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 가족, 지난 5월 5일 아들과딸이 결혼후 처음 맞이하는 부모님들을 섬기겠다면 천안에서 내려와 저녁식사를 예약하고 함께 식사했다. 우리는 사돈 이런 표현을 하지 말기로 약속이나 한 것 처럼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직책을 자연스럽게 호칭으로 사용한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전혀 서로 어색하지도, 불편하지도 않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식사후 즐겁게 담소를 하던 아내가 어께가 아파서 좀 불편했던 얘기가 대화중에 나오자 권사님께서 뭉쳐진 부분을 풀어주어야 한다며 어깨를 지압하신다. 아내가 아프다고 한다. 그런데 아파서 하는 말도, 모습도 아니라 즐거운 비명, 즐거운 표정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권사님께서 이렇게 해서는 안되고 집으로 가서 제대로 지압을 해주겠다고 하신다. 갑자기스럽게 사택으로 가족이 모였지만 서로에게 미안한 마음이나 불편함 마음은 없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장로님과 대화하는 나에게로 닥아오신 권사님께서 목사님 안경 잠깐만 벗어 보실까요 하신다. 어떨결에 예하고 안경을 벗자, 목이 아파 고생중인 제 목과 어깨를 지압하신다.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무지 아프고, 아프다고 말은 하는데 모습에서 아파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감사하고 즐거워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 모습을 맞은 편에서 보시는던 장로님, 목사님 잘 참으시네요. 전 도저히 아파서 못참아요 라고 웃으시며 말씀하신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이어서 아내에게도 사랑에 마사지는 이어지고, 수진에게도 이어졌다 한 결같이 말은 아프다고 하는데 표정은 전혀 아파서 하는 말이 아니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연거퍼 세 사람을 지압하신 권사님이 얼굴이 벌게지셨고, 땀을 흘리신다. 그런데 피곤한 모습이나,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기쁘고 즐거움의 모습이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아니 어느 세상에 세상 말로 사돈네들이 그것도 사부인이 사돈댁 식구들을 이르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부인에게 지압을 하도록 몸을 맡길 수 있을까. 우리는 사돈이 아니라 한 가족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손길은 원평동 집에서도 이어졌다. 딸래미 은진이, 아들 요한이에게로 이어졌고 즐거움의 비명을 고스란이 아들을 통해 수진이에게로 자신으로 전송되어 왔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우리는 서로 아이들에게 대하여 호칭을 아들, 딸로 부른다. 요한이, 은진이로 부른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맺어주신 특별한 한 가족이니까. 권사님은 손으로 만져서 아픈 부분을 교정하는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다. 장로님께서는 침술에 대한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계신다. 그날 보여주신 특별한 은사로 한 가족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는 시간이어였다. 그런데 나에게는 또 다른 큰 가족이 있다. 우리 구미소망교회 식구들이다. 여기에는 부모님도 계시고, 형도, 동생도, 자녀들도 있다. 우린 서로 서로를 많이 아끼고 사랑한다. 왜? 우리는 예수십자가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한 가족으로 만들어 주신 한 가족이기때문이다. 우리는 한 가족이다. 때문에 허물이 있어도, 부족해도, 실수를 해도, 세상이 이해를 못해도 그래도 사랑한다. 왜? 우리는 한 가족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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