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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 문수사리보살에게 유마거사에게 문병하라고 하시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문수사리(文殊師利)에게 말씀하셨다.“그대가 유마힐에게 가서 문병하도록 하라.”
爾時,佛告文殊師利:汝行詣維摩詰問疾。
이제 부처님은 문수사리보살에게 자신을 대표해서 유마거사의 병문안을 가라고 합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세존이시여! 저 상인(上人)은 상대하기가 어렵습니다.
文殊師利白佛言:世尊,彼上人者,難為詶對。
우리가 출가한 법사(法師)에게 편지를 쓰거나 혹은 출가자가 자기 스승[師父]에게 편지를 쓸 때 ‘상인(上人)’이라고 써서 존칭할 수 있습니다. 상인의 출처는 유마힐경입니다.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이 지은 시사(詩詞)로서 법사에게 보낸 것은 ‘모모상인에게 써서 드립니다[寫贈某某上人]’라고 되어 있는데, 전당시(全唐詩) 중에서 많이 보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들 보는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는 당시(唐詩) 중에서 만분의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상인도 화상(和尙)인데, 그 의미는 사람 위의 사람으로 제일등인을 말합니다. ‘고생 중에 고생을 맛보아야 사람 위의 사람이다[吃得苦中苦, 方爲人上人].’라는 속담과 같은 도리입니다.
‘수대(詶對)’란 응수(應酬) 대답입니다. 중국문화에서는 어린이에게 어려서부터 ‘쇄소응대(灑掃應對)’의 기초교육을 가르쳤는데, ‘응대진퇴(應對進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친구들에게 현대인들의 교양은 실패했다고 말합니다. 가정교육은 쇄소응대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다들 배운 일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빗자루로 바닥 좀 쓰는 것을 쇄소라고 생각합니다. 바닥은 어떻게 쓸어야 하며 환경은 어떻게 청결하고 질서정연하게 해야 하는지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오늘날의 어린이는 이런 것에 그리 상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의 응대는 더욱 떨어집니다! 많은 젊은이들, 심지어는 중년인들도 연장자에게나 또는 선생님에게 말하면서 ‘예’라는 대답으로 ‘뚜이[對: duì/역주]!’라고 합니다. ‘뚜이[對]’란 말은 동년배나 자기보다 연하 사람에게 쓰는 말입니다. 연장자에게나 선생님에게는 ‘스(是: shì/역주)!’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제는 저도 듣는 습관이 되어버려 사람들이 그냥 ‘뚜이[對]’ 라 하기를 바랍니다. 조금 전에 어떤 학우가 부인과 함께 저를 보러 왔습니다. 그의 부인은 한쪽에 앉았는데, 단정하게 앉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면전에서 바로잡아줬습니다. 그는 정말 엄격한 전통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부인을 원만히 수습해주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문화의 재건은 한 두 사람이 말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수대(詶對)’라는 두 글자의 중요함을 얘기해보면, 그 안에는 응대진퇴(應對進退)가 포함됩니다. 무엇이 응대진퇴일까요? 사람을 보면 한걸음 나아가서 인사드리고, 떠나갈 때나 뒤로 물러날 때는 한걸음 물러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퇴란 사람으로서 어떤 일을 마땅히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또 어떤 약속을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의 진퇴의 사이를 말하는 것으로, 그 사이에서의 응대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응대진퇴는 사실 사람됨의 기본교육과 태도로서, 중국인은 의례(儀禮)라고 말합니다. 풍채[儀表] 태도는 사람됨의 기본 도리입니다. 만약 의례가 제대로 안 되었다면 하물며 대례(大禮)는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예컨대 어떤 학우더러 와서 일 좀 해달라고 재삼 말하면서 그더러 이곳으로 출근 하라고 하면, 그는 올 때마다 먼저 정좌부터 합니다. 아니 그래가지고 뭔 일을 한다는 겁니까? 이 진퇴의 사이에서 이해를 못한 겁니다. 이 진퇴에 대해 학문적으로 말해보면 너무나도 많습니다. 또 예컨대 어떤 학생들은 남의 거실에 들어가서는 마땅히 어디에 앉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밥 먹을 때 젓가락 들고 그릇 드는 것조차도 옳지 않습니다!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은 석가모니 부처님께 말하기를, ‘아이~! 이 상인은요!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인들로서 좀 못한 사람들은 그의 면전에 가면 툭하면 꾸지람을 당합니다.’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우주와 인생의) 실상(實相)반야를 깊이 통달하고, 불법의 요지를 잘 설하며, 변재가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습니다. 모든 보살의 법식을 다 알고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비밀[秘藏]에 깊이 들어가지 않음이 없으며,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고 신통에 유희하며, 그 지혜와 방편을 모두 이미 성취하였습니다. 비록 그러하더라도 부처님의 분부[聖旨]를 받들어 그에게 가서 문병하겠습니다.”
深達實相,善說法要,辯才無滯,智慧無礙,一切菩薩法式悉知,諸佛祕藏,無不得入,降伏眾魔,遊戲神通,其慧方便,皆已得度。雖然,當承佛聖旨,詣彼問疾。
문수사리보살의 이 한 단락의 말은, 마치 관료 사회에서 황제가 내린 명령에 대하여 완곡히 어렵다고 표시하면서도 역시 가야만 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마치 제가 종종 학우들에게 무슨 일을 좀 하라고 하면 그 사람들은 ‘아이구! 선생님! 이… 저… ’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듣자마자 싫습니다. 저는 정말 차마 가르침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은 먼저 말하기를 유마거사는 ‘심달실상, 선설법요(深達實相, 善說法要)’라고 합니다. ‘심달실상, 선설법요’라는 이 여덟 글자는 정말 엄청난 말입니다. 대철대오 하여 도를 얻어서 성불한 보살의 경계라야 실상반야(實相般若)가 있습니다. ‘실상(實相)’은 무상(無相)하며 진공묘유(眞空妙有)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유마거사는 재가거사의 몸으로서 성불하였습니다. 성불했을 뿐만 아니라 설법할 수 있어서, 온갖 중생을 제도하여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합니다. 우리가 글 가르치기를 예로 들어보면, ‘잘 말하느냐[善說]’ ‘잘 말하지 못하느냐[不善說]’의 차이는 큽니다. 여러 해 전에 어떤 학우가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에 화학을 가르치러 갔는데, 그는 시사(詩詞)의 경계로써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화학 공식을 시의 틀에다 집어넣어 말했는데 대단히 환영받았습니다. 이게 바로 ‘선설’입니다. 어디 여러분들 중 일부 학우들처럼 설법하러 나가면 강단에 서서 두 눈을 부릅뜬 채 앞만 쳐다보고 아무도 상관하지 않으면서 온통 학문적인 얘기만 하지만, 효과가 조금도 없는 것과 같겠습니까? ‘불법의 요지를 잘 설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이 21세기에 불법을 ‘불법의 요지를 잘 설한다’는 정도까지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유마거사는 ‘실상을 깊이 통달하고 불법의 요지를 훌륭하게 설할 수 있는’ 정도까지 이미 도달했는데, 이 경계는 이미 대단한 겁니다.
이어서 ‘변재가 걸림이 없고, 지혜는 막힘이 없다[辯才無滯, 智慧無礙]’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변재는 강변(强辯)이 아니라 모든 문제가 그 사람 앞에 가면 다 해결되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머리를 써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머리를 써서 생각하는 것은 세간적인 총명입니다. 그는 실상반야 경지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그 지혜가 쟁반 위에 구슬이 굴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말을 잘하지만 들어보자마자 이치에 어긋나는 강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변재가 걸림이 없는 사람은 오직 성불한 사람으로서, 세간법이든 외도법이든 어떤 법문이든 모두 불법의 최고봉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은 말했습니다. ‘바른 사람이 삿된 법을 쓰면 삿된 법도 바른 법이요, 삿된 사람이 바른 법을 쓰면 바른 법도 삿된 법이다[正人用邪法, 邪法也是正. 邪人用正法, 正法也是邪].’ 왜 변재가 걸림이 없는 정도에 이를 수 있을까요? 지혜가 막힘없기 때문입니다.
유마힐경의 이 부분의 매 구절은 모두 우리가 도를 닦아 성취하는 기준입니다. 진정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은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들 부처님을 배우면서 주제넘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 자신들이 한 조목 한 조목마다 가지고 대조해보십시오. ‘실상을 깊이 통달한’ 수준까지 할 수 있습니까? ‘불법의 요지를 훌륭하게 설할 수 있는’ 정도까지 할 수 있습니까? ‘변재가 걸림 없는’ 수준까지 할 수 있습니까? ‘지혜가 막힘없는’ 수준까지 할 수 있습니까? 지혜가 막힘없다는 입장에서 말해 보면, 부처님을 배우는 여기 우리 몇 분들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볼 때는 지혜가 매우 높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할 겁니다만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곳곳마다 장애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는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제를 모르고 무지한 것입니다! 잘못되는 원인을 짓는 것입니다!
‘모든 보살의 법식을 다 알고 있으며[一切菩薩法式悉知]’, 모든 대승보살의 불법, 외도 마도를 포함한 온갖 법문, 어떤 하나의 계율규범까지도 알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실지(悉知)’란 말도 본경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말입니다. 뒷날 중문 편지 가운데에서, 특히 연장자들의 말투에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來信知悉].’란 말을 늘 사용합니다. 뜻밖에 어떤 학생도 저에게 써 보낸 편지에서 ‘당신이 보내주신 편지를 잘 받았습니다’ 라는 뜻으로 ‘지실(知悉)’이란 말을 사용하는 일이 있는데, 그러면 끝장입니다.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또 어떤 학생은 대학교수가 되었는데도 저에게 보내는 편지의 봉투에 ‘남사회근(南師懷瑾)’이라고 써져있습니다. ‘남사’면 남사라고 하면 됐는데 그는 ‘사(師)’자를 그 언저리에다 쓰고 ‘회근’이란 이름은 중간에다 썼습니다. 그는 이렇게 쓰는 게 저에 대해서 공경하는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에이~! 꼭 그 반대로 써야 합니다. 편지봉투에다 ‘남선생회근[南先生懷瑾]’이라고 쓴 것은 우편배달부로 하여금 누구한테 부치는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회근’이란 두 글자를 언저리에다 치우치게 함으로써 자기가 감히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에서는 연장자의 이름자를 언저리에 치우치게 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썼다가는 지극히 불경스럽습니다. 에이~! 이런 전통문화 교육들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할까요? 저는 속이 타 죽을 지경입니다! 지금의 교육부가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역시 문제입니다.
‘모든 부처님의 비밀[秘藏]에 깊이 들어가지 않음이 없으며[諸佛祕藏, 無不得入]’, 만약 우리가 묻기를 ‘불법 수지의 내면에는 비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한다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비밀에 대해서는 선종의 육조대사가 대답을 가장 잘해놓았는데, 비밀은 바로 당신 자신한테 있습니다. 남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중생이 본래 부처이지만 도리어 자기의 본성을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비밀인데도 중생은 알지 못합니다. 예컨대 우주의 비밀로서 우리들이 오늘날 전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은 아주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수 천 년 동안 그런 사실을 몰랐습니다. 허공중에는 또 수많은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는데, 현재의 과학으로는 알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다들 불교의 밀교를 비밀스럽다고 보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도리가 있습니다. 도를 깨달은 사람이 밀교를 보면 조금도 비밀스럽지 않다고 느낍니다. 진정한 도는 비밀이 없습니다. 저마다 불법의 궁극에 대하여 깊이 들어간 정도가 다른데, 이 점이 인성의 최고의 기밀입니다. 오직 성불한 사람이라야 비로소 모든 부처님의 비밀에 대하여 모조리 이해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기를 ‘서방극락세계는 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고 부를까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말하기를 ‘무량수(無量壽)ㆍ무량광(無量光)’의 의미라고 할 겁니다. 왜 서방에 계실까요? 왜 동방불토에는 약사여래장수불(藥師如來長壽佛)이 계실까요? 그분도 역시 무량수입니다! 왜 남방의 부처님은 보생여래(寶生如來)라고 할까요? 무슨 보배일까요? 보생불은 어떻게 성불했을까요? 그분은 어떤 법을 사용했을까요? 모든 불법은 공(空)을 말하는데 왜 북방은 불공여래(不空如來)일까요? 북방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왜 중국문화에서의 제왕은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았을까요? 이른바 ‘남면이왕(南面而王)’입니다. 왜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앉는 것이 스승의 자리일까요? 이런 이치를 여러분들은 이해합니까? 제가 여러분들이 생각하여 본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기하지 않으면 아마도 여러분들은 태워서 사리가 나올지라도 모를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법에는 비장(秘藏)이 있는데, 이게 바로 비밀입니다. 유마거사는 재가 부처님의 신분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비장ㆍ신비에 대하여 다 깊이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미 상방(上方)세계에서 성불한 금속불(金粟佛)인데, 일부러 하방 (下方)세계에 와서 거사의 몸을 나타내어 보여주신 것입니다.
‘온갖 마군을 항복시키고 신통에 유희하며[降伏眾魔, 遊戲神通]’, 온갖 마장(魔障)이 유마거사에 대해서는 어찌 해볼 방법이 없습니다. 본 경전의 상권에서는 대마왕조차도 그를 두려워했다고 언급합니다. 심지어 함께 데리고 온 마녀들도 그에게 그 명단대로 모두 거둬들여졌습니다. 최후에는 마왕도 그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었고 마녀들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마구니들을 항복할 수 있는 바에야 왜 병마(病魔)는 아직 항복하지 못했을까요? 조금 있으면 우리는 그가 병마에 대하여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이렇지만 때로는 세속적인 마구니에 대해서 역시 피할 수밖에 없는데, 홍진 세상을 벗어나버리면 세속의 마구니를 피해버리게 됩니다. 세속에 깊이 들어가 세속적인 마구니를 항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큰 출가입니다. 유마거사는 또 온갖 신통을 갖추어서 모든 재가와 출가, 세속과 출세간은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지 유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진정한 신통은 대지혜의 성취입니다. 이것이 그가 도를 이룬 조건입니다. 부처님을 배운 여러분들은 자신이 좀 깨달은 것이 있는 것으로 느끼는데, 이 조목의 경문에 대조를 한번 해 보십시오. 이것은 바로 계율 조목들인데, 어떤 조목을 당신은 해 낼 수 있습니까? 말을 할 경우 언사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제가 늘 여러분들에게 훈계하지만 말이 대중을 압도하지 못하고 언사가 명확하지 않으며 조리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한참 얘기를 했는데 요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도무지 모릅니다. 외모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합니다. 위의도 없습니다. 위의란 사나운 모습이 아닙니다. 혐오스런 모습을 띠는 것도 아닙니다. 위의란 공덕이 성취되어 어디에 가더라도 도량[氣度]이 있는 것입니다. 마치 꽃향기나 혹은 전기처럼 그 사람의 도량이 뿜어져 나옵니다.
‘기혜방편, 개이득도[其慧方便, 皆已得度],’ 이것은 유마거사가 모든 지혜ㆍ모든 방편 법문을 다 성취했다는 말입니다. 문수사리보살은 부처님에게 보고하기를 ‘이 상인은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분은 이런 경계에 도달한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이미 분부한 바에야 문수사리보살도 역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리하여 (그 자리에 있던) 많은 보살과 대제자들ㆍ제석천ㆍ범천(梵天)ㆍ4천왕(四天王) 들은 모두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이제 두 보살[大士]이신 문수사리와 유마힐이 만나 함께 이야기하면 반드시 묘법을 설할 것이다. (이는 얻기 어려운 기회이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마땅히 문수보살을 따라 가야한다)’ 그래서 즉시 8천 명의 보살들과 5백 명의 성문들, 백천 명의 천인들 모두가 따라가고자 하였다.
於是眾中諸菩薩大弟子,釋梵四天王,咸作是念:今二大士,文殊師利維摩詰共談,必說妙法。即時八千菩薩,五百聲聞,百千天人,皆欲隨從。
문수사리보살이 가겠다고 대답하자마자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따라 가서 구경하고자 했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 중에는 대보살ㆍ불제자ㆍ욕계천주로서 옥황대제인 석제환인 등이 있었습니다. ‘석(釋)’자에 대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중국에서의 출가자는 본래 자신의 원래의 성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종지(從智)법사의 성이 이(李)씨라면 ‘이종지(李從智)’라고 불렀습니다. 남북조 시대 이르러서부터 출가자는 속가의 성씨를 없애고 일률적으로 성씨를 ‘석’자로 바꿨습니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문수사리보살과 함께 가는 사람으로는 또 대범천ㆍ4천왕 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두 대사께서 대화를 하려고 하는데 틀림없이 볼만한 좋은 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동시에 8천 명의 보살과 5백 명의 소승인, 그리고 백천 명의 천인들도 모두 따라 가고자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