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은 늘 사건을 복잡하게 만들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가 하면 그 속에 반전을 숨겨 놓아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은 그런 고전적 재미를 넘어 사회성 강한 메시지를 저변에 깔아두었다.
그 덕분에 사건을 따라가는 중에도 그의 숨겨둔 메시지를 곰곰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아마도 이 소설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어느 사회에서나 청소년 범죄는 흔히 일어난다. 그러나 범죄자들이 잡히고 그것이 뉴스에서 사라지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금방 잊는다.
그것은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그 다음부터다.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은 소년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도 갱생의 여지를 감안해서 그 죄를 가볍게 다룬다. 살인을 했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이름도 공개되지 않고 절대 사형을 당하는 일도 없다.
소년법은 질풍노도 시기의 청소년들은 사리판단이 미숙하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이라는 전제 아래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다. 소년법은 청소년의 보호 또는 갱생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피해자의 슬픔이나 억울함은 반영되지 않으며 실상은 무시된다.
피해자 가족은 치유를 포함해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보호되는 일이 없다. 그저 한동안 주변에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말고는 가족들끼리 평생 그 아픔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분명 법이 가진 한계이자 모순일 것이다.
경찰은 사람보다 법을 우선한다. 그것이 치안유지라 그들은 믿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년법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법률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 시기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것이 법률이다.
그럴 때마다 경찰은 새로운 법률로 무장한 칼날을 번뜩인다. 칼날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분명 부조리한 일이다. 이 소설은 바로 이런 모순적인 사실을 핵심 모티브로 삼고 있다.
소설은 학교를 중퇴하고 할 일 없이 지내는 청소년 세 명이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성폭행을 놀이처럼 즐긴다. 그런 과정에서 일면식도 없는 어린 여자 중학생을 납치했고, 성폭행하는 과정에서 약물 과다 투여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사건을 은폐하려했지만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피해자의 아버지 나가미네는 전단지를 뿌리고 범인 제보를 기다린다. 그 동안은 그는 수시로 솟구치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범행에 가담한 한 명으로부터 사건 현장 제보를 받는다.
사건 현장 아파트로 잠입한 그는 딸이 잔혹하게 성폭행을 당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담은 테이프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마침 아파트로 돌아오는 집주인이자 범인인 아쓰야를 무자비하게 칼로 난도질을 한다. 결국 아버지 나가미네는 또 다른 범죄자가 된다.
그때부터 달아난 딸 살해범 스가노를 추적하는 나가미네와, 나가미네로 인해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려는 세 명의 범죄자 가운데 한 명인 마코토, 그리고 달아난 스가노를 추적하는 경찰과 나가마네를 추적하는 또 다른 경찰들이 한데 엉겨 긴장감을 더해간다.
나가미네는 자기가 범인을 추적하는 것은 가정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에 대해 범인도 자기처럼 증오와 슬픔을 느껴야 하다는 생각에서다. 이대로 경찰이 범인을 검거하도록 놔두면 범인은 소년법에 의해 적당한 처벌을 받고 말 것이다. 그건 억울한 일이 분명하다.
그러나 법은 냉정하다. 그것을 허용할리 없다. 법은 그도 그냥 범인일 뿐이다. 범인의 죄를 다스리는 것은 재판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지 일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법을 지키는 것은 경찰의 일이므로 나가미네의 모든 행동은 경찰에 의해 제지되는 것이다.
오히려 나가미네의 엽총 소지 때문에 경찰은 범죄자를 보호하는 데 신경을 쓴다. 끝내는 나가미네가 범인 스가노에게 엽총의 방아쇠를 당기지만 경찰의 총에 맞아 범인을 빗나가고 오히려 나가미네가 숨을 거두고 만다.
결국 경찰은 범죄자를 보호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범죄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범죄자는 보호받아서는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청소년의 일탈에 의한 범죄로 한 가정이 송두리째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제 범인은 재판 과정을 통해서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간단히 처리될 것이다. 갱생은 청소년 범죄자에게는 요술방망이 같은 것이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보다 억울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청소년 범죄자들은 갱생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된다.
갱생이 이루어져야 속죄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만약 범인들이 속죄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나 법은 그저 갱생만이 답이라고 단정한다. 갱생을 통해 속죄를 한다면 그 다음은 어찌 되는가. 그가 속죄하면 피해자의 피해는 원상회복이 되는 건가.
피해자는 그가 속죄를 한다고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도대체 그들이 반성하고 속죄하고 하는 것이 이들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왜 그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데 피해자의 가족이 희생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현실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소설은 의외로 묵직하게 다가온다. 소년 범죄에 대해 사회에서 이렇게 진지하게 성찰을 한 적은 있는가 모르겠다. 우리는 쉽게 놀라고 쉽게 잊는다. 청소년 범죄는 그러므로 늘 우리 가까이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모른 척한다.
우리 법에도 소년법은 사춘기 청소년의 범죄는 갱생의 기회를 주자는 취지로 만든 법이다. 촉법소년은 ‘형사책임능력이 없기 때문에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형사 처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외성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조직적 학교폭력이나 성폭력, 패륜적이거나 반사회적 범죄 등 강력 범죄를 저질러도 촉법소년이면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니 청소년들이 강력범죄를 저지르고 잡혀도 “나는 만 14세 미만이라 감옥에 안 가요”라며 비웃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니 청소년들의 일탈을 가벼이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오죽했으면 국민청원 게시판에 소년법을 없애라는 요구를 하고 있을까 싶다. 정말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한지 의문이다. 이 소설은 그런 의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