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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연법동기회
 
 
 
카페 게시글
▣여행 스크랩 보령 오서산
현림 추천 0 조회 85 13.04.26 07: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보령 오서산(烏棲山)

 

3월의 마지막 휴일. 지난 주 거제도의 망상 장사도의 기행은 흐린 날씨 탓으로 별로였다.

그래서 서해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에는 아예 섬이 없는 서산의 팔봉산으로 갈까, 아니면 황금산으로 갈까 하다가

보령의 오서산으로 방향을 정했다.

오서산은 해발 790m로 서해안의 산 치고는 거리 낮은 산은 아니다.

그러나 앞의 두 곳은 이미 일전에 다녀온 곳이기도 하고

또 오서산의 산행코스를 보니 그리 힘들 것 같지가 않아 마음이 동했다.

 

 

 이른 아침 서해대교 휴게소에 닿으니 자욱한 운무 속에 해가 솟았다. 황홀한 빛에 매료되어 먼 발치에서나 담아 보았다.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면 좋았으려만..운무 속 아련히 떠 있는 서해대교가 그래도 운치가 있다.

 

 

 

홍천 휴게소에 닿았는데도 여전히 운무가 그치지 않았다.

오늘 날씨도 지난번 망산 갈때와 같은 날씨가 아니 되길 바라며 다시 길을 떠났다.

 

 

보령시를 벗어나 목적지의 주차장에 들어섰다. 주자창이 넓어서 좋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가 차량은 많지 않았다. 초행이라 처음 중담 주차장에 들렸다 텅 비어 있기에 더 올라왔더니 삼담 주차장이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 주차장인 모양이다. 산행은 여기서 부터다. 산꾼들이 하나둘 눈에 보이다.

 

 

봄 밭갈이가 시작되나 보다. 푸릇푸릇한 들녘의 빛이 봄의 정취를 자아낸다.

 

 

터밭을 가꾸는 한가한 농촌의 일상도 엿보고...

 

이제 마을을 벗어나 서서히 등로로 접어든다. 오소산 등로를 보니 여러개가 있었다. 난 정암사 쪽으로 정했다.

계단이 길고 다소 가파르다고 들었지만 돌아갈 시간을 감안하여 짧은코스라 여기를 택했다.

 

 

 

(정암사 극락전)

정암사는 백제 성왕5년 담욱(曇旭)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불기(佛紀) 2532년 충남 전통사찰 제 68호로 지정되어 있다. <여시도서><신증동국여지승람>의 결성현 「사찰조」와 「산천조」에 소개되어 있으며 이이-송시열- 권상하로 이어지는 기호성리학의 거두 남당 한원진의 학처(學處)이기도 하다.

 

불기 2556년 석탄일에 주지 장보정이 적묵당을 이전한 자리에 탑을 조성하고

스리랑카로부터 진신사리 5과를 모셔와 봉안했다는 정암사의 사리탑.

 

 

입구에 선 종루. 해탈문과 일주문을 겸했다.

 

 

지난 밤에 눈이 내린 모양이다. 등로 곳곳이 눈이 쌓여있다. 이제부터 지루한 계단이 이어지나 보다.

 

 

등로 5부능선 쯤 마련된 전망대에 오르니 멀리 장곡저수지가 내려 보인다.

서해안의 등대산이라 불리지만 서해안 섬조망은 너무 멀어서 가시거리를 벗어나 있다.

 

밤새 내린 눈이 그늘진 곳은 이렇게 쌓여있었다.

 

 

 

 

 

 

 

 

 

 

 

 

 

 

 

 

 

 

 

 

 

 

 

 

 

오서산에는 2개의 정상석이 있다. 위 정상석은 능선의 정상석으로 진짜 정상석은 조금더 올라가야 있다.

 

 

오서산(烏棲山)은 글자 그대로 까마귀가 머무는 산이라는 뜻인데 오서산(烏棲山)의 <오(烏)>는 삼족오를 뜻한다고 한다. 삼족오(三足烏)는 세발달린 까마귀로 태양 안에 살면서 천상의 신(神)들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신성한 새〔神鳥〕로 알려져 있다. 태양의 사자로 알려져 있는 삼족오는 고대 동아시아의 태양숭배사상과 관련이 깊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다. 삼족오는 광명숭배의 원 뿌리로서, 동아시아의 천자국이었던 배달-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의 상징이 되고 있는 신화 속의 새이다.

 

 

고구려의 건국과정을 그린 드라마〈주몽〉을 보면 동부여의 신녀(神女) 여미을에게 ‘삼족오’가 나타나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불새라고 불리는 이 삼족오는 주몽의 고구려 건국신화에 이어 그의 아들 온조가 세운 백제에도 전승된 것은 당연한 일이였을 것이다. 그래서 태양 산악숭배를 했던 백제인들의 신앙처로서 당나라 지리서 <한원>의 <백제전>에 계룡산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국가에서 천제(天祭)를 올렸던 곳이며 또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한 후에는 백제부흥 운동의 거점이 되기도 했었고,

조선시대에는 오성산(烏聖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산이다.

 

 

 

제철은 아니지만 오서산의 억새들이 무성하다. 제철이라면 멋지겠다. 

 

 

 

 

 저멀리 내원암이 보인다. 마지막코스로 저기를 들린후 하산할 계획이다.

도산리 쪽인 모양이다. 홍동저수지가 내려보이고 우측 보이는 바위가 쉰질바위다.

정상이 보인다. 

 

 

 

오서산 정상풍경이다. 

 

 

이제 내원암을 거쳐 하산할 일만 남았다.

 

입구에서 올려다 본 내원암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은 낙옆이 덮힌 급경사다. 더구나 어제 내린 눈으로 등로는 미끄러웠다. 내원암은 부처가 사바셰계에 하강전에 머물던 가장 은밀하며 아름다운 곳이다.

그 이름을 딴 내원암이라 무언가 독특한 것이 있을 줄 알았는 데..

누렁이 한마리 어스렁 거릴뿐 인적도 없다.

 

내원암의 극락보전이다. 돌담이 눈길을 끈다.

옛전각은 아닌 것 같은데 단청을 하지 않아 오히려 고태가 풍긴다. 

내원암 뜰앞의 전경이다. 앙상한 고송의가지,  그 넘어 하늘 향기를 느껴본다. 

백제부흥운동가 복신이 숨었다 처형되었다는 복신굴이 있는 쉰질바위다.

 

백제부흥운동과 쉰질바위에 얽힌 복신의 이야기 

660년(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이 수도인 (泗?城:지금의 부여)을 공격하자 의자왕과 태자를 비롯한 왕족들은 웅진성(熊津城:지금의 공주)으로 피난했다가 곧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다.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과 4명의 왕자, 88명의 대신·장사(將士) 및 1만 2,00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당은 백제 땅에 5도독부(五都督府)와 7주(七州)를 설치해 직접 지배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백제유민의 저항과 함께 신라와의 충돌로 인해 계획으로만 끝났다.

 

 

백제는 비록 수도가 함락되었지만 지방의 많은 성(城)에서는 저항을 계속했고, 당군의 노략질이 시작되면서 더욱 격렬해졌다. 그중 두드러진 활동을 한 사람으로는 임존성(任存城:지금의 대흥)의 흑치상지(黑齒常之)를 비롯해 복신(福信)·도침(道琛)·부여풍(扶餘豊) 등이 있다.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흑치상지는 부하 10여 명과 함께 임존성을 거점으로 10일 만에 3만의 병력을 모아

소정방이 보낸 당군을 격퇴하자 지방의 200여 성이 호응했다.  

 

한편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주류성(周留城:지금의 한산)을 거점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왜국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는 동시에 당의 유인원(劉仁願)이 주둔한 사비성을 포위·공격해 당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군이 도착해 유인궤(劉仁軌)의 당군과 함께 공격하자 패하여 임존성으로 퇴각했다.

 

 

661년에는 왜국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맞이해 왕으로 세우자 당시 백제의 서부와 북부지방이 모두 이에 호응해 큰 세력을 떨쳤다. 복신과 도침은 임존성을 근거로 활동하면서 각각 영군장군(領軍將軍)·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내부에 갈등이 일어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병합해 병권을 장악했다. 그 뒤 신라의 군량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주둔하던 부대가 662년에 웅진 동쪽에서 당군에게 패하자, 복신은 진현성(眞峴城)의 군사를 증원해 지키게 했으나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그러던 중 복신과 부여풍 사이에 알력이 생겨 복신이 부여풍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여기 쉰질바위로 도망 와서 작은 굴 속예 숨었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고 한다(663). 그래서 이 굴을 복신이 숨었던 굴이라 하여 복신굴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복신굴을 보니 굴로 보기는 너무 협소하고 관리도 허술하여 종이컵만 딩구는 이름뿐이었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는 한편 당군에 저항을 계속했으나 곧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당군과 접전해 패배했다. 이어 신라 문무왕과 당의 유인궤를 포함해 당에서 보낸 부여융(扶餘隆) 등이 연합해 총공격에 나섰다. 부여풍은 663년 백강(白江:지금의 금강 입구)에서 왜국이 보낸 170척의 병선과 함께 나당연합군과 싸워 대패하자 배를 타고 고구려로 망명했다. 흑치상지도 당군에게 항복한 뒤 당에 가서 장군으로 활약했다. 그 뒤 주류성이 20일간의 농성 끝에 항복하자 백제부흥운동은 소멸하고 말았다.

 

내원암에서 광천쪽으로 내려가는 길인가 보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서해대교의 가로등 불빛이 귀경길을 독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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