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두레 마을과 박경리 "토지(土地)"의 “의란진 고성촌”
공동체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연대 조직, "두레마을"은 그 정신적, 추상적 구현 목표는
말할
것도 없고,
친 환경적 농산 제품, 예컨대 된장, 간장, 참기름, 두부, 꿀 등에 붙는
구체적인
브랜드 네임으로도 어언 이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두레의
PR 요원이 아닙니다, 오해가 두렵습니다).
(주위에는 다른 훌륭한 친 환경 공동체들도 있다.)
이제껒
좁은 국토의 우리나라에서도 유기농과 친 환경적 재배로 이름을 날린 두레
마을이
광활한 중국 동북 3성의 들판을 바라보며 국가간의 공동선에 착안치 않을리
없었을
것이고, 기어이 이 방면에 관한 한중간의 상호 협력 관계를 일구어 낸지도 벌써
여러해가
되었다고 한다.
솔직히
내가 연변 두레마을에 관심이 간 것은 여기에서 나오는 된장과 간장, 꿀과 청정
식품을
맛본 이후부터였는데,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오래 망설이고 있던 차,
마침
그 곳을 방문하는 차량이 있어서 훌쩍 올라탔다.
(마침 꿀을 뜨고 있었다. 권하여서
먹어보았더니 꿀맛이었다---.)
물론
연길에서 이 곳 까지는 하루에 한번 시간을 맞추어 떠나는 시외버스 노선도 있고
택시를
대절하는 방법도 있지만 아무래도 시간관리, 시간적 여유가 마땅치 않아서
이제껏
내 마음의 숙제로 남아있았던 것이다.
거리라고
해야 연길에서 45km이지만 걸리는 시간은 아직 도로 사정 때문에 만만치
않으리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중앙에 첨탑처럼 보이는 것은 찜질방이었다.)
물론
일박을 염두에 둔다면 이곳 보다 좋은 곳이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하루
저녁을 자고 세끼 식사에 도합 50원이라면 아무리 중국이라도 싼값이긴 하다.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망설이다가 좋은 기회가 갑자기 온 것이다.
그리고
막상 훌쩍 떠나 살펴보니 그 사이에 길도 많이 포장이 되어서 두 시간 이내의
거리로
단축이 되어 있었고 지금도 새 다리를 놓는 등, 금방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 될
모양새였다.
1997년부터
중국의 "길림성 연길시 의란진 연화동"에 농토 120만평을 확보한 두레
마을은
그동안 여러 시행착오와 역경도 있었지만,
이제는
자연 친화적 대농장 및 휴식 공간의 확보와 제공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크게
성취해
나아가고 있음을 동구 밖 입구에서부터 느낄수 있었다.
(연변 작가들을 위한 창작의 산실)
들판에는
여러 가지 작목의 유기 농산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고 중심지대에
올라간
여러동의 조형미에 가득한 건물들도 재미로우면서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두레마을의 운영 방침과 관리 방식 자체도 그 사이에 많은 개혁과 변신을
꾀하여
왔다고 책임을 새로 맡은 정병석 총경리(사장)가 설명한다,
우선
중국 사회와의 담을 과감하게 헐어서 너무 목적지향 중심의 배타적 분위기를 깨고
누구에게나
어떤 단체에게나 크게 목적이 다르지 않는 한 수련 장소를 널리 제공하여
기본상
수익을 담보하면서,
연변
자치주와 나아가서 중국 사회 전반에 두레 마을이 갖는 독특한 장점과 경험을
공여하여
상호 이익을 도모한다는 전략을 폈다고 한다.
(두
나무가 하나로 합친 연리지 나무도 이곳의 특징이고 자랑이었다.)
“작가의
집”이 만들어져서 유명, 무명작가들의 명상과 집필 공간이 장만되었고,
언론인들이나
사업체의 연수를 위한 시설도 있었고, 특히 한국의 여러 대학과 단체들의
고유한
수련장을 그 이름과 함께 건축한 것도 이러한 변신의 맥락이며 이채로웠다.
(봉평이 아니라 연변의 메밀 꽃 필 무렵---)
분위기
변환의 또다른 구체적 예로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이곳에서도
재현하여서 광활한
메밀꽃 단지도 만들어 놓았고, 두만강의 지류 일부를 막아서 만든
천연
풀장,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북한의 민둥산에 심기 위한 나무 묘목을
기르고
있는 양묘장이었다.
연변을
밟은 사람치고 북쪽의 민둥산에 가슴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으랴.
그곳에
잣나무를 심자는 이 곳 두레마을의 뜻이 바로 이 양묘장에서 자라고 있었다.
6만원을
내면 묘목장 한 블록을 살 수 있고 나중에 식재를 할 때에는 이름도 새겨준다는
이
사업은 더불어 사는 공동체, 나눔을 베푸는 두레 공동체의 진면목을 담은 상록수
정신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두레마을에는 한국의 여러 단체에서 주선한 수련과 봉사의 모임 들이 끊임없이
개최되어서
심신을 단련하고
있었다.
친환경적
교육의 장소로 여기만한 곳도 없을 것이고 가격이야 우리나라의 몇 분의
일쯤이나
될까---.
교통편이
문제이지만 비행기만 탈 것이 아니라 속초항에서 훈춘으로 들어오면 관광과
의식
깊은 볼거리와 역사 공부를 접하게 되고 비용도 많이 절감이 될 것이다.
두레
마을은 아직도 어려움에서 활짝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지만 이제는 초기의 편견과
오해로
관찰의 대상이 되던 분위기에서는 이제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처음에
시도하였던 건강 관련 부분은 찜질 방을 중심으로 원래 본부장을 하던 분이
독립적으로
맡아하면서 500만원이면 분양이 되는 실버타운 식 건강 공동체로 계속
추진이
되고 있었다.
(귀틀집이 조선족 마을임을 나타내준다.
의란진 고성촌 마을 들어가는 곳이다.)
두레마을의
현주소는 “연길시 의란진 연화동”이다.
산
하나를 넘으면, 문호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길상과 서희의 족적이 지나간 마을,
“의란
진, 고성 촌”이 있다.
원래
이 의란진 마을은 일제 강점기에 강원도 쪽 출신들이 많이 들어와 집거하였기에,
얼마
전에는 강원도
분들이 선조의 인연을 찾아 이 곳까지 방문하여서 이 동네 분들
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는데, “토지”의 인연으로 보면 이제는 경상남도 하동군 평사리
분들도
좀 나서야할 때가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평사리 쪽은 “토지”가 매체가 되어 외부의 내방객이 많다고 한다.
물론
잠시 들러가는 분들이라 분답기만 하지 마을에 특별한 이득이야 없을 것이다.
여담
같지만 박경리 작가의 출생지와 가까운 이 마을은, 작가가 집필을 할 당시에는
직접
다니지 않아서 지형지물의 묘사에 차이가 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문학 작품상의 특징으로 항상 엄존하는 문제이고 때로는
낯설게
하기의 문학 기법상의 현상이기도 한데, 그렇다고 “토지”의 본적이 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앞에서도 말했듯이 평사리 마을이 지금 소설, “토지”로 인하여 무슨 물질적
혜택이야
있으랴만, 마음으로라도 두 마을이 연결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다.
도문에
있는 정화촌의 “옥천 마을”이라든지 왕청 태양촌의 “안동마을”, 그리고 또
어딘가
큰 규모로 있다는 “담양마을”이라든지, 내가 이름을 잊은 몇몇 마을들이 고향
마을과
인연을 이미 맺은 것처럼 그런 결실을 꿈꾸어 본다.
두레
연화 마을은 또 독립군이 활약하던 넓고 깊은 골이기도 하였다.
김좌진,
홍범도, 김일성 등등의 이름이 실제와 구전의 경계를 넘나드는 민족사적인
고을이
바로 여기라고 하였다.
이야기가
일제 강점기와 독립군의 지경으로 건너오니 분노가 치민다.
일제가
소위 경신년 대 학살기에 우리 동포들에게 저지른 만행은 천추에 맺혀 어이
다
갚으려는지 모르겠다.
카나다
선교사나 영국의 신문기자들이 목숨을 걸고 취재한 것만으로도 이 때
약
3만 명의 동포 양민이 학살당하였고 불태워진 농가와 학교는 부지기수였으며
부녀자는
도처에서 겁탈을 당하는 등,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일부나마 지금 기록에
남아있다.
그러자니
그 시절, 이 산골 저 마을에서 알려지지 않은, 기록에도 오르지 못한 처참한
학살극은
또 얼마나 많았으랴---.
모르는
게 약이고, 세월이 약이라는 말은 이 지경에 와서야 부끄러운 말장난이다.
세계화의
가도에서 우리가 시침 떼고 넥타이를 바루며 넉넉한 체 하는 자세가 초라할
뿐이다.
두레마을에
그런 역사 교육까지 짐으로 지우자는 생각은 없다.
조심조심
이국땅에서 만든, 인류 공동체의 꿈이 담긴 소중한 땅에 너무 과한 짐을
섣불리
지우지는 말고, 우리의 여러 교육기관에서 국내외적으로 실증적 자료를
이런저런
기회마다 지속적으로 제시하면서, 또 발굴하면서, 잊지 못할 것은 잊지 말며
인간의
포악한 본성을 서로 경계하여 앞날을 살피는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다.
(두레 마을에서 나오다가 또다른 자연친화
휴양소를 지나는데 고성촌 쪽으로
해가 빠지고 있었다.)
위도가
높아서 백야까지는 아니어도 여름철 저녁나절이 일찍 오지 않았으나 관리하는
분들은
캠프파이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자는 초대를 뒤로하고 연길로 길을 재촉하였다.
두레
마을을 나오는 지프차의 차창으로는 옛날 옛적에 맡아보았던 싱싱한 여름 저녁
바람이
넘쳐 들어왔다.
고성촌
마을과 의란진 사무소를 지나는 우리 마음은 분하기도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오늘밤 잉와타고 떠나는 장춘과 길림시 여정으로 여러 날을 비웁니다.
여기는
벌써 여름이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을 슬쩍
집어넣고 세월을 꿰차서
도망가려는 채비를 차립니다.)
(교정의 개살구 나무에 과육이 노랗게
익어가고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침, 저녁 서늘한
바람에 코스모스가 가을을 재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