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행식(李幸植) 교장과 19년을 함께 한 이야기
이때 나는 교도주임이라는 직책을 맡았었는데 원래는 카운슬러의 의미로 사용된 명칭이지만 훈육주임, 학생주임 또는 생활지도주임, 학교에 따라서는 학생과장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훈도나 상담지도보다는 적발과 처벌을 위주로 하는 훈육의 업무였다. 명찰이나 학교 뱃지와 학년 뱃지는 제 위치에 잘 달았는지, 스커트는 무릎 밑으로 5cm, 단발머리는 귀밑으로 3cm에서 단정한지, 백색의 목 칼라는 깨끗하고 빳빳한지 등으로부터 이성교제 등 사적인 편지왕래나 극장출입은 물론이고 일기검사 등에 이르기까지 시시콜콜 적발하여 처벌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이런 것들이 1950~70년대까지 여학교 생활 수칙이었으니 일제 군국주의식 교육방법의 잔재였다. 지금 보면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될 사항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일을 이행식 선생이 맡고 있었는데 그 분이 교감이 되면서 내가 그 일을 맡은 것이다.
나는 교도주임을 하면서 카운슬러 제도에 관심을 가졌었다. 어느 땐가 김판영 교장으로부터 최신 일어판의 <생활지도의 실제와 카운슬러>라는 책을 빌려 흥미 있게 읽고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마침 1966년 여름에 문교부에서 전문 카운슬러 양성을 위한 강습이 있어 전북 교육위원회에 4명이 배정 되었다기에 교육위원회에 찾아가 신청하였다. 간신히 사립학교 교사인 내게 한 자리가 배정 되어서 제2기 카운슬러 강습생으로 이화여대에서 2개월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으며 전문 카운슬러 자격증을 받았다. 이 강습은 교육자에게는 매우 유익한 강습이요 요긴한 교육이었다. 이때 같이 받은 분은 전주고등학교의 박진철, 전주공고의 강한묵, 김제농고의 오해걸 선생들이었다. 그 후에 이 제도는 한동안 교육계의 큰 관심분야로 주목을 받는가 싶더니 유야무야 형식적인 제도로 묻혀 버렸다.
김아무개 교장이 부임하여 오면서 이행식 교감은 무슨 이유인지 사표를 내고 지금의 부안신협 옆에다 가게를 차리고 일용의 잡화상을 시작하였다. 은성갑 교장의 후임으로 자신의 교장승진이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라는 설이 나돌았으나 그렇게 과욕을 부리는 분은 아니다. 그후 김태수 전 이사장의 공민권이 복권되어 다시 이사장으로 복귀되면서 때마침 K교장이 그만두게 되자 즉시 교장으로 승진되어 부임하였다. 이는 재단설립자의 아들이라는 부친의 후광이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들 말하였었다. 이때가 1965년 7월이다.
이때부터 여중과 여고 겸임의 이행식 교장시대가 장기간 지속되었다. 이 분은 과묵 중후하고 인자한 성품이었다. 부잣집의 막내아들로 자랐지만 교만하지 않고 소탈하였으며 사교성은 없으나 호주객으로 주량이 대단하였는데, 술을 마시면 말이 많아지면서 재치나 세련미는 없지만 부자연스런 유머어로 좌중을 리드하려 하였다. 또 많은 직원을 거느린 기관의 장으로서 직원들의 개인적인 어려움에 대해서 관심이 적은 편이고 칭찬이나 나무람이 전혀 없었던 것이 장점이요, 아쉬운 점이기는 하였으나 누구를 특별히 편애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는 분이다.
나는 벽당 이교장을 평교사 시절을 제외하고도 같은 동네 위 아래 집에서 살면서 교감으로 3년, 교장으로 19년을 모셨었다. 그러나 그 긴 세월동안 한 번도 서로 간에 의견 대립을 하거나 낯을 붉힌 바가 없으며 질책 받은 일도 없었으니 너무 무난하게 지내온 관계였던 것 같다. 나는 공사 간에 이 분이 내 상사임에 유의하면서 덕망가의 아들답게 그 후덕한 인품을 존경하며 모셔왔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수고했다고 격려하거나 잘한 일이라며 칭찬 받은 일도 없었으니 내가 무능해서 그랬는지 이분의 천성이 조금은 무심했건 것인지는 지금도 분간이 안된다.
부안여중이 나날이 비대하여지면서 교실난이 극심해지고 그런 와중에서 여자고등학교가 창설되어 신축 이전이 불가피했던 1965년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이 분이 15년 이상을 중·고 겸임 교장으로 있었다. 교장감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면 그 좋은 자리 아무에게나 내주고 싶지 않아서 확보하여 둔 자리였을까 그러다가 이 확보하여 둔 교장 자리는 그후 신아무개 이사가 이사장이 되면서 그 아들이 부임하여 왔었다.
이 시기에 부안여자중·고등학교는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는데, 실은 교장의 능력에 의한 발전이라기 보다는 이사장 백주의 무에서 유를 일구어 낸 탁월한 경륜과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이룩된 결과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니 복 받은 교장일시 분명하다.
1983년의 3월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6년 반 동안 병고로 병원과 자택에서 치료하였는데 언어장애와 함께 팔다리도 조금 불온하여 부축을 하여야 했다. 초기에는 1주일이면 한두 번 부축 받으며 잠시 출근했다가 들어가곤 하였고 서무과에서는 크고 작은 업무를 집으로 가서 도장을 내어주면 찍어오는 결재를 하였다. 이런 상태로 장기요양을 하게 되면 교감에게 직무대행권이라도 주었어야 하는 것인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교장이 참석하여야 하는 모든 회의는 교감이 대리참석을 하였으니 나는 권한은 없고 책임만 따르는 힘겨운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렇지만 이러 저런 일들에 대하여 내가 불평을 하거나 하면 혹시라도 교장자리를 탐낸다고 오해할까 보아 불평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고혈압에 당뇨병 등 합병증이 악화되어 시력마저 나빠지니 6년 반만에 사표를 내고 그 다음 해인가 서거하였다.
내가 교감으로 승진한 것은 교직생활 시작 15년만인 1970년의 3월이었다. 이 무렵에 나는 교무주임이었는데 교원 자격증의 교과과목이 농업이라 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위법이라고 교육위원회로부터 지적을 받고 있어서 1969년 10월에 국가자격검정고시를 보아 국어과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던 때였는데 갑자기 교감으로 승진이 되었다. 이때 검정고시에 합격하니 도교육위원회 중등교육과장이(김준영) “공립으로 올 뜻이 있는지를 물었으며 뜻이 있으면 즉시 발령해 주겠다.”고 하여 “생각하여 보겠다.”며 망설이고 있는 참인데 갑자기 교감으로 발령이 나서 공립으로 옮겨볼까 하는 생각을 접어 버렸다.
이때 여자고등학교가 계속 학급 증설이 되면서 중·고 합하여 30학급 이상으로 학교가 커지고 중·고의 업무도 서로 다른 업무가 많아 교감만이라도 분리를 하여 지금까지 겸임하여오던 오동술 교감이 고등학교를 맡게 되고 내가 중학교 교감의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내가 특별히 우수교사였거나 관리능력이 출중하여서가 아니라 연공서열의 순서에 의한 자연승진이다. 이보다 앞서 박종용 선생은 해성고등학교로 가고 1967년쯤에는 김영진 선생도 성심여고로 갔으며 그보다 더 앞서서는 맹은재 선생이 군산여상으로 갔으니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격으로 내가 고참이어서 자연스럽게 교감으로 승진이 된 것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오동술 교감이 서울 일신여자상업학교의 교장으로 가게 되어 내가 고등학교 교감까지 겸임하고 있다가 얼마후에 그 교무주임이 중학교 교감 발령을 받았다. 같은 교무실 내에서 뜻도 호흡도 맞지 않는 중·고의 두 교감이 책상을 나란히 놓고 앉아서 업무를 보는데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교장은 오불관언으로 양처를 거느리고 사는 남편처럼 교감들의 불편은 아랑곳 하지도 않았다.
오동술 교감과 나는 항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여 양보하므로 조그마한 갈등도 없이 교무실을 잘 이끌어 갔다. 이 분은 원래는 부안 분인데 우리 학교에 부임할 무렵에는 변산면 소재지에 살았었다. 흥덕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오신 분으로 신영동 이사와 인척관계의 인연으로 오게 된 것이다. 능력도 있고 성품도 원만하며 친화력도 있어서 무난한 분이었다. 노모만을 모신 외아들로 우리 학교에 부임하여 부안초등학교 어느 여선생과 혼인하였으며, 후에 그 부인이 본정통에서 노블양장점을 개업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한날 부임하여 자신보다 서열도 낮은 선생이 2년도 못되어 교감으로 승진하더니 이제는 교장으로까지 승진하니 자존심이 상하여 학교에 대한 애착이나 의욕을 잃고 학교를 떠나고자 마음을 굳혀 서둘러서 서울로 가게된 것 같다.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덕을 베풀며 살지는 못했는지 몰라도 폐해가 되는 일은 안하며 살려고 조신하였으며 누구를 섭섭하게 한 일은 없는지 항시 돌아보며 살아왔다. 그러면 남에게 미움은 안받을 것이므로 우선 내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유독 어떤 분에게는 밉고 불편한 존재였다면 이는 내 부덕의 소치일 것이므로 맞대응은 않기로 하였다. 그래서 가급적 그 분과는 상종을 안하였고 공적인 일로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대면하는 일 없이 지내왔으며 그래도 갈등이 생기면 왕양명(王陽明)의 시 ‘우참피훼 도추추(憂讒避毁徒市市)’를 뇌이곤 하면서 교감생활 19년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