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으로 한국 경제를 망친 박정희의 내막을 공개하면서
박정희 향수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발전에 대한 공적과 청렴성이다. 박정희를 그리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박정희의 행적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되었다. 네티즌들의 전파력이 그만큼 크다는 이야기다.
이들 중 일부는 박정희가 한때 다카키 마사오란 군인으로 친일을 했음도 알고 관동군 별동대에 소속되어 독립투사를 잡고 죽이는 일에도 가담했으며 1948년엔 남로당에 가입하여 군사부장을 지내다 적발되자 동료를 밀고하여 혼자 살아남는 사실까지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사코 박정희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서민의 보호자로 혹은 아사자가 속출하던 궁핍한 그 시절 어려운 보릿고개를 넘기게 해준 국부로 추앙하는 것이다. 또한 새마을 운동의 선구자로 새마을 정신을 시골 구석구석까지 전파하여 농어촌의 무기력과 찌든 가난을 추방하고 청결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도록 만든 농어촌의 혁명가가 바로 박정희가 아니냐는 주장이다.
이런 성향은 지금까지도 히틀러를 역사적인 인물로 영웅시하는 신판나치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저들은 <나의투쟁>을 금과옥조처럼 받들며 히틀러의 명민한 세계전략과 탁월한 정치술과 그리고 예리한 통찰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므로 누가 히틀러의 학정과 야만성을 예를 들며 아무리 깨우치려 해도 마이동풍(馬耳東風) 인 것이다.
박정희 문제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박정희의 서민적이고 청렴한 면모. 그러나 그동안 밝혀진 자료들을 정작 살펴보면 박정희의 놀라운 부정의 실체와 부패의 행보가 금방 드러난다.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의 날랜 공작원들이 정치공작에 광분하던 시절이어서 금융과 회계가 투명하지 못하고 언론 또한 숨죽여야하므로 당시 정경유착의 폐해는 훨씬 심각할 터지만 비밀은 오랜 세월동안 가려져 있었다.
히틀러나 시저의 공통점은 독재 정권을 유지하는데 막대한 자금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18년의 독재정권을 유지하려면 거액의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도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철권통치가 강화될수록 떨어지는 지지율 때문에 정치자금은 더욱 많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정치인들을 장악하기 위해선 공천권을 행사하며 선거자금까지 뿌려야했고 군부까지 다독이려면 전직이든 현직이던 군부요인을 매수해야하는 것이다. 여야 정치인들에게도 수시로 떡값을 하사해야 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통치자금은 은밀히 조성하면서도 여당실력자가 정치자금을 따로 조성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복인 김종필과 정일권도 의심할 정도였다.
유신체제 직전인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에 대한 불신임건의안을 둘러싸고 국회 내에서 항명파동이 일어난다. 박대통령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백남억과 김성곤 그리고 길재호 등 당 중진들을 권좌에서 축출한 뒤 친정직할체제(親政直轄體制)를 구축한다. 그리고 유신을 발동하고 긴급조치를 연이어 발령하면서 영구집권의 야심을 키우는 것이다.
1966년 3월 미 CIA의 <한일관계의 장래> 라는 심층보고서의 내용
<민주공화당이 일본에게 정치자금을 받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 일본회사들은 1961-65년 사이에 공화당 예산의 3분의 2를 제공했다. 6개 회사가 6,600 백만 달러를 제공했는데 각각 100만 달러에서 2,000만 달러를 주었다.>
<김종필 당의장은 1967년 대선자금으로 2,60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수의 일본회사들이 김종필에게 한일회담을 추진한 감사의 표시로 돈을 주었고 한국에서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려고도 돈을 냈다. 공화당은 재일 한국인 회사들로부터도 돈을 받았다. 서로 연합한 8개 한국회사들은 최근 정부가 방출한 60,000 톤의 쌀을 일본에 수출하면서 공화당에 115,000달러를 냈다고 한다.(조선일보사발간 한국현대사 극비자료}>
1975년 걸프의 한국책임자 굿맨이 미 의회조사(議會調査)에서 증언한 내용
<1966년에 이후락 비서실장이 1백만 달러를 현금으로 스위스 은행에 넣어달라고 했다. 미국무성은 한국정부에게 미국처럼 사적인 정치자금을 모아 선거를 치르도록 권고했고, 한국의 미국회사와 기업체로부터도 돈을 거두라고 제의함에 따라 걸프도 기부한 것이다>.
1975년 봅 도시 걸프사장이 미 상원의 다국적 소위원회 청문회에서 증언한 내용
<1966년의 1차 헌금 액수는 1백만 달러였다. 1970년 두 번째 헌금 액수는 3백만 달러 였다. 다당제 정치제도 하에서 한국여당은 상당한 정치자금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여당 지도자들은 외국기업가에게 정치자금을 내라며 거센 압력을 가했다. 1969년 나는 서울로 날아가 공화당 재정위원장이며 정치자금 모집창구인 김성곤을 만났다. 그는 처음 1,0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러나 300만 달러로 낙착되었다. 돈은 걸프 본사가 지출했지만 바하마에 있는 바하마 탐사주식회사가 선지급금을 돌려 한국에 건넨 것이다.>
이들 증언으로 확인된 사실은 1960년대에 공화당은 막대한 선거자금이 필요했다는 점과 이런 정치 자금은 일본과 외국회사들로부터 모금됐으며 주로 스위스 비밀은행을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국제적인 돈세탁도 불사했다는 것. 정치자금 모집책은 이후락 비서실장, 장기영 부총리,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형욱 정보부장 등이었다.
미 하원의 한미관계보고서에 의하면 김성곤은 수표를 관리했고 김형욱은 현금을 이후락은 스위스은행의 비밀계좌를 관리했다고 주장한다.
한미관계보고서의 내용.
<1970년에 청와대의 한 관리는 이후락과 김성곤 그리고 김형욱이 각기 1억 달러의 개인재산을 모았다고 했다. 미 하원 소위원회의 증언에서 김형욱은 김성곤이 모은 정치자금 가운데 75만 달러를 자신이 개인용도로 가져다 썼다고 했다. 이후락은 이 자금들을 스위스은행 계좌에 대통령용이라는 명목으로 입금했다. 이후락의 아들 이동훈은 박대통령이 비밀자금이 필요했던 것은 지지자들에게 돈을 주고 정적을 매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미국정부의 한 보고서에는 거의 모든 야당의원들이 돈을 받았다는 어느 한국기업인의 진술이 실려 있다. 이 실업인의 말은 대통령은 군부의 배신을 우려하여 1970년부터는 더 많은 육군의 핵심 지휘관들에게 돈을 풀었다는 것이다
정치자금의 대가로 외국회사들은 엄청난 이권을 얻는다. 걸프는 유공이 울산에 정유공장을 지을 때 25%의 주식투자를 했다. 걸프는 진해화학에는 1,050만 달러를 투자하여 50%의 주식과 함께 경영권을 인수했다. 걸프는 투자액의 150%를 뽑아 미국으로 송금할 때까지 경영권을 행사하기로 한데다 이익률을 최저 년 20% 정도로 보장하는 조항을 한국 측(충주비료)과의 계약서에 집어넣었다.
진해화학에 대한 나프타 인광석, 유황, 염화칼리 등 원료공급권도 걸프가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방적으로 불평등한 계약의 결과 한국 기업은 속빈강정 꼴이 되었다. 반면 걸프는 자신들이 독재정군에 은밀히 지급한 정치자금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이윤을 챙겨감으로 한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1960년대 시절 공화당내 박정희 직계세력과 정치자금 모집책들은 정치자금과 이권을 서로 교환하느라 분주했다. 그 바람에 경제는 정치권에 종속되었고 크거나 작거나 기업인은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박정희는 마음대로 검은 자금을 끌어 모을 수 있었다.
이렇게 걸태질한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박정희는 부하들의 충성을 사고 정적들 대한 정치공작을 마음대로 자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독재의 기반을 더욱 다져가는 것이다. 박정희는 18년 독재정권을 제왕의 권위로 이어갔고 경제는 그만큼 왜곡되고 마는 것이다.
박 정권 시절에 시작된 정경유착의 심화형상은 결과적으로 중복투자 등 자원낭비를 불러왔고 경제계는 앞으로 맞을 경제대란의 싹을 진작부터 키우고 있었던 셈이다. 박정희를 가리켜 경제를 살리고 키운 경제의 대부요 청렴한 대통령으로 평가함은 히틀러를 간디로 평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