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양구곡을 품다 / 신형호
봉화 춘양구곡을 들어보았는가? 봉화!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설렌다. 전날 밤은 선잠으로 뒤척였다. 사십 년도 훌쩍 지난 시절 사범대학을 졸업한 내가 첫 발령을 받은 지역이 아닌가. 4년 동안 짙푸른 자연에서 순박한 학생들과 울고 웃으며 젊음을 불태운 곳이다. 오늘 탐방 일정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예전에는 아무 배경지식도 없이 찾아다니던 냇가이다. 마음 밭 밑바닥에 숨어있던 지난날의 그리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평생 내 글쓰기의 자양분이자 뿌리가 된 마음과 시간의 고향이다.
조선 시대 구곡문화는 무이천(武夷川) 위의 아홉 구비를 설정하면서 만든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다. 그중 춘양구곡은 경암 이한응이 태백산에서 발원하여 춘양면과 법전면을 흐르는 운곡천 9km에 걸쳐 설정한 구곡원림이다. 춘양면을 지난 물길이 남으로 흘러 낙동강까지 길이가 100리라고 한다. 맑은 물의 근원이 그만큼 깊고 길다는 의미이다. 예로부터 춘양은 태백산의 빼어난 기운을 받아 다른 고장보다 신령하고 청정한 지역으로 꼽힌다. 이한응 선생이 이 멋진 곳을 어찌 구곡으로 설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제1곡부터 차근차근 탐방하기는 어렵다. 이한응 선생이 설정한 당시와 같은 자연환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지형이 변해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산을 깎고 둑을 쌓고 물길을 돌려 예전의 흔적을 오롯이 찾기가 어려운 곳도 많다. 쉽게 접할 수 있고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된 곳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아쉽지만 몇몇 굽이만 살펴보기로 여정을 잡았다.
춘양 전통시장에 인접한 한수정(寒水亭)을 찾았다. 춘양구곡 중 춘양면 의양리에 위치한 제8곡이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라 찾는 사람이 없고 조용하다. 이름 모를 새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나그네를 반긴다. 이곳은 충재 권벌이 세운 거연정(居然亭)이란 정자가 있었던 자리지만, 정자가 소실된 후 권벌의 손자 권래가 건물을 세우고 이름을 한수정이라 지었다. 한수정이란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지은 이름이다. 곡(曲)에는 원래 물길이 있어야 하건만 지금은 물길이 돌려지고 제방이 들판을 막아서 당시 풍경을 그려보기가 어렵다. 춘양 사람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곳이라고 하지만 짙푸른 녹음만 정자를 감싸고 있다. 대문이 잠겨 들어가 보지 못하고 담 밖의 너럭바위에 올라 안을 살펴보았다. 퇴락한 건물과 물이 없는 연못 둘레엔 이끼 낀 석축만 세월의 무상함을 전해주는 듯 아련하다. 세월이 더 흐르면 어찌 될까 하는 안타까움에 발길을 쉽게 돌리지 못했다.
9곡 중 으뜸으로 꼽는 사미정(四未亭)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차장에서 내려 걷는 길 왼편으로 삼포가 줄을 지어 나그네를 반긴다. 사미정 안내판이 나타난다. 춘양구곡 중 제2곡이다. 들머리에 서니 사시사철 맑은 물이 천천히 흐르는 법전면의 사미정계곡이 시야에 펼쳐진다. 조선 중기 선비인 옥천(玉川) 조덕린이 지은 정자가 언덕 위에 우뚝하다. 그는 당쟁에 휘말려 여러 번 귀양살이를 했다. 1725년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가면서 유배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정자를 짓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내가 종성으로 유배되지 3년, 그 해가 정미가 되고, 그 해 6월이 정미가 되며, 그 달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 날 미시가 또한 정미가 되었다.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하여 만나기 어렵다고 했다.” "내 어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사람은 태어나면서 시간의 흐름에 쫓겨 잠시도 반성할 틈이 없네. 그러다가 홀연히 어떤 계기로 깨달음이 있으면 대야나 그릇에 문구를 새기거나 건물에 이름을 붙여 틈틈이 볼 때마다 경계로 삼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네. 공자나 성인도 그런 적이 있는데, 하물며 우리와 같은 소인이 어찌 경계할 바를 잊을 수 있겠는가." 라는 정자 이름의 연유가 사미당기(四未堂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옥천 선생이 겸손한 자세에서 출발하기 위해서이다. 번암 채제공의 친필로 알려진 ‘四未亭’이란 단아한 현판 글씨가 눈에 확 들어온다.
사미정 담을 돌아 아래로 내려가니 아름다운 산천이 펼쳐진다. 잡초가 우거진 비탈을 내려가 물가로 간다. 강바닥 전체가 넓고 평평한 바위다. 넓적하고 불규칙하게 움푹 파인 바위 위로 옥 같은 물이 쉼 없이 흐른다. 사미정에서 바라보는 이 풍광은 춘양구곡에서 가장 손꼽힌다. 일행 중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너도나도 신을 벗고 발을 담근다. 시원하고 맑은 기운이 정수리까지 전해온다. 무더위에 지친 심신이 삽시간에 맑아진다. 눈을 감고 잠시 상념에 잠긴다. 그 옛날 옥천 선생도 여기 앉아 발을 담그고 마음을 다스리며 군자의 도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인간의 도리를 깨우친 성인도 늘 부족하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끝없는 사색에 잠겼을 것이다. 건너편 숲이 초록으로 안긴다. 티 없는 쪽빛 하늘도 오늘과 다르지 않았으리라.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진다. 고요 속에서 물소리만 가슴에 울린다.
세상살이가 너무 탁하다. 나라를 위해 일 한다는 위정자들의 말이 늘 공허하다. 삶의 깊이가 갈수록 팍팍해진다.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의 말은 허공에 사라진다. 그저 제 밥그릇 챙기기에 급급하고 특권의식만 가득한 관료들은 언제쯤 사라질까? 당리당략에 얽매이지 않고 국민만 위해 고민하고 배려하는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 국민의 정신적 수준이 많이 성숙했건만 아직도 만족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오늘 같은 날 사미정 아래에서 ‘군자가 가져야 할 4가지 도’를 얻으려고 노력한 옥천 선생의 뜻을 위정자들이 알고 실천했으면 하는 간절함도 품어본다.
제2곡 사미정에서 1km 정도 상류에 올라가면 왼쪽에는 옥계정이 있고 오른쪽 개울 건너편에 10m 높이의 큰 바위가 있다. 녹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이곳이 제3곡인 풍대(風臺)이다. 원래 이곳은 풍대 홍석범이 학문을 가르친 어풍대(御風臺)가 있었지만, 언젠가 사라지고 이한응 선생 당시에는 이미 없었다고 한다. 물가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바위 모양을 찾았지만, 소나무 참나무들이 무성해 풍대의 모습은 또렷이 볼 수가 없다. 아쉬움만 안고 다음 굽이를 찾아 발길을 돌린다.
춘양구곡의 제6곡은 쌍호(雙湖)이다. 법전면에서 춘양면으로 들어가는 운곡천 들머리에서 고개를 들면 삼척봉을 만난다. 짙푸른 소나무로 덮여 있어 봉우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삼척봉 아래에는 선대의 유업을 이은 남양 홍씨 연주정(戀主亭)을 만난다. 이한응의 시에서 제6곡의 경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들판의 산은 삼척봉이고 두 개의 호수는 쌍호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물길과 호수가 두 개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오늘 탐방한 춘양구곡을 돌아보았다. 봉화 춘양에 은거하였던 선비들이 구곡문화를 누렸던 굽이다. 그중에서도 퇴계 학풍을 이어온 문인들이 춘양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구곡문화를 노래한 의미 있는 굽이였다. 지금은 세월 속에 하나둘 잊히고 사라지기에 안타깝다. 잘 보존하고 후세에 전해야 할 문화적 자산이지만 퇴락해가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하다. 햇살이 그림자를 길게 늘이는 시간이다. 마지막 여정인 봉화 청암정(靑巖亭)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철 이른 개망초들이 하얗게 고개를 흔든다.