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정은 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간 만남을 권유했지만 펜스 부통령은 이를 고의로 피했다는 증언이 공개됐다. 펜스 부통령이 김영남·김여정과 사진이 찍힐 것을 꺼려해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와 고의로 리셉션에 지각하고, 김여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평창올림픽 당시 문재인 정부 청와대가 미 2인자와 북한 국가수반의 방한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미·북 사이 ‘중재자’로서의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막상 현장의 당사자는 결이 다른 인식을 하고 있던 것이다.
2018년 2월 9일 평창올림픽플라자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앞)이 참석해있다. 펜스 부통령 뒤는 (왼쪽부터) 김영남 당시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다. /연합뉴스© 제공: 조선일보 펜스 전 부통령은 최근 발간한 저서 ‘신이여 나를 도와주소서(So Help MeGod)’
에서 2018년 2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이뤄진 한국 방문을 회고하는 데 일부분을 할애했다. 부친이 6·25전쟁 참전 용사인 펜스 부통령은 당시 미국 올림픽 대표단을 이끌고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했다. 2017년 북한에서 억류됐다 풀려난 뒤 숨진 미국인 대학생 고(故) 오토 웜비어 부모 프레드·신디 웜비어 부부를 대동해 탈북민들과 만나고 경기도 평택 해군 2함대, 천안함 기념관 등을 방문하기도 했다.
펜스 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우선순위(priority)는 한반도 통일이었기 때문에 나와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 김영남 간 만남을 열망했다(eager for)”고 했다. 2월 9일 강원도 평창군 용평리조트에서 안토니우 구테헤스 유엔 사무총장 등 국내외 주요 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사전 환영 리셉션이 열렸다. 펜스 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연출(choreographed)로 인해 북한 인사들과 나는 헤드 테이블에 같이 앉는 걸로 돼 있었다”며 “연회 시작에 앞서 그룹별 사진 촬영이 예정돼 있었는데 아베 총리와 나는 고의로 지각하고(intentionally late) 참여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로 펜스 부통령,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이 환영사를 마칠 때까지 입장하지 않은 채 별도의 방에서 대기하며 따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리셉션 시작 시간 10분을 넘겨 행사장에 도착한 펜스 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에스코트(escort)를 받았다. 그는 “문 대통령이 나와 김영남, 김정은 간 만남을 정중하게 강요(politely force)할 것이 명백했다”고 했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은 “그렇게 되면 북한에게는 거대한 상징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내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no chance)었다. 문 대통령이 나와 아베 총리, 우리 배우자들을 김영남 쪽으로 안내했지만 거리를 유지했다”고 했다. 펜스 부통령은 “(김영남 위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정상들과 악수를 한 뒤 행사장 밖으로 퇴장했다”고 썼다.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2018년 2월 9일 평창올림픽 개회식 리셉션에서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오른쪽)과 악수를 하고 있다. 왼쪽은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 /조선일보DB© 제공: 조선일보 올림픽 개막식 때도 펜스 부통령은 “뒷줄 바로 오른쪽에 앉아있던 김여정을 무시했다(ignored)”고 했다. 그는 “당시 아양을 부리던(fawning) 국제 언론들은 한국 전쟁 이후 이른바 ‘백두 혈통’ 중에는 처음 남한 땅을 밟은 김여정을 ‘북한의 이방카 트럼프’라 표현했다”며 “이런 언론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여정이 수천, 수만 명의 시민을 죽이고 억압한 정권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당시 펜스 부통령은 개막식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부, 아베 일본 총리와 같은 줄에 앉았는데 “다른 자리 배치도 제안받았지만 거기 앉거나 같이 서서 한·미·일이 북한의 공격성에 맞서 단결돼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펜스 부통령의 이 같은 증언은 당시 미·북 2인자 간 만남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문재인 정부 청와대 인사들의 얘기와도 배치되는 것이다. 그날 오전까지만 해도 청와대 측은 리셉션 헤드 테이블 좌석 배치 관련 “미·북 양쪽의 양해를 받았다” “펜스 부통령, 김영남 위원장 두 사람이 한자리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이 김영남 위원장과 조우를 피해 행사장을 퇴장하자 윤영찬 당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펜스 부통령은 일정 협의 과정에서부터 불참 의사를 내비쳤고, 미국 선수단과 6시 30분 저녁 약속이 돼 있어 사전 고지가 된 상태였다. 테이블 좌석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펜스 대통령의 기억은 달랐다. 그는 회고록에서 “모든 대표단이 만찬을 위해 자리에 앉았을 때 그 방에는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네임 카드에는 ‘펜스 부통령’ ‘펜스 여사’라고 적혀 있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