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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小鹿島 ]
작은 사슴처럼 슬픈 눈망울의 아름다운 섬
요약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하고 작은 사슴처럼 슬픈 눈망울의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 4.42km2, 인구는 600여 명이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소록도에는 현재 5개의 교회가 운영되고 있다.
위치면적인구
고흥반도의 서남쪽 끝 녹동항 앞바다, 이 앞에 면적 4.42km2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 소록도가 있다.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더 유명해졌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가진 자에게는 낭만의 장소이자 한편으로는 고립의 장소다. 이 섬은 갇힌 장소 즉 구분을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어 온 대표적인 곳이다. 일제시대에 소록도가 한센병 환자들을 모은 것은 이들을 격리하기 위함이었다.
소록도 국립병원 전경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한편으로 현재의 녹동항 부근은 과거 녹도라는 섬이었다고 한다. 그 녹도에 비교하여 작은 녹도라 해서 소록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예쁜 이름과는 달리 한센병 환자의 애환이 깃든 사연 많은 섬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은 1917년부터 한센병 환자를 수용하여, 1941년에는 6천명이 살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600여 명이 살고 있다. 문둥이는 차에 태울 수 없다는 이유로 버스에서 강제로 내려져 일주일을 걸어도 도착하기 힘들었던 섬이 ‘소록도’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가야 했지만 지금은 걸어서도 갈 수 있다. 같은 민족의 이웃을 단지 한센병 환자라는 이유로 그리도 차별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것이 통했다.
소록도 국립병원 입구 모습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는 지난 2008년 6월 준공됐다. 이제는 격리 대신 육지와 소록도를 이어주는 소록대교를 통해 소통을 상징하는 섬이 되었다. 이 대교를 건너서 뭍과 소록도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소록도는 환자생활지역을 제외하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는 섬이 되었다. 한때 ‘천형(天刑)의 땅’으로 차별받던 소록도는 지난 2007년에 뉴욕타임스에 대서특필 보도된 적이 있다. 소록대교가 완공된다는 소식과 함께 편견과 슬픔으로 얼룩졌던 소록도의 역사를 돌이킨 것이다. 소록대교를 지나 소록터널을 지나기 전 오른쪽으로 이어진 차선을 타면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빠진다. 제2안내소에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가는 길은 탄식하는 장소 즉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리던 길이라고 한다. 한센병에 감염되지 아니한 미감아인 자식과 한센인 부모가 한 달에 한 번씩 먼발치에서 눈으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픔이 서린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병원 앞에서 숲길을 달리다 자혜의원을 지나면 삼거리가 나온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숲길을 통과하면 한센병 환자들 중 범죄자를 수용하기 위한 특수형무소인 교도소가 나타난다. 오른쪽 내리막길은 구북리 가는 길이다. 정문에서 서쪽으로 가장 먼 곳에 위치한다. 시설의 특성에 맞게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낡은 철제로 된 교도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정문 입구에는 경비실이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의 아치에는 ‘희망의 마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양쪽 기둥에는 시설명이 있었을 것인데 다 떨어져나가고 없다.
소록도 국립병원 앞 소나무 숲 길
소록도에 있는 교도소 전경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로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일제의 인권유린 현장을 간직하고 있는 ‘구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 여사동’이다. 한센병 여성 수감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건립한 교도소 건물이다. 이곳은 현재 비어 있다. 당시의 흔적만이 남아 있다. 빨간 벽돌 건물인 교도소 마당 양쪽으로 철조망이 쳐진 감옥이 있다. 그 안쪽으로는 실험실이 있다. 다시 삼거리로 나와 반대쪽 즉 북쪽 방향의 길을 가면 해안이 나타난다. 이곳이 구복리가 있는 해안으로 모래밭이다. 해안 뒤로 소나무가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해변 한쪽에 현대식 건물이 한 채 들어서 있는데 바로 화장장이다. 그리고 이 앞으로 난 시멘트포장길을 걸어가면 해안 쪽에 옛날에 만들어진 붉은 벽돌의 건물이 있다. 그러나 아무 표시가 없다. 이 앞은 잡초로 무성한 밭이다. 그 옆으로 구북리사무소가 있다. 번지수는 ‘공회당길 191-2’. 그 뒤로 마을 정자인 쉼터가 있다.
소록도 화장장 시설
구북리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을 따라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이어 왼쪽으로 돌아서면 역시 길이 갈라지면서 가운데에 동산을 만들었다. 향나무와 함께 비석 그리고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제2대 원장을 지낸 하나이 원장 창덕비다. 소화 5년 즉 1930년대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앞면에는 ‘화정원장창덕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된 공적 내용을 새겨두었다. 안내판은 한글과 일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이 원장의 공덕비
환자들이 직접 경비를 마련하여 세운 이 비석도 수난을 당했다. 해방 후 자유당 정권에 의해 비석이 폐기될 상황이 되자 환자들이 몰래 땅에 묻어두었다가 1961년 5.16 이후 다시 발굴하여 중앙공원에 세운 뒤 1988년에 원래의 위치인 이곳에 다시 세운 것이다. ‘하나이(花井善吉)’원장은 1921년부터 1929년까지 재직하면서 이곳에서 사망했다. 일본인이면서도 조선 환자들을 가족처럼 아껴주며 헌신적으로 보살핌으로써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은 1917년 설립한 한국인 한센병 환자들의 잔혹사가 시작된 ‘자혜의원’이다. 일본 황실에서 제공한 임시 은사금이 재원이라고 한다. 화장실 외 두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안내문에 의하면 자혜의원 본관은 원래 T자형이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변형이 되고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목재와 벽돌로 골재를 이루고 기와를 올린 모임지붕의 형식이며 비늘판으로 벽채를 마감하였다. 사무실과 치료실, 진료실 그리고 예배당 등으로 구성되었다.
지금은 폐쇄된 자혜의원 건물
지금은 폐쇄된 자혜의원 안내문
1916년 7월 10일 일본인 아리까와는 초대 원장으로 발령을 받고 150여 가옥과 9백여 명의 원주민이 남아있는 가건물에 자혜의원이란 간판을 붙여놓고 설계도에 의한 나요양소를 건립하기 시작하였다. 치료소, 직원 관사, 사무본관, 예배당, 목욕탕, 취사장, 병사 등을 준공하고, 1917년 5월 17일을 기해 자혜의원 개청식을 거행했다. 자혜의원은 지방에서 강제 모집되어온 약 40명 환자를 남녀 병사에 각각 수용하고 일본식 생활방식으로 훈련시켰다. 자혜의원은 치료와 사무를 보았으며, 1935년 치료본관이 신축된 이후에는 서생리 치료실로 사용되었다. 남성리에 들어서면 도로 왼쪽에는 남성교회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고 아래에는 밭과 함께 몇 채의 집들이 모여 있다. 소나무가 주위를 둘러 방풍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록도에는 현재 5개의 교회가 운영되고 있다. 예전에는 제법 많은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소록도에 처음 교회가 생긴 때는 1922년 10월 8일이다. 2대 원장으로 부임한 하나이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구북리교회가 창립됐다.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중앙교회, 신성교회, 동성교회, 남성교회와 북성교회 등 5개 교회가 있다. 서성교회와 장성교회는 마을이 중앙리로 이주하면서 폐쇄됐다.
소록도 남쪽에 위치한 남성교회 입구
소록도 7개 교회를 대표하는 중앙교회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길이 왼쪽으로 꺾여 들어가는데 오른쪽에는 ‘남성리치료실’이 있고 왼쪽에는 남성리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툭 튀어나온 둔덕에 위치한 사무소가 가정집을 연상시킨다. 주변의 무성한 소나무 숲과 옹기들이 잘 어울린다. 이 앞으로 길이 여러 갈래로 갈린다. 여기서 남쪽으로 비포장도로는 소수의 집이 있고 거금대교가 바라보인다. 남성리는 이 아래로 모래해변을 낀 마을이다. 해변길을 따라 조금 가면 선착장이다. 그 입구에 붉은 벽돌로 된 건물이 도로 양쪽에 있다. 그 중 바다 쪽에 위치한 건물은 1940년대에 만들어진 ‘갱생원 식량창고’다. 역시 문화재등록 건물로 안내문에 의하면 바닷물 속에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아 조수간만의 차에 의한 공기순환을 유도하여 내부에 보관하는 식량이 잘 보존되도록 설계되었다. 바다에 접한 부분은 해수의 영향으로부터 수중 기초를 보호하기 위하여 벽돌을 쌓고 외부에 콘크리트로 마감하여 기둥 모양의 초석을 만들고 그 위에 아치를 튼 다음 벽돌로 벽을 쌓아 올라갔다. 창고 앞에는 제법 넓은 공간이 있고 옆으로 선착장이 있어 이곳을 통해 식량이 수송되었던 듯싶다. 이곳이 동생리선착장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해안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가면 희망마을이 나타난다. 동생리에 위치한 ‘희망마을’은 한센인들이 기거하던 노후 병사들을 철거하고 신축한 거주 단지로써 대우조선해양 그룹이 후원 · 시공해 만든 마을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거리로 왼쪽에는 연두색 건물의 ‘양지회기념관’이 있고 오른쪽에 성당이 있다. 1973년 10월에 성실고등공민학교 학생 16명은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였고 이후에도 육 여사는 원생들의 노후생활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기부금을 희사하였는데, 이 기부금으로 74년 11월 양지회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양지회기념관 앞에는 육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의 순수한 모금액으로 공덕비가 세워졌다. 양지회기념관 뒤쪽으로 숲에 가려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한 채가 있다. 바로 ‘우촌복지관’이다. 이곳 화단에는 교황방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984년의 일이니 벌써 30여 년이 지났다. 지난 1984년 5월, 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교황의 소록도 방문을 반대했지만 교황은 끝내 5월 4일에 소록도를 찾았다. 교황은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 왔다”며 “병고에 지친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의 영혼의 생명인 저 희망에서 위안과 힘을 찾게 되기를 빈다”고 원생들을 위로하고, 성금과 십자가를 기증하였다. 이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를 이곳 우촌복지관 화단에 세운 것이다. 성당은 제법 규모가 큰 편이다. 부속건물 포함하여 4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당 옆으로 길이 있다. 이 길로 계속 가면 중앙공원 입구가 있다. 초록의 철제 울타리를 친 공간으로 문이 열려 있다. 이 문으로 들어가면 공원이 나오는데 작으면서도 아기자기한 수목원의 느낌이다.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여 명의 환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6천 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전국에서 강제로 수용된 나환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만들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으나 소나무, 향나무, 철쭉과 종려나무 등 각종 나무들이 잘 가꾸어진 푸른 잔디 위에 심어져 있다.
후문 입구에서 바로 옆으로 철제로 만들어진 장미터널이 있다. 이곳을 지나면 길이 양 옆으로 나뉘지만 몇 미터 가지 않아 만난다. 그 만나는 지점에 탁한 물로 가득한 호수가 조성되어 있으며 물 위에는 십자가상이, 호수 뒤 뒷동산에는 성모상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길이 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비석이 세워진 영역이 나타난다. ‘개원제40주년기념비’다. 그 옆에 안내판이 있는데 이곳이 강제노역을 시키고 환자들한테서 거둔 돈으로 자신의 동상을 세워 참배케 하다가 환자에게 살해당한 4대 수호 원장의 동상이 있었던 자리다. 안내문에 의하면 ‘수호(周防正季)’원장은 제4대 원장으로 1933년에서 1942년까지 8년 9개월 동안 재직한 일본인이다. 온갖 강압적인 수단으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소록도 내의 각종 공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환자들로부터 기금을 강제 징수하여 재임 중 1940년 8월 20일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다. 거기에다 이날을 기념하여 매월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지정,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였다. 그런데 2년 후인 1942년 2월 감사일에 참다못한 이춘상이라는 젊은이가 칼을 빼들었다. 환자에 대한 대우가 심하다는 이유였다. 이춘상은 사형에 처해졌고, 원장 동상은 태평양전쟁 물자로 징발 철거되었다고 한다. 원래 동상은 3.3m이고 단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9.6m였다고 한다. 안내문에는 참배하는 환자들의 모습과 철거되기 전의 동상 사진이 새겨져 있다. 이 앞에 반듯한 반석이 놓여있는데 그 유명한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다. 초등학교 시절 참으로 많이도 외웠던 시, 반송들에 둘러싸인 한하운의 ‘보리피리’시비가 육중한 몸을 누인 채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ᄅ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ᄅ닐니리.
이 주위로 두 기의 공적비가 있다. 한센인들을 위해 헌신하였던 이들의 공덕비다. ‘개원40주년기념석’ 부근에 위치한 것은 세 명의 공적을 기리는 공적비로 여기에는 40여 년 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던 수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세마(3M)공적비’다. 1972년 5월 17일에는 개원 56주년 기념식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온 수녀 마리안느, 마가렛, 마라리아 세 사람의 이름이 ‘마’로 시작한다고 하여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마공적비를(이들은 62년부터 영아원을 운영하였고, 영아원이 없어진 이후에는 아동치료실을 운영하며 다미안 재단과 합류하여 일하기도 하였다.), 중앙공원의 너럭바위에는 미리 새겨둔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를, 유판진 5.16 민족상 수상 기념비를 제막했다. 이에 유판진과 오스트리아 수녀들이 희사한 기금으로 중앙공원 상단에 동물원을 만들었다.
또 다른 공적비는 벨기에 사람들에 대한 다미안 공적비다. ‘다미안’은 일반인이었다가 스스로 한센인이 된 ‘한센인의 목자’가 된 신부다. 이 비는 1971년 다미안 재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정부는 1966년 4월 15일 벨기에 자선단체인 다미안 재단과 향후 5년간 우리나라 구라사업 지원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재단은 열악한 의료환경에 있던 소록도에 의료진을 파견하고 물리치료실과 입원실 마련, 정형수술 등으로 원생들에게는 많은 의료혜택을 주었다. 시비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공원 중앙부분 지점에 우뚝 솟은 탑이 있다. ‘나병을 구원하는 탑’이란 뜻의 ‘구라탑(救癩塔)’이다. 천사가 악마를 제압한다는 동상이 서 있고,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쓰인 탑이다. 이 탑은 1963년 국제워크캠프 남녀 대학생 133명이 도덕면 오마도 간척지 근로봉사를 기념해 세운 탑이다.
소록 공원에 있는 한센인탑
여기서 조금 더 걸어 나가면 공원 정문이 있다. 안내판 뒤로 세 동의 건물이 있다. 전시관이다. 두 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록도병원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지 자료가 전시된 생활자료관이다. 소록도자료관 제2실에는 한센병 환자의 수술 · 시술기구들과 처치에 필요한 기구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 입구에서 약간 내려오면 소록도자료관 맞은편 아래 왼쪽으로 몇 동의 건물들이 있다. 물론 이들 건물들은 등록문화재 건물들이다. 이곳엔 아직도 그 시기 지어진 건물이 제법 남아 있다. 길 양편으로 붉은 벽돌 건물들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원장이 이곳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불법감금하고 출감하는 날에는 예외 없이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했던 감금실과 검시실이다. 창살이 있고 방은 시멘트 바닥이다. 변기도 덩그러니 있다. 벽에 걸린 시들은 아픔을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환자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 이동권을 박탈당했고, 툭하면 감금, 감식, 체벌의 징벌을 받았다.
감금실
붉은 벽돌 담 안에 쇠창살을 단 ‘감금실’ 건물은 교도소를 방불케 한다. 이곳 벽에는 김정균의 ‘감금실’ 전문이 액자에 실려 있다. 이춘상이 수정 원장을 살해할 당시 김정균이 남긴 글이다.
감금실 안내문
아무리 죄가 없어도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에 따라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내가 불신자였다면
이 생명 가치 없을 바에는
분노를 기어이 폭발시킬 것이오나
주로 인해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내 주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하나이다.
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검시실’은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 수술과 시체 해부를 했던 곳이다. 검시소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검을 검사하는 곳이란다. 지금도 수술대와 세척 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당시의 수술대 · 검시대 · 세척 시설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옆방에는 나무로 만든 기구가 있다. ‘단종대(斷種臺)’다. 말 그대로 ‘생식을 중단시켜 버리는 곳’이다. 정관수술이다. 죄를 지은 자들에게 강제로 시술을 했던 곳이다. 단종대가 있는 옆방 벽에는 4대 수호 원장의 명을 거역해 스물다섯 한창 나이 때 ‘단종 수술’을 당한 이동(李東)이란 사람의 ‘단종대’라는 시가 걸려 있다.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
장래 손자를 보겠다던 어머니의 모습
내 수술대 위에서 가물거린다.
정관을 차단하는 차가운 메스가
내 국부에 닿을 때
모래알처럼 번성하라던
신의 섭리를 역행하는 메스를 보고
지하의 히포크라테스는
오늘도 통곡한다.
여기서 나오면 가운데에 큰 나무가 있고 그 앞에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바로 소록도병원 본관 건물과 이어진다. 큰 길 중심으로 본관 옆에 있는 것이 노인전문병동이고 그 뒤로 ‘선물의 집’이라는 매점이 있다. 현재의 소록도병원은 원래의 모습은 아니다. 일찍부터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해 건설된 국립소록도병원은 지금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시설이 잘 되어 있다. 본관이 개관된 것은 지난 1987년 5월 15일이다. 그리고 국립소록도병원 본관 건물이 지어진 지 20여년 만에 현대식 건물로 다시 태어난 것은 지난 2011년 4월이 되어서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역사는 1916년에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다. 1910년 외국 선교사들이 소록도에서 운영하던 ‘시립나요양원’에 나병환자들을 수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13년에 발족한 조선나병근절대책연구회를 모태로 1916년 2월 당시 금산면 소록도를 매수, 건물 47동을 건축하고 소록도자혜원이라 하고 1917년부터 환자를 수용했다(1917.5.17). 일본 황실의 기부금을 종잣돈 삼아 1916년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으며, 1960년부터 수용위주에서 치료위주로 관리정책을 전환하였다.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 여러 이름을 거쳐 현재에 이른다.
소록도갱생원이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바뀐 것은 1960년 정부령에 의해서다. 이후 정부는 국립소록도병원을 제외한 국립익산병원, 국립부평병원을 폐쇄하고, 국립소록도병원은 국립나병원으로 확대 개편했다. 그러나 원생들은 ‘나병’ 혹은 ‘나환자’ 등과 같이 나(癩)로 불리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은 1982년 12월 31일이었고 이듬해 1월 8일에 현판식을 가졌다. 본관을 지나면 큰 길이 나온다. 여기서 큰 길 건너편 바닷가 쪽으로 가면 ‘애한의 추모비’가 눈길을 잡아끈다. ‘추모비’엔 1945년 해방되자 자치권을 요구하다 학살당한 원생들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정리됐다. 해방 직후 자치권을 요구하는 한센병 환우 84명을 죽창과 총으로 학살해 묻었던 참혹한 현장이라고 한다. 그해 8월 84명이 죽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과 착취에 시달린 한센인들의 수난사가 섬 곳곳에 새겨져 있다.
애한의 추모비
추모비 옆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해안을 낀 산책로로 나무 데크로 만들어졌다. 이 산책로는 이리저리 휘어진 곰솔이 있는데 해안을 따라 소록도 입구까지 이어진다. 중앙공원까지는 주차장에서 1.3km를 걸어야 한다. 찻길 옆 해변으로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다. 해송 숲 사이로 난 길은 운치가 있고 걷기도 좋다. 바로 옆은 모래해변이다. 저만치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하얀 연륙교인 소록대교가 보인다. 어둠이 깔리면 형형색색의 조명이 인근 바다에 뿌려져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추모비에서 산책로를 따라 조금 더 가면 비석이 하나 있다. ‘개원50주년기념비’다. 50주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로 이 비 뒷면에는 시인 한하운의 축시를 새겼다.
희(噫) 50년 <소록도병원 50주년 기념에>
천형 섬에는
납골탑이 확답.
끝내 <나병은 낫는다>는 신화가
우악한 산하에도 불어오는가.
모질게 살아 온 목숨들이
이제 뭍으로 신천지를 찾는
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아으, 50년
해방.
자유가 있는
아, 새 세상.
50주년 기념비
50주년기념비 옆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마리안느&마가렛 수녀님’이란 타이틀에 사진 넉 장과 함께 설명문이 새겨져 있다. 넉 장의 사진 중에는 중앙공원의 공적비도 있다. 두 장의 사진은 수녀님의 사진이고 한 장은 두 수녀님들이 살았던 관사 사진이다. 추모비 건너편에는 관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수녀님들이 살았던 그 관사다. 소록도에서 43년 간 봉사하다 홀연히 본국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의 사연이 적혀 있다. 이들 ‘벽안의 천사’들이 소록도에 들어온 것은 1962년 6월이었다. 그리스도왕의 수녀회 소속으로 간호사 자격을 가진 20대 후반의 두 수녀는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나던 한센병 환우를 돕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다. 이들은 당시 국내의 열악한 치료 여건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보내온 의약품과 지원금 등으로 온갖 사랑을 베풀었다. 환우들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등 헌신적인 치료 활동을 했다. 두 수녀는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하고, 물리치료기를 도입해 환우들의 재활의지를 북돋아주기도 했다. 한센병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 등 정부도 나서지 않은 일을 해냈다. 한국생활에 익숙해진 두 수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고 한글까지 깨치는 등 완연한 ‘한국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할매’라고 불렀다. 하지만 평생의 선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극구 꺼렸다. 1996년의 국민훈장 모란장, 이들이 받은 전부다.
두 사람은 떠나기 하루 전, 병원 측에 이별을 통보했다. 주민들에게는 아픔을 준다며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가져간 짐이라고는 낡은 여행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편지에서 이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었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며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대해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빈다”고 말문을 흐렸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한센 환자들이 생활하고 치료하는 병원이다. 그러나 병원과 행정동의 1번지와 한센인들의 주거지인 2번지로 구분돼 있다. 제2안내소를 중심으로 그 영역이 갈린다. 우체국부터 교회, 성당, 사찰까지 그럴 듯한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매점도 여러 군데 눈에 들어온다. 각종 의료시설 및 복지시설을 비롯하여 기독교, 천주교, 원불교 등 종교 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풋풋한 솔숲과 눈이 시릴 만큼 깨끗한 소록도해수욕장 뒤로 아담한 초등학교도 자리잡고 있다. 이곳의 초등학교는 섬의 동쪽인 해수욕장 뒤편에 위치한다. 1930년 개교한 소록도 분교에는 한때 수백 명이 다녔을 정도로 학생이 많았다. 하지만 소록도병원의 환자가 줄면서 직원도 함께 줄어 현재는 겨우 5명뿐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국립소록도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자녀다. 학교 앞에 위치한 모래해변이 바로 소록도해수욕장이다.
제2안내소에서 미아리고개를 넘어 내리막이 시작되면 왼쪽으로 원불교 교당이 보인다. 원불교 교당 경내에는 일본신사가 있다고 한다. 그 주변에 집들이 몇 채 있고 그 아래에 초등학교가 있다. 섬에 포근히 파묻힌 전원주택들은 모두 직원들이 머무르는 관사들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다세대 주택이 보인다. 일반인들이 사는 미니아파트다. 그 맞은편에 성당이 있으며 계속 내려가면 선착장이 나온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 녹동에서 소록도로 오는 길목이다. 소록도병원 전용도선, 일반용 도선도 매일 수시로 운항했던 곳이다. 선착장에는 치안센터가 있고 그 옆으로 자전거보관소가 자리하고 있다. 대합실이라고 하여 특별한 것은 없고 그저 바람막이 정도의 시설과 그 옆에 있는 나무의자가 전부다. 그 옆에 아주 오래된 안내도가 있다. 그다지 길지 않은 선착장이다. 오른쪽 해안 끝에는 긴 방파제가 있다. 녹동항에 들어설 때 만나는 하얀 등대가 있는 그 방파제다. 소록도 최동단에 위치한 이 방파제 주위 해안은 역시 모래해변이다. 배를 타는 선착장 양쪽으로 철부선이 닿을 수 있는 경사제가 있고 그 옆 경사제에는 ‘국립소록도병원행’을 알리는 철부선 ‘소록호’가 정박해 있다. 물론 지금은 운항하지 않는 배다. 소록대교가 생기기 전엔 세상과 유일한 소통로는 바로 이 철부선이었다. 주민들은 그동안 소록도와 녹동항을 하루 40차례 왕복했던 선박(도양 7호)을 이용했다.
항상 대기 상태인 소록호 전경
소록도 선착장에 닿으면 맨 먼저 만나는 게 아치식의 정문이고 그 기둥에 ‘국립소록도병원’ 표지석이 있다. 그 앞쪽에 건물 한 채가 있는데 바로 제1안내실이다. 이 문을 들어서기 전 오른쪽으로 공터에 공원 조성과 함께 ‘전남 503호’라는 배 한 척이 전시되어 있다. 행정선으로 역시 지금은 유물로 남은 상태다. 보존상태가 아주 좋다.
소록도 입구 해안에 전시된 행정선 ‘전남 503호
그 뒤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조성하고 끝에 소나무에 가린 비석이 하나 있다. ‘순록탑’이다. 6 · 25전쟁 당시 한센병 원생들을 지키다 북한군에게 학살당한 병원 직원들을 기리는 탑이라고 한다. 북한군들은 이곳에 들어와 인민위원회를 조직, 예배당을 약탈하여 ‘공회당’이라는 간판을 걸고 인민공화국 노래를 가르쳤으며, 타종은 물론 기도와 찬송을 폐지시켰다. 당시 목회자인 김정복 목사는 교회를 사수하던 중, 9 · 28 수복으로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난사한 총탄에 맞아 순교했다. 당시 순직한 10여 명의 신도들을 추모하는 탑이 순록탑으로 남해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지난 2011년 4월에 국민가수 조용필이 한센인을 찾아 공연을 펼쳐 화제가 되었던 단절과 닫힘의 섬, ‘소록도(小鹿島)’. 2009년 3월 2일, 한센인이 격리 수용된 지 93년 만에 뭍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녹동항과 소록도를 잇는 ‘소록대교’가 개통된 것이다. 소록대교가 건립되면서 이곳에도 상수도가 들어왔다. 한편 소록도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슴과 관련된 섬이다. ‘아기 사슴의 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사슴이 많다. 그래서 야산에서는 사슴 떼를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이 섬에 사슴이 처음 들어온 건 1992년 가을이다. 서울에 사는 백모 씨가 한센인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사슴 3마리를 기증했다. 이후 사슴은 20여 마리로 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슴들은 모두 울타리를 쳐 만든 농장 안에서 사육됐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개체 수는 불었고, 동시에 사료값도 늘어났다. 주민들은 결국 이들을 야산에 풀었다. 10여 년 전부터 섬 야산에는 사슴 무리가 나타났다.
그런데 야산에 풀어놓은 사슴이 급격히 늘어나 ‘생태계 파괴범’으로 돌변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슴 개체 수가 추정치로 100마리가 넘으면서 사슴은 더는 주민들의 ‘볼거리’가 아니었다. 애써 가꾸어놓은 고구마 등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골칫거리’로 뒤바뀌었다. 이에 주민들이 다시 그들을 생포해 농장에 가둬 키우기로 결정하기에 이를 정도란다. 소록도에 관한 이청준 선생의 ‘당신들의 천국’ 속 이야기를 생각하게 한다. 목표를 가진 지도자와 늘 먼먼 곳에 켜 있는 등대불처럼 깜박거리는 민초들의 희망 사이에 무엇이 있어야 갈등을 줄여 서로 웃는 얼굴로 일할 수 있을까. 당신들의 천국을 위한 고통일지라도 그런 시련 속에서 소록도는 이처럼 먼 남해바다에 하나의 보석이 되어 반짝거리고 있을까. 만일 함께 소통해 가면서 행복한 미래를 가꾸어 왔었다면 지금의 소록도는 어떤 모습일까. 절망 앞에 있는 사람이라면 행복을 꿈꾸는 이들은 한번쯤 이곳에 들러볼 일이다. 단체 속에서 사람은 무엇으로 남는지 알고자 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바닷가의 쉼터
출처:(한국의 섬 - 강진군·고흥군·보성군·장흥군, 2021. 04. 30., 이재언)
장관을 이루는 세계 곳곳의 등대 사진 (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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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09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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