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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상과 현실의 중국 역사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이철락
* 먼저 중국역사야기 란의 중국역사기행에 꼭 알아야 할 중국역사(중요함) 을 대충이라도 읽어보신 후에 보시면 도움이 됩니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열전도 읽어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한단(邯鄲)
8,000여젼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유적이 있으며 중국 상(商)나라 도읍이 초기에는 한단 북쪽의 형태(邢台), 후기에는 한단남쪽의 안양(安陽)인 관계로 상나라,은나라때 이미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 미녀 달기와의 고사로 유명한 폭군)때 이미 한단이라는 이름이 기재되어서 지금까지 약 3,000여년간 도시이름이 변하고 않고 한단으로만 명명해진것은 중국 어느도시에 찾아보기 어려운 것임.
유구한 역사를 가진 한단의 특징을 여러갈래로 분류해보면
1. 趙(나라)문화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 7웅중의 하나였던 조 나라. 기마민족으로 대표되는 조나라의 문화가 한단에서 중원문명과 만나서 특유의 융합된 문화를 형성했다고 함. 순자(筍子), 공손룡, 신도(慎到) 등의 대학자와 조나라 무령왕, 문경지교 [刎頸之交]로 유명한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조사(趙奢) 등의 영웅들이 활동하였던 한단.
2. 자산(磁山)문화
8,000여년전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생활을 한 많은 유적이 있음
3. 여와(女娃)문화
흙으로 인류를 만들었다는 여신 여와의 문화가 있는 한단
4. 조위건안문화(曺魏建安文化)
한단은 한나라(東漢)말기부터 위진(魏晋)시대까지 중국 북방의 정치,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東漢말기부터 수나라가 통일할때까지 약 400여년간 曺魏, 後趙, 염위(冉魏),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濟)등의 도읍지였던 한단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 부자와 건안칠자(七子)로 대표되는 문인들이 수반을 시부와 문학작품을 남겨놓아 중국역사상 중요한 위치에 있는 건안문화가 있었던 한단
5. 北濟 석굴문화
중국 돈황석굴, 맥적산석굴, 용문석굴, 운강석굴 다음이라 할 수 있는 북제시대때 지은 향당산 석굴군이 있는 한단
6. 꿈의 문화
일침황량(一枕黃粱), 황량미몽(黃粱美夢)의 이야기가 있는 黄梁梦吕仙祠(황량몽려선사)가 있는 한단의 꿈 문화
7. 자주요문화(磁州窯문화)
대량의 고령토 산지로서 북제시대때부터 도자기를 생산하여 송나라,원나라때는 중국 북방지방 최대의 도자기 산지로 유명하였던 한단의 도자기 문화. 남쪽에는 경덕진이 있고 북쪽에는 한단 자현이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유명했음.
8. 광부 태극문화(廣府 太極문화)
청나라 말기 2명의 태극권 종사가 태어나서 양식 태극권과 무식 태극권의 발상지인 한단
9. 고사성어 문화
지상담병(紙上談兵), 모수자천(毛遂自薦), 한단학보(邯鄲學步) , 부형청죄 [負荊請罪] , 완벽귀조(完璧歸趙) , 胡服騎射(호복기사), 일언구정(一言九鼎) 등 약 1,500여개의 고사성어가 탄생된 한단
하나하나씩 보면....
가로수가 멋있는 새벽 한단시 중심거리 - 왼꼭에 한단 박물관이 있으며 주요 관공서가 있음
* 한단 박물관은 60년도에(?) 지었는데 대단한 규모이며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음
한단주점이나 한단빈관이 바로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여기에 머물면 총태,회차항,학보교 등을 아침에 1시간 정도 산보하면 다 볼 수 있음
총태(丛台)
전국시대 조나라의 수도였던 한단시내에 있는 총태, 조나라 무령왕이 세운 정원으로 군사훈련시 총태에서 관람했다고 함. 2,400여년전의 유적임
* 무녕왕과 胡服騎射(호복기사) 고사성어 해설
기원전 480년 조나라는 흉노나 진나라와 같은 강국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전차를 위주로 하는 오래된 전투법을 답습하여 기동성이 강한 흉노적을 이길 수가 없었다.
이에 무령왕은 전군에게 종래의 비효율적인 옷을 버리고, 호인들이 입는 간편하고 행동하기 좋은 기마복으로 바꿔 입도록 명령하였다. 하지만, 문신들은 낡은 인습에 억매여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무령왕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숙부와 측근 부터 설득하여 국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조차 의복을 바꿔서 입었다.
그런 연후로 조나라는 강력한 기마군을 보유하여 날로 강성하여 국토를 넓혀갈 수 있었다.
어떤 개혁이든 전통적 습관과 사고방식을 고집하려는 세력의 저항을 받게 마련이다. 하지만 스스로가 솔선수범하고 협력을 구한다면 개혁의 근간을 세우기에 족할 것이다.
자신의 개혁의지를 반대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고,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혜야 말로 관리자가 지녀야할 능력인 것이다.
협력을 이끌어내야할 때 관리자는 맞서지 말고, 스스로를 낮출 수도 있어야 한다.
전국시대인 조나라 무녕왕대의 총태 - 우리나라 역사로 따지면 고조선 시대인데~~
새벽 5시30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운동하러 옴 (새벽에 재기차기 운동한는 사람이 아주 많음)
새벽부터 낙시하는 사람들
분위기 좋은데서(그것도 수천년의 역사적인 유적지에서) 유적물에 의지하여 운동하는 모습이 참 자연스러움~~
學步橋(학보교) - 나무로 된 다리를 명나라때 보수한 다리
장자 의 추수편 [莊子 秋水]에 나오는 한단학보(邯鄲學步)의 고사를 근거로 만든 다리임.
한단학보(邯鄲學步) 고사 해설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의 한단(邯鄲) 사람들의 걷는 모습이 특별히 멋있었다고 한다. 연(燕)나라의 수릉(壽陵)이라는 곳에 살고 있던 한 청년은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배우기 위해 직접 한단에 갔다. 그는 매일 한단의 거리에서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원래의 걷는 방법을 버리고, 걷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한걸음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발을 어떻게 들고 또 어떻게 놓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리의 조화와 걸음의 폭 등에 대해서도 주의해야만 했다. 이렇다보니 그는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몹시 힘이 들었다. 몇 달이 지났지만, 그는 한단 사람들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네발로 기어서 자기 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邯鄲學步 는 한다지보(邯鄲之步) 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를 내면 양쪽을 다 잃게 됨 을 비유한 말이다.
학보교
한단학보를 유머스럽게 표현한 동상
학보교앞에서 태극권과 에어로빅하는 한단시민들
회차항(回車巷)
중국 (춘추)전국시대 전국7웅이 천하를 두고 서로 싸울때 진(秦)나라가 가장 강하여서 늘 趙나라를 위협했는바, 완벽귀조(完璧歸趙) 고사의 주인공 인상여가 완벽귀조로 공을 세우고 조나라에 돌아서 上卿이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자 장군 염파는 이에 불만을 품으며 큰소리로 린상여에게 소란을 피웠다. 린상여는 염파가 조나라에 없으면 안되는 장군이라서 늘 양보를 했는 데, 특히 하루는 두사람이 폭이 좁은 골목길에서 만나서 린상여가 자리를 피하면서 염파가 먼가 지나가라고 양보를 했다고하는 곳이 회차항임.
후에 염파는 린상여가 나라를 위해서 자기와 다투지 않고 양보했다는 사실을 알고 사과를 했는데 후에 그 유명한 문경지교라는 아름다운 고사가 생겼음.
완벽귀조(完璧歸趙) 고사 해설
완벽귀조는 원래의 물건이 완전하게 주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전국시대 조나라 혜문왕은 매우 진귀한 화씨벽(和氏璧)을 얻게 되었다. 벽은 중간에 구멍이 있는 둥근 옥을 말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이 벽은 변화(卞和)라는 사람이 초산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옥은 깎고 다듬기 전에는 일반 돌과 큰 차이가 없다. 변화는 이 돌을 려왕에게 바쳤으나, 려왕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의 왼쪽 다리를 잘라버렸다. 이후에 변화는 다시 이 돌을 려왕의 아들인 무왕에게 바쳤으나, 무왕 역시 그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여기고, 남은 오른쪽 다리마저 잘라버렸다. 무왕의 아들인 문왕이 왕위에 오른 후, 형산에서 돌을 안고 울고 있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그는 이유를 물어본 후, 돌을 가지고 와서 깎고 다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옥으로 변하였다. 문왕은 이 옥을 화씨벽이라고 불렀고, 이후 조 혜왕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었다.
진 소왕이 이 옥을 가지고 싶어 조왕에게 성 15개와 바꾸자는 편지를 보내왔다. 조왕이 생각하길, 화씨벽을 보내지 않는다면 강대한 진이 침략할 것이고, 보낸다 하더라도 진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 같았다. 조왕이 난처해하자, 대관인 무현은 지용을 겸비한 린상여와 대책을 상의할 것을 건의하였다. 린상여는 조왕에게 “신이 옥을 가지고 진으로 가겠습니다. 만약 진왕이 약속을 지켜 15개의 성을 우리에게 준다면, 벽을 진왕에게 줄 것이며, 진이 성을 주지 않는다면 반드시 ‘완벽을 조나라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린상여는 진왕을 만나자마자 그가 성을 할양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진왕 앞에 나가 이야기하였다. “이 벽은 희대의 보물이기는 하지만, 위에 작은 흠집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왕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진왕은 이 말을 믿고, 벽을 급히 린상여에게 넘겨주었다. 린상여는 벽을 받은 후, 기둥으로 달려갔다. 그는 옥을 위에 들고는 분노하여 말했다. “대왕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성을 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서 옥을 빼앗고 빈손으로 조로 돌아가게 한다면, 저는 제 머리와 화씨벽을 모두 기둥에 부딪쳐 깨뜨릴 것입니다.”
진왕은 린상여가 정말 벽을 깨뜨릴까 두려워, 즉시 태도를 바꾸고 지도를 꺼내 15개 성의 위치를 보여주었다. 린상여는 진왕의 교활한 눈빛 속에 성을 내어줄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진왕이 5일간 재계한 후에 벽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진왕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하였다.
린상여는 암암리에 사람을 시켜 벽을 조로 돌려보냈다. 5일 후 진왕은 기쁜 마음으로 화씨벽을 받으려 했지만, 린상여는 준엄하게 말했다. “제가 사람을 시켜 벽을 조로 돌려보냈습니다. 대왕께서 정말 성의가 있다면, 우선 성을 내어주신 후 신을 조로 보내주십시오. 조왕은 자연히 벽을 헌상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진왕은 대노하여 린상여를 단칼에 베려 하였으나, 그를 죽인다면 화씨벽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조와의 우정도 깨지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기에 그만두고 말았다.
린상여가 귀국한 후, 조왕은 그가 화씨벽을 보전했을 뿐 아니라 조의 체면을 회복시켜준 것에 감사하고 그를 상대부로 임명하였다. 이후, 진은 조에게 성을 내어주지 않았고, 조도 화씨벽을 진에게 보내주지 않았다.
문경지교(刎頸之交)고사 해설
「 참말로 면목이 없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무어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어리석은 탓으로 당신의 그 하늘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뜻을 몰랐던 것이외다. 나를 벌하고 용서해 주시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했다.
「 대단치 못한 나에게 장군께서 이렇게까지 관대하리라고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리하여 드디어 두 사람은 화해를 하고 생사를 함께 하여 목에 칼을 찔러도 마음을 변하지 않을 정도로 친하게 사귀었다 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고사성어가
문경지교(刎頸之交)이다.회차항 골목
린상여회차항 이라는 글씨가 있는 비석(비록 볼만한 것이 없는 약 수십미터의 회차항 골목이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많이 인용되었던 인상여와 임파의 문경지교 고사의 대표적인 곳임)
조나라 유적지(표지만 있고 유적은 없음. 안쪽으로 들어가면 서민들이 살고 있는 조금은 지저분한 골목집들이 있음)
시내에 있는 이슬람 사원 (중국 어느지역을 가나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회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아마 한단도 회족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는 것 같음~~)
황량몽 여선사(黄梁梦吕仙祠) - 한단시내에서 북쪽을 차몰고 약 20분정도 소요됨
당(唐)나라 심기제(沈旣濟)가 쓴 침중기(枕中記)에 나오는 이야기 일침황량을 근거로 송나라때 지은 사당. (명청때 재 보수했음)
일침황량(또는 황량미몽) 고사는 후대에 중국 문학과 연극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
황량미몽(黃粱美夢) 고사 해설
옛날 중국에 노생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살았다. 그는 한단을 여행하던 중에 여관에서 여옹이라는 도사를 만났다. 노생은 도사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이야기 했다. 한참동안 얘기를 듣던 도사는 그에게 베개 하나를 건네주며 베고 자보라고 했다(一枕). 그때 밖에서는 여주인이 기장을 삶고 있었다(黃粱).
노생은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부잣집 아름다운 딸과 결혼하였고 얼마 후에 재상이 되었다. 그는 여든이 넘도록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꿈에서 깨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여관 주인이 아직도 기장을 삶고 있었다. 그의 곁에서는 도사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는 “인생이란 본시 이런 것이오” 하고 말했다.
이때부터 일침황량은 “부귀의 무상함”을 뜻하게 되었다. 요즘에 와서는 “환상적이고 허황된 일”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새벽에 오면 입장료 없이 들어 갈 수 있음. 우리나라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주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는 멋있는 곳임~~
노생의 고사를 표현한 노생전
조원(趙園)
한단시내에 있는 대규모 공원으로 특히 한단의 고사성어를 테마로 한 공원도 있고 고대 건물형태로 지은 많은 건축물 등이 있음.
자주요(磁州窯) 박물관
한단시내에서 남쪽으로 30분 걸리는 자현에 있음. 도자기에 관심있는 사람은 한번 볼 만한 곳임.
한단시 부근 여러곳에 있는 자주요 유적지들
올해만해도 5번이나 간 한단 지역이지만 업무성과는 아직 없는 곳(겨우 작은 오더 한건 있음). 한단지몽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