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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마을 주민 및 가옥
풍수지리(風水地理)적 지형(地形) |
풍산류씨(豊山柳氏)의 입향(入鄕)에 관한 전설(傳說)
풍산류씨(豊山柳氏)는 본래 풍산 상리에 살았으므로 본향(本鄕)이 풍산(豊山)이지만, 제7세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공이 화산에 여러 번(가뭄, 홍수, 평상시) 올라가서 물의 흐름이나 산세며 기후조건 등을 몸소 관찰한 후에 이곳으로 터를 결정했다고 한다.
입향에 관하여「나눔」의 전설이 있는데, 집을 건축하려 하였으나 기둥이 3번이나 넘어져 크게 낭패를 당하던 중 꿈에 신령이 현몽하기를 여기에 터를 얻으려면 3년 동안 활만인(活萬人)을 하라는 계시를 받고 큰 고개 밖에다 초막을 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음식과 노자 및 짚신을 나누어주기도 하고, 참외를 심어 인근에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수많은 사람에게 활인(活人)을 하고서야 하회마을에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입향 후 풍산류씨들은 계속된 후손들의 중앙관계에의 진출로 점점 성장하였으며,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귀촌(龜村) 류경심(柳景深),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 등의 조선중기에 배출한 명신들로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류성룡 형님의 집 전경
서애 류성룡선생의 집(충효당)
류성룡(柳成龍, 1542년 ~ 1607년 음력 5월 6일)은 조선 중기의 관료,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의성 출신이며, 간성군수 유작(柳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 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과 원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이들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책임자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 중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경상북도 출신.
류성룡 형님 집안의 모습
양진당
사랑채
마당과 마루의 높이가 사뭇 높다.
양반네들이 여봐라~~~ 하면 하인은 자연스럽게 마당에서 올려다 봐야 한다.
계급이 높을수록 계단의 높이도 높다고 한다.
부인이 거철하는 안채인데 사랑채와는 별도의 문이 달려 있다.
삼신당
하회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하회마을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
무료이긴한데 15분에 한번씩 운행하므로...불편함도 없잖아 있다.
하회 탈박물관
12월 안동답사에 탈박물관이 있어서 나는 탈춤공연은 생략하고 탈박물관에 갔다.
세계적인 탈을 모아놓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2,000원 내고 들어간거에 비하여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한다.
없어도 될 박물관이었다.
부용대
경북 안동의 하회(河回) 마을에는 강을 바라보면서 건너편에 둥근 바위산이 솟아있다. 이 바위산을 부용대(芙蓉臺)라 하는데 바로 연꽃 봉오리 모양을 한 동산이기 때문이다. 둥근 봉우리가 잔잔한 강물에 어리면 또 하나의 연꽃이 물 속에 잠겨 그윽한 정취를 자아낸다. 옛 선비들의 뛰어난 심미안으로 본 자연미라 할 수 있다.
드디어 오늘의 답사가 모두 끝났다.
집에서 6시 30분에 택시를 타고 서초초등학교에 도착하여 7시 30분에 안동으로 출발...
병산서원, 하회마을 그리고 탈박물관과 부용대까지........참으로 긴 여정이었다.
하회마을과 탈박물관, 부용대는 생각한것처럼 그리 대단한것은 아닌듯 싶었다.
그래도 한가지 참으로 힘들게 옛것을 잘 지켜왔다는 그 정신은 높이 사고 싶다.
하회마을은 관광지이기는 하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관광지가 아닙니다. 하회마을은 자연마을입니다. 약 600 여 년간 대대로 주민이 생활의 터전으로 살아온 마을입니다. 현재에도 150여 호가 하회마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가는 마을 본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기 위하여 1984년 중요 민속자료로 지정하여 한국 고유의 전통마을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하회마을이 국가의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후 주민은 생활에 큰 불편과 제약을 겪고 있습니다. 마을의 원형을 보존 해야 하기 때문에 사유 재산임에도 증축이나 개축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회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건축물과 그것에 담겨 있는 모든 부분까지도 원형보존을 희망하고 있는데 반하여, 현지 주민들은 능률적인 물질문명사회의 각종 도구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냉장고, 경운기, 자동차, 전기밥솥....). 일부 관광객은 주방에 있는 산뜻한 부엌가구를 보고서 “도시 아파트와 다름없다”고 불평하고 “가마솥은 전기 밥솥에 밀려 장식품이나 다름이 없어졌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러나 주민들은 지금 나무로 불을 지피고 가마솥에 밥을 해 먹을 수 없는 현실이지요.
하회마을에 대하여 위와 같이 얘기한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