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해랑길 영광 39코스 제1부
답동버스정류장-가자봉-뱀골봉-대신삼거리-덕산마을-정유재란열부순절지-
노을전망대-노을전시관-노을길 목재뎈길-대신항-대초마을-모래미-영광대교
20230222
1.백수해안 노을길의 빛나는 풍경과 묵방포의 비가(悲歌)
새벽의 어둠 속에서 서해랑길 38코스 탐방을 백수읍 하사리에서 출발하여, 백수읍 지역의 상사리, 지산리, 약수리, 백암리를 거쳐 홍곡리 백수해안도로 남쪽 끝에서 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곧바로 백수읍 홍곡리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39코스를 출발한다. 39코스는 백수읍 지역의 홍곡리, 백암리, 대신리, 구수리를 거쳐 홍농읍 칠곡리로, 다시 법성면으로 넘어가 진내리를 거쳐 법성리 버스터미널에서 끝난다. 38코스와 39코스의 대부분은 백수읍 지역 탐방인데, '백수'의 뜻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백수의 한자는 어떻게 될까? 백수건달의 白手, 아흔아홉 살의 白壽, 허옇게 센 머리의 白首, 맑은 물의 白水, 흰 소매의 白袖, 온갖 짐승의 百獸, 여러 생각을 품었지만 모두 잘못이었다.
그런데 백수의 뜻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백수(白岫)'라는 지명의 유래는 百(일백 백) 글자에서 一(하나 일)이 부족한 아흔아홉이란 의미의 白(흰 백)과 岫(산봉우리 수)를 써서 아흔아홉 개의 봉우리를 가진 곳이라 하여 '백수(白岫)'라는 지명을 갖게 되었다. 구수산(九岫山)의 뜻은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는 산으로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가 아홉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올린 곳으로 알려져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 구수산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봉화령(374m)에서 내려다보면 백수의 드넓은 평야와 칠산바다, 백수해안도로의 아름다운 절경을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백수와 구수산의 유래' 설명안내판) 백수는 아흔아홉 봉우리가 있고 그 산봉우리들에서 근원하는 여러 물길이 있다는 '백수(白岫)'라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백(白)의 의미가 장수를 뜻하는 아흔아홉 살 '백수(白壽)'의 백(白)과 같은 뜻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서해랑길 39코스 장암지맥 가자봉-뱀골봉 산줄기를 걸을 때 나즈막한 산봉우리들이 많은 것이 그려졌다.
백수해안도로 대신리 묵방포 해안으로 내려갔다. 묵방포 언덕에 '정유재란열부순절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정유재란 당시(1597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살던 동래 정씨(東萊鄭氏)와 진주 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켜 죽은 곳이다. 이들은 전쟁을 피해 묵방포(墨防浦)까지 피난왔으나, 결국 왜적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로운 죽음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 앞 바다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12명의 여인의 정절을 기리는 사당 '모열사(慕烈祠)'와 '열부순절비'가 세[워져 있는 곳을 '정유재란 열부 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라고 이른다. 나라의 재난은 개인에게 고통을 주는데, 국가 존립의 위기에서 여인들이 왜적의 노리개가 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였다. 묵방포 앞 칠산바다에 여인들의 피맺힌 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다.
묵방포 언덕에서 여인들의 고통의 비가(悲歌)에 가슴이 아리다. 그 전쟁을 일으킨 나라는 이후 우리나라를 삼키고 더 큰 고통을 조선 겨레에게 안기고 여인들에게는 위와 똑같은 고통을 주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직도 사죄나 반성도 하지 않은 채 잘못의 합리화에 급급하고 있다. 평화! 평화는 잘못의 통렬한 반성에서 시작된다. 조선 여인들이 탄 작은 배가 칠산바다를 위태롭게 떠가고 있다. 그들을 뒤쫓아가는 왜선이 가까이 더 가까이 추적하고 있다. 꽃처럼 바다에 몸을 던지는 여인들, 순백의 꽃잎들이 칠산바다에 아롱지고 있다.
어두운 가슴을 안고 백수해안도로 노을관광지로 올라갔다. 노을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칠산바다는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멀리 칠산도가 황톳빛으로 들어온다. 가슴이 탁 트인다. 아름다웠다. 괭이갈매기가 사랑을 나누며 칠산바다를 날아간다. 저녁노을이 물들 때 이곳에 오면 풍경이 환상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칠산바다에 고두섬과 칠산도가 떠있고, 붉은 노을이 칠산바다를 붉게 물들인다. 칠산도의 상징 괭이갈매기들이 노을빛을 받으며 칠산바다를 날아간다. 그 상상 속 풍경에 도취하며 백수해안도로로 나갔다. 펜션과 카페 거리를 거쳐 백수해안도로를 따라간다.
칠산바다를 바라보며 해안도로를 걸어가면 하얀 빛 대신등대가 서 있고 노을전시관이 보인다. 그 앞에 조미미 노래비가 세워져 있고,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가 흘러나온다. 해파랑길 경주 나정해수욕장에서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비를 만났었다. 작사자 경북 경주 출신의 정귀문이 경주 감포읍 나정리 해변에서 사무치는 느낌을 풀어낸 노랫말에, 함북 청진 출신의 이인권이 곡을 붙이고, 전남 영광 출신의 조미미가 부른 노래가 '바다가 육지라면' 대중가요, 2008년 KBS가요무대가 선정한 대한민국 명가요 60선에 뽑힌 노래이다.
노을전시관 뒤쪽으로 나가 해안의 목재뎈길을 따라 걷는다. 노을종각으로 갔다. 노을길의 노을종 소리가 울린다. 노을종은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맴도는 아들의 효심을 담은 종이라고 한다. 웃음과 사랑과 행복을 주는 노을종이라고 하는데 그 전설은 너무 슬프다. 전설은 돔배섬(도음소도)에 사는 소금장수 아들과 어머니의 이야기이다. 소금 팔러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늙으신 어머니가 아들을 찾아나섰다가 넘어져 목숨을 잃어 돌이 되었다. 소금이 비에 젖어 녹아서 악전고투 끝에 몇 날이 걸려 어머니의 약을 마련하여 돌아오던 아들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애통해 하다가 사라졌다. 사람들은 해질녘 노을을 보면 바람처럼 사라진 아들이 붉은 노을을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믿었다. 아들이 붉은 노을을 지고 어머니를 찾아오는 노을길, 종소리가 울린다. 애통과 그리움의 종소리가 울린다.
칠산바다 괭이갈매기의 전설은 슬픔 속에 행복이 느껴지는데, 돔배섬 노을 전설은 아련한 슬픔과 그리움으로 여울진다. 칠산바다에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들이 괭이갈매기로 환생하여 아름다운 노을 아래서 백년가약을 맺고 칠산바다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그곳을 지켰다. 그들의 후손이 지금 칠산도의 명물 괭이갈매기다. 슬프지만 사랑과 행복이 느껴진다. 노을종은 괭이갈매기와 소금장수 총각이 함께 울리는 종소리다. 노을종을 울렸다. 목적 없이 그냥 또 노을종을 울렸다. 노을이야기가 퍼져나가 칠산바다에 물결친다.
해안목재뎈길은 365계단을 지나서 백수해안도로와 나란히 간다. 앞에는 돔배섬과 괭이섬 그리고 쥐섬이 보인다. 금정산이 솟아있고,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과 영광원자력발전소, 홍농읍 칠곡리 TSK영광조선소 크레인도 보인다. 고요와 적막이 칠산바다에 흐른다. 걸음을 빠르게 하려지만 마음은 바다에서 놀고 있다. 삼미랑어촌문화체험관 앞을 지나서 대신항 전망쉼터에 이르러 숨을 골랐다. 칠산바다는 서북쪽으로 홍농읍 계마항을 거쳐 드넓은 서해 바다로 나가고, 동쪽으로는 해협을 지나 법성포구로 뭍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 해협을 목넹기라 이르는 것 같으며 이 목넹기에 영광대교가 건설되어 있다.
대신항 전망쉼터에서는 맞은편 홍농읍 해안이 멋지게 조망된다. 목넹기 왼쪽으로 칠곡리 소항월과 대항월, 선창금, 그 왼쪽으로 계마리의 계마항과 가마미가 한눈에 들어오고 금정산이 우뚝하다. 그리고 대신항에 최근에 세워진 홍등대가 방파제 끝에 있다. 홍등대 모양은 칠산타워와 영광의 명품 생선 조기를 본떴다고 한다. 대신항은 공사 중이어서 어수선하다. 대신항에서 해안뎈길을 따라 대미치해안으로 나와 백수해안도로와 재회하였다. 대치미해안의 마을이 대초마을인데 옥당박물관 안내판이 보인다. 옥당박물관이 어떤 박물관일까? 알아보니 "자기 고장의 특화된 문화적, 정신적 특성과 자기 고장의 특화된 상품을 살린 문화기반시설과 문화상품을 만들어 영광 관광산업을 육성하고자" 원불교에서 원불교 탄생지인 영광 지역에 건립한 박물관이다. 그런데, 왜 '옥당'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 홍문관(弘文館)이다.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別稱)이다. 그런데 옥당(玉堂)을 상징하는 '옥당고을'의 칭호를 전라도 영광과 황해도 안악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영광 지역은 고려 때 부용창(芙容倉), 조선조에는 28여 고을의 세곡을 관할한 법성창(法聖倉)이 있었고, 지금의 법성항을 거쳐 중국과 국교가 있어 국내외 사신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일찍이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법성포는 무역항(貿易港)으로 발달하여 '예악문물'이 찬연한 고을이어서 당시에 국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의 지역이었다. 그래서 옥당을 상징하는 옥당고을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전통을 오늘에 이어서 원불교가 박물관을 옥당박물관이라 이름하였다고 볼 수 있다.(영광군청 참조)
모래미해수욕장 앞을 거쳐 목단교차로 영광대교 입구로 올라갔다. 영광대교 입구에 영광대교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곳의 시향 박경숙(1959~)의 '영광대교' 시비가 영광대교를 우렁차게 찬양한다.
영광대교여!/ 너의 위대한 출발은/ 쪽빛 바다가/ 노을을 잠재우는 시간/ 새벽을 깨우며/ 시작되었다.
무궁한 창공은/ 지난 7여 년 동안/ 순간, 찰라의 시간을/ 굵은 와이어로 엮어/ 영광군민의 꿈을 창조하는/ 미학을 지켜봤으리라
아!/ 영광이여/ 위대한 자랑이여/ 꿈의 다리로/ 전남과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아우름으로/
세기의 역사가 되어/ 길이 길이 전설이 되거라
오! / 수고로운/ 땀방울이여/ 칠산바다/ 떠오르는 저 태양을/ 희망의 빛으로/ 맞이하여라
-박경숙(1959~)의 '영광대교' 전문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39km 중 12.7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46분 중 3시간 58분
백수해안도로 서해랑길 38·39 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는 곳에서 답동마을 입구 방향으로 올라간다.
오른쪽에 답동마을 버스정류소, 그 왼쪽에 서해랑길 39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언덕 아래에 답동마을이 있다.
백수읍 답동마을 입구 서해랑길 39코스 시작지점 표지 앞에서 기념 사진을 남기고 39코스를 출발한다.
장암지맥의 갓봉이 정면에 있고 봉화령은 왼쪽 나뭇가지 뒤에 있으며 봉화령 아래에 백수읍 홍곡리 백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이 어우재 고개인 듯. 백수해안도로 어우재에서 오른쪽 산길로 진입한다.
이곳에서 산길로 들어서 장암지맥 능선 봉우재로 향한다.
위 언덕이 장암지맥 능선 봉우재인 것 같다. 오른쪽은 봉화령 방향, 서해랑길은 장암지맥 왼쪽으로 이어간다.
봉화령 아래쪽에 홍곡리 야동마을이 있는 것 같다. 장암지맥을 따라 백수읍 대신리 열부순절지로 이어간다.
오른쪽 언덕 아래 답동마을 버스정류소가 보인다. 왼쪽 아래는 홍곡리 야동마을과 그 왼쪽에 백동마을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뒤쪽 왼쪽에 염산면 봉남리의 봉덕산, 중앙에 야월리의 가음산, 그 오른쪽에 금호산, 그 오른쪽에 두우리의 뒷산이 분명히 확인된다. 오늘 새벽 뒷산 앞쪽 백수읍 하사리에서 38코스를 출발, 오른쪽으로 해안으로 나가서 이곳으로 걸어온 길이 선명하다.
영광군 백수읍과 염산면 일대의 평야가 모두 조망된다. 앞쪽 중앙에 장두산, 그 뒤에 홍곡저수지도 확인된다.
'고도도'와 이 봉수에 대한 구체적 설명안내판이 설치되기를 바란다.
왼쪽에 백수읍 하사리, 상사리, 지산리, 약수리 일대, 중앙 금호산과 뒷산 일대는 염산면 야월리와 송암리 일대이다.
칠산바다 중앙 뒤에 7개의 바위섬 칠산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아래 보이는 마을은 백암리 동백마을인 것 같다.
"백암리(栢岩里) 동백(冬栢)마을은 조선시대 초(朝鮮時代初)에 영광 정씨(靈光丁氏)가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나라 정씨(鄭氏)는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신하여 오늘까지 살고 있다. 마을의 형태(形態)가 동백꽃처럼 생겼다 하여 동백(冬栢)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현재 동백나무가 동네 해변에 약 200여 그루가 자생하고 있어 동백골이라 한다." - 영광군청
계곡에 대신저수지가 조성되어 있고, 오른쪽 산봉이 구수산(九岫山)일 것이라 가늠한다.
이곳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가자골 백수해안공원에 이르는 것 같다.
지명 표시가 없지만 가자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백수해안도로가 해안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칠산바다 오른쪽 뒤에 칠산도가 흐릿하게 조망된다.
이제 영광군 백수읍과 염산면 서쪽 지역이 친근하게 확인된다. 봉덕산, 가음산, 금호산, 뒷산 등의 산은 염산면 위치를 확인하는 기준이 되어 준다. 친환경에너지 풍력발전단지는 영광군의 명물이 되는 듯.
왼쪽 산봉의 산줄기를 이어서 가자봉으로 왔다. 중앙 뒤에 봉덕산, 그 오른쪽에 가음산이 확인된다.
가자봉 표지는 없지만 장암지맥 해발 257.3m라고 적힌 이 표지를 보며 이곳이 가자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안부로 내려갔다가 올라간다.
저곳이 뱀골봉일 것이라 추정한다.
왼쪽 뒤의 산봉이 장암지맥 가자봉일 것이며 오른쪽 아래의 섬은 고두섬일 것이다.
칠산바다 뒤쪽에 황톳빛 바위섬 칠산도가 흐릿하게 보인다. 왼쪽 아래의 작은 섬은 고두섬이라 이르는 것 같다.
장암지맥 226.5m 표지기가 붙어 있으며 이정목 날개에는 가자봉1.1km, 덕산1.0km라고 적혀 있다.
장암지맥 산줄기를 내려가며 백수읍 대신리 덕산마을을 내려보았다. 장암지맥은 왼쪽 산줄기로 이어진다.
"대신리(大新里) 덕산(德山)마을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김경장(金京長)이 고려 말엽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산세가 용(龍)의 형태를 하고 있어 덕망이 있게 보이는 산이라 하여 덕산(德山)이라 하였다. 이 마을에는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3호(號)인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西再亂烈婦殉節地)가 있는데 함평 월야에 살던 동래(東萊)·진주 정씨(晉州鄭氏) 문중의 부인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놈들이 겁탈을 하려고 하자 이곳까지 피신하였으나 계속 추적하자 12부인이 순절하였다고 한다.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에서 바다 쪽으로 50m쯤 가면 바위의 형태가 한 쪽은 처녀의 유방과 같이 생기고 다른 쪽은 검은 바위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서 물이 나오고 있는데, 이 물은 신경통에 좋은 음양수라고 한다." - 영광군청
백수해안도로가 해안으로 이어지고 해안도로 아래 묵방포 언덕에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 사당인 모열사(慕烈祠)가 보인다. 서해랑길은 대신삼거리에서 오른쪽 덕산마을 앞을 거쳐 해안도로 지하통로를 통하여 모열사로 이어진다.
백수해안도로 대신삼거리에 노을전망대1.0km, 39코스 종점11.8km 지점의 서해랑길 이정목과 구수산 등산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백수읍 백암리 동백마을과 답동마을 방향의 백수해안도로이며 오른쪽으로 노을전시관으로 이어진다. 왼쪽길은 대신길이다.
장암지맥 뱀골봉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왔다. 서해랑길은 앞쪽의 대신길로 잠시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대신삼거리에서 대신길을 따라 덕산마을로 향하다가 덕산마을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모열사 앞을 거쳐 해안으로 이어진다. 대신길을 계속 따라가면 대신1리 대초마을에서 서해랑길과 재회한다.
모열사(慕烈祠)의 정문 도해문(蹈海門), 그 옆에 모열사(慕烈祠) 사적비가 있다.
"모열사(慕烈祠) : 바다를 건너 피난하다가 일본군의 함선을 만나게 되자 바닷물에 몸을 던진 12명의 여인의 정절을 기려 칠산바다가 바라보이는 해안 언덕에 세운 사당이다. '모열사'와 '열부순절소 비각'을 묶어 '정유재란 열부 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라고 부르는데, 1976년 9월 30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호로 지정하였으며 영광군에서는 국·도비로 1981년에 본 모열사를 세웠다."
모열사 사적비(慕烈祠事蹟碑) : 임진왜란 5년 후 정유재란 때(1597년) 함평군 월야면 달악이(月岳里)에 거주한 동래, 진주, 양 정씨 친인척 12부녀가 작은 배를 빌려 타고 서울로 피난가다 음력 9월 26일 이곳 칠산해(七山海)에 이르렀을 때 난데없이 왜적들의 배가 쫓아오자 이들에 항거, 나라와 가문을 위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위 사실이 당시 금상폐하 선조께 상조(上朝)되니, 선조께서는 12부녀에게 정문(旌門)의 포상을 내렸다." - 영광군문화관광해설사회 카페
오른쪽에 '열부도해순절소(烈婦蹈海殉節所)' 비각과 왼쪽에 정유왜란함평월악 양(兩)정씨팔열부도해순절소碑, 건립기, 사열부도해순절비 등 세개의 비석이 칠산바다를 등지고 묵방포 언덕에 세워져 있다. 왼쪽 뒤의 섬은 고두섬이다.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墨防浦) 언덕에 정유왜란함평월악 양(兩)정씨팔열부도해순절소碑, 건립기, 사열부도해순절비(四烈婦蹈海殉節碑)가 칠산바다를 등지고 세워져 있다. 맨 왼쪽의 사열부도해순절비(四烈婦蹈海殉節碑)는 진주 정씨와 동래 정씨의 팔열부에 속하지 않은 4열부를 기리는 비석이다. 당시 묵방포 칠산 앞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잡힌 피난민 중 12명의 여성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진주 정씨 정박의 부인 밀양 박씨는 칠산 앞바다가 아닌 대마도 부근에서 투신하였다고 한다.
건립기 비문을 옮겨 놓는다.
이 비는 정유재란 당시인 1597년 9월 27일(음) 전남 함평군 월악면 월악리(현 월야면 월악리)에서 서울로 피난을 가기 위해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왜적선을 만나 피랍위기에 처하자 일행중 12부녀자가 스스로 바다에 투신하여 순절한 사실이 광해 9년(1617) '동국신속 삼강행실도 열부편'에 12열부의 내역과 그림이 수록된 책을 조정에서 발간하였고 숙돌7년(1681, 辛酉) 6월 30일자(辛亥) 실록에 열부로 정려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당시 함께 피난을 간 정경득(만사록) · 정희득(해상록) · 정호인 (정유피란기) 피난일기에도 동시순절의 기록이 있고, 1871년(辛未) 3월에 진주인 후손 세 분과 동래인 후손 두 분이 묵방포 암벽에 '함평 월악 8일부 순절소'라고 글씨를 새겼고 1933년(癸酉) 6월에 진주인 후손 다섯 분과 동래인 후손 한 분이 확인하고 이름을 새겨서 근거를 남겼으나 염기와 풍화로 심하게 훼손되고 있어 이 글을 보존해야 할 후손들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바다에 투신한 12일부 중 함평 8열부를 旌烈閣 현판 순서와 내용대로 명기하여 비를 세운다.
承訓郎 義禁府都事鄭雲吉妻烈婦順人咸陽吳氏 赠 掌樂院正 鄭慶得妻烈婦淑人順天朴氏
部將 鄭主一妻烈婦淑入成平李氏 成均進士 鄭希得妻烈婦宣人咸平李氏
通訓大夫青巖道察訪鄭成一妻烈婦淑人咸平李氏 通訓大夫青農道察訪鄭成一女烈女 晉州鄉氏
奉訓郞 鄭節妻烈婦淑人靈光金氏 學生 鄭好仁妻烈婦孺人咸平李氏
2014년 3월 23일 동래·진주 정씨 팔열부 문화
두 개의 순절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바다를 바라볼 때 왼쪽은 정씨 팔열부 순절비이고, 오른쪽은 밀양 박씨 순절비이다. 정씨 팔열부 순절비는 1942년에 건립했고, 밀양 박씨 순절비는 1946년에 세웠다. 두 곳 모두 8각 석주를 4개씩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려 놓았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 23호.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818-3. 정유재란 당시(1597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등에 살던 동래 정씨(東萊鄭氏)와 진주 정씨(晋州鄭氏) 문중의 부녀자들이 절개를 지켜 죽은 곳이다. 이들은 전쟁을 피해 묵방포(墨防浦)까지 피난왔으나, 결국 왜적에게 잡히자 대마도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느니 의로운 죽음을 결심하고 모두 칠산 앞 바다에 몸을 던졌다. 숙종7년(1681년) 나라에서는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상을 주고 정려(旌閭)를 내려 이들의 정절을 기렸다. 현 두개의 비각은 1942년과 1946년에 세운 것으로, 바다를 뒤로 하여 팔각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팔작형(옆에서 보면 '八'자)의 지붕돌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 영광 정유재란 열부순절지(靈光 丁酉再亂烈婦殉節地) 설명안내판
"정씨 팔열부 순절비(왼쪽) 는 1597년 정유재란 때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던 동래 정씨와 진주 정씨 문중의 부인들이 일본군을 피해 이동하던 중 지금의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가까운 바다에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선박에 태워져 먼 바다로 나아갈 즈음 굴욕을 당하기보다는 의롭게 죽을 것을 결심한 이들 부녀자들은 서해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이들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순절지 부근 해안 언덕에 순절비를 세웠다. 비를 보호하는 비각은 팔각의 돌기둥 4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팔열부 순절비는 앞면에 ‘정씨 팔열부 도해 순절소(鄭氏八烈婦蹈海殉節所)’라고 음각하고 뒷면에는 8명 열부의 이름을 적었다. 순절한 것은 12명 또는 13명이지만 이 중에서 함평사람 8명의 순절을 기리는 비석이다. 밀양 박씨 순절비(오른쪽)는 밀양 박씨는 진주 정씨 정박(鄭博)의 부인으로, 포로로 잡혀가다가 대마도 부근에서 투신했다고 한다. 비석 앞면에는 ‘열부 박씨 순절소(烈婦朴氏殉節所)’라고 새겼고, 뒷면에는 ‘열부 박씨 정려기’를 적었다." - 영광군문화관광해설사회 카페
모열사 뒤쪽의 산은 장암지맥 산줄기이다. 정유재란열부순절지(丁酉再亂烈婦殉節地)를 거쳐 해안 뎈길로 내려간다. 산 아래의 마을이 묵방마을일까?
"대신리(大新里) 묵방(墨防)마을은 380년경에 밀양 박씨(密陽朴氏) 박상언(朴尙彦)이 경남 밀양에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글을 벗삼아 생을 보내기 위해 방랑생활을 하다가 이곳에 머물게 되었는데 산세(山勢)를 보니 등잔을 걸어 놓은 것 같은 형태를 하고 있어 속담 등하부명(燈下不明)을 인용, 어둡다는 뜻으로 묵방(墨防)이라 칭하였다 한다." - 영광군청
묵방포 해안에 설치된 뎈길을 따라 노을관광지로 올라간다.
쉼터정자를 거쳐 노을전망대 스카이워크로 향한다.
백수해안도로 노을전망대 스카이워크 끝에 괭이갈매기 날개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밤이 되면 조명이 더해져 날개가 다채로운 색으로 빛난다고 한다. 괭이갈매기는 칠산바다 칠산도의 상징이며 천연기념물 제389호로 한 번 짝을 이루면 평생을 함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괭이갈매기 조형물 작품명 '끝없는 사랑(Endless Love)'은 높이 3.6m, 폭 3.2m의 크기로 백수해안도로를 찾는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사랑과 백년해로의 기원을 담아 2021년 설치되었다고 한다.
괭이갈매기 날개 조형물 뒤에서 황톳빛 칠산도를 조망하였다. 이때 칠산도의 상징 괭이갈매기 한 쌍이 사랑을 즐긴다.
장암지맥 가자봉과 뱀골봉을 거쳐 왼쪽 백수해안도로 대신삼거리로 내려와 묵방포 언덕 정유재란열부순절지를 거쳐 노을전망대 스카이워크로 왔다. 칠산바다 오른쪽에 고두섬이 보인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백수해안도로 펜션&카페 거리를 거쳐 해안의 대신등대 방향으로 이어진다.
아주 먼 옛날, 칠산바다 아름다운 노을 아래서 백년가약을 맺고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부부가 있었다. 풍랑이 유난히 거셌던 어느 날 황금어장 칠산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그를 기다리던 아내는 몇 날 며칠을 슬피 울며 통곡하다가 남편을 따라 칠산바다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후 날씨가 궂은 날이면 바다에서 여인이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이를 가엽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정성스레 부부의 넋을 달래는 제를 지냈고, 하늘이 이에 감동해 부부의 영혼을 한 쌍의 괭이갈매기로 환생시켰다. 괭이갈매기로 환생한 부부는 아름다운 노을 아래서 백년가약을 맺고 칠산바다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그곳을 지켰다. 이후 칠산바다에 수많은 괭이갈매기가 번성하여 이곳을 수호하는 명물이 되었고, 천연기념물 제389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괭이갈매기는 한 번 만난 짝과 평생을 함께한다고 한다.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이 앞에 보인다. 칠산바다의 섬은 돔배섬 또는 도음소도라 이른다.
"백수해안도로는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에서 백암리 석구미 마을까지 16.8km에 달하는 해안도로로, 기암괴석ㆍ광활한 갯벌ㆍ불타는 석양이 만나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는 서해안의 대표적인 드라이브 코스이다. 특히 해안도로 아래 목재 데크 산책로로 조성된 3.5km의 해안 노을길은 바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걷기와 함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2006년 건설교통부의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2011년 국토해양부의 제1회 대한민국 자연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평가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국내 유일의 노을전시관을 비롯하여 다양한 펜션과 음식점 등이 갖추어져 있다." - 영광군청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 앞에 조미미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2009.3.8 개관하여 운영중인 노을전시관은 천혜의 자연경관이 빼어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가운데 9번째로 꼽히는 백수해안도로에 위치하여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영광 노을의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빛의 과학적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학습장의 역할도 한다. 1층 : 노을체험관(사진 속 노을 외 7테마), 2층 : 노을과학관(노을전망대 외 10테마), 지하1층 : 매점, 수유실" - 영광군청
영광군에서 2022년 6월에 세운 조미미를 기리는 노래비로, 칠산바다의 칠산호를 형상화하였다. 노래비는 너비 5.4m, 높이 3m 규모로 포토존과 뮤직박스가 포함되어 있어 '바다가 육지라면'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노래비 앞면에는 조미미의 생애와 대표곡이자 히트곡인 '바다가 육지라면'의 노래 가사가 새겨져 있다. 조미미(1947~2012)는 영광 출신으로 목포여고를 졸업하고 1965년 가요계에 데뷔하였다. 1960년대 중반 대한민국 대중 가요계는 나훈아, 남진, 이미자, 조미미 등 네 명의 가수가 주도했다는 평가가 있다. 2000년에 재일교포 사업가인 남편과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2010년 귀국하여 가요활동을 이어오다가 2012년 간암으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 나무위키 참조
노래비 뒷면에는 조미미의 대표 앨범 3장을 소개하고 있다.
백수해안도로 노을전시관 및 노을길이 2011년 제1회 대한민국 경관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을 기리응 수상비이다.
악어 석조상과 코뿔소 석조상이 칠산바다를 향하여 조성되어 있다. 바다에 돔배섬(도음소도)이 떠있다.
뎈길을 따라가면 앞에 노을종 종각이 있다.
노을종을 울려 보았다. 종을 울리면서 그냥 웃음짓고, 사랑과 행복감에 젖었다. '노을종' 설명안내판 글을 옮겨 놓는다.
종소리는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종을 가볍게 친 후 껴안고 가만히 그 울림을 들어보세요. 온몸으로 노을 같은 맥놀이(진동)가 느껴질 겁니다. 이 종은 노을이 되어 어머니 곁을 맴도는 아들의 효심을 담아 영광군에서 만든 ‘노을종’입니다. 한 번 치고 맥놀이를 들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두 번 치고 맥놀이를 만지면 사랑의 감정이 찾아들고, 세 번 치고 맥놀이를 느끼면 행복할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일몰의 낭만으로 가득 찬 영광의 바다에서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웃음과 행복을 기원해 보세요.
아주 먼 옛날 도음소도에는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소금을 팔아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매일 무거운 소금가마를 지고 나가 팔다가 노을이 내릴 무렵에야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지요. 그런데도 아픈 어머니 앞에서는 힘든 내색 한 번을 하지 않는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안쓰럽고 걱정돼 매일 아들이 오가는 길목에 서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때마다 아들은 노을을 등에 지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왔지요. 비바람이 심한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금가마를 지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굵은 빗줄기에 소금은 모두 녹아버리고, 팔 것이 없어진 아들은 다른 방편으로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느라 며칠을 더 바깥에서 머물게 됩니다. 이 같은 상황을 알 길 없는 어머니는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급기야 찾아 나서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 바위에 걸려 넘어지고, 어머니는 넘어진 그대로 돌이 되고 맙니다. 며칠 후 아들은 약을 가득 담은 노란 함지박을 지게에 싣고 돌아오다 길가에서 돌이 되어 버린 어머니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뛰어갔습니다. 노란 함지박은 이미 뒷전이었습니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아들은 몇 날 며칠을 어머니 곁에서 구슬프게 울다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이후 사람들은 해질녘이면 아들이 붉은 노을을 등에 지고 어머니 곁으로 온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어머니가 걸려 넘어진 바위를 궁굴바위, 어머니 바위를 할미여, 노란 함지박이 떨어진 자리에 있는 바위를 노랑여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해안에 대신등대가 보인다. 노을전시관 입구에서 백수해안도로와 헤어져 해안 뎈길을 따라왔다.
서해랑길은 백수해안 뎈길을 계속 이어간다. 앞에 노을종 전설이 있는 돔배섬 오른쪽에 영광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
바다 건너편 금정산 왼쪽 아래에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과 한빛 원자력본부(영광원자력발전소), 그 오른쪽에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크레인이 보인다.
왼쪽 앞은 돔배섬(도음소도), 그 오른쪽 뒤에 괭이섬, 그 오른쪽 뒤 계마항 앞의 쥐섬이 모두 확인된다. 금정산 오른쪽 아래에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크레인이 보이며, 중앙에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과 그 북쪽에 가마미(加馬尾)마을이 들어온다.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계마리의 다른 마을들은 모두 사라지고 가마미마을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계마리(桂馬里) 가마미(加馬尾)마을은 1627년 인조 5년 보명대사가 이곳에 와 말이 해변을 향해 오는 형국이라 마래(馬來)라 하는데 본 마을은 말의 꼬리가 피어나는 형국으로 가마미(加馬尾)라 했다.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없어져버린 계마리를 살펴보면, 계마2리 : 가꼴, 통샘(용정이라고도 불렸음) - 금정산에 금정사라는 절과 금정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고시생들이 머무르며 공부도 했던 곳이며, 무지무지하게 큰 벚꽃나무가 그룹으로 있어 봄이면 활짝핀 벚꽃이 웅장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일품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단골 소풍지역으로 각광을 받았음. 계마3리 : 안마(질마제), 샛터 - 초등학교가 안마에 있었으며, 70년대 초까지는 버스가 안마까지만 다녀서 다른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이곳까지 와서 버스를 타고 다녔고, 70년대 중반부터는 가마미까지 버스가 다녔음. 계마4리 : 계동, 수아 - 전형적인 어촌마을임. 계마1리 : 가마미 - 자연부락이 1개뿐이지만 인구가 가장 많았던 부락임. 가마미해수욕장이 있는데 전남 최초 개장해수욕장으로 일제시대부터 개장한 유명한 해수욕장으로 피서철이면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인파가 몰렸던 해수욕장이며, 6개 마을을 휩쓴 거대한 원자력발전소도 비켜간 계마리 중 지금까지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을임." - 영광군청
오른쪽에 영광대교가 있고, 바다 건너편 마을은 홍농읍 칠곡리 소항월마을(중앙), 대항월마을(왼쪽)이다.
"칠곡(七谷)3里 소항월(小項月)마을은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칠산바다에서 조기를 잡기 위해 입출항이 용이한 곳에 사람들이 몰려와 1924년부터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목냉기는 항월(項越)의 뜻이며 거센 바닷바람이 불어 이곳만 넘기면 무사하다 하여 일명 목냉기라 한다. 칠곡(七谷)3里 대항월(大項月)마을은 1955년 등대가 설치되면서 마을이 형성 당시(當時) 이장(里長)이었던 양기표씨가 월(越)을 월(月)로 정정하고 대항월(大項月)이라 칭하였다." - 영광군청
맨 왼쪽은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이고 영광원자력발전소가 보인다. 왼쪽에 금정산이 솟아 있고, 그 아래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크레인이 보인다. 그곳의 마을이 선창금이고, 그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해안 위쪽 마을이 월곡마을이다. 맨 오른쪽에 소항월마을, 그 왼쪽에 대항월마을이 모두 확인된다. 중앙 맨 뒤에 보이는 산은 봉대산이라 가늠한다.
"칠곡(七谷)2里 월곡(月谷)마을은 1700년경 전북 고창군 위도에서 장흥 고씨(高氏)가 들어와서 터를 닦았다. 옛날에 옹기 그릇을 구었다 하여 옹점(甕店)마을이라 하다가 늙은이가 머문 곳이라 하여 옹정(翁停) 으로 바꾸어 부르니 마을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일제 말기에 석양에 달이 골에 비친다고 하여 월곡이라 개명하게 되었다." - 영광군청
왼쪽에 돔배섬(도소음도), 그 오른쪽에 괭이섬, 그 오른쪽에 쥐섬,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과 영광원자력발전소가 확인된다. 중앙 오른쪽에 금정산, 그 아래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그곳에 칠곡리 선창금마을이 있다.
대신항 전망대 이르기 직전 백수해안도로에 삼미랑어촌문화체험관 펜션이 있다.
왼쪽에 돔배섬(도소음도), 그 오른쪽에 괭이섬(작은 돔배섬), 맨 오른쪽에 쥐섬과 계마항이 확인된다.
맞은편 금정산 아래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칠곡리 선창금마을이 보인다.
오른쪽 산봉 아래 해안은 대치미해안으로 대초마을이 있고, 왼쪽 건너편 해안은 구수리 모래미 해변이다.
바로 아래 백수읍 대신리 대신항과 방파제등대, 건너편 오른쪽에 백수읍 구수리 모래미해안, 정면에 영광대교, 건너편 맨 왼쪽 마을은 홍농읍 칠곡리 소항월마을이다.
백수읍 대신리 대신항은 2010년 어촌정주 어항으로 지정돼 2017년 방파제, 접안시설, 배후부지 등으로 어항 시설이 확장됐지만 이정표 역할을 할 등대가 없었다. 이에, 어선 등 선박의 안전항해를 위해 국비 1억2,000만원을 들여 직경 2.6m, 높이 12.4m 규모로 2020년 7월에 붉은색 방파제등대를 완공했으며, 등대 모양은 인근 칠산타워 모양과 지역 특산품인 조기 입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 일간투데이 참조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과 영광원자력발전소가 확인된다. 중앙에 금정산, 그 아래 홍농읍 칠곡리 칠곡농공단지와 TSK영광조선소, 그곳에 칠곡리 선창금마을이 있다. 오른쪽 마을은 홍농읍 칠곡리 대항월마을이다.
왼쪽에 방파제홍등대가 세워져 있고, 건너편에 홍농읍 칠곡리 소항월마을이 있으며 영광대교가 오른쪽에 있다.
오른쪽 건너편은 백수읍 구수리 모래미해안, 영광대교 건너편 중앙 산 아래 왼쪽 마을은 법성면 진내리 자갈금마을, 맨 왼쪽 건너편 마을은 홍농읍 칠곡리 소항월마을이다.
맞은편 해안은 대신리 대치미 해안이며 해안 마을은 대신리 대초마을이다. 서해랑길은 대신항에서 해안뎈길로 이어지는데 공사 중이어서 위쪽 해안길로 올라가 백수해안도로를 따라갈 수 있다.
대신항 제방 공사 중이어서 해안뎈길이 통제되고 있지만 해변으로 나가 대신항에서 대치미 해안으로 이어지는 뎈길을 따라간다.
왼쪽 대치미 해안 뒤에 보이는 마을이 대신리 대초마을이다.
백수읍 대신리 대신항은 해양수산부 ‘어촌뉴딜 300사업’에 선정돼 배후 마을과 연계한 다양한 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2023년 4월 14일까지 공사를 완료한다고 공사안내판에 적혀 있다.
대치미 해안이 둥근 원을 그리며 이어지고 해안 뒤에 대신리 대초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대신항에서 해안 뎈길을 따라 대치미 해안의 뎈길 출입구를 통과하여 백수해안도로로 나왔다. 오랜 연륜의 팽나무가 그윽하다.
앞의 대초삼거리에서 백수해안도로는, 대신삼거리 열부순절지에서 이어지는 국도77호선 대신길과 재회한다. 오른쪽에 대초마을이 있으며, 옥당박물관이 있다. 원불교에서 건립한 옥당박물관 소개글을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에서 옮겨 놓는다.
"영광은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고장입니다. 백제시대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 승 마라난타가 법성면 진내리를 통하여 백제에 불교를 최초로 전파하였고, 한국의 토착종교인 새 시대의 종교 원불교가 탄생한 곳입니다. 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이 건립되어 고대부터 내려온 불교의 고장이라는 전통성을 부각시키고, 영광출신인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강항을 재인식하는 전시와 한국의 시대적 상황에 의해 필연적으로 탄생된 원불교를 영광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지식전달의 이해와 한국 전통사상을 소개하는 공간이 되고자 합니다. (중략) 이제는 물질적인 1차원적 유산을 넘어서 자기 고장의 특화된 문화적, 정신적 특성과 자기 고장의 특화된 상품을 살린 문화기반시설과 문화상품을 만들어 영광 관광산업을 육성하여 군민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게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원불교에서는 박물관을 건립하였습니다. 2007.9.20우리삶문화옥당박물관 개관" - 옥당박물관
대신항 방파제 홍등대와 중앙 끝에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 오른쪽 뒤에 금정산 아래 홍농읍 칠곡리 TSK영광조선소가 보인다.
백수해안도로와 국도77호선이 재회하여 영광대교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곳을 대추뫼라고 하는데 대치미로 발음이 변화되었다가, 이제는 대초마을이라 이르는 것 같다. 원불교에서 건립한 옥당박물관이 앞쪽에 있다.
"대신1리(大新里) 대추뫼마을은 1680년 경신(庚申) 대출척(大黜陟)으로 남인이 몰릴 때 함양 박씨(咸陽朴氏) 퇴사정(退辭亭) 상환(尙煥)이 부호군(副護軍) 벼슬을 버리고 남하(南下)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마을이 형성되었으니, 연화정수(蓮花淨水)로 알려진 터였다.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대추뫼(조산棗山)라고 칭해 온다." - 영광군청
백수해안도로 백수읍 대신리 대치미 고개를 넘어 백수읍 구수리 해안으로 나아간다.
왼쪽에 괭이섬, 왼쪽 끝에 쥐섬과 홍농읍 계마리 계마항, 중앙에 금정산, 맞은편 홍농읍 칠곡리 항월 해안 맨 오른쪽에 소항월마을, 그 왼쪽에 대항월마을이 있다.
오른쪽에 백수읍 구수리 모래미해변, 중앙에 백수읍 구수리와 홍농읍 칠곡리를 잇는 영광대교가 칠산바다 법성포 입구를 가른다. 영광대교 입구 목단교차로에서 아래쪽으로 국도77호선 영광백수 구수지구 위험도로 개선공사가 진행되고 있어 어수선하다.
백수읍 대신리에서 구수리로 넘어왔다. 서해랑길은 국77호선 백수해안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이어진다.
뒤쪽이 모래미 해변으로 모래매 해수욕장이 있다. 모래미는 해수욕장 규모가 작고 해안선도 길지 않으나, 백사장의 모래가 고우며 주변의 때 묻지 않은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이곳에서의 모래찜질은 신경통에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유명하다. 옛날에는 모래미라 하였으나 1924년경에 목단(木丹)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 모래 위에 목단이 많이 자생되었으나 현재는 없다고 한다.
백수해안도로 그린영광굴비, 모래미펜션, 해안로장어촌을 거쳐 왔다. 백수해안도로에 향나무가로수가 멋지다.
백수해안도로 모래골이 유명 음식점인 것 같다. 영광대교 입구 목단교차로에서 국도77호선을 따라 영광대교를 건넌다.
왼쪽에 대신항 방파제 홍등대와 돔배섬, 중앙에 괭이섬, 오른쪽은 홍농읍 칠곡리 항월 해안의 대항월마을이다.
영광대교 조형물과 영광대교 표석, 영광대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영광대교는 전남 영광군 백수읍 구수리와 홍농읍 칠곡리를 잇는 2.2km 거리의 다리로 2016년 3월25일에 완공되었다. 주탑과 주탑 간 거리인 주경간장이 320m에 달한다. 영광대교 완공으로 지역간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역발전에 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인근 유명 관광지의 진입이 용이해져 관광 산업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다리다." - 네이버지식백과
무넹기방조제가 길게 이어져 있다. 방조제 건너편은 자갈금 해안이며 왼쪽 마을은 진내리 자갈금마을이다.
"진내(鎭內)3리 자갈금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전남농장에서 목넹기 방조제 공사를 시작하면서 취락이 생긴 곳이다. 자갈게미는 돌(石)을 뜻하는 우리말 자갈과 만(灣)을 뜻하는 우리말 구미에서 유래하였는데, 지금은 소리음인 자갈금이라 부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진내리로 편입한 이 마을은 1934년에는 서진내리로 속했다가, 1964년에 진내3리에 속하였다." - 영광군청
법성포 좌우두에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 기념 성역이 조성되어 있다. 와탄천이 강으로서의 생명을 마치고 칠산바다로 흘러들었다. 백제불교 최초도래지 맞은편에 구수리 구미마을이 있는 것으로 가늠한다.
"구수리(九岫里) 구미(九尾)마을은 구수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목단리 동북쪽, 구수산 밑이 되며, 영광 삼두 구미(三頭九尾)의 하나로서 구시미 복판에서는 3일, 8일 장이 섰을 정도로 융성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민장치부책에 의하면 천안 전씨(天安全氏)가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입촌(入村)하였고 경주 정씨(慶州鄭氏) 운영(雲永)이 1800년도 초기에 정착해 살다가 이사하고, 1900년경에 경주 최씨(慶州崔氏)가 이 마을에 입촌(入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목단 동북쪽 구수산(九岫山) 밑에 자리하여 지역의 꼬리라는 뜻을 빌어 구시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 영광군청
영광대교 보도 안쪽 난간 기둥 사이의 공간에 조기 조형물을 조성하였다.
영광대교 보도 바깥쪽 난간의 조기 조형물은 입을 다물고 있는 모양으로 조성하였다. 바다 건너편 왼쪽은 법성면 진내리 자갈금, 오른쪽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는 진내리 좌우두이다.
서해랑길은 국도77호선 영광대교 북단에서 홍농읍 칠곡리 칠산바다 해안으로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