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식민지화 정책의 최정점에는 그들의 '신도'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땅에 신사를 창건한 것 역시, 그들의 국교인 신도의 보급을 통해 일본의 정체성을 우리에게 이식하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조상신을 우리의 조상이라
정당화함으로써, 내선일체 · 일선동조론의 명분을 합리화하고 궁극에서는 황민화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일제의 식민주의사관 역시 신도 국교화를 위한 논리의 일환이었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러한 역사인식은 후일 황국사관으로 고착되면서 더욱 관념화된다.
이러한 일제 신도 정책에 정면으로 저항한 집단이 '대종교'다. 대종교를 일으킨 홍암 나철은 일본의 신도만이 아니라 일본문화의 모든 질서가 한국으로부터 건너갔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화(일본)의 옛 사기(史記)를 살펴보건대, 일본 민족의 근본과 신교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신사(神社)의 삼보한(三韓几)과 궁내성(省)의 오십한신(五)이 다 어디에서 왔으며, 의관문물(文物)과 전장법도(典章法), 그리고 공훈을 세운 위인들이 다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
일본 신도의 뿌리가 우리의 신교라는 것이다.
일제가 패망 때까지 극렬하게 대종교를 없애려 한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코 일제는 그들의 신도와 한국 전래 신교(대종교)의 양립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신도를 국교로 했던 일제로서는, 신도의 뿌리를 자처하는 조선의 신교(대종교)를 용납한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신교와 신도의 양보 없는 전쟁이었다.
이것은 일본 신도의 '태생적 한계'(한국의 전래 신교에 그 뿌리를 둠)에서 오는 자격지심도 있으려니와, 신도의 국교화를 통한 조선의 영구지배를 위해서도 단군으로 상징되는 조선의 정체성을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