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 7일 청림회(1)
상당히 오래 됐죠? 1월 달, 하고 처음 뵙습니까? (2월 1일 날···) 아, 2월 1일 날요? 너무 보고 싶었나··· 상당히 오래 된 거 같노··· 저 밑에 또 <법화경> 강의가 2개 더, 시작 돼 놓으니까 <청림회>까지 또 강의가 세 파트로··· 위에는 이제, 어른 스님께서 “스님들을 위한 강좌” 하나, 있고. “일반 불자님들을 위한 강좌” 하나, 있고. 그렇습니다. 다음 세 번째 금요일, 오전 10시 반에, 학교에, 교직에 계신 분들은 시간이 잘 나시지 않겠죠? 학교 수업 시간이라든지, 되시는 분들께서는 10시 반부터 12시까지 “문수선원”에서 어른 스님께서 매월 첫째, 금요일, 매월 첫째, 금요일. 4월부터는 아직 미확정인데 3월까지는 셋째 주 금요일도 <법화경> 강좌가 있습니다.
여기 와서 이에, 큰 스님한테 강의를 들어보며는 <법화경> 전체 통론에 대해서, 또 “법화사상”에 대해서 아마 이, <청림회>에서 제가 하는 강의의 부족한 부분들을 통론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여러 분들이 오셨던데 여기는 2분만 오시고 안 오셨네. *** 선생님, 시간 나시잖아요? 시간 나시면 금요일날, 저쪽 선원에 참석하세요. 오늘 바쁘시다··· 여기 오셔야 되고 저 위에 오셔야 되고··· 근데 매월 한 번은. 매월 첫째, 금요일 한 번쯤 되시니까. 교장 선생님, 오셔도 되겠네? 한 달에 한 번, 출장 가신다 생각하시고··· 연가를 내시든지 뭐, 월차를 내시든지, 하셔 가지고 한 달에 한 번씩 꼭 이렇게 오셔 가지고. 아니면 뭐, 인터넷으로 이렇게 함, 접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스님들을 위해서··· 스님들도 보통 스님들도 아니고 범어사 주지로 계신 스님도 와서 공부를 하시니까 그런 스님들이라든지. 또 부산 불교에서 아주 크게 홍보하고 있는 송광사 율원장으로 있는 강사 지현 스님이라든지 또 홍법원에 심상 스님이라든지. 이런 분들, 다 와서 공부를 합니다. 해인사 강사··· 영축 선원의 반산 스님이라든지 이런 분들이 또 심지어는 동국대 교수, 송광사 주지 스님, 운문사 강사 스님들··· 만만찮은 스님들, 한 150여분들 와서 공부를 하십니다. 젊게는 3,40대로부터 6,70대에 이르기까지. 법랍 2,30년 되신 스님들. 30년 넘은 스님들도 많으세요. 거기 오면 마, 법화회상, 영산회상을 맛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거는 매월 첫째, 월요일입니다. 오후 3시부터. 좀 일찍 퇴근 해 오시면 되겠네요. 그 때 강의실에는, 참석을 못 하시고. 강의실 옆에 제가 비디오 연결 해 놓은 TV로 편안하게 누워서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다과를 드시면서 옆방에서 충분히 공부하실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이제, 대가는 치러야 되는 게. 김밥을 말든지, 숟가락을 놓든지. 일은 조금 이렇게··· 거들어야 됩니다. 단지 거기 참석하시는 분들은 수영복 심사를 통과해야 됩니다. (웃음) 자, 요만큼, 좀 부드럽게 해 놓고 들어갑시다.
매화가 온 천지에 피어 있는 시절인데. 저는 얼마 전에 <법화경>이 가장 꽃피었던 중국의 천태종 본산, “국청사”에 다녀온 바가 있습니다. “국청사”는. 수 나라 시대 때, 수 양제 시대 때 세워진 절이니까 당나라 이전이니까 상당히 오래 됐고. 이 <법화경>을 종요로 삼고. 일생을 소석가(小釋迦), 동토 석가모니불(東土 釋迦牟尼佛)이라 불렸던 천태 지자 대사. 그 분의 육신이 모셔진 자리가 ‘육신보전’이 천태산 꼭대기에 있는데. 거기 가 보니까 우리 일행, 한 여남은 명 뿐이고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햇볕과 햇볕 속에 핀 매화 몇 송이··· 사람들, 한적해서 좋다 그러지마는 불교가 그만큼, 전 세계적으로 쇠퇴됐다는 겁니다. 소석가 천태 지자 대사의 ‘육신 보전’에는 매일 그 향내음이 끊이지 않아야 되는데. 끊어질 듯 말 듯, 끊어질 듯 말 듯, 그런 것을 면면(綿綿)이라고 하죠? 면면히 그렇게 불교가 이어오는 모습이 한가롭고 좋기는 했습니다마는 안타까운 바가 적지 아니 있었어요. 그래, 천태산 국청사 뜨락을 거닐다 보며는. 제가 갈 때마나 한 번씩 눈여겨보는 팻말이 있는데. “3초2목(三草二木)이 구유불성(具有佛性)이라.” 모두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열반경>에는 그런 것을 “범유심자(凡有心自)는 개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皆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무릇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의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깨칠 것이다. 그런 얘기들이 있어요.
오늘이, 125절 할 차례지요? 선생님, 책 없습니까? (같이 보면 됩니다.) 같이 보시면 안 됩니다. 밥도 같이 잡숩니까? 보시는 것도 같이 보시고, 숨도 같이 쉬고, 듣는 것도 같이 듣고? (웃음) 그런 것을 우리 불교에서는 자업자득이라 합니다, 자업자득. 하나의 형태로서, 책으로 바깥으로 나와 있지마는 경전을 보실 때는 큰 일 작은 일 보시고 화장 고치고 오신 분들은 꼭 손을 7번 씻고 보도록 돼 있고. 경전을 비치할 때는 항상 냄새나고 잡된 것하고 섞이지 않고 따로 놓고 청정한 곳에 모셔 놓는 거··· 그 우째 그거는 책이 째째부리~, 그렇습니까?
자~. 오늘 천태 지자 대사가 그토록 찬탄하고 일생을 갖다가 법화신력으로 살아냈던 이런 것들도 잠시 다른 분들이야 뭐, 안 가 보셨으니까 그런 느낌이야 없으시겠지만 저는 그런 느낌, 조금 있으니까 그런 걸 갖다가 기분을 살려 가지고 또 요즘 문수선원에서 항상 어른 스님, <법화경> 강의를 듣고 이렇게 사는 입장에서 오늘 강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125번부터 127번까지 읽으시고)
제 십육은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 사바 국토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나니라.
항상 주인공은 언제 등장합니까? 제일 뒤에 등장하는 법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더욱더 강조하고 더욱더 증명하고 더 빛나게 하기 위해서 마지막에 이렇게 끝등장을 시키는 법이지요. 그러니까 앞뒤가 콰~악, 막힌 분이. 오늘 안 오셨지요? 그러니까 말씀드려도 되겠네. “부처님 아버님은 정반왕인데 그러면 요 대통지승 여래가 석가모니 아버집니까?” 이렇게 질문하신 분, 저번에 계셔 가지고 “책 들고 나가세요!”, 이랬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다~ 초월해 가지고 뭘 이렇게 봐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이 마음이거든요. 여러분들 마음이. 마음을 이,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 겁니다. 저를 한 번 보십시오. 잠시 함, 보세요. 뭐, 못났지만··· 눈 한 번 깜짝거려 보세요. 아니 깜짝만, 해 보세요 깜짝만.
저는 이렇게 한 번 깜짝거리고 차를 운전하고 손을 요만큼 편 데 대해 가지고 행복이 뭐라 할까, 감로수가 즈르르르, 넘쳐 나는데. 이 단순한 행동 하나에 대해 가지고 그렇게 내가 넉넉하고 넘쳐 가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마음을 이렇게 살펴 볼 것 같으면 하루 종일 있으면 어떠냐? 이러면 이슬이 주~~욱, 연결돼 가지고 꿰인 것처럼 끊임없는 생각이 생각을 잡아가는 그, 연속이거든요. 근데 사람이 뭉뚱그려가지고 이만~큼 뭉쳐 가지고 자기 생각이라고 고집하고 내가 요만큼 본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문을 열고 문수선원 밖을 떠억, 쳐다보면. 끊임없이, 정말 끝간데없이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밤에도 이렇게 보며는 달이 뜨면 달이 뜨는 대로 별이 뜨면 별이 뜬 대로 끝간데 없이 저 먼 허공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나한테 있다는 것을 무한~하게 행복하게 생각하거든요. 요걸 이제, 의식이라 그러는데. 그런 데에 기준을 잡으며는. 누가 누구에게 귀속되고 누가 누구에게 해주는 생멸의 인위적인 그런 계급이라든지·점차라든지·조직이라든지 여러 가지 모든 조건이. 사실은 설명하는 하나의 지식에 불과한 것이고 방편에 불과한 것이고 역사적인 사실은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마음은 역사에도 속하지도 않고
마음은 어떤 조건에도 속하지 않고
마음은 자연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무조건입니다.
그래 인생은 무조건 행복합니다.
무조건 행복한 사람은 ‘아! 이무소득고다. 무조건적이다.’는 것을 가지고 행복을 삼고.
그 무상, 하게 흐르는 걸 당연한 이치로 제법의 무아를 당연한 이치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반적정, 다시 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길로 갈 수가 있어요. 방금 읽은 대목이 그런 대목들인데.
무슨 말인고 하면. 이 세상의 사람들은. 다른 분들이 아니야. 바로 오늘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은. 이 <법화경>도 듣는 분들이 왜 이 분들 뿐이예요? 여기 꽉 차고도 넘치고 매일 이 위대한 얘기가 그 ‘사직 운동장’을 빌려서도 계속 해야 되거든요? 근데 그게 안 된다고. 안 되고 제가 요즘 가끔씩 기독교··· TV 한 번씩 틀어 봐라,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 TV있는 데 가서 한 번씩 틀어 보면서 같이 함, 봅니다. ‘쌩 쇼’도 ‘쌩 쇼’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폄하 할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잠시 들어보면 그렇습니다. “이~예수가 이러퀘···” (웃음) 목소리부터 마,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여러분들은 무엇을 행복이라 생각을 하고 무엇을 배우러 여기 오셨나, 이러며는. 제가 생각하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삼는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할 것 없습니다. 거의 99.9% 할 것 없이. 100%의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기가 애착하고 아주 애정을 가지고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 내지 어떠한 물건. 내지 어떠한 형태의··· 뭐라 할까, 권력이라 할까. 그런 힘. 그런 거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아끼고 사랑하고 추구합니다.
고런 것이 만족이 되고
자기 생각보다 넉넉해질 때
망상보다 넉넉하게 차고 넘칠 때 행복하다, 느낍니다.
심지어 도둑놈도. 도둑놈도 지가 훔치게 된 물건이 있는데 훔치러 갔는데 금반지 훔치러 갔는데 다이아몬드를 하나 훔쳤다고, 오늘 횡재 만났다고 오늘, 와 이리 행복하노··· 도둑놈도 그렇고. 올림픽 게임을 하든지 뭘 하다가 가만~히 이리 쳐다보면 실력이 모자라는데 지가 결승에 올라가면 저 사람한테 분명히 테니스를 쳐서 질 텐데. 상대가 발목을 삐끗해 가지고 기권승을 거뒀잖아요? 그거, 좋다고 난립니다.
옆에서 가만~히 쳐다보면. 우리가 행복이라고 기준 짓는 조건은. 자기가 현재에 욕구하는 바, 소구하는 바, 바라는 바. 욕망, 이런 데 대해서 성취되고 그런 것이 또 무너진데 대해서 절망하고 성취되는 데 대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대부분,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뭐, 100%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안목이 트이고 여기 <법화경>에서 얘기하고 불교에서 얘기하는 안목이 무조건적인 삶, 무조건적인 행복. 거기서 절대의 극락. 지극히 즐거운 일. 법희선열.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제행이 무상한 것을. 제행이 무상한 것을.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고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이 점점 늙어 가고. 점점 힘이 없어지고 병들어 가고 가더라도. 그것이 그 무상(無常)함에 무상의 공의 이치, 연기의 이치를 철저히 파악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수순하고 집착하지 않고 그 흐름을 따악, 마음에서 달관하는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힘! 그런 걸 갖다가 저는 제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 이 순간에? 무조~건, 현전일념의 무심을 견지하는 것이 제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이 바깥으로 벌어지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로 실천해 나가는, 제 사상이고 제 발걸음이고 수행자로서의 길이다, 이리 생각하고. 근데 일반적으로 대체적으로 서로 만나서 얘길 해 보며는. 무슨 일을 만들며는.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모여 가지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하더라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예요. 많은 사람 모여 가지고 서로 트러블 생길 수도 있고 뜻이 안 맞을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또 뭐 적은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또 더 좋은 일도 있고. 뭐, 세상만사는 새옹지마니까. 근데 그런 데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이 <법화경>을 공부를 하고 불교를 공부를 해야 불교에 대한 당당함, 자신감. 어디서든지 큰 소리 칠 수 있고. 절대 그렇게··· 뭐, 세속적인 것이 나쁜 건 아니예요. 세속적인 것이 바라 보며는 그것이 바로 불교고. 그 세속이. 세속적인 것이 정말 그 자리에서 공부가 안 되며는. 고요한 곳에서 혼자 오늘 겉은 이런 자리에서 <법화경>을 강설하는 자리에서 철두철미하게 부처님 가르쳐놓으셨던 교설을, 설파해놓은 내용을 보지 못하는 예가 있어.
어둡잖지만 제가 설명했던 내용이 잘 전달되지 않고 아자아(我者我). 나는 내고. 사자사(師者師). 스님은 스님이다. 아자아(我者我). 더 나아가서 아자아(我者我) 서자서(書者書). 책은 책이고. 나는 내고, 이래서 자기만의 불교를 자~꾸 구축해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비일비재하죠. 제가 안 가야 될 모임에 언제 한 번 간 적이 있는데. 저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스님은.” 이제 말을 마, 반말 비슷하게 놓습니다. “이판이가 사판이가?”
“어? 나는 처음 듣는데 이게 무슨 소립니까?” 저한테 자주 오는, 한 분, 있어요. 박 선생님, 이거 무슨 소리지요? 이판, 사판, 들어 봤어요?
“아, 참, 스님, 정말 모르네··· 성철 스님 겉이 공부하는 스님들은 이판! 절 주지 하고 이런 분들은 사판!”
“아!, 그런 게 있어요?···” 옆에서 공자 앞에 문자 쓴다, 는 말을. 이판, 사판, 제 사실은, 전공 아닙니까? 그래, 시일~, 웃고 맙니다. 그래, 자기가. 그 사람은 또 서울 올라가서 뭐라 하겠습니까? “내 아는 스님이 한 분 있는데 그 사람이 이판, 사판도 모르고···”
“스님! 어디에 주로 있습니까?”
“부산에 있기도 하고 서울에 있기도 하고···” 말귀를 못 알아먹죠. “아!, 주로 부산에··· 그럼 어느 절에 있습니까?”
“뭐, 절에 있기도 하고 밖에 있기도 하고··· 뭐, 고정된 데가 없습니다.” 나는 있는 데가 고정된 데가 없다고 이랬더니. 아예 마, 서로 얘기가 안 될 바에야. 내 거처를 가르쳐 드릴 필요도 없고. 실제 제 거처는 없고. 그 말귀를 못 알아 먹으니까 “아이고 중이 뭐, 원래 거처가 있냐고. 왔다갔다 원래 그 목탁 치고 탁발 해 가지고 하루 밥 끼니, 밥 빌어먹고 그래 사는 게 걸승 아니냐고. 걸사, 알죠? 비구 스님들, 그렇게··· 알지 않냐고. 동냥 하듯이 그래 가지고 밥 한 끼 먹고 그리 산다.”, 그랬더니.
야···, 사람 망한 듯이 쳐다보는 눈빛, 그게 참··· (웃음) 거기다가 이제 우리 어른 스님이 큰 스님인데 그 스님 밑에서 내가 꼬붕 노릇하면서 꿇어 앉아 가지고 글을 배워 가지고 저기 <문수원>에 가서 교사불자회에서 강의한다, 아무~도 안 먹혀 들어. 나는 있는 자리도 잘 모르겠고. 절도 없고 집도 없고 ‘아 어마이’도 없고··· (웃음) 이판사판도 모르고, 그리 삽니다.
그러니까 우리 요, 철저하게 보셔야 되요. 예?
125.
諸比丘(제비구)야! 我等(아등)이 爲沙彌時(위사미시)에
모든 비구야! 우리들이 사미 때에
各各敎化 無量百千萬億 恒河沙等 衆生(각각교화 무량백천만억 항하사등 중생)하야
각각 무량백천만억 항하사등 중생을 교화해서
從我聞法(종아문법)하고 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위아뇩다라삼먁삼보리)어든
나로부터 법을 듣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삼았거늘.
126.
此諸衆生(차제중생)이 于今有住聲聞地者(우금유주성문지지)를 我常敎化 阿耨多羅三藐三菩提(아상교화 아뇩다라삼먁삼보리)하노니
이 모든 중생들이. 우(于)는 전치사에 해당하죠. ‘~에’. 뭐, 그래도 되고. 뭐, 이금(而今)이나 우금(于今)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말이예요. 지금에. 성문지(聲聞地)에 머무르는 자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항상 교화하노니.
是諸人等(시제인등)이 應以是法(응이시법)으로 漸入佛道(점입불도)니라
이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이 법으로서. 시법(是法). ‘이 법’으로서 점차 불도(佛道)에 들게 한다.
127.
所以者何(소이자하)오
까닭이 어떠하냐?
如來智慧(여래지혜)는 難信難解(난신난해)니라
처음에는. 한 번 사람이 누구든지 다, 범유심자(凡有心者)는 또 3초2목(三草二木)이.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지나가는 귀뚜라미 한 마리까지 전부다 불성이 없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마는. 시절인연 따라서 다 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다, 갖추고 있지마는. 그걸 갖다가 제대로 활용해 가지고 100% 힘을 쓸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젖을 떼지 못한 그런 상태라 할까요. 뭐, 그렇게 표현하면 제일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사람구실,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 고런 상태를 이제, 성문지(聲聞地)라 할까. 부처님 교법만 듣고 아는 정도.
알아서는 이제 될 일이 아니고. 어디 가서 그 집에 된장찌개 맛있게 한다는데 언제, 어떻게 어떻게 뭐뭐 넣고 한다더라, 이 얘기는 들었어요. 그러나 집에 와 가지고 한 번도 아직, 실천해 보지는 않앴어요. 그래, 된장찌개에다가 된장을 좀 빡빡하게 끓일라니까 된장을 많이 넣어야 되는데 일단 된장이 맛있어야 되고. 근데 된장을 많이 넣으니까 너무 짜 가지고 어떻게 맛이 안 나는데. 짠 걸 중화시키려면 뭘 넣어야 돼요? (물을 넣으면···) 뭐, 깨장? 뭐 넣어야 됩니까? *** 선생님, 뭐 넣어야 돼요? (물 넣으면···) 아, 물 넣으면. 아니 뭐, 빡빡 안 해도 괜찮은데 물 넣으면. 양이 마, 너무 많고. 된장을 맛있게 찌질라면[끓이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물 비슷한 거, 넣기는 넣어야 되는데, 그죠? 다마네기[양파]를, 마, 화~악, 갈아 넣는 기라. 그래, 또 되게 짜면 꿀도 쪼매 넣는 기라. 단 맛은 항상 모든 쓴 맛도 중화시키고 짠 맛도 중화시키고 신 맛도 중화시키니까. 식초가 되~게 시면, 이제 사이다를 넣는지, 요구르트를 넣는지, 달콤~하게 넣으면 새그러운 초장이 또··· (웃음) 이, 침 넘기는 이런 게 수상행식 중에서 상음마(想陰魔)라, 상상을 막 해 가지고··· 그렇게 하듯이.
자기 입맛에 완전히 맞춰 가지고 실제적으로 하는 것을, 아까처럼 얘기한 거. 이 불법(佛法)이 뭐라고 대충 아는 것을 오(悟)라 그래요. 그래 문을 열고 화~악, 바깥으로 나서 본 거라, 이제. 나서 봤지마는. 매화나무 앞에 가서 그 향기를 맡아 보고 도화나무 앞에 가서 그 향기를 맡아 보고 사과꽃, 배꽃을 직접 만져 보고 눈으로 확인하고 또 철두철미하게 살피고. 그렇게 살피는 그런 상태를 오(悟).수(修)라 그럽니다, 수(修) 그래 가지고 나중에 향기만 사악, 스쳐 가더라도 이것은 복숭아꽃 향기다, 이것은 배꽃 향기다, 이것은 난초향이라고 경험을 통해서 저절로 알잖아요? 그런 것을 증득했다, 그래요, 증(證).
우리가 그런 모든 조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수반돼야 될 게 뭐입니까? 신(信)입니다, 신(信). 뭘 믿어야 돼요? 내 자신이 청정한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믿고 난 뒤에. 그 다음에 해(解)·행(行)·증(證), 이렇게 되듯이. “능엄”에서는 그런 걸 오(悟)·수(修)·증(證), 이렇게 얘기하거든.
먼저 아! 이렇구나. 대충 깨닫고
깨달았으면 그걸 갖다가 계속 끊임없는 단련. 천단만련(千鍛萬鍊). 불에 쇠를 천 번 달궈냈다 두드리면 천. 단[千鍛]. 만 번 두드리면. 만. 련[萬鍊]. 연마(硏磨, 鍊磨)한다, 그러잖아요? 단련해 가지고 끊임없이 쇠가 강해지듯이.
그러니까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가지고 자기가 이렇게 제대로 알아지는, 증득이 되는 거죠. 다 알고 보니까. 그 자리가 그 자리라는 얘기는 있지마는. 그러나 우리는 시절인연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그렇게 하는 거죠. 여기 마지막 대목에. 성문은 한 번 해서 대하는 게 아니고. 어땠어요? 항상 매~일 똑같은 얘기를. <법화경>하고 또 <법화경>하고 또 하고 <법화경>하지마는 거기에서? 어떻게 되요? 점차점차, 점입불도(漸入佛道)라. 점입, 이라는 말들이. 점차~점차 수행한다는 말이죠.
애가 이제 처음이 뒤집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예? 그렇잖아요? 그런 것처럼 꽃이 피는 것, 한 송이를 보더라도 그렇고. 사람이 자라는 모습을 하나 보더라도 그렇고. 여기 와서 강의가 시작되는 모습을 하나 보더라도 그렇고. 처음부터 와 가지고 막, 고함지르고 이러면 서로 멍멍해서 될 일도 없잖아요. 뭐, 차를 한 대, 시동 걸고 사악, 출발해서 마칠 때까지도 그렇고. 이 볼펜을 처음에 눌러서 글 한 자 쓸 때부터도 그렇고.
세상만사 이치가 그렇게···
요새 또 봄이니까 더 생멸에 대해서 치연하게 바라볼 수는 있지요. 사시사철 해 가지고 생멸이 치연하지 아니한 때가 한번도 없지마는. 이 봄에. 중생들은 눈에 봐야 믿으니까. 눈에 보여줘야 믿고. 손에 잡혀줘야 그걸, 잊어버리니까. 손에 보여주고 눈에 보여 주고 하는 거 까지가 요, 봄에 잘~, 보이죠. 봄에 잘 살펴 보며는 무상을 체득하기가 상~당히 쉽습니다. 그래서 절에서는 옛날부터 꽃을 많이 심어 놓는 이유가. 꽃이라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향기도 터지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그런 걸 보면서. 저는 뭐, ‘꽃이 핀다’ 뭐, 이런 소리 잘 안하죠. ‘꽃이 진다’ 소리도 잘 안하고. ‘꽃이 흐른다.’ 아주 시적으로. 저답지 않게. (웃음) 꽃이 ··· 흐른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흘러가는 거···
여기서 점입불도(漸入佛道)란 말도 그래요. 계~속, 이 위대한 법을 가지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혹, 모르시는 분은, 아무도 안 계시지요? 혹, 모르시는 분은 부끄러움을 무릅쓰시고 손 한 번, 들어 보세요. (···) 책 들고 나가세요. 불교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모르시는 분이 여기 앉아서 공부하시면 너무 어려워서 안 돼요. 여기는. 거의 대학 수업으로 치며는 한 3학년 과정쯤 돼 가지고. 원어로 수업하고 전공과목 수업 진행하는 형태라서 교양과목 아닙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라고 하는 것은. ‘없을 무[無]’자(字)에 해당하고.
뇩다라라고 하는 것은. ‘위 상[上]’자(字)에 해당하고. ‘아 놓다가 또 삼먁삼보리’ 하지 마시고.
삼이라고 하는 것은 ‘바를 정[正]’자(字)에 해당하고.
삼먁이라고 하는 것은 정변(正邊). 정등(正等). 끝없다, 왜 무변, 그런 거있죠? 무변 정등,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다음에 삼이라고 하는 것은 제가 뭐라고 말씀드렸죠? ‘바를 정[正]’자(字)와 같다, 했습니다. 정(正).
보리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 깨달음. <반야심경>도 마지막 대목이 뭡니까? ‘모지 사바하’잖아요, 그렇잖아요? 그 대목이 이제, 보리 사바하죠? 인도말로 하면 보티 사트바하··· 타테타테 파라카테 파라상가테··· 보디 사바하, 그렇게 하죠, 원어로는.
그러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아뇩다라. 무상(無上). 최고. 가장 으뜸 되는. 정등정각(正等正覺). 올바른. 뭐라 할까요? 올바른데 그 깨달음이 끝없고···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등정각(正等正覺)이라 합시다.
아이고. 그럼 오늘 처음··· 이 <법화경> 강의도 처음입니까? <법화경> 강의도? 우야다가 이렇게까지 늦게 오셨어요? (웃음) 부처님 이 땅에 오셨을 때 인도에 9억이 살았는데. 3억은 부처님 오셨다는 걸 듣고, 법문도 직접 듣고 석가모니 부처님 얼굴도 친견하고 그랬는데. 한 3억과는 부처님 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그런 분이 계시다··· 법문은 들어보도 못했어. 한 3억과는 부처님 오셨는지, 가셨는지도 몰라.
‘조개’라는 놈이 한 번 잠을 자며는. (웃음) 한 3천년을 자는데 부처님 이 세상에 왔는지 안 왔는지도 모르고 그 사람 몸 받아 가지고 이 <법화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설사 불교 안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이 <법화경> 내용을 세세히 파 헤쳐 가지고 보는 사람은 아마 금정구청 다 털어도, 금정구청장이 와도 안 될거라. 금정구청장도 모르지··· 그 양반 교회 다니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 참 불법(佛法)은. 여래의 지혜는 어떻다고요? 난신난해라. 왜냐하면 아까 서두에 제가 말씀드린 거하고 비슷한데. 뭐라 그랬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생멸. 일체 유위생멸법에 대해서 인생의 지고지순. 뭐, 당신들의 행복의 가치를 거기에 두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무조건적인 행복이라든지 절대불변의 진리, 깨달음에 대한 걸 가지고 설파를 하며는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걸 이해되는 순간부터 양말을 짝짝이 신었든지 눈이 뭐, 부어올랐든지 아프든지 힘들든지 그런 데의 한계를 조금씩조금씩, 벗어 납니다. 그런 데서 자기가 이제, ‘아! 이렇게이렇게 벗어나 져 있구나···’ 하는 것을 좀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곳을 조용한 곳에서는. 수영장에서는 연습을 해 가지고 저 바다에서 제대로, 조오련씨처럼 수영하는 것처럼. 수영장에서 연습하는 것은 시끄러운 시장바닥에서 우리가 이제, 잘 써 먹기 위한 거하고 똑같애요. 여기서 공부하는 것은 학교생활하시면서 또 가정생활하시면서 사회생활하시면서 겹겹이 부딪칠 때. 뭐, 차 운전하면서도 마찬가지죠. 누가 막 밀고 들어오면. ‘아이고 니 잘났다. 니 넘버원 해라, 내 넘버투 할께.’ 끼어 들잖아요? 전에 겉으면 어떻습니까? 이 사람이 경우가··· 어디 들오노, 어디 들오노. 나도 밀고 지도 밀고 이러잖아요? 이제 시익, 들어오며는. 그러다가 옆에 까물까물까물해 가지고 들어오잖아요? 까물거리는 흔들림하나, 차 뒤에 흔들림 하나 스윽 쳐다보면. 저 사람은 성격이? 굉장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저 사람은 가진 건 없으면서 까칠~한 놈이다··· 차만 바라봐도 아는 거라. 깜박이 넣는 것부터, 안 넣는 것부터 해서··· 신발도 끌고 오는 거 이렇~게 보살님들 처사님들 오시는 거 쳐다봅니다, 제가. ‘음... 욕심없는 분이 오시니까 차를 한 통 다 드려도 되겠구나···’ 통째로 드리고. ‘저 양반은 욕심이 많으니까 차도 한 방울도 안 줘야지.’ “저 바쁘거든요?” 어디 나가버립니다. “스님이 차별심 가지면 됩니까?” 차별심을 가지는 것이 진짜? 평등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이라고 (웃음) 그리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런 얘기 들어보셨지요? <금강경 오가해>에 그대로 나옵니다. 저 쪽에 얘기도 그런 얘기 나오죠. 학 다리 길고 오리다리 짧다고 두 개를 잘라서 절대 평등하게 해 주는 것이? 똑같이 대해주는 것이 그게 진짜 평등이 아니다, 이거야. 못하는 놈은 뚜드려 패고. 잘한 놈은 상을 주고. 그것이 진짜? 평등한 것이다. 그래 어떤 사람은 그런 얘기 많이 해요. “스님이 그러면 됩니까? 평등하게 대해야지··· ” 지가 내보다 평등을 더 아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런 거 아니죠.
(128번부터 130번까지 읽으심)
128.
爾時所化 無量恒河沙等 衆生者(이시소화 무량항하사등 중생자)는
그 때에 교화된바, 무량항하사등. 그러면 항하사(恒河沙)도 모르시겠네요? 예? 항하사(恒河沙)도 모르시죠? 그럼 말씀해 보세요. 항하사(恒河沙). (항하의 모래) 항하의 모래, 그래 해운대 앞바다 모래! 이러면 제일 편하죠. 항하가. 제가 알기로··· 우리 어른이, 어르신들이 옛날부터 항하라 해 온 거 같애요. 제가 중국 사전을 번역하면서 중국 코드를 보니까 거기는 긍하([忄+亙]河)라 돼 있어요. 긍자[忄+亙]하고 항자[恒]하고 똑같애요. 한문 코드에 똑같이 돼 있는 거. 상호, 할 때 호자[互] 있죠? 옆에다 뻗칠 긍자[忄+亙] 비슷하게 해 가지고··· 긍자, 아마 원래 발음은 긍[忄+亙]가(價?)가 아니었나, 갠지스강이니까. 긍. 항하가 아니고 긍하였는데 누가 한 번 잘못 읽어 가지고 항하라 해 가지고 거기서부터 항하라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저는 가져 봅니다.
제가 뭐, 십 몇 년전에 중국 사전을 갖다가 우리말 색인집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색인집을 만들다 보니까 중국 코드에는 긍으로 나오더라고요? 긍. 또 다른 데도 보면 긍[忄+亙]가(價?)라고 나오는 데도 있거든요? 갠지스. 그래 비슷한 게 같애요, 그죠? 그래도 우리는 항하라고 얘기 하죠. 항하사라고 얘기하는 거는. 언필칭.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산수(不可算數).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불가능한 숫자를 항하사라고 얘기하죠. 그, 무량항하사등. 그러니까 한 가지 항하사만 해도 엄청날 텐데 무량항하니까. 아예 중생들의 소이지심으로 알 수 있는 바, 헤아릴 수 있는. 산수비유? 소불능급. 그러한. 끝없는, 교화한 바, 무량항하사등 중생들은.
汝等諸比丘(여등제비구)와 及我滅度後 未來世中(급아멸도후 미래세중)에
여등(汝等) 모든 비구와. ‘급[及]’자(字)가 이제 ‘및’, 이렇게 되죠. ‘~와’로 해석된 거예요. 내가 멸도한 후에
聲聞弟子(성문제자)가 是也(시야)니라
미래세 가운데 성문제자가 시야(是也)니라.
129.
我滅度後(아멸도후)에 復有弟子(부유제자)가
내가 멸도한 후에 다시 제자가
不聞是經(불문시경)하고 不知不覺 菩薩所行(부지불각 보살소행)하며
이 경을 듣지 못하고 보살이 행해야 할 바를 지각하지 못하며
自於所得功德(자어소득공덕)에
얻은 바, 공덕에. 스스로 얻은 바의 공덕에
生滅度想(생멸도상)하야
생멸로 제도한다는 생각을 내어서
當入涅槃(당입열반)커든
마땅히 열반에 드는 자가 있거든
130.
我於餘國(아어여국)에 作佛(작불)하야 更有異名(갱유이명)하리니
내가 나머지 국토에 부처를 지어서 다시 다른 이름이 있으니
是人(시인)이 雖生滅度之想(수생멸도지상)하야 入於涅槃(입어열반)이나
이 사람이 비록 생멸도. 생멸도가 맞나요? 멸도지상? 비록 멸도지상을 내어서. 생멸도상은 우예 되노? 멸도상을 내어서. 멸도상(滅度想)이란 건 뭔고? 예? 모르면 그냥 넘어 갑시다. 멸도상을 내어서 열반에 드나
而於彼土(이어피토)에 求佛智慧(구불지혜)하야 得聞是經(득문시경)하리니
어피토(於彼土)에 부처님 지혜를 구해서 이 경을 들으니
唯以佛乘(유이불승)으로 而得滅度(이득멸도)요
오직 불승(佛乘)으로서 멸도(滅度)를 얻느니라.
更無餘乘(갱무여승)이니
다시 나머지의 승(乘)이 없으니. 다른 길은 없으니.
除諸如來(제제여래)가 方便說法(방편설법)이니라
모든 여래의 방편 설법은 제(除), 하나니라.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설해 가지고, “이렇게이렇게 하며는 사람이 멸도(滅度)를 얻는다. 뭐, 부처님의 지혜를 얻는다.” 이렇게 얘기해 놓은 것은 비록 3승을 얘기했다하더라도 모든 부처님이 얘기한 것은 제외하고. 그 외에 나머지 온~갖, 뭐, 단식을 한다든지. 단식하고 또 뭐합니까? 단전호흡을 한다든지 탄하복기(呑霞服氣)를 한다든지 별··· 요가를 한다든지 요상한 망창한 걸 다 해 가지고 어떠한 방편을 쳐 가지고 설사 마음이 가라앉고 명상의 경지가 높아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뭐에 이르지 못했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지혜의 본원을 갖다가 다시 회복한 것은? 아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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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漸入佛道,,, 信 解 行 證 . 가을햇살 법우님! 정말 수고 많이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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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햇살님,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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漸入佛道.....가을햇살 님! 수고하셨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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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