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

공사판에서 대학생이 내게 한마디…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업자가 250만 명이던 시절 하루 16시간씩 악착같이 일하며
'광부와 간호사'로 결혼식 치른 나는 '교수 광부'가 되었다
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
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
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광산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
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
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47년 전 오늘, 우리는 파독(派獨) 광부가 되었습니다

공사판에서 대학생이 내게 한마디…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가난에서 벗어나려던 나…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실업자가 250만 명이던 시절 하루 16시간씩 악착같이 일하며
'광부와 간호사'로 결혼식 치른 나는 '교수 광부'가 되었다
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
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
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광산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
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
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신랑이 늦둥이라 저와 나이차가 50 년 넘게 나시는 어머님.. 저 시집오고 5 년만에 치매에 걸리셔서 저혼자 4 년간 똥오줌 받아내고,잘 씻지도 못하고, 딸내미 얼굴도 못보고, 매일 환자식 먹고, 간이침대에 쪼그려 잠들고, 4 년간 남편품에 단 한번도 잠들지 못했고, 힘이 없으셔서 변을 못누실땐 제 손가락으로 파내는 일도 거의 매일이었지만 안힘들다고, 평생 이짓 해도 좋으니 살아만 계시라고 할수 있었던 이유는 정신이 멀쩡하셨던 그 5년간 베풀어주신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제나이 33살 먹도록 그렇게 선하고 지혜롭고 어진 이를 본적이 없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정신치료를 받고 계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견디다 못해 제가 10살때 집나가서 소식없는 엄마.. 상습절도로 경찰서 들락날락 하던 오빠.. 그밑에서 매일 맞고..울며 자란 저를 무슨 공주님인줄 착각하는 신랑과 신랑에게 모든 이야기를 듣고는 눈물 글썽이며 한시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다고 2천만원짜리 통장을 내어주시며, 어디 나라에서는 남의집 귀한딸 데리고 올때 소팔고 집팔아 지참금 주고 데려 온다는데 부족하지만 받으라고...
그돈으로 하고싶은 혼수, 사고싶은거 사서 시집오라 하셨던 어머님... 부모 정 모르고 큰 저는 그런 어머님께 반해, 신랑이 독립해 살고있던 아파트 일부러 처분하고 어머님댁 들어가서 셋이 살게 되었습니다.
신랑 10살도 되기 전에 과부 되어, 자식 다섯을 키우시면서도 평생을 자식들에게조차 언성 한번 높이신 적이 없다는 어머님... 50 넘은 아주버님께서 평생 어머니 화내시는걸 본적이 없다 하시네요.

바쁜 명절날 돕진 못할망정 튀김 위에 설탕병을 깨트려 튀김도 다 망치고 병도 깬 저에게 1초도 망설임 없이 "아무소리 말고 있거라" 하시고는 늙으면 죽어야 한다며 당신이 손에 힘이 없어 놓쳤다고 하시던 어머님...
단거 몸에 안좋다고 초콜렛 쩝쩝 먹고있는 제 등짝을 때리시면서도 나갔다 들어오실땐 군것질거리 꼭 사들고 "공주야~ 엄마 왔다~" 하시던 어머님..

어머님과 신랑과 저. 셋이 삼겹살에 소주 마시다 셋다 술이 과했는지 안하던 속마음 얘기 하다가, 자라온 서러움이 너무 많았던 저는 시어머니앞에서 꺼이꺼이 울며 술주정을 했는데,,,
그런 황당한 며느리를 혼내긴 커녕 제 손을 잡으며, 저보다 더 서럽게 우시며, 얼마나 서러웠노,, 얼마나 무서웠노.. 처음부터 니가 내딸로 태어났음 오죽 좋았겠나,, 내가 더 잘해줄테니 이제 잊어라..잊어라... 하시던 어머님...

명절이나 손님 맞을때 상차린거 치우려면 "아직 다 안먹었다 방에 가있어라"하시곤 소리 안나게 살금 살금 그릇 치우고 설겆이 하시려다 저에게 들켜 서로 니가 왜 하니, 어머님이 왜 하세요 실랑이 하게 됐었죠...
제가 무슨 그리 귀한 몸이라고.. 일 시키기 그저 아까우셔서 벌벌 떠시던 어머님. 치매에 걸려 본인 이름도 나이도 모르시면서도 험한 말씨 한번 안쓰시고 그저 곱고 귀여운 어린 아이가 되신 어머님...

어느날 저에게 " 아이고 이쁘네~ 뉘집 딸이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저 웃으면서 "나는 정순X여사님(시어머님 함자십니다)딸이지요~ 할머니는 딸 있어요~?" 했더니 "있지~~ 서미X(제이름)이 우리 막내딸~ 위로 아들 둘이랑 딸 서이도 있다~" 그때서야 펑펑 울며 깨달았습니다.
이분 마음속엔 제가, 딸같은 며느리가 아니라 막내시누 다음으로 또 하나 낳은 딸이었다는걸... 저에게... "니가 내 제일 아픈 손가락이다" 하시던 말씀이 진짜였다는걸...

정신 있으실때, 어머님께 저는
항상 감사하고 사랑하고 잘하려 노력은 했지만 제가 정말 이분을 진짜 엄마로 여기고 대했는지... 왜 더 잘하지 못했는지, 왜 사랑하고 고맙단 말을 매일 매일 해드리진 못했는지.. 형편 어렵고 애가 셋이라 병원에 얼굴도 안비치던 형님.. 형님이 돌보신다 해도 사양하고 제가 했어야 당연한 일인데, 왜 엄한 형님을 미워했는지.. 말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사무치고 후회되어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답니다.
밤 11시쯤,, 소변보셨나 확인 하려고 이불속에 손 넣는데 갑자기 제 손에 만원짜리 한장을 쥐어 주시더군요. "이게 뭐에요?" 했더니 소근소근 귓속말로 "아침에~ 옆에 할매 가고 침대밑에 있드라~ 아무도 몰래 니 맛있는거 사묵어래이~" 하시는데 생각해보니 점심때쯤 큰아주버님도 왔다 가셨고, 첫째, 둘째 시누도 다녀갔고 남편도 퇴근해서 "할머니~ 잘 있으셨어요~?" (자식들 몰라보셔서 언젠가부터 그리 부릅니다) 인사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침 7시에 퇴원한 할머니가 떨어트린 돈을 주으시곤 당신 자식들에겐 안주시고 갖고 계시다가 저에게 주신거였어요. 그리곤 그날 새벽 화장실 다녀왔다 느낌이 이상해 어머님 코에 손을 대보니 돌아가셨더군요....
장례 치르는 동안 제일 바쁘게 움직여야 할 제가 울다 울다 졸도를 세번 하고 누워있느라 어머님 가시는 길에도 게으름을 피웠네요...
어머님을 닮아 시집살이가 뭔지 구경도 안시킨 시아주버님과 시누이 셋. 그리고 남편과 저.. 서로 부둥켜안고 서로 위로하며, 어머님 안슬퍼하시게 우리 우애좋게 잘살자 약속하며 그렇게 어머님 보내드렸어요..
 오늘이 꼭 시어머님 가신지 150일 째입니다.. 어머님께서 매일 저 좋아하는 초콜렛, 사탕을 사들고 오시던 까만 비닐봉지. 주변에 널리고 널린 까만 비닐봉지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어머님이 주신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를 배게 밑에 넣어두고.. 매일 어머님 꿈에 나오시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말해드리려 준비하며 잠듭니다.
다시 태어나면 처음부터 어머님 딸로 태어나길 바라는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부디 저희 어머님 좋은곳으로 가시길.. 다음 생에는 평생 고생 안하고 평생 남편 사랑 듬뿍 받으며 살으시길 기도 해주세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명확히 알려주는 글 입니다.-
사랑과 인생 - 김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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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찬바람이 부는 겨울, 12월이 되면 아득한 옛일이 떠오른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1963년 12월 21일, 그날은 120명의
한국 광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역만리 독일 땅을 처음 밟은
날이었다. 1977년까지 독일에 간 광부가 7968명.
파독광부(派獨鑛夫)!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낯선 단어겠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자원은 물론 수출할 만한 기술력도 없었기에 인력(人力),
사람도 수출했다. 광부뿐이 아니라 간호사 그리고 군인까지.
나는 1940년 오지 중의 오지 전라북도 장수에서 태어난 ‘촌놈’이다.
또한 춘궁기 보릿고개를 ‘제대로’ 겪은 빈농의 자손이다. 날마다 10리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고, 하루 두 끼 밥 먹기가 힘들어 칡뿌리·
소나무 껍질·진달래꽃을 캐 먹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릴 적부터 간직해 온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전북 전주로 가서 중학교 시험을 쳤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 한 가마니를 빌리려 동네 부잣집 앞마당에서 하루를 꼬박
버티셨다. 자식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넓으셨으면 그러셨을까? 돌아가시기
전 40여일이나 물 한 모금 못 넘기시면서도, 막내아들의 사진과 박사
학위증을 품에서 안 놓으셨던 어머니였다.
간신히 고교를 졸업했지만 나이가 차 군입대 영장이 나왔고, 군복무를
마친 뒤 고향에 내려왔으나 가난의 그림자는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전 국민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이 넘던 시절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공사판에서 일하던 중 함께 일하던 한양대 공대생이 내게
한마디 던졌다. “권형, 나하고 독일 갈 생각 없수?” 파독 광부로 가자는
얘기였다.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해방되고 싶어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하지만 광산 일은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헬멧과 안전화를 착용한 뒤, 4L 이상의 물통, 무릎보호대, 충전
배터리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소위 ‘막장’이라는 지하 8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간다.
숨이 콱콱 막히는 지하갱도에서 땀이 밴 속옷은 뚝뚝 물이 떨어지고,
장화 안에 가득 고인 땀을 몇 번이나 쏟아내야 했다. 아무리 안전모를
쓰고 있지만 돌이 떨어지면서 팔과 얼굴, 등에 난 상처에 석탄가루가
박히면서 그 자리가 곪고 아물면서 석탄은 그대로 있었다.
광부 문신이다. 나는 몸에 박힌 석탄가루를 일일이 파내고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도 했지만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내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검버섯처럼 남아있다.
그런 위험 속에서도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희미한 헬멧의 램프에
의존해 하루 16시간씩 연장근무를 하며 탄을 캐냈다. 막장일은 또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작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글뤽 아우프(Gl?jck auf)”라고 인사를 했을까. ‘죽지 말고
살아서 지상에 올라오라’는 뜻이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국내로
보낸 돈이 당시 우리나라 외화수입의 3분의 1이 됐다니….
이렇게 힘든 3년이 지나 귀국을 앞둔 내게 독일 친구들 덕분에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인생의 두 번째 기회였다. 독일 국립사범대인 아헨
교원대에 입학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여전했고,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되어 강제
출국당할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파독간호사
출신 한 여학생을 만나게 되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그녀를 보기 위해 40km나 떨어진 곳을
자전거로 왕복하면서 탈진해 쓰러지기도 했다. 2년 만에 우리는
황금커플이라는 ‘광부와 간호사’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주말이면
함께 된장국·청국장·김치찌개 등의 음식을 해 먹었다.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 다 아직 학생 신분인지라 집을 얻을
돈이 없어 처음에는 따로 살아야 했고, 간신히 합친 후에도 서로
학업과 생활에 바빠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맡겼다.
그러나 그만 사고로 생후 5개월 된 첫딸은 하늘나라로 갔다.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베풀지 못한 죄책감에 서로 부둥켜
안고 피눈물을 쏟았다. 나는 12년 만에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귀국했다.
‘교수가 된 광부.’ 파란만장하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삶이지만 어느덧
고희(古稀)가 됐다. 지금도 나를 일깨워주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함보른 탄광에 1964년 12월 대통령 부부가 찾아왔고 식순에 따라
애국가가 시작되자, 감격에 찬 광부와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곧이어 울음바다가 됐다.
“가난 때문에 이역만리 지하 수천 미터에서 일하는 새까만 여러분
얼굴을 보니,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아직까지 이렇게 못살지만, 후손들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줍시다.”
대통령의 연설에 우리는 울고 또 울었다. 육영수 여사도 한 사람 한
사람 껴안고 함께 울었다. 그날 흘렸던 뜨거운 눈물의 기억이 마치
엊그제 일처럼 나를 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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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토랑?,,,,,,,,,,,,생큐임니다.
며느리노릇잘했다고들하지만 어려운상황이 되면 돌아가신어머님이 생각나는건 왜인지 모르겠는데?,,,,,,,이글 보고 눈물 많이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