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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무비스님 문수원 강의 2강
(2.絶學無爲閑道人은~6.刹那滅却阿鼻業이라)
제대로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 인생의 의미를 알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혹 그대를 보지 못했는가, 이렇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을 말하자면 여기서는
絶學無爲閑道人은
(절학무위한도인은)
배울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은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다 그랬어요, 절학무위한도인이다.
절학(絶學), 배우는 일을 다 끊었다 이거예요.
아 그 놈 배우는 것, 평생 공부니 뭐니 유치원에서부터 지금도 보살님들 배우러 많이 다니죠? 한 곳만 다니는 게 아니예요, 여기저기 온갖 것 배우러 쫓아다니고 그러는데.
제대로 참,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면은 배울게 이제 끝났다는 거지. 그래서 끊을 절(絶)자 배울 학(學)자라.
배우는 일을 다 끊었다. 그래서 하는 게 없는 거야. 배우는 일이야 말로 진짜 하는 거야. 그 외에는 하는 거라고 할 수가 없어. ‘아이구 뭐 좋은 일 했다’ ‘훌륭한 일 했다’ 하는거 그건 다 소용없는 일이고, 정말 배우는 일이야 말로 제대로 하는 일이다 그렇게 보는거죠.
그래서 이 배우는 일이 다 끝났으니까 하는 일이 없어. 무위(無爲)야 무위. 불교에서 굉장히 숭상하는 말이죠. 무위라는 말. 그래서 한가한 도인이다. 한도인.
한가함. 삶의 보람은 뭐 사람마다 여러가지겠지만은 그저 인생을 한가하게 사는 것 이게 태어난 보람이라고 그래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도연초』에 보면은 한가하게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태어난 보람이다 그랬어요.
한가하면 느낄 수가 있어요. 바쁘면 못 느낍니다.
그러니까 인생의 맛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시간이 가장 많은 것은 한가해야 돼.
한가하니까 그런 것을 한껏 느끼니까 그 속에 삶의 보람과 가치를 맛본다는 것입니다. 그 스님도 일리가 있어요. 일본의 그 한 600년 전 스님이 쓴 그 글인데.
한가함을 느끼는 것, 한가함을 즐기는 것 이것이야 말로 삶의 보람이다. 그래 한도인(閑道人)이라고 그랬습니다.
한가한 도인, 도인이라고 하니까 복잡하게 생각하고 높이 생각할 게 아니라 아까 이야기 했듯이 천하 사람이 다 걸어가는 삶의 길이 바로 도인, 도인인거죠. 그 길을 다 가고 있는데 그 깊이가 어떠하냐 거기에 차이가 물론 있겠습니다.
제대로 깨닫고 인생을 제대로 깨닫고 가는 사람, 그 사람은 이른다.
不除妄想不求眞이라
(부제망상불구진이라)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네.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라.
우리는 내 마음에 드는거 취하고 마음에 안 드는거 버리죠.
그런데 그걸 이제 보통 우리가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망상은 버리고 진리는 구한다 그래요. 진리는 구한다, 좋은 일은 말하자면 하고, 안 좋다고 하는 일, 도에 방해되고 뭐 이것은 세속적인 일이다 뭐다 하는 거 그런 것은 전부 버리려고 하죠.
천만에, 제대로 된 사람은 그렇게 안 해. 망상을 제거하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안 해. 진상이라고 해도 좋아요. 참생각, 좋은 생각, 망상은 망령된 생각이라면은 진은 참다운 생각, 좋은 생각.
좋은 생각 참다운 생각 안 좋은 생각이 어딨어요?
사람이 일으키는 생각은 전부 똑같지. 왜냐, 한마음에서 일어난 것이여. 물에서 일어난 물결은 똑같애. 그 물이야.
아무리 파도가 높게 치든 작게 치든 안 치든 떠서 맛을 보면 전부 짠맛이야. 한 맛이라고요. 그게 파도 친다고 좋은 물이 아니고 파도 안친다고 좋은 물이 아니야. 똑같은 물이야.
괜히 우리가 모르고 무슨 안 좋은 생각, 좋은 생각 분별하고 안 좋은 생각은 버려야 할 거고 좋은 생각은 취해야 할거다 이렇게 이제 우리가 취사선택을 하죠.
거기에서 온갖 고통이 이제 따르는 거죠 사실은.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라. 참 이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뭐 특히 구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안좋은 습관 그거 버리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하, 누가 잘하니까 아주 행동 아름답게 하니까 나도 배워야지. 안되면서도 자꾸 배워야지 하는 그 마음 때문에 그만 고통스럽고 안달하는거야.
그거 할 거 없다고요. 그래 버리면 그냥 편안해.
내가 전번에 그 천성산에 내 도반스님한테 가서 들은 이야긴데 밤에 하루 저녁 자면서 이제, 자기는 어디 여행가가지고 어떤 스님을 만났다는 거야. 옛날에 같이 선방 있던 스님이라.
가만히, 둘이 모처럼 만나서 이렇게 보니까 이 스님은 지금도, 지금도 물론 그렇지만 아주 공부를 못해서 안달이거든. 그래가지고 영 뭐 불안해 하고 영 편치가 않은 거야. 아, 여행 보통 나가갖고 도반 만났으면 마음 편안하게 이렇게 말이지 느긋하게 좀 이렇게 쉬었다 가야 할텐데, 영 마음이 편치가 않고 말이지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그러고 있는거야.
그래 이 스님은 벌써 한 생각 놓아버렸어. ‘아, 뭐하려고 그래 공부하려고 하느냐고, 공부할려고 하는 생각 놓아버리니까 마음껏 편안한 걸 갖다가 나도 그전에 공부하려고 하다 보니까 어떻게나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혼났다’는 거야. 그걸 10여년 이상 그렇게 고생했는데 어느 날 공부할 생각을 탁 놓아버렸다네?
그렇다고 뭐 다른 짓 하는 것도 아니야.
공부할 생각을 탁 놓고 보니까, 그게 그 사람의 깨달음이야 일종의 그 사람의 깨달음, 그래 놓고 보니까 천하에 편한 것을, 아주 아무 할 일도 없고 그렇게 편하더란 거야.
그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은거라. 충격을 받아가지고 계속 가슴에 그게 이제 남아있는데 그 소리 들었다고 지도 그래 되나? 안돼요. 그 한마디 듣고 충격은 받았지. 그런데 지도 놓고싶지, 안 놓아진다구요 그게.
그래가지고 내한테 또 그 이야길 하는거라. 사실은 그 해야 된다고 하는 마음, 버려야 된다고 하는 그 마음, 그 마음이 문제야.
이사람 보십시오. 부제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이야, 망상 제하지도 안 해. 망상일어나면 망상 실컷 부린다고요. 그렇다고 뭐 특별히 구하는 어떤 진리가 있는 것도 아니라.
왜냐? 이유가 있어. 그냥 뭐 지 멋대로 살라고 한 게 아니야. 고 밑에가 해답이야.
無明實性卽佛性이요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요)
무명의 실제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며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말이야.
내가 뭐 억지로 딴 길로 나가면서, 무슨 뭐 외도가 되어가지고, 그리고 지 혼자 지 멋대로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고 이치에 이렇게 탁탁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부제망상불구진 한다 이거야. 망상 제하지도 않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 이유는 사실 알고 보니까 제할 망상도 없고, 구할 진리도 따로 없더라.
무명실성이 즉불성이야. 우리가 여기서 보면은 불성은 구하려고 하고, 무명은 제하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제하려고 한 그 무명, 번뇌무명이 그대로 불성이야.
우리가 몽매에도 찾고자 하는 그 불성, 견성하잖아요, 견성(見性) 성품을 본다, 불성을 본다 하는 그 보고자 하는 그 불성이 바로 무명, 번뇌 무명이 그대로, 온갖 그냥 탐진치 삼독 부리고 말이죠, 시기하고 모함하고 그냥 욕하고 그냥 온갖 탐진치 다 부리던 그 무명 번뇌가 그대로 불성이야. 그대로 다이아몬드 덩어리, 보물덩어리, 불성 그대로더라 이거야.
무명실성이 즉불성이니까 그동안은 그런 줄 몰라노니까 무명은 버리고 불성은 찾고, 저 앞에 부제망상불구진 망상은 버리고 진리는, 진리가 뭐예요? 불성이지.
불성은 구하고 이렇게 했는데 아니야. 알고 보니까 무명 그대로가 불성이고 불성 그대로가 무명이야. 하나도 무명 아닌게 없고, 하나도 불성 아닌게 없어.
그러니까 구할 진리도 없고 버릴 망상도 없는 거지 그리고
幻化空身卽法身이라
(환화공신즉법신이라)
환영 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네.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이야, 우리는 이 몸뚱이는 말이죠 온갖 탐진치 삼독, 고통의 근원이다 그러지요.
환화공신, 헛된 몸 아니예요? 이 몸뚱이가 헛된 몸, 이 몸뚱이 육신 이것 때문에 고통이 따른다. 이 몸뚱이 때문에 온갖 죄를 범한다 그래가지고 이 몸뚱이를 증오하지요.
그래가지고 어떤 부정관을 해요.
하, 이 몸뚱이는 부정한 것이다 해가지고 해골관을 한다든지 아니면 무슨 뭐 썩어가지고 푸르딩딩한 시체를 관한다든지. 원시 선관에 보면 그런게 다 나와요.
심지어 염주까지 그 저 해골로 된 염주가, 108염주가 있잖습니까? 그런식으로 이제 이 몸뚱이를 부정하다고 그래 관하는 그런 관법이 있거든? 그것도 하나의 방편으로써 필요한 사람이 있고, 필요한 근기가 있어요.
그래서 이걸 싫어하고 멸시하고 그랬었는데 허망하다고 해서 그랬었는데 아니야 알고보니까 그대로 우리가 이 몸을 부정하고 찾고자 하는 진리의 몸 그대로더라.
그래 환화공신이 그대로 진리의 몸, 법신이더라 이거예요. 법신은 영원불변의 몸 아닙니까? 영원불변의 진리의 몸이거든.
그 찾고자 하는 영원불변의 진리의 몸이 그대로 이 몸, 허망한 이, 조금만 가시에 찔려도 피가 나고 조금만 감기만 걸려도 그냥 콜록콜록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이 허망하고 부정할 데 이를데가 없는 이 몸뚱이가 그대로 법신이더라.
그러니까 법신을 구하고 뭐 이 몸뚱이 뭐 제거하고 버리고 취하고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이야기 다 한거예요. 불교 이야기 다 한 것입니다.
『화엄경』우리 공부할 때 그런 이야기 있었죠. 『법성게』 또 『약찬게』같은 거 뭐라고 했습니까? 물불 그대로 신이라고 했죠. 신이요, 부처요, 보살이라고.
그런데 하물며 사람이야 더 말할 것도 없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육신, 망상 그대로 위대한 부처요, 보살이요 신이라. 사람 이보다 더 위대한 신은 없다고요.
내가 미국에 가서 법회를 이번에 여러 곳에서 하면서 주로 그런 이야기를 했어. 그쪽에는 기독교 사상이 팽배해 있는 나라 아닙니까?
인간보다 더 위대한 신 있으면 나와보라고 했어.
웃기면 금방 웃을 줄 알지, 기분 나쁜 소리하면 금방 얼굴 찡그릴 줄 알지, 이보다 더 훌륭한 신이 또 어딨느냐 이거예요. 참 기기묘묘하잖아요.
머리 쓰고 말이지, 머리 굴리는 거, 그거 신기하게 보라 이거야. 신기하게 보라.
신이 아니고 인간이 아니고 부처가 아니고 보살이 아니면 그거 머리 굴릴 줄 어떻게 알아? 저 목석이 머리 굴릴 줄 알아? 그것도 아름답게 보라 이거야.
나를 속인다, 아주 참 저거 신기하다 저 불성이 들어서서 나를 속일 줄 안다고 그거 인간이 아니면 못하는 거예요. 신이 아니면 못하는 거야. 그게 신이야 바로. 살아있는 신이다. 내가 그런 이야기를 주로 했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인간보다도요,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뭐 특수한 인간 아니고, 다이아몬드로 만들고 무슨 뭐 금으로 만들고 한 그런 인간이 아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재 그 모습 그대로의 그 인간 또 우리가 쓰고 있는 이 마음 이대로의 이 인간, 이 인간보다도 더 위대하고 더 소중한 것은 없고, 이보다 더 위대한 불성과 법신은 또 없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경전을 봐도, 어느 깨달은 조사스님의 법문을 봐도 똑같애. 한결 같아요. 한결 같애.
『화엄경』은 통째로 이 우주 덩어리 그대로 부처라고 보고 보살이라고 보고 신이라고 보지 않습니까?
주성신중주지신 주산신중주림신 뭐 물불 바람, 공기 온갖 것들이 전부가, 심지어 뭐 가루라 아수라 까지도 전부 신으로 보고 부처로 보고 보살로 보는 그런 안목 그것이 바로 「화엄경」이거든요.
표현의 차이가 약간 있어서 그렇지 똑같다고요.
이런 데는 보면은 어떤 자연현상에 대한 그런 이해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 중심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바르면은 그런 것도 그냥 바로 이해가 되거든요.
그러니 이건 우선 우리들 자신이 그렇다라고 이해를 해야 되고 다른 사람도 역시 동일하게 그렇다라고 이해가 될 때 바람직한 사회는 저절로 돌아오는 거죠.
행복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그 가치성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면은요, 뭐 아무리 무슨 인간성 회복이니 뭐니 뭐니 별별 소리 다 해봐야 그게 제대로 안된다고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여기에 첫째 열쇠. 열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제망상 불구진하는 거지. 무명실성이 즉불성이 아니면은 부제망상 불구진 안됩니다.
망상은 제거해야 되고 진리는 따로 구해야 되고 그렇지요.
또 환화공신(幻化空身)이 곧 법신(法身)이니까 그대로 부제망상 불구진 하는 거예요.
환화공신은 버려야 할 거로 알았는데 아냐, 그대로 법신이라, 환화공신 이거 버리고 법신 따로 찾으면 곤란하다, 그건 있지를 안해. 첫째 있지를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法身覺了無一物이요
(법신각요무일물이다)
법신의 실상을 깨닫고 나니 아무 것도 없고
법신각요무일물(法身覺了無一物)이요 본원자성천진불(本源自性天眞佛)이라.
법신을 각요하면 무일물이야.
법신(法身), 법신이 뭐라고 했죠?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했죠. 환화공신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고 나니까, 각요(覺了)하고 나니까 무일물이야.
여기에는 우리가 하나의 물건도 없다 라고 하는 말은 어떤 따로 분리해서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런 차별적인 한가지 사물도 없다.
전체가, 온 우주 전체가 그대로 법신이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온 우주 전체가 진리다. 진리 그 자체다. 그러니까 따로 떼어놓을 물건이 사물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본원자성이 천진불이다. 본래 가지고 있는 근본자리 그대로, 뭐 이걸 조작하고 다듬고 만들고 정진을 하고 수양을 하고 무슨 육바라밀을 닦고, 뭐 화두를 들고 해서 부처가 되는게 아니고.
어느 정도 부처가 됐다, 또 뭐 어떤 『심우도』같은 거를 보면은 처음엔 뭐 소를 찾아가지고 그 소가 차츰차츰 순화되니까 머리부터 하얗게 되어가지고 나중에 꽁지까지 되고 뭐 이런 식으로도 이제 표현을 하죠.
여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부처는 온전한 부처가 아니라는 거예요.
본래 부처라야 그게 온전한 부처다 그거야. 본래 부처.
뭐 수행해서 다듬고 그러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本源自性天眞佛이라
(본원자성천진불이라)
모든 존재의 근본자성이 그대로 천진불이로다.
그래 본원자성(本源自性) 본래 모습 그대로의 자성이 천진한 부처다. 아주 이게요, 결정적인 이야기고 또 궁극적인 이야기고 궁극적인 이야기예요. 더이상 나아갈 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그러면은 어떻게 되겠어요?
어떤 일상속에서 문제가 되는 게 있어요. 문제되는 것, 서로 티격태격하고 서로 많이 가지려고 하고 하는, 또 많이 가지려고 하는 그 근원은 또 뭐냐? 결국 아까 이야기 했던 육신이거든요. 그런데 그 육신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 버려요.
五陰浮雲空去來고
(오음부운 공거래고)
오음의 육신도 뜬구름이라 할 일 없이 오고가며
그래 오음부운공거래(五陰浮雲空去來)예요, 이 오음이라고 하는게 뭐예요? 이 나, 보통 나예요.
그건 뜬구름이라, 괜히 왔다갔다 하는 거예요. 공거래. 공연히 오고 간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이 우주화 됐고, 또 내 자신이 진리화 된 거예요. 무일물이니까.
그러면 내 오음이라고, 내 개체적인 오음, 개체적인 나라고 하는 것은 이미 거기에는 뜬구름과 같애.
뭐 살았다, 죽었다, 왔다 갔다 여기에 아무런 마음에 걸릴 게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거래라. 오음부운공거래(五陰浮雲空去來)
시원하죠? 죽어도 시원하고 살아도 시원하고.
구름이 저기 그 뜬구름이요 흘러가는 모습 참 한가하고 보기 좋습니다. 흩어지는 모습도 아주 보기 좋아요.
쓱쓱쓱쓱 바람이 불면 그냥 흩어져서 없어지고 또 없어지고 가만히 잔디밭에 누워서 구름 흘러가다가 사라지는 모습 보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어요. 아무 부담없지요.
그 뭐 형체만 없어졌지 사실은 없어진 게 아니거든요. 또 하얗게 그건 어떤 형체를 이루고 있지만은 또 알고 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어졌다고 해서 없는 것도 또 아닌 것, 이게 구름이거든. 우리 이 육체도 마찬가지예요.
나라고 하는 이 오음역시 마찬가지죠.
그런 경지가 된다. 그러니까 ‘이 오음의 육신을 그대로 가지고 그렇게 보고 그렇게 수용하는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걸 뭐 버려가지고 금강석으로 이 육신을 만들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예요. 이 육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런 경지가 된 것이지. 요는 안목의 차이야. 안목의 차이.
이 세상을 똑같이 우리가 살지만은 그 사람의 지혜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이 전혀 달라진다고요.
내가 가끔 비유를 들지만은 우리나라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반에는 스뎅 그릇 가지고 시골에 가면 이조백자하고 맞바꿔오는 예가 허다했습니다.
스뎅 그릇가지고 이조백자하고 맞바꿔요. 왜냐 시골에서 이조 백자는 깨지기가 쉽고, 또 그거 뭐 벌써 오래 되고 금이 많이 가 있고, 이거 뭐 버리기도 그렇고 아직은 쓸만하고, 버릴라니까 아깝고.
그래서 골동품 상점 하는 사람들이 스뎅그릇 을 한 차 싣고 와가지고 맞바꾸는데 좋은거야. 바꾸니께 스뎅은 쓰기가 훨씬 낫거든. 던져도 안깨지고 말이죠 많이 담고, 날렵해서 아주 사용하기 좋고, 그러니까 좋다고 맞바꾸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람 아무도 없어. 지금은 요즘은 뭐 명품감정 그런 데 보면 시골 아줌마들도 들고 나와서 이게 얼마짜리냐? 얼토당토않게 값을 몇백만원씩 매겨가지고 나오는거 보지 않습니까? 지금은 수준이 그렇다고요.
그러면 그전이 있던 가지고 있던 물건하고 지금 물건하고 다르냐 하면 아냐. 똑같은 그 물건인데 그때는 안목이 없으니까 스뎅보다 못했고, 지금은 스뎅이 뭐야 이젠 어림도 없어. 이제는 가가지고 기웃기웃 했다가는 야단나.
예전엔 개밥그릇으로도 이조백자 막 썼어요. 그걸 개밥그릇으로 쓰고 있는 걸 가만보니까 저걸 달라그래야 되는데, 달라 그래야 되는데 그래가지고 어떤 사람이 여러 날을 노리다가 결국은 얻어온 이야기 수두룩해요. 사실은.
그게 뭡니까? 요는 안목의 차이라.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도, 이조백자의 가치는 똑같은 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스뎅보다 못했고, 지금은 스뎅보다 몇 백배 몇 천 배 가치를 안다 이거예요. 그만치 눈을 떠서 그런거죠.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이나 우리나 똑같은 인생이예요. 똑같은 인생인데 그 분은 인생에 대한 눈을 그렇게 팍 그냥 제대로 떴고, 우리는 제대로 못 떠가지고 별 가치 없는 존재로 살아갈 뿐이지, 그 차이입니다.
별차이 없습니다. 그 소질은 누구나 이 한마음이라는 것 때문에 똑같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제대로 인생을 깨달은 사람은 그야말로 그 인생이 극대화 된거죠.
그러니까 오음부운 공거래라. 마음의 드넓은 허공에, 허공에 이 육신이라고 하는 오음은 뜬구름과 같아 가지고 공연히 오고 가고 하는 거지요. 그러면은 이 육신을 통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삼독, 탐진치 삼독은 그야말로 물거품이야.
三毒水泡虛出沒이로다
(삼독수포허출몰이로다)
삼독의 번뇌도 물거품이라 헛되이 출몰하네.
삼독(三毒) 탐심을 좀 일으켰다가 어리석음도 일으키고 그래봤자 그거는 헛되이 일으켰다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은거야.
그런데 그렇게 못보면은, 못보면은 아, 막 가지려고 하고 아등바등 해가지고 결국 그것이 고통으로 그게 전락이 되는 거야 고통으로 남겨지고 마는 거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요, 보아서 탐심이 설사 일어났다손 치더라도 그뿐이야. 그뿐이라고 볼 때뿐이야.
그러니까 진열장에 말이지 아주 좋은 옷을 이렇게 보고는 그대로 못 지나가죠. 자기도 모르게 그 안에 들어간다고요. 주머니에 돈도 한 푼도 없으면서 들어가가지고 괜히 물어봐. 얼마냐고 물어봐. 살 계산도 없어. 그래가지고는 이제 나중에사 정신 차리고는 집에 돌아가 가지고는 끙끙 앓는거야.
어떻게라도 그걸 사야 되겠는데, 사 야되겠는데 이러는 거야, 그게 이제 우리의 실정인데 여기의 입장은 뭐예요?
보고 좋다 이거야. 좋다 하고는 지나가. 그게 허출몰이라.
삼독이, 도인도 그래요, 도인도 빨간 거 보면 빨갛고 흰 거 보면 흽니다. 빨간 거 보고 희다 하는 게 도인이 아니예요.
흰 거 보고 빨갛다 하는 게 도인이 아니예요. 빨간 거 보면 빨갛고 좋은 거 보면 좋고, 흰 거 보면 희고, 미운거 보면 역시 증오심이 일어나고 말이지.
그런데 어떤 차이가 있느냐? 그 때 뿐이예요.
지나가버리면 그뿐이야. 허출몰이야.
공거래 하고 허출몰 하는 이 차이입니다.
그래서 성인의 마음은 마치 거울과 같다.
거울 앞에 섰을 때는 다 비치죠. 다 비치는데 지나가 버려면 그거 끝이야. 거울에서 그거 남겨놓지 않는다 이거예요.
거울은 이쁜 사람이라고 해서 지나갔는데도 거울에서 이쁜 사람 얼굴 계속 비치는게 아니고, 미운 사람이라고 해서 그 앞에 섰는데 미운 사람 얼굴 안비치는 게 아니요. 그대로 다 비춰. 그런데 그 자리 벗어나면 그 뿐이야.
우리는 가슴에 그게 자국이 남아가지고 몇 날 며칠 자국이 남아가지고 아니 몇 년 까지 자국이 남아가지고 결국은 속병까지 들고 그걸로 인생 망치는 경우까지도 있는 거야. 늘 이야기 하지만 그 차이죠.
그 이제 안목이 좁아서 그런 거야. 안목의 차이입니다 요는. 다른 차이 하나도 없어요. 안목의 차이예요.
그래 취사선택. 그러니까 취해야 할 게 있고, 버려야 할 게 있고, 부제망상불구진 돼야 할 텐데. 제망상구진 하는 거지. 망상을 제해야 되고 진리를 구해야 되는 그런 분별들이 있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오음부운 공거래요 삼독수포허출몰이라.
참 이 저 그 전에 내가 『증도가』를 맨 처음에 공부할 때는 이제 저기 저 은해사 강원에 있을 때 내가 배웠는데 그때 『도서』인가 배우면서 이걸 하루에 요렇게, 여덟구절이죠. 오늘 배운 거, 요 정도씩 이제 배우고 본과는 본과대로 다 공부하고 요거는 요것대로 따로 외웠어요.
그래가지고 매일 여덟 구, 넉 줄 씩 외워가면서 배운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 하도 환희심 나가지고 평생을 그 이걸 쓰기도 여러 번 쓰고 또 외우고 그랬어요.
저기 오대산 그 상원사에 겨울철 나면서 이제 도량석을 하는데 내- 이 『증도가』를 이제 외우면서 도량석을 한 그런 기억이 있습니다.
한철동안 도량석을 하는데 이걸 가지고 하니까 참 아주 그 시원하고 아주 좋았어요. 스님들이 자기가 즐겨 읽는 것을, 즐겨 외우는 걸 가지고 도량석을 많이 하거든요.
이걸 외워가지고 여러분도 도량석 좀 하십시오. 집에서 하하(웃음)
그리고 이것은요 하나의 노래 형식을 취했고, 또 그 조계산, 인가를 맞고 참 그 날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오면서 막 부른 노래같이 됐습니다만은 그러나 이것이 이제 시형식으로써도 아주 제대로 갖췄어요. 보면은.
4구가 이제 하나의 시인데 요렇게 4구를 하면은 사언절구라 그래요. 율, 절, 뭐 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절은 운을 석자로 봅니다.
절학무위한도인 그다음에
부제망상불구진
무명실성즉불성 성자는 안봐요. 그다음에
환화공신즉법신 그래 ‘인진신’ 요게 운이 같죠. 니은(ㄴ)으로 운이 떨어지니까요. 음성운(音聲韻) 이렇게 해요.
인 하면요 이응(ㅇ)이 음이 되고 이(ㅣ)가 성이 되고 니은(ㄴ)이 말하자면 운이 됩니다. 한문 소리에는요 음운학에는 그런 미세한 분별이 있는데 음성운(音聲韻) 소리 음, 소리 성, 소리 운 우리 말로는 전부 소리야.
소린데 인 하면 이응이 인자 이렇게 써놓으면 이응(ㅇ)이 음이 되고 이(ㅣ)가 성이 되고 밑에 니은(ㄴ)이 운이 되요. 그래 운만 맞지 그래 ‘인진신’
다음에 밑에 보십시오
‘물불몰’ 이렇게 해서 운이 탁 또 이렇게 맞도록 돼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은 ‘법업겁’ 이런 식으로 석자씩, 칠언절구는요, 일곱글자로 됐기 때문에 칠언절구라고 하는데 칠언절구는 이런 식으로 글자 운을 맞춰나가는 것입니다.
요런 것들도 이제 곁들여서 이해해 놓으면 좋죠.
한시에는 요런 운을 맞추고 또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뜻은 한껏 또 표현하면서 글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보통 숙달된 사람이 아니죠.
이 영가스님은요 그냥 경전이나 보고만 정도가 아니고 본래는 천태학에 굉장한 깊은 조예가 있었습니다. 천태학이라면 우리가 공부했던 『법화경』
『법화경』을 중심으로 한 그 모든 불교학의 분야를 천태학 이라 그럽니다.
왜냐하면 천태 스님이 『법화경』을 중심으로 하나의 학문체계를 완성했습니다.
영가스님도 거기에 굉장히 깊은 이해가 있었는데 그런 밑바탕 하에서 『유마경』을 그렇게 보시다가 『유마경』에서 깨달았다 그랬습니다.
자고로 뭐 특수한 예가 있긴 있습니다만, 자고로 인생의 깊은 도리를 깨달은 분들은 보면은요, 무식한 사람은 거의 없어요. 무식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육조스님 같은 경우지, 육조스님 같은 경우는 만 명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하지 대개 도인들은 아주 뛰어난 머리와 또 어떤 문장력과 학문과 이런 거 아주 비상한 그런 자질들을 다 가지고 있었더라구요 보니까.
그렇다고 또 뭐 너무 아이구 나는 머리도 둔하고 배운 것도 없는데 해가지고 또 낙담할 일은 아닙니다. 또 육조스님 같은 이가 우리에게 굉장히 용기를 주는 분 아닙니까?
그 분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데 누구보다도 도를 깊이 깨달은 또 그런 이고 인생에 대한 그런 것은 학문을 가지고 논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지 않습니까?
한 분야에 상당한 수준에 이른 분이면 또 다른 부분야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를 수가 있는 가능성이 그래도 제일 많습니다. 그다음
證實相 無人法하니
(증실상 무인법하니)
실상을 증득하니 나와 남의 분별이 없어지고
증실상무인법(證實相無人法)하니 찰나멸각아비업(刹那滅却阿鼻業)이라.
증실상무인법(證實相無人法) 실상을 증(證) 깨달았다 이말이죠 증득했다. 실상은 뭡니까? 실다운 모습. 진실한 모습 이거예요. 진실한 모습.
이 우주와 삼라만상의 진실한 모습을 깨달아 보니까 인(人) 법(法)이 없다. 나다 남이다 여기서 인이라 함은 내가 되요.
다른 경우에는 인은 남이 되는데 여기서는 인(人)은 내가 됩니다. 그리고 법(法)은 객관이 되요. 주관과 객관이 따로 없더라 이거예요.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깨닫고 나니까, 나다 남이다 하는 그런 것이 따로 없더라. 그래 무인법이야. 나도 남도 없다.
그러면 분별할 것이 없죠.
니거다 내거다 할 것도 나에게 딸린 것, 너에게 딸린 것 이런 것도 없죠. 그러면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통은 저절로 없게 되는 것이다.
刹那滅却阿鼻業이라
(찰나멸각아비업이라)
찰나사이에 무간지옥의 업이 사라지네.
찰나멸각 아비업(刹那滅却阿鼻業)이라, 그러니까 찰나에 아비업을 소멸하더라. 오래 걸리는 게 아니여.
아비업이 뭡니까? 아비지옥에 들어가서 고통 받을 그런 죄업 그런 죄업을 아비업이라고 그러거든요.
그걸 뭐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한다든지 목이 쉬도록, 목에 피가 넘어오도록 염불을 한다든지 무슨 사경을 산더미처럼 한다든지 그런식으로 해서 죄업을 멸하는 게 아니야.
여기에서는 마음의 도리이기 때문에 바로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깨달아 보니까 너도 나도 없어, 지옥도 극락도 없다.
상대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 무인법이란 그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순식간에, 찰나 사이에 아비지옥에 들어갈 그런 업도 없더라. 찰나 사이에 그런 업도 소멸해버렸다 하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힌 말이죠.
첫댓글 三毒水泡虛出沒이라....삼독의 번뇌도 물거품이라 헛되이 출몰하네.... 꽃물들다님! 수고 많으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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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學無爲閑道人은 不除妄想不求眞이라... 배울 것도 없고 할 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은 망상을 버리지도 않고, 진심을 구하지도 않네. 無明實性卽佛性이요 幻化空身卽法身이라... 무명의 실제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며 환영 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네..本源自性天眞佛이라.... 모든 존재의 근본자성이 그대로 천진불이로다..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우주와 인생의 실상을 깨달아 상대적인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감사올립니다. _()()()_
증실상무인법(證實相無人法)하니 찰나멸각아비업(刹那滅却阿鼻業)이라...._()()()_
無明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
證實相하니 無人法이라!_()()()_
감사합니다._()_
무명실성(無明實性)이 즉불성(卽佛性)이요 환화공신즉법신(幻化空身卽法身)이라.ㅡ무명의 실제 성품이 그대로 부처님 성품이며 환영 같은 허망한 육신이 그대로 법신이네._()()()_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고맙습니다._()()()_
증도가 참 좋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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