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방갈로 안에서 머리가 하얀 40대 남자가 앉아서 문에 기대선 한 직원과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목소리를 높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마크 셔먼 홍보이사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저 사람이 바로 브라이언(워커 회장)이에요"라고 말했다. 방 앞에는 비서도, CEO의 사무실임을 알려주는 어떤 표시도 없었다. "늘 이런 식으로 일하느냐?"고 묻자 셔먼씨는 "보통 그래요. 예외적으로 기밀유지가 필요하면 문 옆의 스위치를 누르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유리가 뿌옇게 변하면서 방 안의 소리가 차단된다. 워커 회장과의 인터뷰는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의자 제조 공장의 소회의실에서 진행됐다.
■혁신 디자인의 비결은 '관찰'
―허먼밀러만의 가구 개발 노하우를 소개해 주세요.
"그 핵심은 '관찰'입니다. 소비자에게 뭘 원하느냐고 묻는 게 아니라 그들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세심히, 장기간 관찰함으로써 그들이 정말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합니다. '인체측정학'이라고도 하는데요. 행동을 관찰하면 사용자가 가진 문제를 알 수 있죠."
허먼밀러는 디자이너의 역량을 믿고 전폭적으로 지원한다. 디자이너는 최고경영진에게만 보고한다. 경영진은 이들에 대한 바람막이가 돼 준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것을 개발하려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통찰력으로 시장 조사자나 판매 담당자의 생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외부 디자이너와 작업하는 이유는?
"외부의 방대한 디자인 네트워크를 통해 훨씬 더 크고 넓은 스펙트럼을 수용할 수 있고, 우리 역량을 확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내부 디자이너들의 자질이 뛰어나더라도 늘 그들에게만 일을 맡긴다면 회사의 세계관과 경험이 제한되게 됩니다. 고객이 직면하는 여러 문제점도 일종의 필터(filter)를 통해서만 보게 됩니다. 외부 네트워크는 우리의 필터를 늘 점검하고 재창조하게 해줍니다."
허먼밀러는 세계적 디자이너들을 어떻게 발굴했을까? 워커 회장은 "오히려 디자이너들이 허먼밀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왜? "우리는 디자이너의 아이디어를 따르고,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자유를 줍니다. 디자이너를 중심으로 최고의 팀을 꾸려서 최고의 결과가 나오도록 시간·돈·사람을 들여서 지원합니다."
그는 외부 디자이너와 일할 때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것은 "너무 일찍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에어론 의자를 디자인한 빌 스텀프(Stumpf)와 어떻게 일했는지를 설명했다.
"빌은 항상 세계를 여행하며 사물을 관찰했습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완전히 다르게 보는 통찰력을 지녔어요. 빌의 히트 작품인 '임바디(Embody) 의자'는 스웨덴과 스위스를 여행할 때 잤던 침대에서 영감을 얻었죠. 우리가 '이제 그만 여행하고 디자인을 시작해 보라'고 하자, 빌은 '이 침대의 서스펜션(완충장치)이 참 편한데, 좀 다르게 만들고 싶어'라고 했어요. 결국 이전과 다른 것을 개발했습니다. 빌은 또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컴퓨터 스크린을 보는 문제를 놓고 시력 측정사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의자에 대해서만 생각하는데, 빌은 테이블에 관심을 뒀어요."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높낮이가 달라지고, 배선이 안으로 들어가는 컴퓨터 테이블이었다.
- ▲ 1 창업자인 D.J. 디 프리의 모습을 희화화해 만든 인형. 본사 사무실 벽 곳 곳에 설치돼 있다. 2 조지 넬슨이 디자인한 마시멜로(Marshmallow) 소파. 3 찰스 임스의 임스 라운지(Eames Lounge) 체어.
허먼밀러는 1950년대 최고의 의자였던 임스 라운지 체어(Eames Lounge Chair)에서부터 2000년대의 미라(Mirra)·세투(Setu) 체어까지 파격적 디자인을 끊임없이 선보였다. 요즘 어느 회사에나 보편화된 칸막이 형태의 사무공간도 1960년대 허먼밀러가 출시한 '액션 오피스(Action Office)'의 후손이다.
허먼밀러의 심장부인 디자인실을 찾아가 보았다. 디자이너들과 수십명의 인체·기계·재료공학 전문가들이 얼굴을 마주한 채 한 팀으로 일하고 있었다. 신소재를 이용한 시제품을 앞에 놓고 난상토론 중이었다. "허먼밀러의 디자이너와 기술진은 동반자 관계"라는 말이 실감났다.
디자이너와 기술자가 팀을 이루다 보면 서로 긴장 관계도 발생한다. 워커 회장은 그러나 "그런 긴장이 획기적이고 특별한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디자이너들은 한계를 초월하려 하고, 기술진은 그에 맞는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찾아냅니다. 만약 이런 긴장이 없다면 디자이너는 '뜬구름 잡는' 아이디어만 낼 것입니다. 반대로 기술진이 디자이너를 너무 제약하면 최상의 디자인을 얻지 못할 겁니다. 위대한 디자이너인 찰스 임스(Eames)는 '어느 정도의 제약 없이는 훌륭한 디자인도 없다'고 말했어요."
생산시스템, 도요타와 흡사
매일 토의하면서 일하는 방식 개선
무상수리 기간 12년… 품질 자신감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매년 뽑혀
"혁신 디자인 비법? 관찰, 또 관찰"
워커 회장의 리더십
"종업원들의 숨겨진 능력 찾아내
꽃피우도록 도와주는 게 내 일"
이 회사는 단순히 디자인을 중시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한발 나아가 디자이너의 일하는 방식을 업무 전반에 적용한다. 워커 회장은 "우리는 위대한 제품을 디자인할 때의 원칙을 고스란히 매일 매일의 경영 활동을 하는 데도 적용한다"고 말했다. 디자이너의 일하는 방식의 특징은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고, 허먼밀러도 그렇다.
워커 회장은 허먼밀러에서 일을 할 때 가장 처음에 하는 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 회사에선 일을 "이 정도 가격대의 의자가 필요해"라는 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을 위해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이런 문제가 있어. 어떻게 풀어야 하지?"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고 나선 전사적으로 그 문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 사람들을 모은다. 이렇게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게 일상화돼 있다. 디자이너의 업무 방식이다.
허먼밀러의 공장 라인과 작업 방식 역시 그런 방식으로 늘 개선된다. 직원들은 매일 분임토의를 통해 개선 아이디어를 내고 정보를 교환한다. 협업과 개선을 통해 효율을 극대화하는 도요타식 생산시스템(TPS)과 닮은꼴이다.
컨베이어 방식의 에어론 생산라인에는 '오늘 생산 목표 1255대'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15개 단계의 공정을 거쳐 의자 1개가 만들어진다. 소요시간은 5분 19초. 고객들이 원하는 색상·재질·형태에 맞춰 주문생산을 하면서 말이다. 수십만 가지 조합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불량률은 0.01% 이하이다. 품질검사 기준은 외부 검사보다 8배 엄격하다. 무상 수리 기간은 12년. 그만큼 품질에 자신 있다는 뜻이다.
- ▲ 위부터 임스 알루미늄(Eames Aluminum) 체어와 테이블. 넬슨의 코코넛(Coconut) 체어. 임스 몰디드 플라이우드(Eames Molded Plywood) 체어.
워커 회장은 허먼밀러의 인재관을 "종업원들의 숨겨진 능력을 끊임없이 찾아내는 것, 그리고 적재적소에서 그것을 꽃피우게 하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종업원을 어느 한 부서의 울타리에 가두기는 너무 아깝다. 그에게 다른 곳에서 만개할 재능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업자인 디프리(De Pree) 회장에게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허먼밀러의 기술 책임자가 죽었다. 위로차 갔더니 부인이 시를 낭독했다. 디프리 회장은 "와, 아름다운 시네요. 누가 쓴 건가요?"라고 물었다. 부인은 남편이 쓴 것이라고 대답했다. 디프리 회장은 그날로부터 노동에 대한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발견되지 않고 사장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허먼밀러에선 직원들의 부서 이동에 열려 있고,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리더가 될 기회도 얻게 된다. 이런 허먼밀러의 문화가 아니었다면, 워커 회장 스스로도 CEO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계사 출신이고, 허먼밀러에서도 재무 쪽에서 주로 일했다. 회사는 그에게 좁은 재무 관련 업무를 뛰어넘는 많은 기회를 주었고, 이는 그의 학습 욕구를 자극했다. 허먼밀러는 포천(Fortune)이 선정하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매년 빠지지 않고 선정된다.
그에게 젊은 나이에 성공한 비결을 물었다. "제겐 훌륭한 멘토가 있었어요. 운 좋게도 경영에 관여할 기회도 많이 얻었죠.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기심입니다. 저는 호기심이 넘쳐서 기회만 있으면 뭐든 하려 했고, 많은 나라를 여행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쌓았습니다. 그게 제 성공의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그는 한국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지위의 높낮이에 관심을 갖지 말고, 폭넓은 경험을 통해 경험의 수준을 높이세요. 그러면 언제든 더 빨리, 더 멀리 갈 수가 있습니다."
허먼밀러가 제안하는 5가지 경영의 교훈
1 집중하라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새로운 시각과 혁신을 어떻게 이끌어낼까
2 질문하라
고객의 니즈가 무엇인가
현실적 제약은 무엇인가
3 차이를 존중하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
새 아이디어에 열린 마음을 가져라
4 협업하라
외부 전문가와 함께 일하라
다양한 지식분야에서 창조가 나온다
5 문제를 이해하라
문제 해결의 절반은 문제 인식에서 나온다
문제 이해 없이 만든 제품은 성공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