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淵蓋蘇文)
고구려 동부대인(東部大人) 연태조(淵太祚)의 아들,개금(蓋金),개소문(蓋蘇文)이
라고도 하는데 15세에 부친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다. 자신을 거부하며 제거하려던 대인들을 잔치를 열어 초청한다음 대신과 대인 180여명 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 한후 보장왕을 옹립하였으며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었다. 그는 한때 고구려에 사신으로 온 신라 김춘추를 감금한적도 있었으며 당태종이 이끌 고온 17만 대군과 개모,요동,백암,안시성의 60여일간의 혈전에서 당군을 격퇴시킨 영웅이었다. 따라서 그가 안시성에서 당군과 전쟁을 치루었다는 설도 부정 할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 삼국사기에도 그를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 하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 된 사대주의 사상에 입각한 호칭이 아닐수 없다,김부식의 곡학아세 라 아니할수 없다. 왠고 하니, 연개소문의 연(淵)자는 당태조 이연(李淵)의 연자와 같다 하여 당나라가 연개 소문의 연씨 표기를 천자로 일방적으로 격하시켜 쓴것인데 어찌 우리 마져도 저 개돼지 만도 못한 뙈놈들 행위대로 따라해야 한단 말인가?
양만춘(楊萬春) 장군(將軍) 고구려 보장왕때 안시성(安市城) 성주(城主) 일찌기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켰을때 개소문에 복종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 성주의 지위 를 지켰다고 한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개모,요동,백암성을 함락 시키고 고연수,고혜진의 고구려, 말갈의 연합군 15만을 깨트리고 안시성으로 공격해 오자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60 여일간의 항전 끝에 물리 첬으며 그의 화살로 당태종의 눈을 쏘아 맞혓다 한다. 당나라 대군이 철수할때 양만춘이 성루에 올라가 당태종에게 송별의 예를 하니 당태종 이 장부로서의 호기를 발동하여 그에게 비단 100필을 보내어 성의 방어를 하례 하는 한편 왕에게 충성하라는 격려를 하였다 한다. 이상의 내용은 정사에는 기록이 없고 동춘당선생별집과 열하일기에 전할뿐이다.
남생(男生) 연개소문의 장남, 아버지 대막리지가 죽자 뒤를 이어 막리지가 되어 삼군대장군을 겸하 고 뒤에 대막리지에 올랐다. 두아우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전국의 성을 순시하러 떠난 사이 형제간을 이간시키는 무고 를 믿고 아우 남건(男建)이 남생의 아들을 죽이고 막리지가 되었으며 군사를 내어 남생을 공격 하였다. 아! 슬픈일이었다, 남생은 그로 말미암아 당나라에 붙어 고구려를 망가뜨리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민족성쇠의 운명이란 말인가? 그가 당나라로부터 받은 작위는 우위대장군 변국공(右衛大將軍 卞國公)이다. 그의 묘는 낙양(洛陽) 남쪽에 그의 아우 男産의 묘와 함께 있다 한다. 수문제(隋文帝),양견(楊堅) 서기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 받아 세운나라가 수(隋) 나라인데 그는 본래 북주의 수왕(隋王)이었는데 황제인 선제로부터 나라를 선양받아 등극한 인물이다. 그는 고구려(영양왕9년)를 첫으나 실패 하였으며 그의 아들 양제에 의하여 죽었다.
수양제(隋煬帝),양광(楊廣) 부왕 수문제 양견의 둘째아들,서기 600년 형 양용(楊勇)을 밀어내고 자신이 태자가 되 었으며 4년후 궁전정변을 일으켜 형과 아버지를 죽이고 등극 하였다. 그는 등극후 부왕의 유업을 계승받아 대운하를 강행 하였으며 토곡혼과 돌궐을 첫다. 또한 돌궐과 손을 잡을수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처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遠征) 하 였으나 모두 실패 하였다. 개국후 얼마 않되는 기간동안에 일으킨 대대적인 토목사업과 고구려와의 기나긴 전쟁 은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이 높아져 곳곳에서 반란이 속출 하여 결국 나라를 연지 38년 만에 망하고 만다.
당태조(唐太祖),이연(李淵) 수나라 태원(太原)유수(留守) 이연(李淵)은 점차 수왕조의 실정에 등을 돌린 민심이 반란 으로 도처에서 터져 나오자 태원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 취 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 하였다. 그러나 서기 618년 강도에서 수양제가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서 살해되자 공제로 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업하게 되었다.
당태종(唐太宗),이세민(李世民) 당태조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 하였으며 중국역사상 몇않되는 명군(明君)으로 꼽힌다. 아버지 이연이 태원유수 시절 그는 나이 20에 천하가 어지러워짐에 아버지를 설득하여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를 세우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를 질투하는 형인 황태자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을 쓰러뜨리고 아버지 로부터 양위받아 서기 626년에 즉위 하였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깊었으며 무술,병법에도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두루 갖추어 치세에 업적을 남겨 그의 시대를 정관 의 치(貞觀의治)라 칭송 받으며 후세 제왕(帝王)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옥에도 티가 있다 하던가? 그는 올바른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를뿐만 아니라 만년에 대 고구려 전쟁을 실패 하였고 그로 인하여 사후에 정권이 동요하게 되어 마침내 저 유명한 측천무후 가 실권을 장악 하게 되는 악연을 만든다.
측천무후(側天武后) 당나라 창업에 공헌한 무학(武학)의 딸이다. 뛰어난 미모로 인하여 14세에 당태종의 후궁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비구니가 되었다. 다시 고종의 눈에 뛰어 총애를 받게 되자 황후 왕씨를 모함하여 내쫒고 스스로 황후가 되었으며 수년후 고종의 건강을 핑계삼아 스스로 정무를 맡아 보며 정권을 휘둘렀다. 또 고종이 죽자 그의 아들 중종,예종을 차례로 등극시키고 무씨의 천하를 이루었다. 서기 690년에는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주(周)라 하며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로서 15년간을 지배 하였다. 그는 음탕하기도 하며 잔학하고 탄압정치를 자행한 악녀로 으뜸이다. 당초의 부군인 태종을 섬기다가 태종이 죽자 태종의 아들 고종과 또 짝을 이루었으니 어찌 한여자가 애비와 자식을 차례로 부부지간의 연을 맺을수 있단 말인가?
기타인물 건무(建武) : 고구려 영류왕,영양왕의 이복동생,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했을때 잡아 간 포로들을 송환했고 당나라 고조 이연과 화친했다. 장손무기(長孫無忌) : 하남 낙양사람, 당태종 정비 문덕황후의 오라비,태종의 정벌에 수 차례 종군했으며 학문과 경전에 두루 밝았다. 고종이 측천무후를 황후로 책봉하려 할때 반대했다가 관직에서 쫒 겨나 검주에서 죽었다. 위징(魏徵) : 산동성 사람,수나라말기 혼란기에 당태조 이연에게 귀순하여 후에 태종에게 크게 쓰였으니 諫議大夫,宰相을 역임했고 굽힐줄 모르는 직간으로 당나라 관계에 기친 영향은 실로 어마어마 하다. 계필하력(契苾何力) : 唐의 武將,당태종이 고구려 1차침공때 종군했고 2차침공때는 소정방 이 수군을 계필하력은 육군을 통솔하여 평양을 첬으나 남생에게 패 하였다. 이적(李勣) : 산동사람,본래 서씨(徐氏)였으나 고조 이연에게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름도 세적(世勣)이였는데 당태종 李世民의 "世"자를 피하기 위해 뺏다. 수나라 말기 그는 도둑의 괴수였는데 당에 항복,태종에게 발탁되어 이정과 함게 돌궐을 격파 했으며 고종때 재상이 되어 고구려를 치기도 했다. 유인궤(劉仁軌): 唐將, 백제정벌군 계림대총관
<추신>
그 밖의 자료는 희소해서 올릴수 없으며 인물에 대하여 모두다 언급하기가 시간상 힘이 드네요 ^^
상고사에 대하여는 그만큼 자료가 부족 하다는 이야기도 되지요 ~
분명한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조선상고사를 많이 참고하여 사극이 제작되고 있으며 ...기회
가 있다면 조선상고사 를 사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강촌이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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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제야 의문이 좀 풀렸어요... 장대한 내용과 글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고 무측천이 역시 아버지와 아들사이를 오고간 인물이었군요.
내가 불리하다고 딴나라넘 편에서서 나라를 망치는 일이야 우리 민족사에서 여럿이니 그중에 한 인물이 남생이었군요. 망할 매국넘들, 예나 지금이나 존심없는 인간들땜에 나라가 요모양 요꼴!! 으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