형이 있으며 그 인형이 천칭 같은 종을 치며 돌아간다. 그 아래는 서양의 점성술에 해당하는, 전갈, 게 황소, 물병과 같은 열두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런 그림들로 보아서 시계를 제작한 사람이 천문학에도 관심이 깊었던 듯하다.
성당 앞에, 매일 밤에 하는 쇼를 위해 현대적인 조명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성당 앞 광장에 길거리 공연하는 예술가들이 많았다. 난쟁이 악사, 동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희한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로 성시를 이루었다. 연인 사이인지 부부인지 한 남녀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이태리 가곡을 열정을 다하여 부르니, 내 입에서도 저절로 그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악사들은 연주하고 떠나고 사람들은 구경하고 떠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고 떠나는 것을 반복하였을 듯싶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아름다운 성당이 있는 한, 이 광장에서 연주는 계속될 것이다.
광장 귀퉁이 햇볕 좋은 곳에, 거리의 화가들이 작은 햇볕 차단용 파라솔을 치고 십 유로에서 이십 유로를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들 뒤에서 구경하며 제일 잘 그릴 것 같은 사람에게 나의 캐리커처를 그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나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왔다는 청년과 잡담을 나누다가, 내 얼굴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화가를 놓쳤다. 옆 화가에게 그냥 그리기로 마음먹어 이왕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였다. 예쁘게 나오려고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앉아서 생각하니 지금 그리고 있는 것이 초상화가 아닌가. 아무래도 사진을 찍을 때 습관적으로 웃는 것도 나만의 독특한 병 증세인 듯하다.
동양인이 앉아있으니, 구경꾼들은 화가가 어떻게 그리는지 내 얼굴과 그림을 비교하며 쳐다보고 있다가 그림이 끝나니 그 자리를 떠났다. 만족할 수는 없었지만 집에 돌아와서 사진틀에서 그림을 빼고 내 초상화를 넣어서 벽에 걸었다. 약간 멀리서 나쁜 시력으로 보니,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시간이 흘러야 익숙해지고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생각할 일이다.
유람선을 타고 운하를 돌며 한 시간 정도 관광하였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서 화가의 모델이 되는 것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배에 타자마자 비몽사몽간에 졸다가 깨어보니, 운하 양쪽으로 아름다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특히 유럽의회 건물이 인상적이었다. 두 건물은 다리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여러 나라말로 예쁜 색으로 글씨를 써 놓아서 마치 건물 벽에 무지개가 뜬 것처럼 예뻤다. 이것은 유럽 사람들이 유럽연합에 대하여 환영하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현재 유럽의회의 힘은 미약하지만, 앞으로 세월이 흘러 유럽연합이 더욱 강대해지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인들은 유럽의회의 힘이 커져서 미국에 대항하기를 원하는 한편, 더 커져서 자신의 나라가 유럽의회로부터 구속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단다. 어느 나라나 국제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나라가 보호받기를 원하고 통제 받는 것은 싫은 모양이다.
이 아름답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며칠 머무르며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싶다. 하지만 이제 다음 여행지로 떠나기 위해서 기차역으로 가야 한다. 기차역으로 열심히 달리는데, 내 눈앞에 아카시아 같은 나무가 눈부신 연녹색 꽃을 달고 가로수를 이루고, 나무 아래에 꽃이 무수하게 떨어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잠시 허리를 굽혀 그 꽃잎을 주어 향기를 맡아 보았다. 길 건너편 가게에 가서 물으니 나이 지긋한 부인이 ‘자카시아, 자카시아’라고 하였다. 꽃 이름의 발음이 서로 비슷한 것으로 보아 아카시아가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또 다시 기차역으로 달렸다. 이번에는 룩셈부르크의 수도 룩셈부르크로.
룩셈부르크에서 하룻밤 자고 나니, 아침부터 비가 몸을 적실 정도로 많이 내리고 날씨는 갑작스레 추워졌다. 프랑스까지 거의 평평한 들판을 달려오다 이곳에 오니 언덕도 보이고 계곡도 있어서 기차 창 밖으로 보는 풍경이 제법 입체적이었다. 더군다나 룩셈부르크 지역은 지금까지 유럽의 여행지에서 볼 수 없었던 뾰족뾰족한 침염수도 울창하였다. 이곳은 아주 작은 나라라서 아침 한 나절만 구경하고 다음 여행지로 갈 생각이다.
룩셈부르크에도 노트르담 성당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부가 집전(執典)하는 동안에,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허용하여 주었다. 이태리의 어느 성당이었던가. 성당 안에서 사진 찍다가 혼난 적이 있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였다.
헌법 광장에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에 참전한 용사들의 넋을 위로하는 전몰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이 작은 나라에서 한국전에 군인을 보내주었다니 감사한 일이다. 잠시 고마운 마음으로 감사의 묵념을 올렸다. 위령비의 조각 작품은 죽은 병사를 뉘어 놓고 애도하는 병사의 모습이다. 슬픔은 전이되는 습관이 있어서 바라다보는 나도 내 마음 바닥까지 묵직하게 누르는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비의 맨 위에 황금의 여신상이 서 있어서, 다시 희망을 갖고 날아오르자는 메시지로 보였다.
전몰 위령비 앞에서 한국인 배낭여행객을 만났다. 땅바닥에 지도를 펴놓고 나침반으로 목적지를 찾아다니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탐험가의 모습을 연상케 하였다. 건물이 대부분 중세의 아름다운 건물이라서 은행을 궁전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국제 언어인 영어로 된 홍보 용지마저 없고, 지도 한 장을 들고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묻곤 하여 가슴이 답답하였다.
지하 벙커를 구경하고 싶은데 시간이 사십여 분 걸린다고 하여, 기차 시간에 맞지 않아서 포기하였다. 다행히 그 비 앞에서 노란 비옷을 입은, 장래가 유망해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을 만나서 룩셈부르크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직업이 가이드인 만큼 상세하게 알았다.
룩셈부르크는 인구 사십만의 나라로 과거에는 주로 프랑스어와 독어를 썼다. 영어는 학생들이 요즈음 학교에서 배워서 쓰기 시작하였단다. 그래서 이 나라에 원래 고유한 나랏말이 없는 줄 알았는데, 1984년부터 룩셈부르크 언어를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단다.
이곳에도 유럽 여러 나라들이 연합한 것을 기념하는 흔적이 있다. 아름답게 꽃밭을 가꾸어놓고 맨 위에 룩셈부르크 국기를 게양하고 왼쪽에 조금 낮게 최초에 유럽연합에 가입한 여섯 나라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유럽연합은 1951년에 시작하여 1995년에 15개국, 2004년에 24개국, 2006년 현재 무려 25개국에 달한다. 유럽 여러 나라가 여러 지역에서 그들의 연합을 축하하고 자랑으로 여긴다.
유럽의 관광지에서 독어, 불어, 영어는 기본이고 스페인어, 이태리 말까지 언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런 현상으로 보아 유럽 연합이 유럽의 공통된 출구이고 미래의 희망인 것처럼 보인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가 힘없는 작은 나라였지만 베네룩스 3국으로 합쳐서 강한 나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어디에서나 ‘연합’이란 막강한 힘을 갖는다.
이 작은 나라에서 나는 한국의 개척하는 젊은이들과 룩셈부르크의 봉사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세상이 다 함께 살기를 희망하는 황금의 여신상을 보았다. 세상은 확실히 개척하는 자, 노력하는 자의 것이다. 나는 다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집어 들고 브뤼셀로 가는 기차역으로 향하였다.
원고지 9매
뒤셀도르프에서 밤차를 타고 왔다. 새벽에 도착하여 샤워도 하지 못하고 끈적이는 몸으로 어찌 관광을 할 수 있을지 걱정하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공항 내 유료화장실을 지키는 사람에게 샤워도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5유로만 내면 할 수 있단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자면 약 육천 원이 넘으니, 일반 목욕탕보다 비싼 셈이다. 하지만 그 돈에 머리 감고 샤워하고 나갈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가.
베를린을 쉽게 구경하려고 열다섯 군데의 관광지에 데려다주는 버스 티켓을 끊었다. 차안에서 설명을 헤드폰으로 듣는데 그 언어가 독어, 불어, 영어는 물론이고 이태리 말 스페인어 일본어까지 다양하게 제공한다. 그런데 이 선진 관광 도시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관광정보를 아는데 쉽지 않았다. 하물며 외국인을 안내하는 버스 기사 양반 또한 영어를 모르니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 순간 잠시 당황하였다. 어찌 생각하면, 독일에서 독일 국민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마도 내가 이 나라가 선진국인 만큼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많은 곳을 하루에 다 볼 수는 없으므로 몇 군데 중요한 곳만 정해서 보기로 하였다. 쉬로스샬로텐보그 궁전이 볼만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17세기부터 18세기까지 약 팔십 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궁전으로 상당히 아름다웠다. 이곳의 정원은 자연의 멋을 그대로 살린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도화지에 공간을 디자인한 서양 미술의 ‘구성’ 작품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정원이 아름다워서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니 일본 큐슈 섬에 있는 관광지 하우스텐보스에 있는 궁전의 정원과 비슷하였다. 일본에서 풍차로 유명한 네덜란드만 본떠서 그 관광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유럽의 일부를 복사한 모양이다.
겐데멘마크트라는 곳은 극장을 중심으로 양쪽에 독일 성당과 프랑스 성당이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광장 한 가운데에 멋진 동상이 서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멋있는 동상이 누구냐고 물으니 대체로 모른단다. 학생인 듯한 사람 두 명이 지나가기에 물으니 한참 동안 기록을 찾아서 읽고 나서, 그 동상의 주인이 독일 고전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라고 가르쳐주었다. 그의 동상이 극장 앞에 서 있는 것은 그의 극작가로서의 명성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독일 성당과 프랑스 성당이 마주 보고 서 있는지 몰라 답답하였다.
독일은 많은 철학자와 악성(樂聖)을 낳았다. 하이네 거리 등 그들에게 영광을 부여하는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애와 작품을 후손에게 알리는 박물관이 셀 수 없이 많아서 나를 압도하였다. 독일 국민들이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데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활공간 안에 있는 성인의 동상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도 신기하였다. 하물며 신분이 교사라는 두 젊은이도 베를린에 살면서 그곳에 대한 정보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듯하여 실망하였다. 최소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라면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은가.
거리에 나무들이 울창하고 차들은 별로 붐비지 않았다. 거리에서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그들이 유대인이라며 이탈리아인에게 행했던, 우월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탈리아인은 장사를 잘하고 그 장화같이 생긴 나라 전체가 예술품이 아닌가. 철학자와 천재적인 음악가를 많이 배출한 국민으로서의 독일인들의 우월감인 듯하였다. 문제는 잘못된 방향으로 그들의 긍지를 발전시킨 데에 있었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상황은 1989년까지 같은 상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베를린을 기점으로 서부는 미국이 장악하고 동부는 소련이 장악하였다. ‘체크포인트 찰리’라는 곳은 냉전 시대에 동서 베를린 경계에 있던 검문소이다. 동독과 서독을 오갈 때에 이곳에서 비자를 확인하고 스탬프를 받았다. 1990년에 철거하였지만 과거의 이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거리 한 가운데에 군인의 초상화를 걸어 두고, 거리 한쪽에 스탬프를 찍는 곳을 마련하여 기념스탬프를 찍어주며 돈을 받는다.
그뿐인가. 길 한가운데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미국 군인 역할을 하는 두 명의 젊은이들이 보초를 서며 관광객을 상대로 사진을 찍고 1유로 달러를 받았다. 나도 군중 심리가 일어 그 보초병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태국에서 ‘알카자’ 게이 쇼를 봤던 기억이 난다. 쇼가 끝나고 공연한 사람들이 관광객에게 사진을 같이 찍는 영광(?)을 부여하며 1달러를 받았다. 이곳이 과거에 독일 국민들에게 아픔의 장소이었건만, 지금은 그것을 희화하여 즐기고 있었다. 바야흐로 ‘팍스 베를린’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였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허리가 잘린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베를린에는 기차역 건물을 비롯하여 공공기관 특히 기차역 담벼락에 꽤 많은 낙서들이 있었다. 그것이 1990년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열차 안에서 만났던 독일 여성 잡지 기자의 말에 의하면, 통일 전에 그려진 낙서 벽화로, 젊은이들의 사회와 권력자에 대한 반항이나 반감 같은 것을 나타내는 것이란다. 어느 사회나 젊은이들이 기존 사회에 대하여 반감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반감을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기지와 그것을 무시하여 지워버리지 않고 사회 현상으로 수용하는 독일 사회의 태도 또한 재미있다.
이제 또 기차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내려서 확인하고 싶었던 베를린 벽의 낙서를 가까이에서 구경하지 못하고 버스에서 보았다. 우리는 언제 판문점이 역사적인 유적지가 되어 세계 곳곳의 사람들을 찾아오게 할 수 있을까? 또한 관광객의 관심을 끌 낙서가 아니라, 우리가 평양과 서울에서 했던 이산가족 만남의 현장 모습을 옛 이야기라며 전시할 수 있을지 부럽고 안타까웠다. 비 온 뒤 하늘에 아름다운 무지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우리 조국의 통일의 무지개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