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돌아 공방길 지나니 기와집촌이… 서울서 한양을 걷다
북촌에 서면 비로소 조상의 넋이 내게 입혀지는 듯이 기분이 묘하다. 그 야릇한 느낌을 안고 청계천과 종로 윗동네인 유서깊은 북촌을 찬찬히 바라보며 걸었다. 동네에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만큼 상점도 늘고 있어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다. 하지만 북촌의 그윽한 옛모습이 어디나 똑같은 뻔한 상가로 바뀔까 염려도 되었다.
서울 풍수지리의 핵심 명당은 경복궁과 창덕궁이다. 조선왕조 500년 기득권자들의 터전인 북촌은 두 궁의 중간에 자리했다. 지난 1930년대부터 작은 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만든 북촌 한옥 마을에는 ‘ㅁ’자형과 ‘ㄷ’자형 등 중부지방 전통한옥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북촌 1경은 원서동에서 계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서 창덕궁을 보는 경치를 말하는데, 하늘로 뛰어오르고 싶을만치 확 트이고 아름답다. 몇 번이고 하늘로 사과를 던져 내 작품 사진을 찍으며 생의 환희를 외쳐보았다. 그럴만큼 선원전, 규장각, 홍문관, 인정전 등 창덕궁의 전각들로 이뤄진 삼삼한 풍광이 감탄을 자아낸다.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창덕궁이 궁금하다. 계절에 따른 아름다움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 언덕은 갑신정변, 3·1운동 등 한국 근대사가 펼쳐진 역사의 현장이다. 계동에 살았던 여운형도 해방 후 건국준비를 위해 이 언덕을 오갔다. 이곳에서 꿈틀대는 생의 에너지가 강하여 가슴이 먹먹해왔다. 용수산 비원점 뒤쪽 시인 박인환이 살던 집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목마와 숙녀’의 ‘술잔에 별이 떨어진다’라는 시구를 떠올렸다. 샤갈이나 마그리트의 그림 같은 초현실적 이미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죽 이어진 창덕궁 돌담길, 고풍스러운 살롱 마고 앞에 나는 잠시 멈춰섰다. 2007년, 김지하 시인이 서구 문예부흥운동의 기반이 된 살롱 문화를 세우겠단 뜻으로 열었으나 현재는 원불교 재단인 은덕문화원에서 문화 사랑방으로 운영하는 카페로 바뀌었는데, 왠지 이곳 주변 카페들은 20~30년 전 시계가 멈춰서 있는 듯이 향수를 자극한다. 마침 내시나 궁녀가 늙고 병들면 떠났던 요금문(曜金門)이 눈에 띄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였고, 동방예의지국이었으나 신분차별이 심해 천민들에게는 더없이 슬픈 나라였음을 기억하게 하는 문이다. 갑자기 요금문 앞에서 내 가슴이 몹시 술렁거렸다. 이곳에서 수많은 궁궐 사람들 사연들이 가슴 속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듯했다.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나는 그만 두려워져서 얼른 빠져나오려는데 궁궐 담장 아래 개인 집이 붙어있어 이게 뭔가 했다. 세계문화유산 담장을 사유화하도록 유산관리가 소홀한 것이었다. 정부는 뭐하는지 답답한 심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북촌2경은 ‘메종 드 이네스(masion de Ines)’ 오른쪽 원서동 공방길로 왕실 일을 맡은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다. 연(鳶) 공방, 한지 공방 등 전통공방이 있고 마지막 주방 상궁의 맥을 이은 궁중음식연구원 또한 이 길 위에 있다. 상궁이 궁에서 나온 뒤 거처로 삼았다 전해지는 백홍범 집은 ‘한샘DBEW디자인센터’의 바깥만 볼 수 있었다. 또한 이곳은 장희빈 집터였다는 설도 있다. 이렇게 원서동공방길은 오른쪽에 있고, 왼쪽에는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 화백집(붉은 벽돌집)이 있다. 원서동의 이곳은 아주 고요해서 아무리 새 시대가 열려도 세월에 지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이게 무얼까 하며 나는 두리번거렸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흩뜨리지 않았다. 마당에 쌓인 낙엽도 바람이 닿는 울림 그대로 음악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길 끝 창덕궁 담 아래에 빨래터가 있었다. 궁에서 흘러온 물로 백성이 빨래를 했던 터로 대리석 계단이 좀 우스꽝스럽고 어색했다. 신윤복의 ‘단오풍정’에서처럼 아이들에게는 몰래 아낙네들의 몸씻는 모습을 훔쳐보거나 물고기 잡는 놀이터요, 어른들에게는 서로의 정보와 소식을 나누는 아고라와 같은 장소이다. 이 빨래터를 더 정겹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북촌 물길로 복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마을 정류소 이름도 ‘세탁소’ ‘빨래터’인 동네이니까. 이발소와 세탁소, 복덕방, 한복집 이름 그대로 오래전 일상을 품은 순정함이 시골스러웠다. 아니 참으로 사랑스러워서 미소를 짓고는 금세 떠나기가 어려웠다.
북촌 3경은 가회동 11번지 일대다. ‘기쁘고 즐거운 모임’이라는 의미의 가회(嘉會)라는 이름처럼 그윽한 예스러움의 향기 속에 밝고 활기차다. 이곳에는 전통문화공방이 모여있다. 북촌 4경은 가회동 31번지 일대의 수많은 기와집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가회박물관과 전통 공방들이 자리한 북촌은 외국인들에게 한국 고유 문화를 널리 알리는 중요 코스다.
북촌 5경은 아래에서 위로, 6경은 위에서 아래로 보는 기와집 풍경이 백미다. 이곳에서는 먹구름이나 눈보라도 회색 기와집들과 어울려 한 장 수묵화처럼 그윽한 운치로 빛나리라. 5경 골목 중간쯤에 ‘꼭두랑 한옥’집이 있어 나는 아기자기한 마당정경을 눈에 담았다.
서울 북촌길에서 제사장처럼 풍요를 기원하며 창덕궁을 배경으로 사과를 던져 사진을 찍었다. 신현림 촬영
서태지가 다녔고, 내 딸도 다녔던 119년 된 재동초등학교를 지나 좌회전하면 계동길이 펼쳐진다. 현대사옥과 북촌문화센터 사잇길 초입부터 중앙고등학교 자리까지가 계동길이다. 현대사옥 뒤에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깊이 새겨져 있다. 외교문서를 관장했던 승문원터부터 세종 때 만든 천문관측대인 관천대, 갑신정변 때 고종이 피신한 계동궁터 표지판이 있다. 표지판으로나마 그 시대를 그려본다. 당대의 슬픔과 우왕좌왕하던 혼란을. 기록되지 않는 건 그냥 사라질 뿐이라 생각하니 거친 골판지를 만질 때처럼 슬펐다. 북촌문화센터는 1921년 대궐목수가 비원의 연경당을 본떠 지은 한옥으로 건축적인 가치도 크다. 이곳에서 파는 전통공예품들을 보며 사고 싶다는 심정이 들만치 물건들이 예뻤다. 나는 현대사옥 계동길 화동옥에서 설렁탕을 먹고, 게스트하우스에서 묵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공드리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만 했지, 이 길을 꼼꼼히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아니 6∼7년 전에 TV 프로그램 ‘북촌기행’의 출연자로 지날 때보다 더 잘 다듬어져 놀랐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이자 일제강점기 때 대표 소설가 채만식이 다닌 중앙고등학교와 함께 이곳은 조선구한말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덕분인지, 많은 외국인들이 오가는 국제적인 관광 마을이 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빈민구휼의료기관인 제생원이 있어 조선시대에는 제생동이라 불렸다. 그렇게 부르다 줄여져 계동이란 이름이 된 지 100년 되었다. 이 길에서 1975년부터 대구 참기름집을 운영하는 주인장 서정식 씨는 손님이 인정해 주고, 찾아주는 보람을 느낀다며 “여기서 쫓겨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란 말을 했다. 그만큼 계동길도 개발의 태풍을 맞고 있다. 오래된 목욕탕인 중앙탕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안경집으로 바뀌고, 수선집도 이사간다. 북촌에서 전통 흑백사진관을 운영하는 주인 김현식 씨는 조선시대 초상화의 맥을 흑백사진을 통해 찾고 싶다는 꿈을 가졌다. 키낮은 가게와 작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계동길을 걷다보면 잃어버린 꿈 한조각을 보는 듯하다. 밤에는 은하수가 흐를까 싶어 하늘을 쿡 찔러보았다.
나는 우리 궁궐 중에서 창덕궁이 제일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는 당연하다. 조선시대 르네상스라 할 수 있는 영·정조의 흔적이 가득하다. 신분제도의 한계를 깊이 느끼고 노비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려 애쓴 왕들이기도 했다. 그 어느 왕들보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을 잘 활용했다. 지난해 달빛기행에서 본 창덕궁 밤풍경은 세계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자신할 수 있다. 스페인 알람브라 궁전보다 더 괜찮으면 괜찮았지 빠지지 않는다.
정조대왕 때 정다산은 “조선사람은 조선의 것으로 시를 쓴다”라는 조선시 선언을 하고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풍미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 김홍도가 그린 ‘수원능행도’에서 보는 당대 모습과 우리는 얼마나 먼가. 그나마 서울에서 북촌, 서촌만이 조선의 흔적이라고 만족하기엔 그래도 아쉽다. 역사교육이 대단한 게 아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의 풍경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잘 지키면 아이들은 보고 캐물으며 공부하게 된다. 우리는 풍경을 닮는다. 풍경은 우리가 얼마나 정직하고 아름답게 살고 지켜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것이 원서동에서 본 세월에 지지 않는 힘이리라. 망각에 지지 않는 힘. /시인·사진작가 신현림이 본 서울 북촌 ㉻ 2014-11-21
조선초부터 자리잡은 660세 백송 ‘북촌 명소’가 된 가회
△북촌 1경=
창덕궁을 멀리서 한눈에 볼 수 있는 장소를 이른다. 조선 태종 이방원이 경복궁을 지은 지 10년 후에 동생을 죽인 곳에서 살기 싫다며 창덕궁을 건설했다. 정조는 빼어난 정원인 창덕궁 후원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세력을 키우며 신하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북촌 2경=
요금문.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다.
△빨래터=
지금도 맑은 물이 흘러나온다. 문틈으로 나무와 숲,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어우러진 비경이 보인다.
△고희동집=
한국 최초 서양화가의 집이다. 이 집은 1918년 서양과 일본 집의 장점을 한옥에 적용한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지녔다.
△시인 박인환 집터=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 시인이 살던 집의 현재 모습을 볼 수 있다.
△660세 백송, 제중원 터 헌법재판소=
이 백송은 조선왕조가 터를 잡을 무렵 중국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갑신정변 때 대역죄로 처형된 홍영식의 집이 광혜원이 됐고, 12일 만에 제중원으로 바뀌었다. 병이 나면 주술을 걸고 굿을 했던 조선인들에게 이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신통한 곳이었다.
△계동길=
39년째 우리 옛 풍경을 이어오고 있는 고마운 대구 참기름가게가 이 길에 있다.
△계동길 만해당 =
불교잡지 ‘유심’을 발행했던 곳으로, 만해 한용운 시인이 3년간 이곳에 살며 3·1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주인의 정성이 밴 아담한 마당이 인상 깊었다. 나도 어느 하루 숙박을 하고 싶어졌다.
△계동길 석정보름우물터=
보름(15일) 간격으로 맑고 흐린 물이 반복되는 우물.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인근 궁녀들도 목을 축이며 아들 탄생을 기원했다.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인 주문모 신부와 김대건 신부가 신자들에게 세례 줄 때 이 우물물을 썼다고 한다.
△계동길 끝 중앙고=
3·1운동의 발원지, 독립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집터란 사실보다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더 유명하다.
△북촌 가회동 성당=
북촌의 명소로 자리잡은 성당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 2시면 주임 신부께서 커피를 끓여주신다. 그가 끓여주는 커피 맛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맛 중 하나였다.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구 공간 사옥)=
우리나라 현대건축 1세대인 고 김수근 선생이 창립한 건축사사무소 공간의 사옥으로, 올해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미술관으로 재탄생했다.
△원서공원=
현대그룹은 이 공원을 주민에게 돌려주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여준 고마운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