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모처럼 평소에 가까운 동기생들이 포항에서 모임을 갖자고 연락이와서 설레는 맘으로 약속을 하고 나니 막상 입고 갈 옷이 마땅잖다.
마치 여자들이 외출 때 마다 옷장에 가득찬 옷을 두고 옷 없다고 넋두리 하는 마냥 같아서 나도 픽 웃고 만다.
일년에 봄,가을 두번씩 만나고 있는데 모처럼 얼굴도 보면서 그간의 안부도 서로 묻고 예전 젊은 시절의 추억에 한번 빠져 보는 것도 좋고, 시시껄렁한 살아가는 얘기와 건강, 자식얘기,짧게 또는 길게 군 생활하던 시절을 돌아보며 주어 섬기는 얘기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파안대소와 부끄러움을 동반한 친구들을 만나는 것이다.이제 70고개를 바라보면서 인생을 논하기에는 좀 덜 떨어진것 같은 생각도 들지만 지난 봄에 만났을 때는 포항 청룡회관에서 푸르게 일렁이는 영일만의 밤바다와 맑은 바람과 포항제철의 찬란한 야경을 앞에 펼쳐 두고 중국의 고사를 통달한양 하면서도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고 의기양양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이번에는 주로 골프 라운딩 한번 하자는게 주된 목적이다.따지고 보면 입고갈 옷은 걱정 안해도 되는 자리다.그러나 막상 집을 나서려니 옷이 없다.내가 가지고 있는 옷들은 대개 다 십여년 된 것들로 건강 관리상 20여킬로가 빠진 지금은 막상 입어보니 뭔가 이상하다.
물론 그동안 필요에 따라서 몇벌 사입기도 했으나 골프 라운딩에는 거의 20년이 넘은 현역시절의 옷이기 때문으로 허리통은 주먹 두개가 들어가도 남을 정도다.그리고 이번 포항 방문을 무엇보다 뜻깊게 생각 하는 것은 옛전우들을 만나는 것이다.내가 연대장 할때의 김홍창 주임원사와 나름대로 사업체를 일군 김형대 상사를 근 20년 만에 만나는 걸음이기 때문이다.반가울 것이다.그건 그렇고
그동안 내가 그 만큼 출입을 안 했다는 증거인가보다.그래도 가봐야 하기에 이리 저리 뒤적거려 보다가 옛생각이나서 몇자 추억을 더듬어본다.
어릴적 나는 누님들로 부터 교복 바지를 물려 받은 적이있다.그것도 4대째나 말이다.우리 8남매 형제자매는 거의가 3년터울로 청소년기를 보냈다.그 시절 어느집 할것없이 그랬겠지만 참으로 귀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형님이나 언니의 옷을 물려 입는것은 다반사지만
나는 누님들이 입던 옷을 물려 받은 것이다.그옷의 역사는 지금은 미국에 살고 계시는 나 보다 아홉살이나 많은 세째 형님의 바지였기 때문이다.사연인 적슨 우리집은 여름 농산물인 오이나 가지 혹은 배추등을 차로 실어서 부산 경매장에가서 주로 넘기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오시는데 당시는 아마도 어머님께서 국제시장에서 누른 사-지 군복을 사오셔선 집에서 까맣게 물들려선 아마도 세쩨 형님께 입혀셨던 모양인데 그 미제 사-지 군복은 그야말로 당시엔 최고의 복지로서 잘 다려 놓으면 칼날 같은 주름이 청소년이 아무리 마구 입어도 일주일은 느끈히 제 모습을 유지했기 때문에 세쩨형은 중고등학교동안 잘 우려 먹었을 것이지만 깔끔한 모양으로 큰누님께 대물림에 공을 세웠을 것이다.그것까지야 누가 뭐라나 앞이 터진 부분은 어머님의 미싱질에 어김없이 흔적도없이 제 모습을 감추었을 것이고 누님은 혹시라도 칼날같은 주름이 없어 질라나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잠자는 요 밑에 깔고 자는 걸 내가 봤고 어쩌다 때론 사정이 있어서 다른 사람 요 밑에 신세를 지다가 잘못 된 주름이 생기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책임을 통감케 되는 불운을 당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나도 때론 큰누님께 공을 세울 기회를 읍소 한적도 있지만,언감생심, 얼른도 없다.선머스마는 꿈속에서 하늘을 날고 절벽에서 뛰어 내리는 달콤함에 요 밑에 깔린 여학생 바지가 온전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체중에서 이미 자격 미달이 되는 것이다.이렇게해서 그 바지는 또 한 3년을 큰누님으 사랑을 받다가,드디어 작은 누님께로 3대째 대물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이때 까지만해도 그 바지가 설마 나 한테 까지 올 줄은 내가 단언 하건데 귀신도 아마 몰랐을 것이다. 그동안 6-7년된 바지는 조잡한 염색이 바래져서 두어번의 성형수술과 메이크 업을 받았을 것이고 작은 누님은 아마도 대물림 받는다고 소녀다운 불평도 했을 것이지만 어머님의 약간의 야단과 달렘에 아마도 두 손 들었을께 뻔하다.작은누님도 언니의 전통을 이어 받아 요 밑에 깔고 자기를 3년은 버티었지만 아무리 미제 사-지 바지지만 이젠 어느 정도 낡기도하고 했지만 불평없이 잘도 입었던 것 같다.역시 작은누님은 누구보다 오빠 언니의 체취를 실컷 즐겻던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작은 누님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내가 중학생이되니 어머님이 그 전통의 바지 앞에 숨어 있던 남자옷의 상징을 다시 감쪽(?)같이 복원해 놓으시고 은근히 나를 달래시면서 "봐라, 이제 새것 같이 됐잖아"하시며 까만 물을 새로 들여주시는 것이었다.이러시면 나로선 도저히 볼맨 소리를 할수가없다.
만약에 내가 불평한다면 어떻게 했을까는 지금도 궁금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 바지가 좋았었다.그래도 히프는 아무래도 나에게 맞지 않았었다.
아무리 4대째 대물림이라도 어린 나는 형님과 누님들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지금 생각 해도 난 정말 불평 없었다.이렇게 나는 부모형제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었나 보다. 그러나 아무리 속없이 그랬어도 한2년반 정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 반쯤 됐을땐 옷이 너무 낡고 빛이 바래서 도저히 더는 못입겠다는 생각에 말하면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큰 맘 먹고 "진영라사"에가서 월사금 낼 돈 180원으로 순모루 바지를 맞춰 입고야 말았던 추억이 생각 난다,어느날 내가 새바지를 입고 나타나자 어머니가 왠 바지냐고 물었지만 난 그냥 용돈 모아 샀다고 처음으로 어머니께 거짓말을 했다. 또 처음으로 거금을 허락없이 썼다.당시 월사금이 180원이었는데 그때까지는 매달 초일에 월사금을 냈지만 이 일로 한달 늦춰서 익월초에 내니까 담임선생님의 의혹의 눈길에서 편치 못했던 추억마저도 이젠 아름다운 나만의 역사로 남았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아마도 나에겐 사춘기 였던가보다.
이 글을 보면 어머님도 웃으실라나. 어머님 미안 합니다.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뒤 동생 경옥이 한테는 대물림하지 않았다.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아! 10년된 교복바지 4대로 물려 입어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