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 익재선생 유적지 답사
일자 : 2008년 2월 13일(수요일)/음력 1월 07일
남북 분단 이후 최초로 황해북도 장풍군 십탄리 서원촌에 소재하는 고려 말 익재 이제현 선생의 유적지 답사를 추진, 경주이씨 문중인사 213명을 25인승 버스 8대에 분승 인솔하여 북측에 소재하는 기생 황진이 묘와 열하일기 저자인 박지원 선생의 묘를 지나 익재 선생 묘지와 개성시내 익재 선생 생거지인 죽림당. 포은 선생의 생가터인 숭양서원. 고려박물관, 선죽교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방문단장 이재훈)
(1) 이른 아침 출경 전 도라산 출입관리소(CIQ) 강당에서 익재공 유적지 답사 추진을 수행했던 필자의 인사말과
함께 행사 일정을 설명하고 있다.
(2) 개성송도사범대학 강좌장, 박사 전룡철 사학 교수가 익재선생의 신도비문 내용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3)익재선생 신도비 답사
(4)익재선생 선영하의 모습이다.
(5) 현지에 도착하여익재선생 신도비로 향하고 있다.
(6) 익재공 묘(墓)역이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제물들의 상차림 준비를 하고 있다.
(7) 제례음식을 차리고 있는 모습이다.
(8)익재공 산소의 초헌관에 경주이씨중앙화수 필우회장, 아헌관에 익재공파 대종회장 부산 필우회장, 종헌관에
중앙화수회 상근 상임부회장의 순으로 헌작하는 모습이다.
(9)익재공의 묘지 문인석이다.
현지 전언에 의하면 산소아래 굴러 있었는데, 이번에 산소로 옮겼 세웠다고 한다.
(10) 문인석의 상단 부분이 떨어져 나가 몸신만이 서립하고 있다.
우측에 마스크를 하신 분이 청주에 사시는 이봉희 족장이신데 매년 동암공 익재공 향사시 홀기와 독축의 대가이시다.
이번에도 봉희 족장의 애달픈 독축이 지하의 익재 할아버지께 전해질 것으로 믿는다.
(11)묘지의 향로석으로 여겨지는데 북측이 잘 몰라서 묘지 앞 좌우측의 망주석 위치 지점에 뒤집어 놓여있다.
(12) 익재공의 산소이다. 성묘를 끝내고 하산한 후 북측 인사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있다.
(13) 28世 벽오공(碧梧公) 시발(時發)의 증손(曾孫)으로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역임한 31世 휘(諱) 성곤(成坤)
선조의 묘소이다. 상석과 문인석이 있고 잘 보존 되어 있는 상태이다.
공의 묘지 아래 약 50m 거리에 35세의 젊은 나이에 졸(卒)한 아들 석지(錫祉)공의 묘지를 필자가 육안으로 확인했다.
이곳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은 벽오공의 손자 통덕랑공(通德郞公/휘(諱) 인식(寅烒)께서 세거하여 선영을 수호해 왔는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墓所)는 익재공 묘소 외록(外麓) 건좌(乾坐)로, 만정당(晩靜堂) 서종태『1652년(효종 3)~1719년(숙종 45)』선생이 찬(撰)한 묘지명(墓誌銘)과 비석(墓表陰記)이 있었다고 족보에 기록이 있으나 이번 방문에는 필자가 먼리서 육안으로 시야에 들어왔으나 시간관계로 이번 답사엔 성묘를 하질 못했다.
그의 장자 인천부사(仁川府使)공은 족보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오천공(梧川公) 종성(宗城)께서 찬(撰)한 묘지명(墓誌銘)과 묘갈비(墓碣碑)가 있었으나 이번 답사시 확인결과 유실되고 보이지 않았다.
(14) 인천 부사공 산소에 성묘하는 종인들 모습
(15) 부사공의 묘소이다. 종인들이 성묘하는 모습이다.
(16)부사공 산소 성묘 후 하산 모습
(17) 31世 부사공(府使公) 묘의 문인석이 6.25전쟁의 상처없이 잘 보존되 있다.
(18) 31世 부사공(府使公) 묘의 상석이다.
(19) 성묘 행사를 모두 마치고 산소에서 하산하고있는 모습이다.
(20) 보이는 곳이 익재공(益齋公)의 세거지 건물이 있었던 집터이다.
(21) 익재공(益齋公)의 세거지 후원(後園)이다.
(22)개성송도사범대학 강좌장, 박사 전룡철 사학 교수가 죽림당 유허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23) 2008년 1월 24일(목) 죽림당 휴허비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의 필자이다.
뒷편에 서있는 두 아이가 참 인상적이였다.
(24) 2008년 1월 24일(목) 죽림당의 유허비이다.
유허비를 잡고 익재공 할아버지를 그리며 한동안 감회에 젖었다.
(25) 개성시 방직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인 개성성균관(開城成均館)이다.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27호로 지정되어 있다. 992년(고려 성종 11)에 세운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현재의
건물은 1602년부터~161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후의 중건은 알 수 없다.
(26)개성 성균관의 은행고목 표지석
(27) 개성의 옛 성균관은 오늘날 북측의 역사박물관 전시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8) 개성의 성균관 건물 모습
(29) 익재공 묘지석이다. 필자가 1월 24일(목요일) 발굴 당시 다녀왔는데 그동안 벌써 깨끗이 세척하여 이곳
개성시내 고려박물관으로 옮겨 전시중이었다. 익재 묘지석은 개성의 靑石을 잘 다듬어 만들어 졌고 길이는 6.68m,
넓이 63.2cm, 두께 20.5cm, 무게 약500kg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려 묘지석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내용이
풍부한 걸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과 글 : 24代孫 李在薰
(30)
(31) 2008년 2월 13일(수) 고려 박물관 내의 9층 석탑이다.
(좌로부터 필자 내와와 우측은 필자의 지인 윤천영 경희 한의원 원장이다.
(32) 고려 박물관 내의 석탑이다.
(33) 선죽교(善竹橋) 모습이다.
이곳에서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 1337년(충숙왕 복위6) ~ 1392년 음력 4월 4일(공양왕 4)』가 이성계『李成桂 :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1367(공민왕 16~ 1422(세종 4)」이 보낸 조영규『趙英珪∼1395년(태조 4)』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다리 위의 돌에 붉은 반점이 있어서 정몽주의 핏자국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그 안에 있다. 1971년 재 북한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4) 선죽교 표지석
(35) ⓒ사진과 글 : 野村 李在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