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더스문명은 기원전 3,000년전 이전부터 인더스강 유역 1,000km이상에 걸쳐서
주로 100여개의 소도시나 취락형태로 발전되었다
특징은 이집트문명,메소타미아문명,황하문명은 중앙집권식으로 발전해왔으나
인더스문명은 소단위로 발전했다.
당시 도시들의 발전은 하수도,수도,도로, 공중 목욕탕등
도시가 놀라울 정도로 잘정비되어 있다.
특히 그들은 서로 침략 즉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문명이 소단위 로 발전한거 같다 ,,또한 신분은 수직관계가 아니라
주로 민주적 평등의 수평적 관계 였다고한다,,,그러나 아리아인들이 온후 인도사회는 오늘날 까지
카스트 제도의해 철자한 신분 계급사회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1500년사이에 인더스 문명은 멸망 하였다.
이유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침략이나, 기후,추측,,,,
기원전 1500년경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살던 아리아인들중
서부유럽으로 이동한 무리는 유럽인들의 일부 선조가되고(게르만 민족의 선조라기기도 한다.
히틀러는 이를 이용하여 아리안의 순수 혈통을 강조하면서 유태인 600만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란의 고원넘어 동쪽으로 이동한 인도침략 원주민인 드라비타인과 합쳐진것이 오늘의 인도이다
아리안인들은 그후 인더스강 유역에서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여 오늘날에 이른다.
인도의 역사는 늘 많은 소왕국들이었으나 딱 2번 인도를 통일하여 제국을 이루었으며
첫번째가 기원전 325년 알렉산더 대왕이 침공이후에
알랙산더 대왕의 사망 소식을 듣고
찬드라굽타란 청년이 그리스군을 몰아내고 마우리아 왕조를 세우고
그의 손자 아소카왕이 인도는 물론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을 포함한 대제국을 세움 (
두번째는 징기스칸의 둘째아들 티카타이와 투르크 전복자 티무르의 직게손인 바브르가
본거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아프카니스탄 카블점령을 시작으로 인도 델리점령
1526년 무굴제국 세움
그후 그의손자 악바르 왕에의해 전인도는 물론 북쪽까지 통일 대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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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타지마할은 악바르의 손자 샤리한의 16번째 부인이 출산중에 사망.
샤리한왕은 너무 슬프고 비통한 나머지 한달만에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한다.
총애한 부인 뭉타즈 마할을 위한 궁전묘다.
건축양식은 페르시아,터키,인도,이슬람식을 아우른 건축물로서
인도역사상 가장위대하고,웅장하며,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타지마할은 사진으로는 표현이 불가능한거 같다.직접봐야,,,
특히 제국을 통일한 악바르왕의 궁전묘를 보고나서
샤리한왕이 사랑한 한여인의 묘 타지마할을
그 입구에서 보는순간 비교하니 아~~``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
훗날 영국이 타지마할을 능가하는 건축물을 짓기위해
빅토리아여왕을 기리는 빅토리아 메모리얼 캘커타에 심혈을 기울여 했으나
타지마할과는 비교가않된다고한다.
타지마할묘 안의 관을 보기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전통 의상을한 여학생들의 화사한모습.
타지마할 중간 정원에서 바라본 중앙 모습
타지마할의 중간지점의 정원,,,엉성한 나의 뒷모습
2시간이상 기다리다 보니 석양이지기 시작,,,
위건물은 타지마할 본건물 좌우에 있으며 용도는 모르겠다.
아그라성(무굴제국의 왕궁)입구
아그라성내 정원
왕의 부인들의 처소이며 어찌보면 감옥과 같다.
흰두교 부인에게만 넓은 공간을 주었다고 한다.
왕들은 각민족과 각종교에 따라서 많은 부인을 두었다.
악바르 대제의 묘
인도를 통일하여 대제국을 이룩한 위대한 악바르왕의 묘는
위의 타지마할왕의 한여인에 비해 아주 초라하기 이를때가 없다.
하지만 역시적인 배경이 있는 건축물이다.
그소리는 타지마할 모든 건축물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악바르 대왕의 관
인도에서의 여행은 기다림이다
기차는 늘 몇시간씩 기다린다.
지치고 힘들다.
낮에는 관광이지만 늘 이동은 밤의 기차로하며 취침이다.
바라나시 ..
갠지스강가에서 신랑신부가 결혼한후
알수없는 의식인 어느행사에 참여하는듯 했다.
갠지스강가 계단에서 질서정연하게 구걸하는 걸인들.
예전엔 서울역 지개꾼도 순서가 있듯이 이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는듯 했다.
배를타고 강쪽에서본 개지스강가로 제일 북쪽의 burning 가트( 화장터)
전체 길이가 4km이상이 되는듯했다.
각입구마다 명칭이 틀리며
유명한 가문의 소유였다고한다.
갠지스강가의 힌두교 축제 공연
수많은 배에 타고 강에서 축제를 구경한다.
버닝가트 뒤 라가카페는 한국인 식당이다.
바라나시에서는 여기가 가장 유명한 한국인 식당이다.
부부가 유학을 와서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한다.
이곳에서는 와이파이가 뜬다.
거리
길거리 치과.
이런 풍경이 길거리에 쭈욱 있다.
사르나트(불교의 4대 성지중 하나)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0km 지점에 있는
오토 릭샤로 한시간 걸린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다섯명의 도반들에게 설법을 행한곳이다.
안타깝게도 250년전에 바라나시 성주가 60m의 불탑을 파괴하고 자기집을 지었다고 한다.
사르나트에서 티벳인들이 예불하는 모습이며
가장 경건하게 보였다.
다맥스투파
사르나트의 모든 유적은 기원전 233년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때에 지어진것이다.
아쇼카왕은 인도역사상 최초로 인도를 통일한 인물이며
불교에 귀의하여 헬레니즘쪽과 스리랑카 ,중국방향으로 불교 사절단을 파견하여
불교를 전파한여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아쇼카왕은 위대한 왕이라 불리운다.
무굴제국의 악바르왕 또한 위대한 왕이라 불린다.
한국의 세종대왕 처럼...
버마에서온 스님과 신도들.
무언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망하는 기도를 하는듯 했다.
일종의 기복신앙이란 느낌이 들었다.
버마의 신도들은 황금천을 탑에 두르고 탑을 돌면서
무언가 소망을 했고 금박지를 계속 그곳에 붙인다.
보는 입장에서 아름답지는 않았다
호랭개교.. 호랑개교.. 호랭개교..
그소리를 들으니 이들이 일본 신도들인 것을 알았다.
사르나트 유적지 뒤편있는 티벳인들의 황금사원
이들은 나라가 가난하고 백성이 가난해도 부처님을 모시는 사원은
화려하고 웅장한편이다.
그들의 신앙은 인간세상 보다도 부처님의 뜻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것 같다.
바라나시역 어느 행인,,,,뭘봐,,임마
바라나시역 4번 풀랫홈에서 간난아기를 앞세운 앵벌이 소녀.
이들은 이것을 천직으로 알며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것이 카스트 제도의 문제점이다.
부처님은 이것은 타도하려 했으니 2,500년이 지닜어도
이제도는 인도에서 아직도 존재하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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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유~~통옵빠 글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아직 눈이 쩡쩡하시네요 ㅎ 난 읽기에도 어리어리...ㅋ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인 인간은 종교 또는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웅대하고 거대함을 꿈꾸었나 봅니다.
멋진 여행을 다녀 오셨군요^^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