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비 (無比) 큰스님 妙 法 蓮 華 經 문수원 강의
40.
世尊以方便力으로 說如來智慧어늘
세존 이방편력 설여래지혜
我等從佛하야 得涅槃一日之價하고 以爲大得이라하야
아등 종불 득열반일일지가 이위대득
於此大乘에 無有志求니다
어차대승 무유지구
41.
我等이 又因如來智慧로 爲諸菩薩하야 開示演說하대 而自於此에
아등 우인여래지혜 위제보살 개시연설 이자어차
無有志願호니 所以者何오
무유지원 소이자하
佛知我等의 心樂小法하시고 以方便力으로 隨我等說이언만은
불지아등 심락소법 이방편력 수아등설
而我等不知眞是佛子로이다
이아등부지진시불자
42.
今我等은 方知世尊이 於佛智慧에 無所吝惜이니다
금아등 방지세존 어불지혜 무소인석
所以者何오
소이자하
我等昔來로 眞是佛子어늘 而但樂小法이로다
아등석래 진시불자 이단락소법
若我等이 有樂大之心이런들 佛則爲我하사 說大乘法일러이다
약아등 유낙대지심 불즉위아 설대승법
43.
於此經中에 唯說一乘이어늘 而昔於菩薩前어 毁訾聲聞의 樂小法者
어차경중 유설일승 이석어보살전 훼자성문 낙소법자
然이나 佛實以大乘敎化니다
연 불실이대승교화
44.
是故我等이 說本無心有所希求이나 今法王大寶가 自然而至로소니
시고아등 설본무심유소희구 금법왕대보 자연이지
如佛子의 所應得者를 皆已得之니다
여불자 소응득자 개이득지
나. 偈頌
45.
爾時摩詞迦葉이 欲重宣此義하야 而說偈言하니라
이시마하가섭 욕중선차의 이설게언
㈎ 頌長行
㉮ 頌法說
46.
我等今日에 聞佛音敎하옵고 歡喜踊躍하야 得未曾有니다
아등금일 문불음교 환희용약 득미증유
47.
佛說聲聞이 當得作佛이라하시니 無上寶聚를 不求自得이니다
불설성문 당득작불 무상보취 불구자득
방학 잘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날씨가 지금부터 이제 더울라 그러네요. 방학 중에는 시원하고, 시원해야 할 때는 또 덥고.....
사람이 사는 일 가운데에 더울 때는 좀 시원하게 지내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이고, 또 추울 때 따뜻하게 지내는 것도 즐거움이지요.
일을 한참 하다가 잠깐 쉬는 것, 거 짧은 시간이라도 맛이 참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사람 사는 일이라면, 불교를 믿는 우리 불자들은 불교라고 하는 큰 세계 안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또는 당장의 어떤 뚜렷한 문제가 아니더라도 내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아프고 하는 개인의 문제라든지, 등등 살아가면서 있을 수 있는 그런 일들이 닥쳤을 때에는 부처님의 힘이랄까 불교 안에서의 제 3의 어떤 힘이라 할까, 무엇이 됐든지 간에 그 힘을 통해서 내 삶을, 내가 하고자 하는 어려운 문제 해결을 이루고자 하는 것, 이런 것이 불교를 믿는 일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이지요.
또 그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장기적인 기간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든지 경전공부를 한다든지 수행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여러 가지 수행을 통해서 살아가는 보람, 불교를 믿는 보람, 불교를 믿는 소득 이런 것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늘 겪는 일이지만 사실은 똑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살아가는 속에서 어떤 가치와 보람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못 느끼는 사람도 많고, 느낀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또 천차만별이고 그렇습니다.
사람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로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고 살아있다는 그 이유만으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소중하고 값진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삶의 가치는 우리가 그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과 보람을 개발하고 찾는가 하는데 거기에 또 달렸어요.
인생의 성패(成敗)가 사실은 거기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안목을 가졌느냐, 인생을 보는 안목이 어떠냐 하는 거기에 사실은 우리 인생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거든요.
말하자면 같은 인생을 사는 데도 얼마나 값지고 가치 있고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사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보는 안목, 인생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에 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산에 약초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약초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잘 알아요. 옛날 ‘기바’라고 하는 의사가 스승으로부터 약초에 대한 공부를 하는데, 처음에 좀 공부하다가 나가 보니까 약초가 드문드문 보이고, 한참 공부를 한 뒤에 나가 보니까 거의 모든 풀이 약초로 보이고, 공부를 다 마치고 나와 보니까 약초 아닌 것이 없더라고 했어요.
전부 약초로 보인다는 것은 그만치 안목이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산에는 온갖 약초들이 수두룩하지만 약에 대한 안목이 없으면 전부 잡초로 보이지요, 약이 아니거든요.
설사 산삼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산삼을 볼 줄 모르면 그건 산삼이 아니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중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삶에 대한 어떤 가치와 보람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으면 그건 뭐 사실은 같은 인생을 살아도 전혀 다른 가치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거지요.
화엄경에도 보면 불법 가운데서도 우리가 느낄 수 있고 또 찾을 수 있고 또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그런 가치와 보람이 사실은 어마어마한데 여기서처럼 지혜의 안목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을 찾을 줄 모른다는 거지요.
불교를 믿어도 사람들마다 다 다르지요. 성격에 따라 다르고 적성에 따라 다르고 자기가 맨 처음에 불교를 어떻게 접했는지, 어떻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는지, 처음에 인연 맺을 때 무엇으로 길이 들여졌느냐에 따라서 사람마다 각각 다르더라고요. 가만히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자기 소견에 한 번 사로 잡혀버리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해도 잘 먹혀들지가 않아요. ‘아, 불교는 이런 이런 것이다’ 하고 딱 자기가 판단해 버리고는 그 외의 것은 더 이상 귀담아 들으려 하지를 않는다고요.
천궁이란 약초를 일예로 들자면, 천궁이란 약초 하나만 배워가지고는 산에 가서도 계속 천궁만 찾으러 다니지 산삼이 옆에 있어도 볼 줄 모르고, 천궁보다 열배 스무 배 더 값진 약초가 있어도 볼 줄을 모른다면 그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우를 상당히 많이 범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약초의 비유를 들면서 아주 값진 약초가 많이 있지만 눈이 어두운 사람, 약초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은 그 약초에 대해 그냥 스쳐버리고 만다고 하셨지요.
불교 안에서도 역시 그렇고 그 비유는 어디든 다 해당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보통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정말 소중하고 값진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한 어떤 생각이 부족하고, 지혜가 없고, 또 안목이 부족하거나 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의 가르침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스쳐버리는 거예요. 그 참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지요.
예를 들어서 산에 가서 산삼이 옆에 있는데도 산삼을 캐지 못하고 자기가 아는 천궁이란 약초 그것 하나만 캐러 다닌다고 해보세요.
인생에 있어서나 불교 안에서나 사실 그런 처지가 됐다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지요.
부처님께서는 또 그런 비유를 했어요.
땅 속에 많은 보물이 있다. 그런데 그 보물을 아는 사람은 곳곳에서 보물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보물인지 모르는 사람은 보물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도 모르고, 설사 보물을 봐도 그것이 보물인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의 돌멩이로 밖에는 못 본다는 거지요.
그랬을 때 그런 상황을 아는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분통터지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불법 중의 보물도 마찬가지이고, 불법 중의 약초도 마찬가지이고 인생에 있어서 정말 값진 보물로써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다행히 이렇게 인연이 되어서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인 대승경전을 공부한다고 하는 이 사실, 이것만으로도 큰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공부한 뒤 돌아가서 어떤 소득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벌써 우리가 이러한 시간을 가지고 있고, 백 개를 들어서 그 중 한두 가지만 설사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훌륭한 대승경전을 공부한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그렇게 큰 복일 수가 없어요.
이 사실만 가지고도 큰 복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느껴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만도 큰 이익이라, 이것을 공부해서 어디 가서 어떻게 되고 어떤 결과가 오느냐, 그것을 지금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물론 그런 결과는 따로 또 소득이 분명히 있지만은, 따로 오는 소득 이전에 바로 오늘 이 시간에 우리는 다른 어떤 삶보다도 가치 있는 삶, 어떤 복 보다도 큰 복, 어떤 이익보다도 큰 이익을 누리고 산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됩니다. 사실이 그렇고요.
그럼 그 다음은 이 공부를 통한 복이 설사 안 돌아와도 상관이 없는 거지요.
기도라고 하든지 수행이라고 하든지, 우리 나름의 기도와 우리 나름의 수행은 이 대승경전을 공부하는 여기에 바로 그 의미가 있다, 그렇게 우리가 생각해야 되고요.
부처님은 그런 비유를 듭니다.
날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으면 천리마 덕택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거예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천리를 갈 수가 없는데 천리마 꼬리에 붙었기 때문에 하루에 천리를 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자기 혼자의 소견을 가지고는 사실은 제대로 살 수가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성자의 가르침과 그분의 신앙 속에서 뭔가 의지하고 힘을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지요. 자기 혼자 힘으로 뭘 이뤄내겠습니까? 결국 자기 힘으로 이루어 내는 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연으로 함으로 해서 그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지요.
지난 시간까지 법화경 강의를 스무 번을 했는데 오늘은 스물한 번째입니다.
이야기가 계속 되어가고 있는 그런 과정에서 마침 일 주일을 쉬게 되었었는데 이야기의 줄거리인즉슨, 유명한 비유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아주 어릴 때 집을 나가서 부자(父子)가 서로 헤어지게 됐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못 찾고 본래 살던 도시로 돌아와서 아주 거부 장자가 되어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은 어리석게도 전 세계를 돌면서 기술도 없고 지식도 없고 해서 그저 아주 천한 일, 거름이나 치고 똥이나 쳐 주는 그런 하천한 품팔이나 하며 말하자면 숙식을 겨우 때워 가는 그런 삶을 전전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의 집 대문에 당도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마루에 앉아서 보고는 그것이 아들인지 알았는데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는 아버지로 보지 못하고 왕이나 왕과 같은 사람일거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는 도망을 가게 되고, 아버지는 엉겁결에 반가워서 그 아들을 맞이하려고 하는데
그 아들은 오해를 하고 도망을 가다가 그만 기절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생각에, ‘아, 이 아들의 수준이 저렇게 낮은 천민으로 살아왔으니까 그냥 데려오려 했다가는 아들을 정말 죽이겠다’ 생각해서 아들의 수준에 맞는 하인을 두 사람 보내서 그 아들을 데려와 서서히 천한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차츰 그 집에 출입을 시키고 그 집의 재산상황을 알게 하고, 그리고 나중에는 아들이다, 라고 공포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재산을 전부 전해주게 된다.」
부처님과 중생과의 관계를 가섭이라고 하는 대제자가 그런 비유를 통해 이야기 합니다.
지금 와서 보니까 부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와 같이 부자와 부자의 못난 아들과의 관계하고 똑 같다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은 이야기의 끄트머리에 왔고 그 다음 게송으로 걸러, 시로서 다시 표현하는 부분이 경에 계속 되는데 그 내용은 말하자면, 거부 장자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고, 그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중생이라는 거지요.
중생들은 본래 부처의 씨앗을 가진 불성인간, 말하자면 부처의 성품을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못난 중생으로 전락해서 중생놀음으로만 살고 있지요. 그것을 차츰 차츰 근기를 키워서 그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자기의 불성을 이해시키도록 한다는 거지요.
본래 거부장자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 그것은 거지가 되었으나 거부장자의 재산을 물려받았을 때나 하나도 변함이 없지요. 그 신분에는 사실 하나도 변함이 없는데 중생들이 착각을 해 가지고 그 신분이 바뀌게 되어 있는 거지요.
우리는 스스로 능력이 없고, 아는 게 없고, 덕이 없는 그런 못난 중생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건 우리의 착각이고, 그건 우리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부처님의 그런 복과 덕과 지혜와 자비, 이런 것을 고스란히 우리 가슴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중생들에게 일깨워 주는 그런 내용으로 이 비유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줄거리를 염두에 두시고 뒤에 부분을 이어가겠습니다.
마지막에 이제 그 집의 재산 상황을 전부 알게 되고 그 다음에 그 집의 재산을 전부 물려받게 되는 그런 이야기가 이제 40번에 조금 남았고, 그 다음에 다시 걸러서 게송으로 재차 이야기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우리가 귀담아 들으면 이야기의 줄거리를 알 수가 있습니다.
118쪽의 40번부터 보겠습니다.
40.
世尊以方便力으로 說如來智慧어늘
세존 이방편력 설여래지혜
我等從佛하야 得涅槃一日之價하고 以爲大得이라하야
아등 종불 득열반일일지가 이위대득
於此大乘에 無有志求니다
어차대승 무유지구
세존이방편력(世尊以方便力)으로, 세존께서 방편의 힘으로
설여래지혜(說如來智慧)어늘, 여래의 지혜를 설하거늘
아등종불(我等從佛)하야, 우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우리들은 부처님 제자들입니다. 가섭존자와 그 외 다른 제자들이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요.
득열반일일지가(得涅槃一日之價)하고, 열반의 일일지가를 얻고,
열반이라고 하는 하루의 값을 얻고라는 말입니다.
열반의 하루의 값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루 일을 하고 거기에서 얻는 일당(日當)을 말합니다. 그러니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일당(日當)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당(日當) 받자고 불교수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편안하려고 불교수행 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평화롭고, 영원의 보물인 마음을 찾아서 그 마음의 보물을 영원히 쓰자고 하는 것이지 일당 받자고 불교 믿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를 들어서 하루 절에 가서 어떤 일을 하고, 그래서 그 순간 편안하다면 물론 그건 하나의 일당(日當)일 수는 있어요. 열반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마치 하루 품, 일당(日當)과 같은 그런 것이라는 거지요.
늘 말씀드리지만 일당이 아닌 불교적으로 영원한 행복, 영원한 평화는 그럼 어떤 삶이냐?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 그래서 부처의 행동을 하면서 사는 것, 부처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영원히 부처로 사는 것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길이지요.
그동안 열반 열반 했는데,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가 열반인데 그것은 결국은 자기 혼자는 편안할지 몰라요. 자기 혼자 편안한 그것은, 자기 혼자 아무 일없는 그것은 그야말로 품팔이, 일당(日當) 받고 하루 일해 주는 그런 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열반일일지가(涅槃一日之價)라는 말을 하는 겁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일당(日當), 그것을 얻고,
이위대득(以爲大得)이라하야, 그것을 가지고 큰 소득이라고 여기고
어차대승(於此大乘)에, 그리고 대승의 가르침, 법화경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이 대승의 가르침에
무유지구(無有志求)니다, 뜻에 구함이 있지 못했다.
더 이상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겁니다. 일당 받았으면 됐지 그 다음 내일 일은 내일 알아서 하자는 겁니다. 살림을 살아도 그래 살아서야 되겠어요, 그래?
아무리 살림을 엉터리로 살아도 일 년 먹을 것은, 직장이 없어지더라도 일 년 먹을 것은 준비해 놓고 살아야지, 그날 먹고 나면 내일 먹을 게 없고, 오늘 해결하고 나면 내일 잘 곳이 없고 내일 입을 것이 없는 그런 살림을 살아서야 살림 산다고 할 수가 없는 거지요.
여기서 열반(涅槃)이라는 것은 마치 일당을 받고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이 대승(大乘)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삶을 내 삶으로 사는 그런 가르침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일 년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그런 재산을 장만하는 길이라고 표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들어 일당(日當), 일일지가(一日之價)라고 하는 이런 표현도 쓰고 있는 거지요.
사실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지요. 가섭존자 이야기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뭐, 불교 안에서 아무리 좋은 길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거는 크게 관심 없고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당장 시급한 문제, 발등에 떨어진 내 개인의 문제, 사업상의 문제 이런 거나 해결하고 보자는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것이 또 시급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런 문제도 물론 해결이 가능하긴 하지만 그보다도 더 큰 소득이 있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우리가 이렇게 이해를 하면 됩니다.
가섭존자 같은 이들도 말하자면 당장에 시급한 것부터 해결하려고 했지 영원히 잘 사는 그런 길은 크게 마음 쓰지 않았다는 그런 말이지요. 무유지구(無有志求)라는 말은 그런 말이지요.
어차대승(於此大乘)에 무유지구(無有志求)라, 큰 가르침에 있어서는 뜻에 크게 구하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41.
我等이 又因如來智慧로 爲諸菩薩하야 開示演說하대 而自於此에
아등 우인여래지혜 위제보살 개시연설 이자어차
無有志願호니 所以者何오
무유지원 소이자하
佛知我等의 心樂小法하시고 以方便力으로 隨我等說이언만은
불지아등 심락소법 이방편력 수아등설
而我等不知眞是佛子로이다
이아등부지진시불자
아등我(等)이 우인여래지혜(又因如來智慧)로, 또 여래의 지혜로 해서
위제보살(爲諸菩薩)하야, 이와 같이 보살들을 위해서
개시연설(開示演說)하대, 열어 보이고 또 연설하되
이자어차(而自於此)에, 스스로 여기에 있어서
무유지원(無有志願)호니, 뜻과 원이 없었으니
소이자하(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이냐?
불지아등(佛知我等)의 심락소법(心樂小法)하시고, 우리들이 마음에 작은 법만 좋아하는 줄을 부처님이 아시고는,
부처님은 아실 것이고 또 아시고 있다 이거예요. 무엇을 아시는고 하니, 우리들이 마음에 소법을 좋아하는 것을 아신다는 말이에요.
중생들은 작은 것만 좋아하지 큰 것은 좋아하지 않아요. 그저 오늘의 문제 그저 당면한 문제의 해결, 그것만 좋아해요.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어느 지방의 사람이 그렇게 바라던 대통령이 됐다 하니까 아무 할 일이 없더라는 겁니다. 아무 할 일이 없다, 몇 번을 이야기 하는 거지만 아무 할 일이 없어. 전혀 걱정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런 목표를 딱 세워놓고 살면 사람이 그렇게 되거든요.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요즘은 소식이 영 없다만.
심락소법(心樂小法)이라, 마음에 작은 것, 작은 바램 그거 하나만 가지고 산 거지요. 그런다고 당장에 그 집의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요.
대통령이 된 사람과 사돈의 팔촌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런 기분을 가지고 살았더라는 것입니다.
심락소법(心樂小法), 우리들이 마음에 작은 법만 좋아하는 줄을 부처님이 아시고는
이방편력(以方便力)으로 수아등설(隨我等說)이언만은, 이 방편의 힘으로써 우리에게 맞추어 말씀을 하시다,
수(隨), 따라 준다는 것은 우리수준에 맞추어 준다는 거지요. 우리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같지가 않아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사람 사람의 그 마음에 맞추어 가지고서 이야기를 하지요.
그러니까 불교에는 방편이 얼마나 많습니까? 별별 방편이 다 있어 가지고 성격이 아무리 여러 가지이고 제 각각 다르다 하더라도 불교에는 입맛대로 다 있어요. 없는 게 없어요.
뭐든지 있다고요. 뭐든지.
성불하겠다는 사람은 성불하는 법도 있고요, 당장에 어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람에게는 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고, 절에 가면 그냥 시원한 공기가 좋다는 사람에겐 또 그것도 있고, 물이 좋은 사람에게는 물이 있고, 불교 안에는 별별 게 다 있어요. 입맛대로 다 있어요.
그건 왜 그러냐? 부처님이 중생들의 여러 가지 속성을 다 잘 알고 그렇게 준비를 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어떤 하천한 종교보다도 훨씬 더 수준이 낮은 그런 것들도 있고, 아주 수준이 높은 것도 있고 별별 게 다 있어요.
그러니까 방편의 힘으로 우리들에게 맞추어서 설한다, 이야기한다고 그래요.
예를 들어서 산신이니 칠성이니 하는 것들도 불교에 언제 있었나요? 불교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그런데 왜 불교 안에 산신이 있고 칠성이 있느냐?
산신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산신을 모셔놓은 거예요, 칠성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칠성을 모셔 놓고 어차피 중생제도를 위해서 판을 벌리려면 백화점처럼 별별 상품이 다 있어야 되는 거예요.
산신은 특히 우리나라에서 좋아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도 산신을 모시는 그런 관습이 있었거든요. 산신 따로 놔두고 불교 따로 놔두면 그건 이상하잖아요.
불교의 세력이 커지니까 산신을 불교 안에다 맞아 들여 가지고 ‘아, 산신도 다 불교집안이다, 불교의 성인이다’ 이렇게 된 거지요. 그럼 어떡하겠어요. 부처님 도량이나 오지.
산신만 내내 찾아다니다가 혹시 여기는 어떤 곳인가 하고 대웅전에도 들어갈 수 있고, 관음전에도 들어갈 수 있고 그러다 또 법회도 참석할 수 있고, 사람이 여러 가지 안목이 생기고 자꾸 확대되어 지는 거지요.
그래서 산신이니 칠성이니 하는 것은 그 뜻으로 생긴 거예요.
중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토속신앙의 정신에 맞춰서 생긴 겁니다.
한용운 선생님 같은 이는 불교유신론에 보면 칠성하고 산신을 없애자, 이런 주장이 있거든요. 이건 다 잘못된 생각이라.
부처의 가르침도 새로운 문제가 생기면 새로운 근기에 맞는 방편을 새로이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이 시대 중생제도를 위해서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할 판인데 있는 것을 없애면 안 되는 거지요.
일본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신사는 불교하고 관계가 없는 것인데도 절 안에 신사가 다 있어요. 절에 오면 신사 참배하고 신사 참배하고 나서는 절에 참배하고, 그렇게 해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거지요. 사람 사는 게 별 거 있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보면 방편력으로써 우리들에게 맞춰서 이야기 한다고 해 놨지요.
산신이니 칠성이니 여러 가지가 많습니다. 그전에 성철스님이나 청담스님 같은 이도 그 빼쪽한 생각을 할 때는 산신, 칠성을 없애야 한다고 두드려 부숴야 한다고 했지요. 산신각 칠성각을 과격한 표현으로 두드려 부숴야 된다고 해서 더러 없앤 경우도 있고 그랬어요. 그게 다 가만 생각하니 조금 모자란 생각이지요.
아, 중생 건지는데 뭐 어떤 방편인들 어때요. 그것을 방편으로 해서 자꾸 성장시켜 가고 발전시켜 가면 되는 거지요.
부처님은 별별 방편을 다 내놓은 거지요.
이아등부지진시불자(而我等不知眞是佛子)로이다, 그러니까 참으로 이 불자인 줄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줄을 몰랐다 이겁니다.
42.
今我等은 方知世尊이 於佛智慧에 無所吝惜이니다
금아등 방지세존 어불지혜 무소인석
所以者何오
소이자하
我等昔來로 眞是佛子어늘 而但樂小法이로다
아등석래 진시불자 이단락소법
若我等이 有樂大之心이런들 佛則爲我하사 說大乘法일러이다
약아등 유낙대지심 불즉위아 설대승법
금아등(今我等)은, 지금의 우리들은
방지세존(方知世尊)이, 바야흐로 알았다.
말하자면 부처님의 재산을 장자의 재산을 거기 일군으로 들어간 못난 아들이 전부 물려받는 그런 비유에 해당되는 내용이지요. 지금 우리들은 바야흐로 알았다, 무엇을 알았느냐?
어불지혜(於佛智慧)에, 부처님이 깨달으신 그 지혜에
무소인석(無所吝惜)이니다, 인석한 바가 없다. 아끼는 바가 없다,
부처님 당신이 깨달은 지혜를 다 나눠주고 다 이야기해 줄려고 하지 아낄 까닭이 없는 거지요. 지혜를 이야기 해 준다고 해서 당신의 지혜가 줄어드는 게 아니거든요. 주머니 안의 돈처럼 그렇게 줄어드는 게 아니라고요. 주머니에 있는 돈도 남 준다고 해서 줄어드는 게 사실은 아니라고요. 눈 앞에서는 준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게 줄어든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지혜야 말할 것도 없지. 지식도 그렇지요.
나 혼자 공부하고 있으면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을 자꾸 보고 이야기하고 강의하고 설법하고 하는 과정에서 또 깨달아 진다고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 또 생각이 나는 거라. 그러니 아낄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도 아끼지 않았다는 거지요. 당신의 지혜에 대해서 아낌이 없었다.
아낀다고 그게 무슨 오롯이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 준다고 해서 남에게 다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 것이 더 빛나지요.
소이자하(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이냐.
아등석래(我等昔來)로, 옛날부터
진시불자(眞是佛子)어늘, 참불자어늘
이단락소법(而但樂小法)이로니, 다만 작은 법만, 말하자면 소승법만 좋아했다.
이 참 어려운 대목입니다. 사실 말은 하나도 안 어려운데 참 어렵습니다.
우리가 부처로 살자고 하는 것이 불교의 참 목적이고 부처님의 마음인데 우리는 부처로 산다고 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요.
당장 집안에 별일이 없었으면 좋겠고,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고, 하는 사업이 잘 됐으면 좋겠고 어떻게 하더라도 뭔가 재수가 있어 횡재를 좀 만났으면 좋겠고, 뭐 요런 정도만 생각하지 부처로 산다는 건 전혀 까마득한 딴 나라 이야기 같이 듣는다고요.
그게 사실은 제일 큰 문제입니다.
또 부처님은 법화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뭐라고 이야기를 했든 그것은 결국은 너희들을 꼬기 위한 것이고 사실 내가 너희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네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 그것 밖에 나는 달리 다른 것이 없다, 유일 일불승, 오직 일불승뿐이다!”
아, 부처로 살면 끝났지, 어디에 부처보다 더 나은 성공이 있으며 부처보다 더 나은 횡재가 있겠느냐는 거지요. 사실은 그렇지요. 사실은 부처님 말씀이 맞긴 맞다고요. 그런데 우리 마음에 그것이 얼른 와 닿지를 않아요.
‘나는 부처보다도 횡재나 좀 만났으면 좋겠다.’ 아, 당장에 그렇잖아요? 솔직히 우리 심정은.
'아, 금년에는 말이지 재수생 저거 좀 처리했으면 난 부처 열 번 되는 거보다 좋겠다.' 아, 당장은 그렇잖아요. 부처가 열 번 되는 건 소용없고 우리 집안의 애물덩어리 재수생 저거 하나 처리해 줬으면 좋겠다, 사실이 그렇거든요.
이게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문제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가 뭔고 하면, 당장의 문제도 물론 중요하고 열심히 하면 그것도 해결 되요, 되지만은 “보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높이 떠서 더 큰 이익을 챙길 줄 알아라, 어떻게 그렇게 너희들은 약지도 못 하냐, 좀 큰 이익을 챙겨라” 이거지요.
아, 산에 갔으면 이왕이면 산삼을 캐지 천궁 그것만 자꾸 찾느냐는 거지요. 천궁 그까짓 거 몇 푼이나 한다고 그것만 찾느냐 그거야. 산삼으로 눈을 좀 돌리라는 거지요. 산삼 하나만 캐면 팔자 고치는데. 부처님 말씀은 그 뜻입니다.
물론 더덕도 좋고 천궁도 좋지요. 그것도 다 갖다 팔면은 일당은 나와요. 부처님 말씀 중 일일지가(一日之價)란 말씀이 그거예요. 일당은 나오지만 산삼 하나 캐면 평생 팔자를 고쳐요. 혼자만 팔자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에게도 물려줄 재산이 된다는 거지요. 예컨대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소법(小法)을 좋아한다는 그 말이 우리들의 현실이고 또 대개 우리는 그런 작은 문제에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부처님은 부처의 지혜에 대해서 아끼는 바가 없다 이거예요. 옛날부터 우리는 참불자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작은 것만 좋아했어. 참불자라면 부처 아들이라 이거예요. 부처 아들이면 끝났지요, 뭐. 더 있습니까?
참불자, 진시불자라 그랬어요. 그런데도 소법만 좋아하니
약아등(若我等)이 유락대지심(有樂大之心)이런들, 만약에 우리들이 대법을 좋아했던들,
낙대지심(樂大之心)이런댄, 낙대(樂大), 그 아주 동그라미를 해놔야 겠네요. 전혀 다른 말이니까요.
작은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여기는 큰 것을 좋아한다, 대법(大法)을 좋아한다, 부처의 삶을 좋아하는 것,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만약에 있었던들, 그럼 부처님이 어떻게 했겠어요?
불즉위아(佛則爲我)하사, 부처님이 곧 우리를 위하사
설대승법(說大乘法)일러이다, 대승법을 설했을 것이다.
과거에 아함경을 설하며 뭘 하면 좋다, 뭘 하면 좋다하고 40년간을 그런 방편설을 이야기 했는데 그러지 않고 바로 대승법을 설했을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 우리들의 수준이 그게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수준에 맞춰서 이런 저런 이야기, 별별 이야기를 다하고 그래서 끌어 들이고 결국 가서는 우리나라에 와서는 산신도 끌어 들이고, 칠성도 끌어 들였지요.
어떻게 하더라도 한 중생이라도 놓치지 않고 다 이끌고 저 해탈의 언덕으로 가려고 하는 그런 자비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우리가 어떠한 근기를 갖췄느냐에 따라서 사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법화경을 앞에 놓고 공부할 바에는 우리 마음에 들고 안 들고는 차치하고 ' 아, 부처님의 본마음은 이런 것이구나, 불교의 본래의 목적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사실은 이것을 우리 마음에 제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소득은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산삼을 쥐어줘도 그건 버리고 더덕이나 천궁, 기껏해야 일당밖에 안 될 그것만 챙기려고 하는 게 못난 중생들의 마음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다.
43.
於此經中에 唯說一乘이어늘 而昔於菩薩前어 毁訾聲聞의 樂小法者
어차경중 유설일승 이석어보살전 훼자성문 낙소법자
然이나 佛實以大乘敎化니다
연 불실이대승교화
어차경중(於此經中)에, 지금 이 경 가운데
유설일승(唯說一乘)이어늘, 오직 일승만 설하거늘
그랬지 않습니까? 이 법화경에서는 일승만 설하고 부처의 길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무슨 성문이니 연각이니 보살이니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니 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부처의 삶만 이야기 하는데
이석어보살전(而昔於菩薩前)어, 옛날에 보살 앞에서
훼자성문(毁訾聲聞)의 낙소법자(樂小法者)나, 성문들이 소법만 좋아한다고 훼자, 비방했다는 거지요.
보살들 앞에서 "아, 못난 놈들, 못난 놈들"이라고 스님들을 보고 내가 그렇게 했다는 거지요. 성문들은 대개 출가스님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여기 보살들은 여러분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대승적인, 보다 더 개방적인 폭이 넓은 그런 사람들을 여기서는 보살이라고 합니다.
보살들 앞에서 성문을 가리켜 "저 못난 놈, 못나서 출가했다. 못 나서 출가했다. 못난 사람이라서 소법만 좋아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그렇게 말 했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 보살 앞에서 성문들이 소법 좋아하는 것을 헐고 비방했으나
연(然)이나, 그러나
불은, 부처님 본래의 마음은 뭐냐?
불실이대승교화(佛實以大乘敎化)니다, 실은 대승으로서 교화함이다.
사실은 대승으로써 교화하는 것이 부처의 목적이다. 그게 목적이기 때문에 때로는 소법 좋아하는 제자들을 비방하기도 하고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44.
是故我等이 說本無心有所希求이나 今法王大寶가 自然而至로소니
시고아등 설본무심유소희구 금법왕대보 자연이지
如佛子의 所應得者를 皆已得之니다
여불자 소응득자 개이득지
시고아등(是故我等)이, 이러한 까닭에 우리들이
설본무심유소희구(說本無心有所希求)이나, 본래 마음에 희구하는 바가 있지 않다고 말은 하나,
말하자면 부처노릇 하려고 하는 것, 좋은 것, 큰 것을 희구하는 바가 별로 있지 않아서, 마음에 희구하는 바가 있지 않아서,
금법왕대보(今法王大寶)가 자연이지(自然而至)로소니, 그러나 법왕, 부처님의 큰 보물이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저절로 굴러왔다는 거예요.
좋은 때나 안 좋을 때나 계속 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별 변함없이 절에 자꾸 다니다 보니 법화경 공부도 하게 되고, 법화경 공부를 하다 보니 결국은 우리가 부처라고 하는 사실, 우리의 마음자리는 본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부처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부처가 법당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삼천년 전 인도의 가비라성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 자리에 앉아서 이렇게 공부하고 있는 이 사람이 부처이구나,
아, 끝나면 돌아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피곤하면 잠 잘 줄 아는 바로 이것이 부처구나, 라고 하는 그런 입장에 우리가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불자(如佛子)의 소응득자(所應得者)를, 여러 불자의 마치 부처의 아들로서 응당히 얻어야 할 상태를
개이득지(皆已得之)니다, 다 이미 얻은 상태이다. 전부 다 얻어 마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임제록 같은 곳에서 표현을 참 잘하고 있지요. 우리나라의 오대산도 문수도량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오대산 이야기입니다. 중국 오대산의 문수도량은 참으로 유명해서 수행을 잘하는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장안에서부터 일보일배로 몇 년이 걸려서 가는 거예요. 한 발 가고 절 한 번 하고, 또 한 발 가고 절 한 번 하고 몇 년을 걸려야 그 산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렇게 기도하며 고생 고생을 해서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간다 이거요.
그런데 임제스님이 뭐라고 하느냐?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없다. 문수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네가 바로 문수이다. 너 밖에 다른 문수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고 하지요. 너보다 더 훌륭한 문수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 이거지요. 그렇게까지 아주 확실히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임제 스님은 우리 불교의 전통 전법활동에 뚜렷한 선지식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우리 마음에 이렇게 확 다가서야 어느 날 눈이 번쩍 뜨일 텐데 백날 그렇게 말해도, ‘아니야, 그건 임제 스님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부처님은 법당에 있어. 문수보살은 오대산에 있어. 지장보살은 지장전에 있고, 관음보살은 관음전에 있어’, 속에서 자꾸 우리는 그것을 배격하고 있는 거지요. 임제스님이 그렇게 큰 법문을 해도 자꾸 물리치는 거야, 안 받아들이고.
‘아니야, 관세음보살은 관음전에 있지 어디 내가 감히 어떻게 문수보살이야.’
‘관세음보살을 찾아가는 네가 관세음이다’라고 백날 해 줘봐야 안 받아 들이는 거예요.
법화경을 설하실 때는 부처님이 열반에 가까워지는 시기이니까 당신이 하실 소리를 솔직하게 다 하는 대목입니다. 솔직하게 다 하는 대목이니까 이 마당에 와서 감추고 자시고 하실 까닭이 없어요.
내내 감추고 하다가 바른 말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법화경에 와서는 하실 소리 다 했다는 겁니다. 하실 소리 다 했다는 건 뭐예요?
법왕대보(今法王大寶)가 자연이지(自然而至)라, 저절로 굴러떨어졌다 이거지요. 사실 우리가 말로 형언한 바가 없어서
시고아등(是故我等) 설본무심유소희구(說本無心有所希求), 본래 마음에 희구하는 바가 있지 않아서,
그렇지만 어떡해요? 우리는 부처가 될 생각이 꿈에도 없었어. 그런데 알고 보니 부처야.
부처될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는 그 말이 뭐냐? 본무심유소희구(說本無心有所希求), 이 말입니다. 본래 내 마음에는 희구하는 바가 없었다. 더 이상 부처를 구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법왕대보(今法王大寶)가 자연이지(自然而至)라, 그러나 법왕의 큰 보배가 저절로 굴러 떨어졌다. 나는 부처될 생각이 없었는데 벌써 부처는 나 한테 와 있어, 내가 부처였더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그렇습니다.
이게 우리 마음에 얼마나 들런지요. 그건 이제 우리가 수행을 자꾸 하고 인생을 오래 살고, 그래서 경험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은 이런 말이 가슴에 와 닿게 되고 눈이 번쩍 뜨일 때가 있어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면 세상에 겁날 게 없고 부러울 게 없고 그런 상황이 되는 거지요.
아무리 대통령을 열 번을 했다한들 부처보다야 나을 수 있습니까? 그런 대통령 열 번 보다 나은 부처가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내 손아귀에 있더라는 그 이야기를 법화경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우리들 가슴속에 깊이 새겨줄려고 하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있지요.
45.
爾時摩詞迦葉이 欲重宣此義하야 而說偈言하니라
이시마하가섭 욕중선차의 이설게언
이시마하가섭(爾時摩詞迦葉)이, 시에 마하가섭이
욕중선차의(欲重宣此義)하야, 이 뜻을 거듭 이야기하려고
이설게언(而說偈言)하니라, 게송으로서 말했다.
46.
我等今日에 聞佛音敎하옵고 歡喜踊躍하야 得未曾有니다
아등금일 문불음교 환희용약 득미증유
아등금일(我等今日)에, 우리들이 오늘 날
문불음교(聞佛音敎)하옵고, 부처님의 음교(音敎), 소리로 가르쳐 주는 것, 말로 가르쳐 주시는 것을 듣고서
환희용약(歡喜踊躍)하야, 아주 뛸 듯이 기뻐하여
득미증유(得未曾有)니다, 일찍이 있지 않았던 처음 듣는 법을 듣게 되었습니다.
47.
佛說聲聞이 當得作佛이라하시니 無上寶聚를 不求自得이니다
불설성문 당득작불 무상보취 불구자득
불설성문(佛說聲聞)이 당득작불 (當得作佛)이라하시니, 부처님께서 말하기를 성문, 그런 못난 제자도 마땅히 작불(作佛), 부처가 된다는 말씀을 했다.
수행자 중에서도 제일 못난 게 성문이거든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 입만 보고 앉아 있는 거요. 거기에 뭐가 떨어질 줄 알고. 그런 못난 제자도 마땅히 작불(作佛), 부처가 된다는 말씀을 했다는 거예요. 부처님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무상보취(無上寶聚)를 불구자득(不求自得)이니다, 무상보취, 가장 높은 최고의 보배무더기를 구하지 아니했는데도 저절로 얻어 졌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나는 부처가 싫다 해도 여러분은 부처야,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여기서 불구자득(不求自得)이라는 말이 그 말이라.
무상보취(無上寶聚)는 부처라는 말이지요. 나는 부처되는 것이 싫다, 이것이 불구(不求)야, 구하지 않는 거지요.
자득(自得)은 그런데도 싫어도 부처라는 겁니다. 내가 부처되는 것이 그렇게도 싫지만은 할 수 없이 부처야. 무상보취를 불구자득이라.
이제 그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부처될 생각이 별로 없는데 내가 부처야, 원래 부처래.
참 걱정이지. 부처될 생각이 없는데 부처가 됐으니 참 보통 걱정이 아니에요.
부처라니까 부처로 살아야지요, 할 수 없지요. 이제.
뗄래야 뗄 수 없는 거예요. 떼 내어 지겠어요? 떼 내어 지면 떼겠지만 떼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싫은데도 할 수 없이 부처가 되었다, 이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입니다.
법화경의 가르침이 뭐냐고 하면 그렇게 말하세요.
“아, 나는 부처가 싫은데, 싫어도 부처가 됐다 하더라.”
부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부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든 부처님을 좋아하는 사람이든 뭐 그런 걸 가릴 게 없습니다.
누구든 전혀 기구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오는, 불구자득(不求自得)이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무상보취(無上寶聚)를 불구자득(不求自得)이라, 가장 높은 최고의 보배무더기가 구하지 아니했는데도 저절로 얻어졌어요. 요 한 마디 여덟 자 속에 법화경의 사상이 다 들어 있어요.
첫댓글 감사합니다_()()()_
안목이 없으면 보물도 돌덩이로 보인다. 날파리가 천리마 꼬리에라도 붙어 있으면 하루에도 천리를 달릴 수 있다. 고맙습니다. _()()()_
날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으면 천리마 덕택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거예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또 하나의 매듭을 품니다 _()()()_
너보다 더 훌륭한 문수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정말 마음에 쏙 드는 문장입니다. ^^ ()()()
無比 큰스님께! 사실은, 이제 칠성각이나 산신각으로 부터 "우리들의 佛敎"가 이쯤에서 벗어나야 할 시기가 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포용력있는 방편법으로서 중생들을 敎化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大乘의 一佛乘을 공부하는 이 마당에서 말입니다 ! < 無上寶聚 不求自得 >
공부 잘 하고 갑니다. 내 안의 문수를 만날 때까지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_()_
같은 인생을 사는 데도 얼마나 값지고 가치 있고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사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은 인생을 보는 안목, 인생을 생각할 줄 아는 지혜에 달렸다.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_()()()_
구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얻게 되었다. 고맙습니다. ()()()
無上寶聚 不求自得...가장 높은 보배를 구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얻어졌다. 그러니 사람이 어떤 안목으로 보느야에 따라 인생이 달라 진다.는 말씀...고맙습니다._()()()_
감사드립니다 _()()()_
법왕대보(今法王大寶)가 자연이지(自然而至)라....무상보취(無上寶聚)를 불구자득(不求自得)이라.....가장 높은 최고의 보배무더기가 구하지 아니했는데도 저절로 얻어졌어요. 요 한 마디 여덟 자 속에 법화경의 사상이 다 들어 있어요.......(날파리가 천리마 꼬리에 붙으면 천리마 덕택에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거예요.) - 큰스님 법문 中 -
감사히 공부합니다. ()()()
은우님 한번 크게 불러봅니다. 참 고맙습니다._()()()_
은우님, 반갑습니다. 일찍 일어난 덕에 이렇게 좋은 법문을 접할 기회도 되고..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고 사는 것, 그래서 부처의 행동을 하면서 사는 것, 부처의 삶을 사는 것..그것이 영원히 부처로 사는 것이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길...說本無心有所希求이나 今法王大寶가 自然而至로소니...본래 마음에 희구하는 바가 있지 않다고 말은 하나, 부처님의 큰 보물이 저절로 굴러왔으니...無上寶聚를 不求自得이라..보배 무더기가 구하지 아니했는데도 저절로 얻어졌으니...은우님! 수고하셨습니다..법공양 고맙습니다.._()()()_
은우님! 수고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_()()()_
_()()()_
()()()
_()()()_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무상보취(無上寶聚)를 불구자득(不求自得)이라......
法王大寶 自然而至
如佛子 所應得者 皆已得之
본래 마음에 희구하는 바가 없었지만(부처될 생각은 없었지만)부처님의 큰 보물이 저절로 굴러 떨어 졌다
불자로서 당연히 얻어야 할 것을 이미 얻어 마쳤다,다 얻었다
문수 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네가 문수이다
관세음 보살을 친견하러 가는 내가 관세음이다
無上寶聚 不求自得
;나는 부처될 생각이 별로 없었는 데 부처가 되었다
;나는 부처되는 것이 싫지만 부처가 되었다,뗄레야 뗄 수도 없다
;부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부처님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누구든지 바라지도 않았지만 부처가 되었다
---법화경의 핵심 사상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잘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