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산마애 삼존불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본존여래상 2.8m, 보살입상 1.7m. 반가상 1.66m이다.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의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여래입상은 소발(素髮)한 두상, 풍만한 면상을 특징으로 하며 두꺼운 법의(法衣)가 발등까지 덮여 있고 발 밑에는 간략한 단판연화(單瓣蓮華)가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寶珠形頭光)의 단판연화가 양각되어 있다. 우측의 보살입상은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면상은 약간 긴 편이며, 상반신은 나형(裸形)에 하상(下裳)은 길게 늘어져 있다. 발 밑에는 이중의 단판복련(單瓣複蓮)이 양각되어 있고,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좌측의 반가상은 삼산관을 썼고 상반신은 나형이며 두 팔은 손상되었다. 하상은 매우 얇고, 넓게 옆으로 퍼져 발등까지 덮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이 불상은 삼존형식(三尊形式)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 말기인 제주양식(齊周樣式)을 엿볼 수 있다. 온유한 조각수법, 반가상의 배치 등 당대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석불의 가장 우미한 예이다.
*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 1963년 지정. 1491년(성종 22)에 축조된 것으로, 둘레 1,800 m, 성 높이 5 m, 성 안의 넓이 6만 4350 m2이다. 영장(營將)을 두고 서해안 방어의 임무를 담당하던 곳이며, 폐성된 지 오래되어 성곽이 일부 허물어지고, 성 안의 건물이 철거되어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는 등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었으나, 1973년부터 읍성의 복원사업을 실시, 민가 및 관공서가 철거되었다.
본래의 규모는 동 ·서 ·남의 3대문이 있었고, 옹성(甕城)이 2개소, 객사(客舍) 2동, 포루(砲樓) 2동, 동헌(東軒) 1동, 총안(銃眼) 380개소, 수상각(水上閣) 1개소, 신당원(神堂院) 1개소 등 매우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복원된 것은 3대문과 객사 2동, 동헌 1동, 망루 1개소뿐이다. 1418년(태종 18)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되었다.
* 수덕사
사기(寺記)에 따르면 백제 말 숭제(崇濟)가 창건하고, 제30대 왕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왕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하였다고도 전한다. 조선시대 제26대 왕 고종(高宗) 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문화재로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이 밖에 대웅전 양 옆에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精舍)와 3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 채석강
1976년 4월 2일 전라북도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127,372㎡이다.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 맨 서쪽, 격포항 오른쪽 닭이봉 밑에 있다. 옛 수운(水運)의 근거지이며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이 있던 곳이다.
지형은 선캄브리아대의 화강암, 편마암을 기저층으로 한 중생대 백악기의 지층이다. 바닷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은 듯하다. 주변의 백사장, 맑은 물과 어울려 풍치가 더할 나위 없다. 채석강이라는 이름은 중국 당의 이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채석강과 흡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여름철에는 해수욕을 즐기기 좋고 빼어난 경관 때문에 사진 촬영이나 영화 촬영도 자주 이루어진다. 채석강에서 해수욕장 건너 백사장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붉은 암벽으로 이루어진 적벽강이 있다.
* 내소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633년(선덕여왕 2) 신라의 승려 혜구(惠丘)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소래사(蘇來寺)라고 하였다. 1633년(인조 2) 청민(靑旻)이 대웅전(大雄殿:보물 제291호)을 지었는데, 그 건축양식이 매우 정교하고 환상적이어서 가히 조선 중기 사찰건축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1920년 관해(觀海)가 수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밖에도 설선당(說禪堂), 보종각(寶鐘閣), 3층석탑 등이 있으며 정문에는 실상사지(實相寺址)에서 이건(移建)한 연래루(蓮來樓)가 있다.
내소사의 유래에 관하여, 일설에는 중국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와서 세웠기 때문에 ‘내소(來蘇)’라 하였다고도 하나 이는 와전된 것이며, 원래는 ‘소래사(蘇來寺)’였음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고, 최자(崔玆)의 《보한집(補閑集)》 중에도 고려 인종 때의 정지상(鄭知常)이 지은 “제변산소래사(題邊山蘇來寺)” 운운의 시가 있다. 또 이규보(李奎報)의 《남행일기(南行日記)》에도 ‘소래사’라 하였는데, 이것이 언제 ‘내소사’로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 금산사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은 모두 소실되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을 인용하여 사적기(事蹟記)가 만들어졌는데, 금산사의 창건은 599년(백제 법왕 1)에 왕의 자복(自福)사찰로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까지 전하는 바로는 진표(眞表)가 762년(신라 경덕왕 21)부터 766년(신라 혜공왕 2)까지 4년에 걸쳐 중건(重建)하였으며, 1069년(문종 23)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대가람(大伽藍)으로 재청하고, 그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이라는 대사구(大寺區)를 증설하여 창건 이래 가장 큰 규모의 대도량(大道場)이 되었다.
1598년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미륵전(彌勒殿) ·대공전(大恭殿) ·광교원(廣敎院) 등과 40여 개소에 달하는 산내 암자(庵子)가 소실되었다. 그러나 1601년(선조 34) 수문(守文)이 재건의 역사(役事)를 벌여 1635년(인조 13)에 낙성을 보았다.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고, 1934년에 다시 대적광전 ·금강문(金剛門) ·미륵전 등을 중수하였다.
금산사와 인연이 있는 고승(高僧)은 혜덕왕사(慧德王師) 이외에도 도생승통(道生僧統) ·원명(圓明) ·진묵(震默) ·소요(逍遙) ·남악(南嶽) 등 대사가 거쳐 갔거나 죽거나 하였다.
주요 건물로는 미륵전(국보 62) ·대적광전(보물 476) ·대장전(보물 827) ·명부전(冥府殿) ·나한전(羅漢殿)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보제루(普濟樓) 등과, 방등계단(方等戒壇) ·5층석탑(보물 215) ·6각다층석탑(보물 27) ·석련대(石蓮臺:보물 23) ·석종(石鐘:보물 26)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28)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보물 24) 등의 석조물이 있다.
* 미륵사지
사적 제150호.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로 추정되기도 하는 금마면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추정 규모로는 한국 최대의 사찰지이다. 601년(백제 무왕 2)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무왕(武王)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로 유명한 사찰이다. 국보 제11호인 동양 최대의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제236호인 미륵사지 당간지주가 있으며, 1974년 8월 원광대학에서 실시한 발굴조사 때 동탑지(東塔址)도 발견되었다. 건물지(建物址)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구(遺構)가 복합되어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4.24m. 사각형의 다층석탑(多層石塔)이었으나, 서남 부분은 무너지고 북동쪽 6층까지만 남아 있다. 초층 탑신은 사면이 3칸씩이며, 그 중앙칸은 내부와 통하도록 사방에 문이 있고, 탑 안의 중앙에는 네모난 커다란 찰주(擦柱)가 놓여 있다. 각 면에는 엔타시스 수법을 쓴 모난 기둥을 세웠고, 그 위에 평방(平枋)·창방(昌枋)을 짰으며, 다시 두공양식(枓樣式)을 모방한 3단의 받침으로 옥개(屋蓋)를 받쳤다. 2층부터 탑신이 얕아지고 옥개석은 초층과 같은 수법으로 표현하였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이 작은 석재로 구성되었으며, 그 가구(架構) 수법도 목조건물을 모방하기 위해 석탑 이전에 목탑(木塔)을 먼저 세웠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기이며, 한국 석탑양식의 기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양식상으로 볼 때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도 원래 7층석탑으로 추정한다면 20m 안팎의 거대한 탑이었을 것이다. 건립연대는 백제 말기의 무왕 때인 600∼640년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일제강점기 때, 붕괴가 우려된다고 콘크리트를 발라놓아 훼손이 심하다.
2001년 10월, 총공사비 80억 원을 들여 해체·보수작업에 들어가 2007년 완성할 예정이다.
* 부소산성
사적 제5호. 사비성(泗城)이라고도한다. 이 산성은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해서 1차적으로 테뫼식(式)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를 포곡식(包谷式)으로 약 1.5km에 걸쳐서 축조하였다. 현재 반월루(半月樓)가 있는 곳에서 산정을 두른 약 600m의 테뫼식 산성 안에는 영월루(迎月樓)와 군창지(軍倉址) 그 밖의 건물터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탄화미(炭化米)가 많이 나오고 있는가 하면 토축(土築) 성벽도 완연히 남아 있다. 이 부소산성은 538년(성왕 16) 웅진(熊津)에서 이곳으로 천도한 때를 전후하여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능산리 고분군
사적 제14호. 부여에서 논산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산의 남쪽 기슭에 있다.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 7기(基)는 3기씩 앞뒤 2열을 이루고 그 뒤로 1기가 떨어져 있으며, 1915~1937년 일본학자가 여러 차례 조사하였다.
이들 고분 중에는 산구릉의 남쪽 경사진 면에 남북으로 길게 직사각형의 석곽(石槨)을 쌓고 남쪽 벽 방향에 널길[羨道]을 만든 뒤, 원형의 봉토 아랫부분에는 호석(護石)을 두른 경우도 있다. 특히 1호분은 잘 물갈이한 편마암 벽에다 사신(四神)을 그렸는데, 이는 고구려 강서삼묘리고분군과 퉁거우[通溝] 사신총(四神塚)의 경우와 유사하다.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은 별로 남아 있지 않고, 두개골 파편, 칠(漆)을 한 목관(木棺)조각, 금동제 장신구 등이 소량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매장방법은 1 ·2 ·3호는 어울무덤[合葬墓] 형태이고, 5호분은 홑무덤[單葬]으로 추정된다. 시신의 머리 방향은 북쪽을 향하고, 관이 놓인 바닥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잘라 깔아 놓았다.
만든 시기는 대략 6세기 중엽~7세기 중엽으로 보이는데, 편년이 가장 앞서는 2호분이 부여로 천도(遷都)한 성왕(聖王)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들은 이전에 고구려와 중국 남조를 통해 받아들인 문화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이를 완전히 소화시킨 백제 후기 고분미술의 중심적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 정림사지
사적 제301호. 1942년 발굴조사 때 ‘대평 팔년 무진(大平八年戊辰) 정림사대장당초(定林寺大藏當草)’라고 쓰여져 있는 고려 초기의 기와 명문(銘文)이 발견되어 정림사라고 부르며, 이 기와가 1028년의 것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국보로 지정된 백제 때의 5층석탑은 그 이전에도 절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 박물관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많은 유물과 가람의 규모를 밝혀냈다. 가람의 배치는 강당과 금당(金堂) ·중문(中門)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강당과 중문을 연결한 회랑(廻廊)이 있으며 금당과 중문 사이에는 1기의 탑을 배치한 1탑식 가람으로 전형적인 백제 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정림사지 석탑은 국보 제9호이다. 보통 백제5층석탑이라고도 한다. 높이 8.33m.
좁고 얕은 단층 기단(基壇), 사각형 우주(隅柱)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층 옥개석(屋蓋石)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轉角)에 나타난 반전(反轉) 등이 목조탑파(木造塔婆)의 구조와 비슷하며, 또한 이런 점이 특징이다.
제1탑신(塔身) 4면에는 당장(唐將)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紀功文)이 있어 속칭 ‘평제탑(平濟塔)’이라고도 한다.
백제시대 석탑의 현존하고 있는 둘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희귀한 석탑일 뿐만 아니라 각부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부 수법은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이며, 전체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높은 기품을 풍겨 후세에 모방품(模倣品)이 많이 나왔다.
* 국립 부여박물관
연건평 1947㎡. 소장유물 7162점(1995.8.31 현재). 1929년 부여고적보존회(扶餘古蹟保存會)가 발족되어 옛 객사(客舍) 건물을 이용하여 '백제관(百濟館)'을 개관하였다. 1939년 4월 일제 총독부박물관 부여분관(扶餘分館)이 되고, 1945년 8·15광복과 함께 한국의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이 되었으며, 1975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소장유물의 진열 현황은, 제1실이 선사시대(先史時代)와 백제시대실, 제2실이 불상(佛像) 및 공예품실, 제3실이 옛 객사건물로 석불(石佛)·석등(石燈) 등의 석조물실이며, 정원(庭園)에는 석조(石槽)·석비(石碑)·탑재(塔材)·주춧돌 등이 전시되어 있다.
* 무량사
신라시대에 창건하였고, 여러 차레 중수(重修)하였으나 자세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주위의 산림(山林)이 울창하여 거찰(巨刹)의 면목을 유지하고 있는데, 보물 제356호로 지정된 극락전은 드물게 보는 2층 불전(佛殿)으로 내부는 상 ·하층의 구분이 없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서, 당시의 목조 건축술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극락전 내에는 거대한 좌불(坐佛)이 안치되었는데 중앙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은 좌고(坐高)가 16자, 가슴둘레 24자이며 좌우의 관세음(觀世音)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각 좌고가 16자에 가슴둘레가 18자이다. 또한 여기에는 석가불화(釋迦佛畵)가 있는데 길이 45자 8치, 폭이 25자 2치나 되는 조선 인조 때의 불화로 기구(機構)가 장대(壯大)하며 묘법(描法)도 뛰어나고 채색도 선명하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보물 제185호로 지정된 5층석탑, 보물 제233호인 석등, 지방문화재인 당간지주(幢竿支柱), 김시습 부도(金時習浮屠) 등이 있다. 이 절은 또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이 세상을 피해 있다가 죽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 궁남지
사적 제135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東南里) 소재. ‘마래방죽’이라고도 한다. 부여읍에서 남쪽으로 약 1km 지점에 있으며, 동쪽에는 초석(礎石)이 남아 있고, 주변에 옛 기와가 많이 산재하여 있다. 또 부근에는 대리석을 3단으로 쌓아올린 팔각형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음료수로 사용되고 있다. 이 궁남지는 백제 무왕(武王)의 출생설화와도 관계가 있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法王)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龍神)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딸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한 서동(薯童)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 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제의 정원(庭園)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궁남지의 조경(造景) 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源流)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 갑사
계룡사·계룡갑사·갑사(岬寺)·갑사사(甲士寺)라고도 한다. 420년(백제 구이신왕 1)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창건하였다.
505년(무령왕 5) 천불전(千佛般)을 중창하고 556년(위덕왕 3) 혜명(惠明)이 천불전·보광명전·대광명전을 중건하였다. 679년(문무왕 19) 의상(義湘)이 당우(堂宇) 1,000여 칸을 더 지어, 화엄도량(華嚴道場)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十刹)의 하나가 되었고, 옛 이름인 계룡갑사를 갑사로 개칭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어 1654년(효종 5) 사정(思淨)·신휘(愼徽) 등이 크게 중창하였고, 1875년(고종 12) 다시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강당·대적전(大寂殿)·천불전·응향각·진해당(振海堂)·적묵당(寂默堂)·팔상전·표충원·삼성각·종각 등이 있다. 또, 보물 제256호인 철당간 및 지주와 제257호인 부도(浮屠)가 있으며, 《석보상절(釋譜詳節)》의 목각판이 있고, 1584년(선조 17)에 만든 범종, 경종이 하사한 보련(寶輦), 10폭의 병풍, 1650년(효종 1)에 만든 16괘불이 있다.
* 무령왕릉(송산리 고분군)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宋山里)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封土)를 접하고 있다. 분구(墳丘)는 지름 약 20m의 원형(圓形) 플랜을 가지며 널방[墓室]의 바닥면에서 분정(墳頂)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蓮華文塼)·문자전(文字塼)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單室墓)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軸線)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小龕)과 그 아래에 연자창(連子窓)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燈盞)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羨道]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鐵製) 석수(石獸),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동제(銅製)의 발(鉢)·시(匙)·오주전(五銖錢)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被葬者)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刻字石板) 2장이 나왔다.
널방[玄室]에는 청자사이병(靑瓷四耳甁)·청동용기류(靑銅容器類)·철모(鐵)·현금(玄琴) 등의껴묻거리[副葬品]와 금·은의 식금구(飾金具)가 달린 흑칠(黑漆)이 칠해진 목관(木棺)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매치(埋置)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足座)·동경(銅鏡)·단룡환두(單龍環頭)의 칼, 울두(斗)와 동제(銅製)의 용기류 화염형관식(火焰形冠飾)·수식(首飾)·이식(耳飾)·과대(帶)·식리(飾履)·팔찌[釧] 등의 꾸미개[裝身具]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第三大臼齒)가 출토되었다.
* 국립공주 박물관
백제 문화재를 중심으로 전시하고 있다. 연건평 2,082.3㎡. 소장유물 8356점(1995 현재).
1934년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가 설립되고, 1940년 옛 관아(官衙) 건물인 선화당(宣化堂)에 공주읍 박물관이 개관되어 공주 사적현창회(史蹟顯彰會)가 관리하였다.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고, 1972년 12월 30일 새 공주박물관이 건립되어 1973년 5월 1일 새로 발굴된 무령왕릉(武寧王陵) 출토유물 2561점을 중심으로 전시하여 개관식을 가졌다. 진열실은 1실로 되어 있으며, 1971년에 출토된 무령왕릉 출토유물이 주종을 이룬다. 마당에는 석조물이 전시되어 있다.
충청남도 공주시 웅진동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2001년 현재 대지면적 6만 9865㎡에 2002년 8월 완공을 예정으로 신축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