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4:18 <어부들을 부르시다(막 1:16-20; 눅 5:1-11)>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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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아포 토테) - 본서에 세 번 발견되는(16:21;26:16) 이 용어는(눅 16:16) '특별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예수 생애의 주요한 전환점을 이루고 있다. 예수는 (전에 유대에서 활동하셨지만) 갈릴리에서 본격적이고도 지속적인 그의 공적사역을 이제 드디어 시작하신 것이다.
전파하여(케륏세인) - 이 용어는 본래 전령자, 또는 선구자(케류스)의 역할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전파하다', '선언하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것은 어떠한 지식에 대한 설득, 토론이나 또한 어떤 유(類)의 논쟁이나 공격을 허용하는 이론 전개가 아니다. 이것은 도래하는 천국에 대한 일방적인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명하시는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지체없이 전하는 것이다. 한편, 말씀(로고스)과 진리(알레데이아, 요 14:6)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의 '전령자'(케류스)가 되셔서 전파하심으로 세례 요한의 그것(3:1)과는 달리 그 가르치시는 것이 더욱 권세를 지니게 되었다(17:29).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 요한의 선포(3:2)와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의 선포 내용이 구약적 맥락과 관련하여(사 40:3) 자신이 메시야와 그의 왕국에 대한 선구자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임에(3:2-12) 비하여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바로 메시야로서 이방의 갈릴리에 큰 빛을 비출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사 9:1,2)의 성취라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Schweizer)는 점에서 그 내용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부언하자면, 요한의 '가까이 온' 천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에 그친 반면에 예수의 천국은 자신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깃들어 있고(Auto Basileia, Origen), 그의 인격이 곧 실현된 왕국(C. H. Dodd)이며, 그의 메시지와 행동이 곧 생동하는 신국의 표징(M. Dibelius)이라는 측면에서 '가까이 왔고'(엥기켄), 또 죄와 죽음의 사슬을 끊고 인류에게 진정한 구원과 천국 기쁨을 허락하사 당신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이 이제 곧 전개될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작되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은 모세가 약속된 땅에 들어가지못한 것처럼 그는 천국의 실체를 단순히 소개하고 전파하는 역할만을 수행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여 그 백성들을 축복의 땅으로 인도한 것처럼 갈릴리 전지역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대하여 천국의 실체를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는 요한의 천국 선포를 인계하여 백성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편만(遍滿)해 있던 사단의 왕국을 친히 물리치시고(11절), 또한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각종 이적을 행하시는 가운데 사단의 세력을 정복해 가심으로써(눅 10"17-20) 이 땅에 천국이 현재적으로 도래했음을 나타내 보이셨다. 물론 이러한 현재적 천국은 죽음(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 땅에 생명의 축복을 부여하신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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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해변 - 구약 성경에서는 '수금'이란 뜻의 '긴네렛' 바다(민 34:11;수 13:27)로 불리웠는데(수 12:3에는 '긴네롯 바다') 그것은 아마 이 호수의 모양이 수금(竪琴)과 비슷하기 때문이거나 또는 북서쪽 해안에 위치한 성읍(신 3:17;수 11:2;19:35;왕상 15:20)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바벧론 포로 귀환 후에 '게네사렛 호수'(참조, 14:34;막 6:53;눅 5:1)로 불리웠으며, 신약 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또는 헤롯이 남서쪽 해안에 건설한 도시 이름(요 6:1;21:1)을 따라 '디베랴 바다'로 불리웠다. 히브리어에서의 '바다'(얌)라는 말과 헬라어예서의'바다'( 달라싸)가 독일어(See)와 같이 '호수'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곳은 다른 바다보다 염분 정도가 5배(25%)가 되는 남쪽의 사해와는 달리 담수호로서 남북이 14마일(20km), 동서가 가장 폭이 넓은 곳이 9마일(12km)이며 해수면보다 보통 212m나 낮아 헤르몬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태풍이 풍랑을 자주 일으킨다(마 8:24;14:24;막 4:37;6:48;눅 8:23;요 6:18). 또한 이곳은 어족(魚族)이 풍부하여 어업이 번창하였고 그 해안에는 예수의 전도활동이 주요한 배경이 된 성읍들(마 4:13;11:20;요 6:23)이 위치해 있었다.
베드로라 하는 시몬 - '베드로'라는 헬라어 이름은 '반석'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님의 역사적 예견의 방법에 의해서 주어진 이름이다(10:2;16:18;막 3:16;눅 6:14). 이에 대한 아람어 동의어인 게바(반석)가 당시에 이미 널리 사용되던 이름이지만(Best, Wilson) 예수께서 시몬에게 붙여 주심으로 그의 신분과 미래의 가능성을 통찰하고 계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케 한다. 시몬은 히브리어 이름으로 '들음'을 의미하며 베드로의 본명(本名)이다.
안드레- 이 이름은 순수한 헬라이름으로서 '남자다움'을 뜻한다.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요 1:40) 예수께서 메시야이신 것을 확신하고 자기 형제인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최초의 선교사란 칭호를 받았다. 또한 그는 이웃을 돕는데 신속하게(요 6:8, 9;12:21, 22) 그리고 은밀하게 선(善)을 행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후에 그는 아가야(Achaia)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물 던지는 것 - '그물'(암피블레스트론)이란 용어는 신약성경에는 단한 번 밖에 안 나오는 단어로서 둥근 모양의 투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물'의 보다 포괄적인 용어 '따튀아'('그물들', 4:20)와 '사게네' ('그물', 13:47)등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본문에 제시된 '그물을 던지는 것'이란 '그물을 어깨 위로 돌리며 던진다'는 의미로 동작이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용어로 보는 것이 좋다. 이는 결국 주님께서는 그들이 생업에 바쁘게 전념하고 있을 때 제자로 택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한편 본 기사는 눅 5:1-11의 내용과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즉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는 것을 보신 것으로 묘사한(눅 5:2) 반면에 본절에서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18절)과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1절). 이 같은 차이점이 두 기사가 각기 다른 전승(傳承)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이점은 (1) 공관 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서 엄격하게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한 사건이 드러내고 있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그 사건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하고 적재 적소(適材適所)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2) 또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 내지는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동일 사건을 묘사하는데 세부 내용상 차이점이 생기는 것이다. 마태는 누가와 동일한 사건을 다루되 동일한 방법으로 기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본문의 '다니시다가'라는 말에서 한층 명백해진다. 독자들은 본 사건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 건설의 현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처럼 예수를 믿는다면서 골방에나 기도원에 앉아만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스스로 일할 것을 찾아 적극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위한 위대한 소명을 맡기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