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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들.어.손.님.맞.는.부.산.영.도.다.리 | ||||||||||||||||||||||||||||||||||||||||||||||||||||||||||||||||||||||||||||||||||||||||||||||||||||||||||||||||||||||||||||||||||||||||||||||||||||||||||||||||||||||||||||||||||||||||||||||||||||||||||||||||
대한민국의 명소가 되었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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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는 214m 63㎝ , 폭 18.3m, 1934년 준공
부산하면 영도대교를 떠올릴 만큼 이 다리는 부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명물로 군림해 왔다. 다리를 놓기 전에는 도선을 이용해 왕래하였으나 부산 시세가 발전함에 따라 그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일본강점기 때인 1931년 3월부터 1934년 11월까지 3년여에 걸쳐 공사하여 완공되었다.
총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70만 8천 원이었는데 이때 노무자 한 사람이 하루에 받는 평균 일당이 91전이라 하니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400억 원 내외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공사는 시작부터 한국인들의 수난이 점철되었다. 현재 영선초등학교와 남항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산을 깎아 영도대교 호안 매립공사를 하면서 산이 무너져 많은 한국인과 중국인 노무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다리공사 때에도 희생자가 속출하여 밤이 되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을 정도였다고 한다.
과연 이 다리가 들어 올려 질 수 있느냐로 언론에까지 여론화되었던 움직이는 마법의 다리는 하루 2번씩 하늘로 치솟으면서 영도의 발전을 가속시켰다. 이 다리는 80도까지 들어 올려 졌으며, 고속일 때는 1분 30초, 저속일 때는 4분이 걸렸다 한다. 개통 당시의 공식 이름은 '부산대교'였다. 부산 방향으로 31.3m를 들어 올려 1,000t급의 기선이 지나가도록 건설됐으며, 당시 가설 공사로서는 매우 어렵고 큰 공사였다.
한국전쟁의 포향(砲響)이 귓전에 남아 있던 1953년 나온 노래다. '금순아 보고 싶구나/고향 꿈도 그리워진다/영도다리 난간 위엔/초승달만 외로이 떴네' .... 기약 없던 피난시절 영도다리는 용두산과 더불어 때론 위안을, 때론 절망을 안겨 준 만남과 흩어짐의 장소였다.
이처럼 국민의 애환이 담긴 영도다리는 옛 부산시청 자리에 제2롯데월드가 착공되면서 재건축에 들어가 왕복 4차선인 다리를 6차선으로 늘리면서 옛 모습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영도대교가 개설되어 옛날의 정취는 사라졌지만 자갈치 시장을 비롯하여 영도 항은 여전히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때 그 갈매기들의 후손들이 쉼 없이 창공을 가르며 영도 앞바다의 터줏대감이 되고 있다. 영도다리 이상으로 명소가 된 자갈치에는 오늘도 연탄불에 구워주는 꼼장어가 고래고기와 함께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기자가 좋아하는 감자가 들어간 돼지껍데기를 비롯해 생선어묵도 서민들의 막걸리 안주로 인기가 그만이다.
바다에 사는 종류는 다 있다는 자갈치 시장, 구수한 사투리에 인심 좋고 친절함이 관광객을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싱싱한 횟감을 골라 먹을 수 있는 회센터를 비롯한 건어물 도매거리 젓갈도매거리, 어시장 거리, 생필품 거리, 식당가 등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 있다. 국내산만 취급하여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3대 부산 꼼장어 집에서 꼼장어와 소주 한잔하고 맞은편에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 한잔을 마셨다. 이 카페의 사장님은 2005년 세계정신지체수영선수권(체코)에서 금·은·동메달 하나씩을 딴 ‘스타’로 2009년 세계지적장애인수영선수권 배영 200m 금메달을 대한민국 국민에게 안겨 주면서 많은 국민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던 주인공 김진호 씨가 은퇴 후 어머니(유현경)와 함께 운영하는 카페였다. 수영선수 김진호 씨를 있게 한 것은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자폐증을 앓고 있지만, 그러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준 어머니가 있었기에 훌륭한 수영선수가 탄생할 수 있었다. 만약, 어머니마저 김진호 씨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현재 김진호 씨는 김연아 선수와 함께 평창 동계스폐셜올림픽 홍보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만 자신이 명소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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